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산책


참새는 대가리를
치고받으면서
싸우는 중이다
참새가 저렇게
사납게 구는 건
처음 본다 정말

무자유카는
주렁주렁 흰 꽃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때를 과시하지만
너에게는 향기가 없지

공원에는 처절한 세금 낭비인
노인 일자리 정책의 노인들
거리 청소를 위한 빗자루는
조용히 잠들어 있어
자식이 얼마나 용돈을 주는지
자랑을 늘어놓는
무료한 농담의 대잔치

자, 우리 초코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젊은 여자는 목줄을
풀고 강아지를
가슴에 품는다

건너편 아파트에서는
홀로 집을 지키는 개가
목이 터져라 짖고 있어

족저근막염에 걸린
발이 아파서 비명을 지를 무렵
어디선가 자그맣게 들리는 소리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달력에다 자그맣게 써넣는다

매미가 울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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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시


아주 젊은 나이에 죽은
시인의 시를 읽었다
지상에서의 불행한 삶
가정폭력의 피해자
성소수자 그리고
시인이란 이름의 굴레

더럽고 슬프고
눈물과 분노가 가득한
절망의 시
시인은 영원의 시간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쾅,

미쳐서 죽지 않으려면
시를 쓰지 않는 편이 좋아
누군가 그렇게 충고하는
것을 들었다

정상(正常)의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지
이해와 안온한 일상이
있는 풍경 저 너머
죽은 시인의 시가
꺽꺽 우는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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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주고 싶은


목이 고장난 선풍기는
앉는 법을 잊어버렸다
길게 늘어진 아픈 목에서는
가끔 끼익 끼익 소리가 난다
거 참, 듣기 싫군

그럴 땐 말이죠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한 대 딱, 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대개는
기계들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가거든요

딱, 그렇게 선풍기를
한 번 세게 때려주었다
15년 된 컴퓨터의
하드가 드르륵거리며
힘겹게 작업을 할 때도
주저없이 때려주었다

가끔, 인생도 그렇게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한다
그런데 어딜 때려주어야 할까

약한 부분을 때려야지
아프게 움직이는 과거
오늘의 나는 전혀
새롭지 않으며
반복되는 이야기

툭, 찻잔의 이가
깨지며 떨어졌다
그래, 시를 쓰자
노래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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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냉장고


오렌지 주스는 발효되고
있었다 치익치익 보글보글
소리를 내면서

발효와 부패의 차이는
한끗이다 이 주스를
마실 것인가 버릴 것인가
한 모금 마셔 보니
이것은 진정한 알코올의 맛

탄산수에다 그 주스를
조금 넣는다 나는 기묘한
칵테일을 마시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너의 냉장고는 지겹도록
단조로워 재미가 없어
모두 공장에서 만들어낸
그렇고 그런 가공식품들

냉동된 삶의 감각
네가 먹는 것이 너를
만든다고 하더군
시큼한 하품을 하며
주스는 수챗구멍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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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쏟아지는 졸음에
잠시 눈을 붙였더니
미용실 아줌마는
내 머리를 너무 짧게
잘라놓았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보니
중세의 수도사가
서 있다 그는 수도원의
삶에 지쳤다 어떻게든
여길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오래전
세상에 두고 온 연인이
있었다 이제 머리를 기르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지

하지만 회색의 빛나는 좀벌레가
둥지를 튼 머리에서는
좀처럼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

눈에는 정체 모를 가루들이
발에는 커다란 티눈이 박혀서
그는 수도원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움질일 수가 없다

눈부신 너는 잘살고 있겠지

잘 면도된 맨질맨질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거울 앞에서
가만히 뒤돌아섰다
수도사의 머리카락은
이후로도 자라지 않을 것이며
멀어버린 눈과
걸을 수 없는 발로
그대로 잠들기를 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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