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忌日)


새책을 읽는데 후두둑, 종이들이 떨어진다
읽지 않은 페이지, 나는 바닥의 종이들을
그러모으고는 스카치테이프와 가위를
들고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걸 붙여서
읽을 것인지, 이 책은 어차피 버릴 책이다
그냥 한번 보고 버릴 책, 어차피 죽어버릴 인생,
그리고 잊힐, 하지만 잠시동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재생되는
새벽 3시 반쯤이었다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밤은 고요하고 추웠으며 구불거리며 흘러갔다
나의 발은 언제나 시렸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맨발로 자다가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해 본다
가을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忌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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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그래서 한때 문구점도 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아줌마의 실력을 별로 믿지 않았는데,
아무튼 그래도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며칠 전, 나는 쇼핑몰 앱에서 선착순 천 명에게
주는 적립금 이천 원을 힘겹게 받아내었다
아, 정말이지 무척 기뻤다 그 이천 원을 뭘 사는데
보태어 쓸까, 고민하다가 문득 숙이 아줌마 생각이 났다
돈의 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인생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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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


새벽에 꿈을 꾸었다
죽을 사(死)자가 아주 커다랗게
허공에 쓰여있었다
정말로 죽을 꿈인가
마음이 서늘해진다

지난 1년은
몸이 너무도 아파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버릴 시를 쓰느라
죽어버리고 싶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게
내 사주(四柱)에 단 하나뿐인
나무 목(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살아있는 기운인데
나무가 말라비틀어지고
나무가 바람을 가두지 못하고
나무가 고양이 울음에 놀라고
나무가 풀벌레와 함께 울고
나무가 사람을 진저리나게 싫어하고
나무가 나무가 나무가

죽어버린 나무에 물을 주면
백 년, 어쩌면 그 후에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침표 없는 글에다
물을 따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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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하늘이 눅눅하다
비가 올 것 같다
현관에 촛불을 켜둔다
국군의 날, 억울하게 죽은 군인들 생각이 나서
그리고 10월에는 아버지 기일(忌日)이 있으니까
촛불은 차분하게 타오른다

어느 무당의 말을 들으니
촛불이 타는 모양새에도
뜻이 있다고 하더군
흔들리는 촛불은 불길하다지
벌써 지 몸뚱이의 절반을 태운
싸구려 양초는 상자곽에 쓰여 있는
제사용 고급 양초의 명성을 배반한다

고급의 인생은 어떤 것인지
잠깐 생각을 해본다
좋은 차, 좋은 집, 잘 먹고 잘사는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되는 결국은
고급의 그 어떤 중심의 삶

촛불이 잠시 흔들린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어린 시절, 나의 피아노 가방에는
기도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는데
소녀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마도 촛불의 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고요하게 타는 촛불
불쌍한 영혼들, 이 세상 어디에서
헤매지 말고 잘들 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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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抒情詩)


명랑(明朗)을 말하면서
시시덕거리면
명랑해지냐
너의 명랑은 오로지
너만의 것이지

생이 우울하다고
줄줄 처울지 좀 말아
그건 너의 삶이지

어그러진 연애담
너한테나 절절할 뿐이야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아

나를 구겨 넣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안 들어가
잠깐 들여다볼 뿐

사람들이 지나가
시간은 흘러가
상처는 낫는 법이지

너의 지옥
서정의 감옥
탈출하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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