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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일 ㅣ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비비언 고닉의 가벼운 에세이집을 읽고난 후 바로 마리 루티를 읽으면서 중간 틈틈이 펼쳐 휴식 삼아 읽은 건 김영하의 산문집이다. 그의 입을 빌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왜 내가 다시 읽기 모드로 돌아섰는지 알 수 있었다. 고백삼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혼을 할 수 없으리라 여기며 홀로 이혼하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넉넉한 생활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액수가 더 커질 테고 나이를 먹으면서 누리고픈 것들은 더 누릴 수 있을 테니 남편의 따뜻한 눈길 따위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여기면서 좋아하는 책을 넉넉하게 사서 쟁여두며 맛집을 돌아다니며 딸아이를 등교시키고난 후 홀로 시간을 보내곤 할 때 이혼을 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어떤 생활을 해나갈지 그곳에서 나는 어떤 인물로 생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자주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나가곤 했다. 더할나위 없이 불행해진 나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상상의 시나리오를 써나가면서 그냥 이렇게 살다 죽겠지_로 매번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혼을 하고난 후 이게 정말 내게 벌어진 일인가 자문하기도. 나이가 들어 폐경 조짐이 보이고 노안이 오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나날들이 쌓여갈 때 바라는 풍경이 있다면 직접 내 손으로 그걸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는 비비언 고닉의 문장을 심장 한쪽에 새겨놓고 언어란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집이라는 고다르의 영화 속 대사를 따라 읊으면서 우리가 나눈 것들은 기껏 말뿐이고 말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이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면서 우리는 함께 했어도 언젠가는 파멸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겠구나 알았다.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말하면 사람들은 다 기겁할 것이다. 나 역시 장난으로 가볍게 대꾸를 했을 뿐이라고 여겼으니까. 비 오는 날 상상놀이를 이어가는 동안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낯선 말들이 오고가는 틈바구니 사이로 내 혀와 내 팔다리가 쏟아내고픈 말을 다이렉트로 내뱉으면서도_ 그랬다.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들, 읽기라는 행위를 우습게 여기는 시선들, 책이 사라져가는 풍경들 사이로 어지간히 도망쳐보려고 했다. 얼마나 읽지 않았는지 그 시간을 헤아리는 건 나보다 내 친구들이 먼저였다. 분산된 신경들을 한데 억지로 모아 읽어봤자 의미를 헤아리려고 억지로 또 힘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읽기를 포기했다. 너무 당차게 말야. 도망쳐봤자구나 그걸 다시 알게 된 건 비비언 고닉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읽는 존재에 대한 광폭한 사랑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소년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말로 한다고 해서 깨닫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반복 강박. 전남편이 내게 처음 사랑한다 고백을 하는 순간에도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내가 아니다, 네 판타지다, 하고 수없이 말을 해도 그걸 마주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사기를 당했네, 속았네 투덜거려서 어리석구나 아무리 타이르며 말을 해줘도 막힌 귓구녕을 더 스스로 막더니만_ 소년 역시 보이는 행태가 너무 전남편과 똑같아 현기증이 살짝 느껴지기도 했는데 다정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을 해도 아니 난 달라, 나는 안 그래, 하며 눈도 코도 귀도 막더니만 결국 자기가 만든 판타지 속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신경질을 때때로 낼 때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홀로 쌍욕을 하면서 불러들인 것도 아니건만 이 무슨 리바이벌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허참.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비비언 고닉을 차분하게 읽어나가는 동안 나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여긴 그들의 태도도 그저 학습된 것일뿐, 더 지혜로운 척 하지 않고 덜 오만했더라면 또 다른 결과를 맞이했을 수도 있을 터인데 하고 이내 아쉬움을 느끼는 건 혼자 앉아 반추하는 동안이다. 5월 마지막 날이다. 불러들이지도 않고 올 사람은 오고 가라고 온갖 욕설을 내뱉어도 가지 않을 이들은 가지 않고 그런 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라는 걸 알 것도. 무례하게 내 행복을 자신의 불행과 견주어 비웃는 이들은 내 친구가 아니다 싶어 그만 안색을 싹 바꾸고 말하고 말았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이혼해. 그렇게 궁상맞게 살지 말고, 라고. 말을 내뱉는 순간 아 썰리는 건가 싶었지만 할 말은 하고 살아가기로. 읽는 동안 버릴 책과 버리지 않을 책, 다정함을 유지하되 무례한 경우에는 여지 없이 그 얼굴에 침을 뱉는 걸 특기로 삼아야겠다고 다시 인류애를 되새겨버림. 그러니까 다시 읽는다고 하는 말을 뭐 이렇게 장황하게 해버렸을까.
"남자가 완전체 인생을 살 용기를 낼 수 있게끔 여자는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의 암묵적 협약은, 저 깊이 흐르는 불안이라는 관점을 통해 보자 별안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안 때문에, 우주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제정신으로 그 주장을 밀고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이, 근원적 이유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우리 사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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