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괴물〉, 반미의식의 산물 

 〈괴물〉은 괴수 영화인가? 분명, 나름대로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돈이 많이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 없다)으로 구현된 괴물의 형상은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구경거리이기는 하다. 대다수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우리도 이제 헐리우드에 못지않은 괴수 영화를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는 2006년 7월의 한강에 괴물을 등장시켰을까? 그것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고서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영화 초반의 장면들이 암시하듯 괴물과 미군 부대가 한강에 무단 방류한 포름알데히드는 무언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암시’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쩡한 한강의 물고기가 어느 날 갑자기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 단지 독극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에서 괴물 탄생의 배후로 미국을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독극물 방류 장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반미에 대한 노골적인 정서를 드러낸 매우 정치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미의식이 극렬했던 198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미국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새삼스레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나야하는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독극물 방류 사건으로 한정짓는 것은 손쉽기는 해도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 보다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반미 의식의 표출이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괴물이 반미 의식이 격렬한 아랍 세계가 아닌,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부르던 한국에 나타났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영화 〈괴물〉에 나타난 반미의식은 매우 분명하고 노골적인 것이라 우리의 흥미를 그다지 끌지 못한다.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러나 이제는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둘째 아들 박남일의 존재도 그러하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가족에 대한 묘사이다. 한강 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강두네 가족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제시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2. 위기상황에서의 가족주의

  강두네 가족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서민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각별한 그들을 결집시키는 매개체는 바로 혈연, 핏줄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무화시킨다. 박희봉에게 현서를 찾는 일은 아들 강두의 앞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 왜냐하면 약간 모자라서 어떻게 살지 늘 걱정스러운 아들에게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손녀인 현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핏줄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일은 박희봉의 존재가 세대를 이어 기억됨을 의미한다. 

  혈연은 오랫동안 한민족(韓民族)으로 이상화된 공동체를 유지시켜온 가장 강력한 가치였다. 그러니 그것이 〈괴물〉의 강두네 가족에게 있어 유달리 부각되거나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위험과 재난 상황에서 혈연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기제에 대해서다. 왜 사회체제, 국가는 생명의 위협에 처한 개인,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그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봉준호는 〈괴물〉의 강두네 가족에게 닥친 재앙에 대한 해결을 전적으로 그 가족 자신의 몫으로 돌려놓는다. 이 가족이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진 것이라곤 낡은 소총과 화염병, 양궁 활이 전부이다. 사회와 국가는 이 가족의 안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미국의 지휘를 받는 비상본부와 미디어는 오로지 바이러스의 실체 규명에만 집착한다. 사회, 국가가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저버릴 때 개인이 희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가족이라는 익숙하고 오래된 가치이다. 그러므로 강두네 가족은 괴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다.       

  괴물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이젠 도대체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감독이 이미 영화 초반부에 포름알데히드라는 열쇳말을 주었으므로 추측이 어렵지 않다. 괴물은 전부터 우리와 함께 존재했던 그 무엇이었다. 단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돌연변이된 개체가 된 것이다.  


3. 〈괴물〉,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탐구하다

  영화 속의 괴물을 보면서 관객이 복합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잔혹하게 사람들을 잡아먹고 해치는 괴물, 현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괴물의 모습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인골을 고통스럽게 내뱉는 모습이라던가, 화염에 휩싸여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 이르면 도대체 이 괴물이 왜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지 일말의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그러한 이중적 감정을 촉발하게 만드는 근원에는 이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을 괴물이 아닌 독극물을 방류한 미군, 미국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괴물〉에서 괴물의 존재론적 해명은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 괴물이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 괴물은 분명 우리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대리자라고 볼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 둘 사이의 비극적 공존이 낳은,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괴이한 생명체, ‘괴물’인 것이다.

  봉준호는 전작인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사회의 80년대를 관통하는 무의식을 담아내었다. 그의 〈괴물〉은 2000년대의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반미와 가족주의의 문제를 괴물로 형상화시켜서 그려낸 그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나다. 그러나 새로운 것, 혁신적인 것을 담아내기에 〈괴물〉은 여전히 미흡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나아갈 것이 가족주의, 그것도 혈연에 바탕을 둔 가치일까? 봉준호는 혈연이 아닌 이들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결말 부분에서 강두는 죽은 딸 현서와 함께 붙잡혀 있었던 세주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세주가 현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가족은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잠정적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 오는 한강변을 바라보던 강두는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소총을 집어 든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한 사내가 언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괴물’과 대면해서 자신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을 과연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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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북스테후데 : 오르간 작품 전집 (DDD/ Germany)
Dietrich Buxtehude 작곡, Ulrik Spang-Hanssen 연주 / Documents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새 음반을 사는 것이 때론 모험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물론 들어보지 못한 음반을 구입하는 일이니 그러하겠지만, 그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음반사나 연주자인 경우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번에 구입한 이 음반이 그런 경우였던 것 같다. Document라는 음반사 자체도 생소하거니와 그 파격적인 가격은 매력이 아닌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전집 음반 6장의 가격이 만원을 조금 넘는다. 음원이나 음질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만도 했다.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던지 클래식 음반 동호회 게시판에는 Document사의 음반에 대해 묻는 질문들이 더러 있었다. 이미 구입해서 듣고 있는 이들이 친절하게 답을 달아주었다. 대개가 라이선싱이 풀린 오래된 음원들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격은 매우 저렴하나 음질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다.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전집 음반은 그런 경우는 아니었다. 연주자 검색을 해보니 네덜란드 태생의 중견 연주자로 나름대로 유럽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구글을 따라 연주자 소개 홈페이지까지 가게 되었는데 내가 받은 인상은 푸근한 중년의 아저씨 같은 분위기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이 있다면 유머라나...

 

  주문한 음반을 받고보니 포장이 매우 실용적이었다. 종이 박스 포장에 재킷도 종이이다. 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포장에 실망을 하긴 했지만, 연주는 괜찮다. 이만한 가격에 전집 음반을 듣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란 생각도 든다. 다만, 마스터링 과정에서 들어간 새소리 같은 것은 꽤나 뜬금없고 난감하게 들린다. 아마 음반기획자는 자연의 소리와 어우러진 오르간 연주를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정격연주나 원전연주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추천할만한 음반은 아니겠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오르간의 음색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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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 미하일 하네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희곡 『문밖에서』에는 진실에 관한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다. 보르헤르트는 진실을 ‘한낮에 거리를 배회하는 창녀’로 비유한다. 진실의 얼굴은 보는 이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누구든 그것을 밝은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나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진실이 어느날 갑자기 한낮의 빛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면? 조르주와 안나 부부에게 닥친 일이 그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담은, 예사롭지 않은 비디오 테입이 배달되면서 이 가족의 삶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는 처음엔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충실히 이행해나간다. 관객은 과연 저 테입을 촬영해서 그들 부부에게 보낸 이가 누구일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조르주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기억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테입 보다는, 과연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게 된다. 

  조르주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의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알제리인의 아이를 부모가 입양하려 하자 거짓말을 하여 아이를 집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다. 그 이유를 묻는 부인에게 그는 대답한다. 자신이 혼자 쓰던 방과, 그 밖의 것들을 나누기 싫었을 뿐이라고. 그의 거짓말로 인해 입양의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 마지드의 삶은 이후 철저히 무시되고 잊혀진다. 조르주에게 배달된 테입은 표면적으로는 마지드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테입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드가 자살한 후, 그의 아들이 조르주와 대면하여 나누는 대화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조르주에게 말한다. 평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고.

  조르주에게 마지드의 일은 잊혀진, 사소한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영락해버린 마지드의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나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한다. 조르주는 자신의 삶에 불편이나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며, 선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조르주의 신념은 자신의 소유물과 공간에 침입하는 그 어떤 대상, 즉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배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결국 타자에게 행하는 폭력과 야만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데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드의 아들에게 답한다. 

  “내게 양심의 가책 따윈 바라지 마. 네 아버지의 인생을 망쳤다는 것 말이야. 난 아무 잘못이 없어!”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은 1961년의 파리 대학살과 관련하여 프랑스 사회가 보여주었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자신들의 범죄와 살인에 면죄부를 주며 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행태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대해 행했던 지배 논리와도 맞닿아있다. 〈히든〉을 통해 하네케가 직격탄을 날리는 곳은 바로 그 지점이다. 

  사실 자신의 소유물, 집, 가족, 삶의 안락함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추악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추구가 타자의 권리, 더 나아가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에서 타자는 단지 프랑스 내의 알제리 인, 유색인종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강대국에 의해 침탈당하는 약소국까지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조르주와 안나 부부의 집 거실에 있는 TV가 쏟아내는 뉴스들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라크 전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에 관한 화면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가진 근원적인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가 외부의 불온한 타자에 의해 습격당하거나 오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어떤 예외 없이 대규모의 전면전과 학살로 귀결되는 것이다. 미디어는 그러한 모든 과정에서 학살자의 거짓과 공모한다. 거짓은 순식간에 진실이 되고, 곧이어 역사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가? 여기에서 다시 〈히든〉에 나오는 비디오 테입을 언급해야할 필요성이 생긴다. 감독 자신이 언급했듯 테입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사실 〈히든〉에서 현실과 테입의 화면에는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시선의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시선에 의해 재현되는 현실은 파편화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안나는 진실을 계속 숨기는 남편 조르주에게 테입은 ‘그와는 다르게 자신에게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테입은 배회하는 진실이 택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히든〉에서 진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에서 달아나버린 가해자 조르주의 무의식 안에서도 살아남았다(영화 초반부에 피를 토하는 아이가 등장하는 두 번의 인써트 장면을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진실이 결국에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논쟁적인 마지막 장면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르주의 아들 피에로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길이다. 그 때 마지드의 아들이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그 둘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네케는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무수한 해답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며 열린 결말임을 강조한다. 그 장면은 화해와 소통의 시도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상처 입은 진실은 그렇게 성급히 서둘러 봉합되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세대를 통해 전달되어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손톱만큼의 균열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타자의 삶에 가하는 거짓과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히든〉은 가진 자가 지키고자 하는 일상의 안온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인다. 진실은 가해자에 의해 수탈당하고 도륙되지만 살아남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해자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건드리고, 세대에 세대를 이어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해나간다.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믿는 조르주는 수면제를 먹고 편안히 잠이 든다. 그러나 피 흘리는 진실의 얼굴은 여전히 그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것은 잊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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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색의 역사 - 성모마리아에서 리바이스까지
미셸 파스투로 지음, 고봉만.김연실 옮김 / 한길아트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중세시대의 이콘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성모의 모습은 대개 붉은 색의 평상복 위에 푸른색 겉옷을 두르고 있다. 내가 아는 미술사 지식에 따르면 붉은 색은 전통적으로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결혼한 여인들이 입는 옷 색깔이었으며, 겉옷의 푸른색은 성모 마리아가 평생 지킨 정결함에 대한 상징을 뜻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왜 푸른색이 성모를 상징하는 고유한 색이 되었던 것일까? 책의 저자가 던지는 질문의 출발점은 그곳에서부터이다.

 

  푸른색이 성모의 색이 되기 이전에 그것이 악마의 사악함과 더러움을 상징하는 색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움을 안겨준다. 그런 색이 어떻게 가톨릭 교회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성모 마리아의 겉옷에 덧입혀지게 되었을까?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의 설명은 이러하다. 몇몇 사람에 의해 시도된 푸른색의 성모 그림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점차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그것이 일반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관습적 기호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푸른색의 안료는 구하기 어렵다는 희소성 때문에 높은 가격에만 살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제한된 소재의 그림에만 사용될 수 있었다는 점은 청색이 어떻게 해서 색채의 제왕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된다. 이쯤 되면 색이란 것이 고정불변의 정해진 이미지가 아니라 종교, 사회, 문화, 경제와 같은 여러 요소들과 맞물려 형성되는 하나의 큰 신념체계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교회의 고위 관계자와 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그림에만 쓰였던 푸른색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에는 자유와 평등을 상징하는 색으로 일반에게 인식되기 시작했을까? 사실 푸른색의 독점적이고 우월한 위치는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성취된 것이었다. 투쟁이라는 표현이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블루의 역사는 결코 안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고결한 성모의 옷자락에서나 볼 수 있었던 중세에서 오늘날 누구나 입는 청바지의 색으로 일상에 자리 잡기까지의 짧지 않은 블루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눈에 보이는 현상이면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사상적 토대가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모든 견고한 것은 공기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들은 저속한 것이 되며...”

맑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 들어있는 그 글귀가 블루가 이룩해낸 혁명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그 혁명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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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 골드베르크 변주곡 - 글렌 굴드 - 55년 녹음
바흐 (J. S. Bach) 작곡, 글렌 굴드 (Glenn Gould) 연주 / 소니뮤직(SonyMusic)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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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오래전 빌헬름 켐프를 통해서였다. 불면증을 앓는 귀족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친절한 설명서를 읽었던 때문이었을까? 괴로운 일이 있거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이 곡을 즐겨서 들었다. 그런데 켐프의 연주는 명료하기는 하지만 매우 건조하다는 느낌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장 기유가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한 골드베르크는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켐프 이후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음반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만난 글렌 굴드의 음반은 참으로 낯설기 그지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연주한 골드베르크도 있을 수 있구나 싶어서 놀랐던 것도 같다.


  그가 가진 재능에 못지않게 피아노 앞에서 일삼는 기행 때문에 더욱 더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굴드의 면모는 음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연주 속에 작게 들리는 허밍이라던가 숨소리는 이 피아니스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하는 생각의 거리를 던져주기도 한다. 거기에다 그의 골드베르크 연주는 일반적인 빠르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에게 이 곡은 편안함과 위안 대신 굴드가 선사하는 긴장과 각성처럼 여겨질런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굴드의 골드베르크 연주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이 음반을 즐겨 듣는 이유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피아니스트의 내면을 추측하고 엿볼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대로 그는 알 수 없는 여러 통증과 질병 때문에 항상 한보따리의 약병을 가지고 다녔으며, 자신만의 앉은뱅이 피아노 의자에 집착했고, 콘서트에서는 자신의 연주가 모두 사라져 버린다며 스튜디오 녹음을 고집했던 피아니스트였다.


  그에 관한 다큐를 작년에 볼 기회가 있었다.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프랑수와 지라르의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단편”을 보고 나서도 굴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남는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을, 내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오늘도 그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에 관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그리고 그가 연주한 골드베르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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