"1979년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TV에서 워터쉽 다운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집에서 그것을 보았다. 친구는 보다가 너무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나는 토끼들의 흥미진진한 모험에 매료되었다. 다 보고난 뒤에 당장 책을 찾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978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이듬해 BBC 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서 볼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글은 영국의 어느 평론가가 '워터십 다운(Watership Down, 1978)'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회고한 데에서 따왔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해외 비평을 읽어 보면, 영국 쪽에서 당시 BBC 방송을 통해 본 경험담이 꽤 나온다. 아동에게는 꽤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들어가 있는 '워터쉽 다운'을 영국은 전 연령 시청가로 정했다. 과연 이 애니메이션을 아동에게 보여주기에 적합한가에 대해서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원작자 리처드 애덤스는 자신의 딸들에게 읽혀주기 위한 동화로 토끼들의 모험담을 썼다. 젊은 시절, 군 복무 중에 동료로부터 들은 토끼의 생활과 습성에 대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었다. 그렇게 토끼들의 장대한 모험을 다룬 환타지 장편 소설 '워터십 다운(1972)'이 탄생했다.

  원작 소설은 꽤나 두껍고, 나름대로 정교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초등 고학년 수준에서도 좀 버겁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이 동화는 어른들에게도 매력적인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고, 마틴 로젠은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했다. '워터십 다운'의 그림체는 상당히 사실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거칠다. 토끼들끼리 싸우는 장면에서의 피와 폭력의 묘사도 구체적이다. 이쯤되면 이 애니메이션이 정말로 아이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 관객층을 성인으로 한 것인지 의문이 들 법도 하다. 그러나 그림체와 묘사의 수위, 서사의 전개가 어른들에게는 밋밋하게 느껴진다. 요즘 아이들에게 이 정도 표현 수위는 그다지 충격이랄 것도 없다. 그보다는 오래전의 투박한 색감과 그림체를 좋아할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진 탓에, 애니메이션은 아주 속도감있고 단순 명확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 점 때문에 원작 소설의 팬들은 이 애니메이션이 원작의 본질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스트리밍 서비스사 N사에서는 2018년에 4부작으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한 시리즈물을 내놓기도 했다.

  '워터십 다운'은 예언적 능력을 가진 토끼 파이버가 계시적 환상을 보는 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형 헤이즐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파이버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새롭게 살 곳을 찾아 동료 토끼들을 이끌고 떠나는데,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담이 워터십 다운의 뼈대를 이룬다. 여기에는 야생동물과 인간과의 갈등을 비롯해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 토끼 사회에서 존재하는 계급적 갈등, 잔혹무도한 독재자 운드워트의 존재까지 아주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워터십 다운'의 원작 텍스트 해석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좌파주의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이었다. 그들은 이 동화가 명백한 계급 투쟁과 그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이에 대해 원작자 리처드 애덤스는 자신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지만, 원작자의 품을 떠난 텍스트는 해석의 공공재나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관객 입장에서 1978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얼마나 호소력을 가지고 있을까? 원작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워터쉽 다운'은 어둡고 지루하다. 토끼들의 모습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토끼들 사이의 생존 경쟁은 인간 사회에 못지않게 처절하다. 그들의 세계는 절대로 평화롭지 않으며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쥐어짜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한다. 엄격한 계급이 존재하기에 약육강식의 냉혹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왜소한 체구(애니메이션에서도 파이버는 다른 토끼들에 비해 작게 나온다)의 토끼 파이버가 예언자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낮은 계급의 약자가 자신이 가진 예언적 능력으로 위기에 처한 토끼 무리의 활로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은 갈매기 키하르를 도와주고, 그렇게 쌓은 유대감으로 함께 연대해가는 모습은 생명체들 사이의 협동과 유기적인 관계를 상징한다. 오직 인간만이 그 연결 고리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 토끼를 가축으로 길들이려고 하며,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토끼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죽이는 모습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진 독점적인 지위의 폐해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생태학적 교훈의 메시지는 1시간 40분짜리 애니메이션에서 피상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칙칙하고 별 다른 재미가 없는 토끼들의 모험에는 삶에 대한 근원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모험을 해야하고,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투쟁해야 하며,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들과 협동해야한다는 삶의 진리. 결국 관객들은 토끼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사진 출처: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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