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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구마을 아침편지
이진우 지음, 우승우 그림 / 열림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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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가끔씩 목이 턱턱 막히는 듯한 순간이 있다. 아등바등 무언가를 얻기위해 온힘을 다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성에 차지 않을 때가 그렇다. 그럴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안에 든 것을 탈탈 털어버려서 새로운 것을 위해 비워두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비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제까지 내가 모아두었던 것들을 버리고,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것들을 바라보며 텅 비어있음을 응시하는 것은 고통에 가까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과 가족들은 서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제도의 저구마을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이 산문집은 그 둥지에서 보낸 날들의 찬가이다. 비록 물질적인 여유나 편리함 같은 것들은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시인과 아내, 두 아이들에게는 이전에는 체험할 수 없었던 휴식과 평화를 선물해주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시인이 자신의 텃밭을 가꾸면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릴 때이다. 산다는 것은 겨울 텃밭과도 같다는 말에서 아무것도 없는 겨울의 텃밭이 봄과 여름을 지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함을 알게 되고, 마음의 텃밭 또한 비워두어야 새로운 씨앗이 날라와 싹을 틔울 수 있음을 긍정하게 되는 부분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준다.

  시인은 집에 머무르게 된 강아지 식구 이야기, 아이들의 학교 생활, 먹거리 장만, 마을 사람들 이야기와 같이 시골생활의 소소한 일상을 한폭의 그림처럼 그려낸다. 그 그림 안에서는 모두가 다 주인공이며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자부심은 도시 사람들은 결코 느끼지 못할 삶의 충만함과 진정성을 자신이 직접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라도 시인의 견해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더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과 아내를 둘러싼 가족의 내력과, 문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젊은 시절 집을 떠나 겉돌았던 시인이 어떻게 다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안정을 찾고 관계를 복원시켜갔는지를 읽다보면 진정한 삶의 복원은 관계의 복원과 다름 아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인이 저구마을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자체로 행복을 살고 있는 시인과 가족의 삶은 때론 비어있음이 더 큰 충만함을 가져온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반드시 시인처럼 시골 마을에서 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의 한가운데에서도 마음만이라도 매순간 비우려 노력하는 이에게도 작게나마 맛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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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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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은 아니다. 그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나의 기억과 정서와 체험의 영역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위 말해 나와 코드가 맞는 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우연히 보게된 황인숙의 시집 '자명한 산책'은 나의 가슴을 톡톡 두드리는 코드를 지녔다는 생각을 한다.

몸이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방정식을 푼다
풀어야 한다
혼자서
하염없이 외롭게
혼자서. - '병든 사람'

  아픈 사람의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옆에서 챙겨주고 위로해주어도 결국 병의 고통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병자 본인의 몫이다. 그것을 혼자 풀어야만 하는 수학의 방정식에 비유한 것은 참 신선하게 다가온다. 혼자서 풀어야할 방정식이 어디 아플 때의 몸 뿐이랴. 때론 삶 한가운데에서 철저히 혼자임을 자각할 때가 더 많이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은 결코 쉽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괴롭고 지겨워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
이렇게까지 해서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삶은 감자'

  삶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감자로 등가시키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 생생하게 풀어내는 시인의 감각에는 절로 찬탄이 나온다. 몇번씩 익었는가를 찔러보고 확인하는 그 지겹고도 긴 과정에 지쳐서 아직 익지 않았다면 그냥 자야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익혀서 먹게되는 감자처럼 삶이란 기다려서 그 결과물을 얻게되는 과정임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외롭고 미소하고 모진 존재인지에 대해 그녀의 시는 때론 강하게 마음을 후벼파는듯한 언어로 노래한다. '강'이라는 시에는 스스로의 고통을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음과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대한 절망과 괴로움을 핏발이 서린 언어로 쏟아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그럼에도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둡고 칙칙한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삶의 처연함과 외로움을 응시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 유머감각을 갖고 있다.

귀뚜라미는 만물이 쓸쓸해하는 가을밤 속을
씩씩하고 우렁찬 노랫소리로 가득 채운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뭐가?!뭐가?!
귀뚜라미 소리가
명랑한 소름처럼 돋는 밤. -'가을밤 2'

  그녀의 시들은 마치 독한 탄산수 같다. 목을 넘어갈 때는 미칠듯이 따갑게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탄산수... 그녀의 시들은 그렇게 내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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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경찰관
린다 버젠달 폴링 지음, 김이숙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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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 신문에서 복지관을 운영하시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수녀님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 계기가 어린 조카의 죽음에 있다고 했다. 어린 조카가 불치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신께 매달리며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내 어린 조카가 죽어야 합니까?'라고 수없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 기도의 끝에 돌아온 깨달음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가?'라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고나자, 그러한 고통에 처한 수많은 이들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 린다 버젠달은 스물아홉의 나이에 일곱살 된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었다. 그런 그녀가 4살 때 발병한 아들과 3년 동안 지내면서 신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도 아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였을 것이다. 경찰관이 꿈이었던 아들 크리스와 보냈던 3년간의 투병기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전부와도 같았던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녀는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와 가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되었으며 자신의 삶의 경험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해답을 찾게 되었다. 아픈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메이크 어 위시 재단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마음이 갈갈이 찢기는 아픔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지은이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또 다른 삶의 일면을 바라보게 한다. 인생에서 신에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라고 물어야할 때는 무척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신으로부터 듣지 못하는 대신에 그 고통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나아갈 힘을 얻는 것으로 스스로 답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나라의 경찰이 되어서 엄마를 지켜주겠다던 아들 크리스를 떠올리며 이 책을 쓴 지은이도 그렇게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낸 이들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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