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obert Lepage, "Andersen Project"의 처음과 끝. 환영으로서의 극장.
1) 2007년 9월 7일 저녁 8시, LG아트센터, 로베르 르파주(Robert Lepage) 연출 <안데르센 프로젝트(Andersen Project)>의 국내 첫 공연. 배우 이브 자크(Yves Jacques)가 흐드러질 정도로 '구성진' 프랑스어 억양의 영어를 쉴 새 없이 내뱉는 아르노(Arnaud)를 연기하는 시점에서부터, 한국어 자막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공연 사고'로까지 말할 수 있을 이러한 해프닝은, 단순한 '실수'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 언어를 다루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어' 자막이 등장인물의 '지독한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따라잡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시점에서부터, 언어는 두 조각, 아니, 세 조각이 난다. 그러나 이 '언어'들은 사실 이미 '원래부터' 조각나 있던 것, 그러므로 굳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언어의 조각난 조각들이 사방으로 피 튀기듯이 튀기면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관객들의 웃음이 그 적절한 '폭발'의 시점을 잡지 못하고 무대와 관객석 사이를 겉돌기 시작하면서부터, 진정한 '희극'은 시작된다. 따라서 이 장면은 그 자체로 '이땅에서' 삼중의 희극적 재미로 화하게 된다. 첫째, 가장 일차적으로, 지독한 프랑스어 억양의 영어가 안겨주는 희극적 재미. 둘째, 한국어 자막과 프랑스어 억양의 영어가 서로 따로 놀고 따로 돌아다니는, '어이없는 사고'로서의 어긋난 희극적 재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따로 노는 한국어 자막과 프랑스어 억양의 영어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발생하는 무대 위의 배우와 무대 아래 관객들 사이의 '거리감', 그 '웃음의 시차(時差)', 그 촌철살인의 시간차 공격이 선사하는, 말 그대로 지극히 '연극적'이고 '상황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희극적 재미. 이 세 가지의 희극적 재미들은 서로 중첩되면서 그 자체로 '한국 공연만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희극적'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 Robert Lepage, "The Far Side of the Moon"의 두 인물, 이브 자크의 일인이역.
달의 이면(裏面), 이면(二面), 혹은 이면(異面).
2) <안데르센 프로젝트>가 던지는 '형식적' 질문은 간단하다: 일인극, 혹은 모노드라마란 무엇인가? 일인극에서 가장 중요한 '형식적' 장치와 효과는, 관객이 그 모든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가 '물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같은 사람이자 단 한 사람임을 안다는 인식, 바로 그것에 놓여 있다. 경이로운 일인다역의 연기를 보여준 배우 이브 자크에 대한 찬탄도 결국 이러한 우리의 '인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 이러한 점에서 <안데르센 프로젝트>는 지난 2003년 한국에서ㅡ그리고 같은 장소에서ㅡ공연되었던 르파주의 <달의 저편(The Far Side of the Moon)>을 물리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 더욱 확장시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달의 저편>이 보여주었던 '시적 테크놀로지'의 세계는 내 기억 속에 아직까지 여전히 강렬한 형태로 남아 있다). 두 작품 사이에서 우선 표면적으로 목격되는 공통점은 무대 공간의 '횡적' 구성과 '착시적' 원근법의 구도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일인다역'이라고 하는 '일대다대응 함수' 관계가 지닌 매력이 두 작품의 '횡적' 연결 고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먼저 주목되어야 한다. 특히나 이 '착종된' 안데르센 이야기에서 왜 이러한 함수 관계가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물음은 중요하다. 결국 안데르센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혹은 르파주가 '안데르센'이라는 인물에게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작가'라는 주체의 발견이며ㅡ이 문제는 연극 속의 인물인 라푸앵트(Lapointe)에게서도 오버랩되며 반복되고 있는 주제인데ㅡ, 이는 곧 푸코적 의미에서 '자기 배려'로서의 양생법(養生法, diététique)이라는 문제에 다름 아니다. 작사가 라푸앵트가 농지거리하며 말하듯, 그것은 안데르센의 성적인 깨우침(sexual awakening)에 다름 아닌 것. 이러한 주체의 '발견'과 '깨달음'에 있어 장애가 되는 결핍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은 자위(masturbation)이다(또한 이러한 '자위'는 포르노 비디오방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가장 '개인적인' 행위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안데르센의 '자위'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바로 '일인다역'으로서의 자기 증식, 자기 반복은 아닐 것인가? 이 문제는 결국 안데르센의 '그림자' 이야기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자신의 '그림자'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학자의 이야기, 그것은 곧 안데르센과 그의 분신 라푸앵트의 이야기에 다름 아닌 것. 연극의 한 장면을 차용해보자면, 앵발리드(invalides)가,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mais pas sans valeur"라는 그래피티로 조롱되고 있는 상황에 다름 아닌 것. 이러한 '그림자'로서의 주체의 여정은, 때로는 조각상을 애무하고 사랑하는 '피그말리온적' 테마로(또한 여기서 라푸앵트와 드라이아드는 서로 중첩되고 있는데), 그리고 때로는 '식민지'와 '신대륙' 출신 작가가 '대륙'에 대해 갖는 뒤틀린 동경과 열등감의 테마로(또한 여기서 파리라는 도시, 그리고 '안데르센 프로젝트'는, 라푸앵트에게 하나의 '카프카적'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기능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게 반복되고 있다. 라푸앵트가 피씨방에 들어가 디디에(Didier)에게 쓰는 이메일의 내용과 그 '수정'의 행위를 보자. 디디에의 애완견 파니(Fanny)의 상태에 대한 술어는 "in shape"에서 "in good shape"로 '강조'되었다가 다시금 "pretty much in shape"로 한층 '강화'된 후 마치 고백하듯 "pregnant"로 최종 수정되어 마무리된다. 이 에둘러 가는 '수정'의 여정은,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라푸앵트 혹은 안데르센이 보여주는 '자기 의식'의 여정이 되고 있는 것.
▷ Robert Lepage, "Andersen Project"의 몇몇 장면들.
라푸앵트-아르노-안데르센, 르파주의 '페르소나'로서의 이브 자크.
3) 동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동화의 자리는 어디인가? 동화 속에서, 교훈(morale)은 남고, 이야기는 사라지는 것인가? '이야기'란 교훈을 남기기 위한 하나의 과정, 곧 하나의 방편(方便)일 뿐인가? <안데르센 프로젝트>가 가장 '적극적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바로 이것이다. 연극은 순수하게 내러티브적인 것으로 해소되지도 않고 용해될 수도 없는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그런데 이 '잔여물'이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님은, 최소한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라푸앵트는 물론이고, 아마도 안데르센 역시 아이들을 '혐오'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공연 중에 목격한 바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애꿎은' 공연에 따라왔다가ㅡ아마도 이 어머니는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에 매혹되어 단지 어린 아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던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겠지만ㅡ자신의 '불량한' 관극 태도 때문에 어머니에게 계속해서 꾸지람을 들었던 한 어린아이에게도, 이 연극은 아름다운 '동화' 한 자락 따위의 '재미나고 신나는' 자리는 아니었던 것(그렇다면, 또한 곁가지로 물어보고 싶은 물음 하나는, 몇 달 전에 역시나 LG아트센터에서 보았던 마틴 맥도너의 작품 <필로우맨>과 이번 <안데르센 프로젝트> 사이에서 공히 느껴지는, 이 '동화'의 자리에 대한 착종된 혐오와 애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인데)! 덧붙여, 그 '잔여물'이 교훈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이야기가 '남긴' 그 잔여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떤 '내러티브'의 잔향이라는 것, 그것도 어떤 '흔적'으로서의 내러티브라는 점은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예술-사유의 재료일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연극의 '결말'이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의 '권선징악'이거나[혹은, 아니거나, 분명, 아니겠지만], '잔여물'로서의 동물들이 남아서[혹은, '남겨져서'] 행복하게 영위하는 어떤 '삶', 그것뿐일 것으므로('psychologie canine'을 위한 진료소에 가서는, '개의 심리 상담'은 고사하고, 말 그대로 '개 같은 심리 상담'을 받게 되는 라푸앵트의 경험은, 단순히 '환자'의 저항이나 전이로만 해석할 수 없는 신랄하고 역설적인 '동물-되기'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데, 저 '사이비-개-치료사(pseudo-dog-therapist)'가 한 명의 온전한 정신분석의로 변하는 '경이'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교훈은 또한, 모든 이야기와 동화는 교훈을 구하고 교훈을 남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경고, 그러므로 일종의 '자기 파괴'에 대해 내리는 하나의 경고일 것이므로(디디에가 개에게 주던 '마약'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발견하게 된 라푸앵트가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그 약을 입속에 털어넣고 일종의 '기차-트랜스(train-trance)'를 펼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좌절된' 프로젝트로서의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좌절됨'으로써, 그리고 '완성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완성되고 성취되는' 프로젝트인 것. 이 '프로젝트' 안에서 르파주는, 라푸앵트ㅡ혹은 안데르센ㅡ의 이야기를 통해 율리시즈 이야기의 '여벌'을 한 벌 더 만들어내고 있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