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 이란 이름으로 고착적인 정치적 판단과 가치 형성에 비판을 가하는 프레임적 용어를 처음 들어 본 것이 대략 2천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같은 사무실에 앉은 한 직급 아래 초보 사원의 혼잣말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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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2대째 조선일보를 구독한다. 한자를 섞어가며 세로쓰기로 발매를 하던 시절, 친척 집에서 보는 동아일보에는 군데 군데 글자가 빠지고 비어있는 기사를 보던 그 시절에도, ‘매일 신문을 한 자도 안 빼고 3년을 읽으면 학자가 된다는 어느 선생님의 멘트를 인상적으로 새기면서도, 설령 구독지를 바꾼다 해도 별달리 마땅한 것도 없고 해서 그냥 계속 본 것이 대를 이은 몇 십년의 구독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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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조간 신문을 읽는 일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 피곤이 가신 뇌가 가장 먼저 받아 들이는 사회의 신호들이 조간 신문이라는 점에서 조선일보가 1위 구독지가 된 것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도 있다고 여겨진다

가장 먼저 들어와 뇌에 자리 잡은 각종 사회의 첫 인상적 소식들의 새김이 판단이나 가치의 처리를 형성했기 때문에, 나름의 구조적인 배열 같은 뇌 조직의 체계를 형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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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골치 아픈 미적분을 배운들 사회에 나가서 써 먹을 일이 얼마나 있으려나

실제로 사회생활 경험으로 보아도 학교 때 배운 고차원의 방정식을 써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 같은 경우는 앰프를 제작하면서 차동 회로라는 설계 부분에서 방정식이 동원 되는데서 

자작의 심도 있는 작업을 포기하게 하기도 했지만, 우리 일상의 공통적 경험의 장에선 실제 고차 방정식을 활용할 기회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방정식을 배우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 어려운 방정의 해법을 순서대로 차레 차레 풀어 나가면서, 그러한 과정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뇌는 그러한 방정식 풀이의 과정처럼 어떠한 건수를 처리하여 자신의 주변에 생기는 현상이나 문제성을 이런 식으로 풀어가게 되는 지경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마치 조간 신문을 읽으면서 그 처리 방식의 익숙한 형식처럼 말이다. 두뇌 속에 컴퓨터의 파일과 폴더의 방이 형성 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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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지면 현해탄을 건너오지 말라우!’ 라며 축구에서 힌일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 부터 시작해서, 총체적 국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분야에서 한국이 제압 할 수 있는 운동 종목으로서의 축구는 한일전 만큼은 반드시 이겨야하는 숙명과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멕시코 올림픽(1968?) 동메달의 주역인 가마모토가 골을 넣으려고 센터링한 볼에 점프를 하면

우리나라의 이세현 골기퍼가 볼 대신 턱 주가리를 갈겼다는 주간지 기사를 상기하지 않더라도

예전의 축구에서 대 일본전은 알게 모르게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과 같은 가치가 있는 종목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호프집 대형 화면이나 길거리의 대형 전광판, 극장의 대형 화면을 보며 응원하던 문화가

흑백TV 시절에는 다방에 모여 응원을 하고, 전파사 쇼윈도TV 앞에 모이고, 아나운서의 가열차게 

호소있는 목소리로 울부짖듯 전하던 승리의 소식은 추억이 되어도 완전 고물처럼 삭힌 문화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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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자연과 똑같이 살면서 자연스레 집단 생활을 하는 인간이 간절한 바램을 담아 제사도 드리고 제사장 중심으로 더욱 뭉치면서 점도 치고, 제사도 지내면서 바램도 간절히 빌고, 그런 과정에서 서서히 신적 영역에 접급해 갔을 사회가, 어느 시기가 되면서 위선이라는 가면이 벗겨지며, 종교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가치로 내려오면, 신 중심 사회는 인간 중심 사회가 되었다.

인간 중심 사회에서 수 많은 갈등과 번뇌 속에 왜 사는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생겨나고, 결국 답은 살려고 사는 그 사는 힘을 얻는 것! 생동성이라는 주제로 귀결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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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그러한 생동성의 원초적 힘을 주는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근원적 존재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스포츠의 희열을 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강렬히 전염되어 오는 에너지를 온 몸에 충만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열심히 몰두하는 젊은이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한편으론 고마움을 넘어, 저들이 저렇게 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는데 나는 이 나이까지 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김연아의 카타르시스가 생각 나듯이, 열심히 실력을 발휘해 우승의 기쁨을 전해 주길 바라며

블로그에 나마 흔적을 남겨 본다.

히딩크가 전해 주었던 4강이라는 전율의 추억은 월드컵 결승까지 가면 재현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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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선희 씨 신인 시절 창법을 그냥 생 목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라고

어느 음대 교수가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지금은 작고 하셨을 듯, 86년 발간 책이니)

그녀의 데뷔곡 'J'는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Hey!' 라는 곡을

어느정도 모디파이 한 것이라는 언급과 함께......

 

언제 부턴가 이지 리스닝, 발라드, 소울 이란 용어가 가요계에 자연스럽게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스탠다드 팝이란 용어는 가요계에 아직 생소한듯하다.

 

그러한 가요의 스탠다드 팝 적인 요소를 갖춘 가수를 들라면 이선희 씨 정도면

좋은 예라고 보여지는데,

생목으로 부르건 가성이나 샤우팅 적 록이든

어째든 호소력 있는 창법으로 부르는건 맞는 것 같다.

가요제 데뷔 시절의 빠글 빠글한 파마머리의 촌스러움이

연륜을 말한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은 엄청난 세련미로

변신된 지금

그녀의 많은 히트곡 중에 하나의 명곡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알고 싶어요> 를 들겠다.

 

가사 내용과 호소력 있는 창법과 가수의 이미지가 아주 잘 맞아 떨어져

가사 내용 처럼 노래에 음미하는 시간의 타이밍이 아주 잘 맞는

그녀의 대표적 명곡이자, 진가가 잘 드러난 곡

 

어쩌다 감상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종종 이 곡을 듣곤 한다.

고인이 된 장덕 씨의 <소녀와 가로등>을 듣다 보면 작곡가가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음상을 떠올렸을 창밖의 야밤 풍경을 떠올리게

하듯이(우리에겐 장덕 보다 진미령씨 노래로 더 알려진 듯 하다)

<알고 싶어요>를 듣다 보면 호기심 많고 꿈에 부푼 사춘기 소녀의 그리움과

애모의 연정이 고스란히 잔잔하게 배어 나와 저절로 사춘기 그 옛 시절을

회상케 해준다.

작사가 양인자 씨의 수준도 가늠이 되면서 말이다.

 

* 근래 리마스터 앨범이 발매되어 고음과 보다 또렷한 저음의 배음이

잘 디지털화로 재생 되어 있다.

가요는 발매되던 그 당시, 인기 끌던 그 당시의 그 목소리로,

힘있는 원음 그대로 듣는게 가장 좋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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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부터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다.

트롯은 근대화 시대의 애환적 소산물로 보인다.

산업화 시대에 트롯을 듣는 젊은 세대는 트로트를 일컫어

고개 넘어 가는 것 같다라는 표현으로 듣기 싫은 모종의

3류 취급을 하곤 했다.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미자 씨나 후대에 인기를 끈 주현미 씨 같은 여가수의 라디오나 TV 영상으로만 들어 본 세대 입장에서, 질 좋은 스피커를 통해 새롭게 들어 본 노래들은 ! 이 가수가 이래서 인기를 끄는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미세한 여운이나 끌림 같은게 느껴져서 감탄을 하곤 한다

협주곡은 갈등이고, 대위법은 평등 사상이고, 소나타에서 주제-재현-갈등-해설 식 감상법이 

적힌 책의 내용을 들지 않더라도,

트롯은 그냥 어릴적부터 주변에서 경험적으로 체득한 귀의 경험적 소산이란 점에서, 듣는 횟수가 점점 늘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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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방송에 안 나온다고 에이즈에 걸렸다는 표현 까지 했던 주현미라는 가수가 있다. 이 가수의 진가를 느낀 것은 짝사랑이란 곡이었다.

가사중에 중간 이하의 눈물만큼 고운 별이 될래그대 가슴에

이 부분에서 될래~~ 할 때의 그 꺽임은 마치 고운 비단 같은 매끈한 천을 구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가수의 진가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개성적인 농밀함으로 요동치는 구겨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이런 느낌을 받을 때 오디오는 LP 였고 스피커는 마그네판이란 평판형 스피커 였다

근래 알텍으로 오면서 그 때의 감정을 살려 보고자 중고 시디를 어렵사리 구했는데 이 CD가 그것이다

녹음 연도가 1992년도인데 그 젊은 시절의 생생하고 힘찬(지금도 불변이긴 하지만) 느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주현미의 진가를 느껴보고 싶다면

짝사랑을 들어라! 저 '될래요' 할 때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듯한 목소리의 구겨짐을 못 느낀다면 그대의 오디오는 하이파이급은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옆집에 방해 되지 않을 정도의 가급적 큰 음량의 실황적 크기로 한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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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고기 식용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반대쪽에서는 헌법 소원 까지 거론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개고기 식용 논란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초년시절인 60년대 국민학교 시절에도 개고기는 동네 일부 나이 드신 아저씨들이나

드시던 음식이었고, 어쩌다 개고기를 먹을 때 나는 누린내는 코를 막게 하기도 했었으니까, 그 당시 시골 구석도 개고기는 좋지 않은 음식이란 인식이 있었다.

 

그러다가 10살 가까이 차이 나는 큰 누님이 시집을 가고 그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녁에 나온 소고기 장국을 아주 맛있게 먹게 되었다. 그런데 다 먹고 난 후 그 음식이 개고기 였다고 말을 해주는데, 얼핏 지금도 진한 고추씨 기름 같은 국물에, 대파가 많이 들어간 독특한 음식이 개고기였다니 거부감보다는 그냥 개고기 음식이 배운 것 보다 그렇게 못 먹을 음식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튼날 낮에는 뒷마루 조그만 평상에 놓인 반상에 덮혀져 있는 순대 같고, 머릿고기 같은 접시의 고기가 맛있어 보여 몇 개를 낼름 집어 먹기도 하였다.

알고 보니 그것 역시 개고기 순대 같은 것 이었다. 접시의 개고기가 없어진걸 알고

사장 어른이 고양이 짓으로 여겨 키우는 고양이를 야단치는 것 보고 속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가 먹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집의 오래된 헛간에는 옛날 선조들이 타던 가마도 있고, 일대 만석꾼 칭송을 받던 집안 이었으니, 개화기에 그 사장어른(누님 시아버지) 은 경성 제국 대학을 나오시고, 사부인은 이화여대 출신이셨으니 근대화 시대 교육과는 무관하게 개고기는 서구의 원조와 연관하여 나온 시대적 소산물이라는 생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개고기의 전통성도 인정하게 된 셈이다.

그러다가 거국적인 개고기 혐오로 번진 계기가 올림픽 때 였던 걸로 기억된다.

대로 변에서 10미터 이상 들어간 곳에서 영업을 하고 보신탕이라는 한글을 외국인이 안다고 하여 영양탕’ ‘땡칠이탕“(그 당시 심형래씨가 맡은 영구와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 땡칠이를 합친 영구와 땡칠이라는 코메디물도 있었다). 심지어 어느 집은 자 다음에 검정 고무을 박아 놓고 밑에 이라 말을 적은 집도 있었다.

이렇게 선진국이 되기 위한, 내지는 잘 살기 위한, 또는 가난을 벗기 위해 원조를 받아야 하는 나라의 슬프고 애잔한 시대적 사연은 어이해 전면 금지로 결실을 맺지않고 지금의 찬반이 치열한 상태로 오게 되었을까!

1988년에 한국은 개고기를 먹는 나라이므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 해야 한다는 여론이 서구에서 일어나면서 전두환 5공 정부는 개고기를 저런 식으로 단속했지만, 그 서슬 퍼런 시절에 날카롬고 치열하게 이를 비판한 학자가 한분 있었으니 그분이 지금의 도올 선생이었다.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김용옥 교수로 통칭되던 시절로 기억 되는데, 그 개식용 권리의 계기가 된 책 내용은 아래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그 당시엔 나 지신도 독서 초보 시절로 밑줄도 삐뚤빼뚤 지금처럼 자를 대고 반듯하게 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있는 그대로 올려본다.


이러 저러한 계기로 먹는 음식의 주관적 개념이 형성되면서, 2002년에는 개고기 식용 때문에 월드컵을 보이콧 해야 한다는 여론이 서구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이 브리짓 바르도 라는 프랑스 여배우로, 미국에 마릴린 먼로가 있다면, 유럽의 섹스 심볼은 브리짓 바르도 라는 말이 있었으니까, 젊은 시절엔 꽤나 유명 인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매일 밤 남자가 필요하다라는 당시로선 요상하고 야릇한 언사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미니스커트의 원조가 트기라는 배우인지 이 여자 인지는 확실치 않을 만큼 유명 배우였다고 할 것이다. 그런 여자의 주장이니 많이 먹혀 들어 갔을거라는 건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어난 반전이 있었다. 한국의 네티즌들이 개고기 식용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E-메일을 이 여배우에게 보내기 시작 해 심지어 하루 6천통의 항의 메일을 보내 그녀의 서버가 다운 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하였다.

어째든 잠잠해 지는 듯 하던 개고기는 식용 허용 주의 입장에선 헌법 소원까지 가는 주장의 시대까지 오게 되었으니, 일부러 개고기집에 가서 보신탕을 먹으라고 줘도 먹지 않을 나 같은 입장에선 남의 일처럼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지만,

합의 하에 결정된 법이라니 앞으로 어떤 진행 결과를 보일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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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만반음독만권서 2024-01-1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어투어 시앙쯔> 상권에 수록 됨.
 

최근에 인기가 좋은 정치인 한 사람이 있다.

언제나 깍듯한 매너로 스마트한 이미지에 말쑥한 복장이 특징인 사람인데

니체의 글귀를 접할 때마다 나는 항상 그가 떠오른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활기차고 말쑥한 인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정신과 마음이

이처럼 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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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위주 사회의 인간학적 레퍼런스들이 동양의 사서오경 같은 부류라고 한다면,

동시에 서구에서 동경하던 당나라 전후의 동양 선진 문화를 농업 사회의 모범적 모습으로 인정 한다면 더 더욱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며, 선진 문물을 접하기 위해 개척된 실크로드나 해상 무역은 역사적으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농업시대 선진국은 중국이었다.


반면에 일본의 탈아입구를 불러온 중국의 아편 전쟁 패배나, 식민지 시대의 아픔성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과학이라는 토대로 이루어진 산업 혁명 이후의 산업 사회 결과물로 본다면, 이러한 산업 시대의 질서적 인간상을 연구한 탁월한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의 천재가 니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갖는 장점이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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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보아도 단장하고 말쑥하게 그리고 활기찬 언행은 그의 자유로운 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느 것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롭게 사물을 바라보는 자세는 올바른 판단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말쑥함과 활기찬 언행은 그의 결점이 확대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 자연스레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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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어받은 가치관의 영향으로, 보통 다툼은 좋지 않다.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등의 태도를 보이는데, 정치의 현실에서 오랜 시간을 부닥히면서 정치적 비판과 제시한 가치관의 결과물이 긍정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으면서, 보수로 불릴만한 사람들에게 신용을 잃게 된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면을 차지하더라도 보수적 가치관의 사람들은 사진의 글귀처럼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어느새 잊어버리고, 건망증이 심한 어리숙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상항이 되어, 어찌보면 은자가 미덕이 되는 환경이 조성 된지도 모를 일이다.

어째든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이탈리아 현대 철학자의 이런 언급이 심히 가슴에 부합된다.


이런 시점에 저러한 말쑥함과 자유로운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활기차게

기득권적 세력에 언변을 가하며 사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응을 부르고 기대감에 젖게 하는 것이다. 가장 근래에 그가 남긴 어록 역시 그런 최선과 능력의 결과물이기에 공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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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능력과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얽매이지 않은 자유의 정신이 필요하다.그러기 위해 그 자유로운 정신을 방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배제하다 보면 기본 용모부터 말쑥하고 깨끗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기를 더욱 폭발적으로 부풀리기 위한 방편이라면 그의 능력과 최선의 노력으로 쌓인 결과를 더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고급 어휘의 외국어로 정상급 부류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을 연출하거나, 예술 문화 세계의 침착 된 지적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던가 할 때 대중은 더욱 열광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니체의 말과  알베로니의 귀절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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