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나에게 말하길, 요즘 들어 꿈에서 자꾸 누가 돌아가라고 한다고 했다. 바로 엊그제에도 마을 사람 하나가 전하길, 우리 밭에 풀이 무성하니 자식들 데리고 돌아가 김을 매라고 했다는 거다.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우리 밭은 다른 사람이 농사지은 지 한참 됐다고, 우리는 일찌감치 성안으로 이사 와서 농사를 안 짓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땅은 쭉 너희 집에 남아 있잖아. 그건 너희 밭이야. 달아날 생각 말라고.
깨어날 때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망연히 앉아 있었다. - P504

모름지기 농민은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다면, 가난하고 초라하게 살아갈지언정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찾고 싶어하지 않는다. 집안을 일으키는 어려움을, 거친 땅과 집을 버리는 괴로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 P506

가정이나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사람이 되면, 내가 떠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이르는 것은 좋지 않다. - P513

땅에서 내가 가진 것은 머지않아 황폐하게 버려질 집 하나뿐이다.
하늘에는 벽돌 한 장, 기와 한 장도 없다. 사방을 떠도는 혼백이 될 운명인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너ㅡ황사랑뿐이다. 그곳이 유일한 목적지이자 돌아갈 곳이다. - 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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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뿌리 하나가 땅속 깊이 박히면 몸통의 튼튼한 가지도 하늘 높이 뻗기 시작한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에서 그들은 서로 만난다. - P455

한 가지 사물의 문은 사람에게 한 번씩만 열리는 모양이다. 그 문으로 들어가본 사람은 그 사물의 진상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된다. 그 뒤로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사물을 알 수 있다. 진짜 모습은 전해질 길이 없다. 전언자를 통해서 보는 것은 그저 전언일 뿐이다. 그것은 이미 다른 사물이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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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오래되면 그 길을 걸어가 떠나버린 사람도 너무나 많아진다. 그러나 발자국은 가버리지 않는다. 발자국은 사람 몸에서 떨어진 나뭇잎이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떠나 시간 속에서 홀로 나부낀다. 나부낄수록 멀어지고 또 잠잠해진다. - P405

황사량에서는 서른이 넘으면 눈을 감고도 살아갈 수 있다. 불안하다면 칠팔 년쯤 지나 눈을 떠보면 된다. - P407

이 마을은 참으로 운이 좋다. 운 좋게도 똑똑한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다. 똑똑한 사람이 촌장을 맡았다면 마을은 일찌감치 탈바꿈했으리라. 그는 보기 흉하게 쓰러져가는 담장과 집을 모조리 헐고, 낫처럼 생긴 황사량 마을을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으로 정비했으리라. 신품종 가축을 들여오고 인공 교배하여 집집마다 소를 다른 품종 소로, 닭을 다른 품종 닭으로 바꿔놓았으리라. 어느 집에도 검은 소나 이마가 하얀 황소가 없을 것이다. 수수닭도, 등은 붉고 배는 하얀 닭도, 잘생긴 잡털 닭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마을은 진짜 끝장인 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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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뎬네 집은 예전보다 훨씬 낮아져 있었다. 벽의 절반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집이 수십 년간 한 자리에 서 있으면 땅을 몇 자 가라앉히는구나 싶었다. 사람이 평생 한 곳을 걸으면 땅에 구덩이가 패듯 말이다.
많은 집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한 해 한 해 땅속으로 꺼져든다. 문과 지붕이 하루하루 낮아져 처음에는 사람이 고개를 쳐들고 드나들지만 나중에는 허리를 굽혀야 한다. 많은 사람이 늙어서 허리가 굽고다리가 훨 때까지 산다. 사람이 곧게 뻗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머리 위 지붕이 짓눌러서 그렇다. 하늘마저 사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사람이 무슨 방법이 있겠나. 억울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 P366

나는 황사량에서 자란 나무였다. 내 가지가 어디로 뻗어가도, 울타리와 담을 넘어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도 내 뿌리는 여전히 황사량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도 없고, 나를 바꿀 방법도 없었다.
그들은 내 가지를 다듬고 가장귀를 자를 수 있지만, 내 뿌리에는 손댈 수 없었다. 그들의 칼과 도끼는 황사량까지 뻗치지 못했다.
누군가와 내가 서로 아무리 오래 알고 아무리 친분이 깊다 해도 그가 내 고향에 가보지 않은(그곳을 알지 못하는) 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역시 낯선 사이였다. - P396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젠가 그 마을의 왁자한 소리 속에 다시금 내 소리 한두 마디를 더할 수 있을까. 음메 소리 뒤에, 문 두드리는 소리 앞에, 아니면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 사이에......
갑자기 그 속에서 내 소리를 듣고픈 갈망이 치솟았다. 더없이 작디작은 소리라 해도. 있다내 소리는 이미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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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가 진정 찾으려던 것,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시각의 모든 삶이었다. 그것은 사라졌고 이제 잊혀가고 있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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