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 기암은 사람에게 많은 기(氣)를 불어넣어준다는 속설이 있다. 대지의 기, 바다의 기, 설문대할망이 보내주는 기를 한껏 들이켜며 풍광에 취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구상나무자생지에 도착하게 된다.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뛰면서 구상나무 숲길을 지나노라면 자연의 원형질 속에 내가 묻혀가는듯한 맑은 기상이 발끝부터 가슴속까지 느껴진다. 영실이 인간에게 기를 선사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보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제주도 지리산·덕유산 무등산에서만 자생하고 있다. 키는 18미터에 달 - P187
하며 오래된 줄기의 껍질은 거칠다. 어린 가지에는 털이 약간 있으며 황록색을 띠지만 자라면서 털이 없어지고 갈색으로 변하며, 멀리서 보면나무 전체가 아름다운 은색이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 전나무속으로, 원래 지구 북반구 한대지방이 고향인 고산식물이다. 빙하기 때 빙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빙하기가 끝나자 고지대에 서식하던 전나무속 수종이 미처 물러가지 못하고고지대에 고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란다. 가을부터 정확한 삼각뿔 모양의 보랏빛 솔방울이 맺힌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해발 1,500미터부터 1,800미터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다. 영실의 키 큰 구상나무들은 곧잘 바람과 폭설 때문에 많이 쓰러져 있다. 그렇게 고사목이 된 구상나무는 그 죽음조차 아름 - P188
답게 비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고사목은 단순히 기후나 병으로 고사한게 아니라 멸종의 과정이란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할수록 고산식물은 고지대로 이동할 텐데이미 1,800미터까지 왔으니 한라산 정상에 다다르면 결국 더 이상 오를곳이 없어 멸종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른고산식물의 위험성을 측정한 연구에서 구상나무는 위험 2등급으로 발표되었다. - P189
구상나무의 학명(學名)은 Abies koreana이다. 분비나무 계통을 뜻하는 Abies에 koreana가 붙은 것은 한국이 토종이라는 의미로, 이를 명명한 사람은 영국인 식물학자 어니스트 헨리 윌슨(E. H. Wilson, 1876~1930)이다. 프랑스 신부로 왕벚나무 표본의 첫 채집자인 타케(E. J. Taquet,1873~1952)와 포리(U. Faurie, 1847~1915)는 1901년부터 수십년동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만여 점의 식물종을 채집해 구미 여러나라에 제공했다. 특히 포리는 1907년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한라산에서 ‘구상나무‘를 채집하여 미국 하바드대 아널드식물원의 식물분류학자인윌슨에게 제공했다. 그는 이것이 평범한 분비나무인 줄 알았다. 윌슨은 포리가 준 표본을 보고 무엇인가 다른 종인 것 같다는 생각이들어 1917년에 제주에 왔다. 그는 타케와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가 구상나무를 채집했다. 그리고 윌슨은 정밀연구 끝에 1920년 아널드식물원 연구보고서 1호에 이 구상나무는 다른 곳에 존재하는 분비나무와는 전혀 다른 종으로 지구상에유일한 ‘신종(種)‘이라며 구상나무라 명명했다. - P189
윌슨은 이 나무의 이름을 지을 때 제주인들이 ‘쿠살낭‘이라고 부르는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살‘은 성게, ‘낭‘은 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상나무의 잎이 흡사 성게가시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이 나무를 상낭(향나무)이라고 해서 제사에 올리는향으로 사용해왔다. 실제로 구상나무에서 풍기는 향기는 대단히 고상하고 또 매우 진하여 폐부에 스미는 듯하다. 이런 구상나무 숲길이 있어한라산 등반에서는 나의 발길이 자꾸만 영실 쪽으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 P190
윌슨은 동양의 식물을 연구한 몇 안 되는 서양 식물학자로 특히 경제적 가치가 높은 목본식물을 위주로 채집하고 연구했다. 윌슨은 아널드식물원에서 구상나무를 변종시켜 ‘아비에스코레아나 윌슨‘을 만들어냈다.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수·공원수 등으로 좋으며, 재질이 훌륭하여 가구재 및 건축재 등으로 사용된다. 특히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비싸게 팔리는 나무로 유럽에서는 ‘Korean fir‘로 통한다. 그 로열티로 받는 액수가 어마어마하단다. 지금 아널드식물원에는 윌슨이 그때 한라산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은 구상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자라고 있다. 윌슨의 별명은 ‘식물 사냥꾼‘ (plant hunter)이었는데 그는 이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가 개발한 구상나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 종자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제국주의가 총칼만 앞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 P190
위쪽으로 있는 세 오름(삼형제오름)이라 해서 ‘윗‘자가 붙었다. 뭉쳐 부르면 윗세오름이지만 세 오름 모두 독자적인 이름이 있어 위로부터 붉은오름·누운오름·새끼오름이다. 이들을 삼형제에 빗대어 큰오름(1,740미터), 샛오름(1,711미터), 족은오름(1,698미터)이라고도 한다. 큰오름인 붉은오름은 남사면에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한라산의 강렬한 야성미를 보여주고, 새끼오름인 족은오름은 영실로 통하는 길목에서 아주 귀염성 있게 다가온다. 길게 누운 듯한 누운오름은 누운향나무와 잔디로 뒤덮였고 꼭대기에 망대 같은 바위가 있어 방목으로 마소를키우는 테우리들은 망오름이라고 한다. 바로 이 누운오름의 남쪽 자락이 선작지왓이다. 크고 작은 작지(자갈)들이 많아 생작지왓이라고도 한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최고의 절경으로꼽을 만한 곳이다. 한라산을 끔찍이 사랑했던 제주의 언론인이자 산사나이 김종철이 쓴 『오름나그네』는 말한다.
늦봄,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의 넘실거림에 묻혀 앉으면 그만 미쳐버리고 싶어진다. - P192
겐테 박사는 일찍이 극동 항해 중 제주 근해를 지나면서 한라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한라산에 올라 높이를 정확히 측량하고 다음과 같은 백록담 인상을 남겼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크고 찬란한 파노라마가 끝없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처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감동적인 파노라마가 제주의 한라산처럼 펼쳐지는 곳은 분명 지구상에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바다 한가운데 위치하여 모든 대륙으로부터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면서 아주 가파르고 끝없는 해수면에서 거의 2,000미터 높이에 있는 이곳까지 해수면이 활짝 열리며 우리 눈높이까지 밀려올 듯 솟구쳐오른다. 한라산 정상에 서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한한 공간 한가운데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높은 산 위에 있으면 마치 왕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주위 사방에는 오직 하늘과 바다의 빛나는 푸르름뿐이다. 태양은 하루 생애의 절정에 이르러있었건만 아주 가볍고 투명한 베일이 멀리 떨어진 파노라마에 아직남아 있었다. 물과 공기의 경계가 섞여서 한없는 비현실적인 푸른빛의 세계에서 헤엄치고 날아다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라도 하듯, 뚜렷한 공간적인 경계가 없이 동화 같은 무한으로 이어져 있다. - P193
그러면 남들은 산정에 올라 어떤 감정일까? 백록담에서 느끼는 감상은 무엇일까? 정상에 오른 쾌감일까?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해방감일까? 아마도 그런 마음은 잠시뿐일 것이다.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왜소함이나 두려움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제까지의 속세에서는 일어나지않았던, 미미한 자연의 한 존재로서 자아의 발견일 가능성이 크다. 「향수」와 「고향」으로 널리 사랑받는 정지용(鄭芝溶, 1902~50)이 39세되는 1941년에 간행한 시집 백록담에는 ‘한라산 소묘‘라는 부제가 붙은 모두 아홉 개의 시편이 있는데 평소 그의 시와 아주 다르다. 그 마지막 시는 이렇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 - P195
나는 한라산을 무한대로 사랑하고 무한대로 예찬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한라산을 말하면서 곧잘 잊어버리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제주섬이 곧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곧 제주섬이라는 사실이다. 잠깐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속에 그렇게 새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라산은 산이면서 또한 인간이 살 수 있는 넉넉한 땅 6억평을 만들어주었다는 고마움을 잊곤 한다. 면암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내 6, 7만 호가 이곳을 근거로 살아가니, 나라와 백성에게 미치는 이로움이 어찌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들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비길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대학자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 P196
미술품은 하나의 물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물(物) 자체로 보는것이 아니라 그 물체를 통해 나타나는 상(像)을 갖고 이야기한다. 유식하게 말해서 오브제(objet)가 아니라 이미지(image)로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전환해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미술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이미지를 극명하게 부각해낼 수 있는가를고민해왔다. 그런 중에 옛사람들이 곧잘 채택했던 방법의 하나는 시각적 이미지를 시(詩) 영상으로 대치해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도 엄두를 못 내는 이 방법을 조선시대에는 웬만한 선비 - P199
라면 제화시(題畵詩) 정도는 우리가 유행가 한가락 부르는 흥취로 해치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침묵의 물체를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이는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것이다. 조선왕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山) 정원용(鄭元容)은 비록 그 자신이 문장가이기는 했지만 글씨에 대하여 특별한 전문성을 갖고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네 사람의 명필을 논한 논제필가(論諸筆家, 여러 서예가를 논함)」에서는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 P200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는 여름비가 바야흐로 흠뻑 내리는데 늙은농부가 소를 꾸짖으며 가는 듯하다. 서무수(徐懋修의 글씨는 반쯤 갠 봄날은일자(隱逸, 세상을 피해 숨어지내는 사람)가 채소밭을 가꾸는 듯하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가을달이 창에 비치는데 근심에 서린 사람이 비단을 짜는 듯하다. 이원교(李圓嶠)의 글씨는 겨울눈이 쏟아져내리는데 사냥꾼이 말을타고 치달리는 듯하다. - P200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 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사이 대청에서 낮잠 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 - P201
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우리 어머니가 택한 것은 운문사 전경이었고 나는 부석사를 꼽았었다. - P202
영주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한 건축잡지에서 건축가 2백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이라는 항목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당 1위를 한 것이 부석사였다. 그 "가장 잘 지었다"는 말에는 건축적 사고가 풍부하고 건축적 짜임새가 충실하다는뜻이 들어 있으리라. 그런 전문적 안목이 아니라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눈이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 없이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 P203
부석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량수전에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서가 아니며, 그것이 국보 제18호라서도아니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해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조화하여 두 모습으로 나눠이 없고,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하나됨"이라는 원융(圓融)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람 배치가 부석사이다. 그러니까 부석사는 곧 저 오묘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이미지를 건축이라는 시각매체로 구현한 것이다. 이 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이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대화일 것이다. - P203
부석사는 백두대간(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鳳凰山) 중턱이 된다. 이 자리가 지닌 지리적·풍수적 의미는 그것으로 암시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국토의 오지라는 사실에서 사상사적·역사적 의미도 간취된다. 부석사 아랫마을 북지리에서 이제 절집의 일주문을 들어가 천왕문, 요사채, 범종루,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조사당과 응진전(應眞殿)까지 순례하는 길을 걷게 되면 순례자는 필연적으로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세 종류의 길을 걷게끔 되어 있다. - P204
절 입구에서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은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부석사의 본채는 정연한돌축대와 돌계단이라는 인공의 길이다. 그것은 엄격한 체계와 가지런한 질서를 담고 있으며 그 정상에 무량수전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면 자연의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치달리는 소백산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것은 곧 극락세계로 들어가는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상처받지 않은 위대한 자연으로돌아온 것이다. 무량수전에서 한 호흡 가다듬고 조사당, 웅진전으로 오르는 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길이다.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를 포근히감싸주는 여운이다. - P205
사과나무의 줄기는 직선으로 뻗고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도록가지치기를 해야 사과가 잘 열린다. 한 줄기에 수십 개씩 달리는 열매의하중을 견디려면 줄기는 굵고 곧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과나무는 운동선수의 팔뚝처럼 굳세고 힘있어 보인다. 곧게 뻗어 오른 사과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대지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역기를 드는 역도 선수의 용틀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사과나무의 힘은 꽃이 필 때도 열매를 맺을 때도 아닌 마른 줄기의 늦가을이 제격이다. 내 사랑하는 사과나무의 생김새는 그 자체로 위대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묵은 줄기는 은회색이고 새 가지는 자색을 띠는 색감은 유연한 느낌을 주지만 형체는 어느 모로 보아도 불균형을 이루면서 전체는 완벽한 힘의 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뿌리에서나온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서 더욱더 사과나무를 동경하게되었다. "세상엔 느티나무 뽑을 장사는 있어도 사과나무 뽑을 장사는 없다." - P209
나의 주관적 견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건축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찰 건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뛰어난 절집이라면 당연히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경주 불국사가 꼽힐 만하다고 생각하고있다. 그런데 이 세 절은 건축적 지향점, 특히 자연과의 조화 관계가 아주 다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여맥을 절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선암사는 부드러운 조계산 자락이 사방에서 감지되는 아늑한 산중에 자리 잡았는데, 불국사는 산자락을 타고 올라앉았으면서도 비탈을 평지로 환원하여 반듯하게 경영되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자리앉음새 (location)가 뛰어나고, 선암사는 건물과 건물 간의 공간(space) 운영이 탁월하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technic)와 가람배치(design)의 묘가 압권이다. 그런 저마다의 특징으로 인하여 한국사람은 부석사를, 일본 사람은 선암사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를 더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부석사의 호방스러운 기상을, 일본 사람은 선암사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의 공교로운 인공(人工)의 멋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 P256
불국사는 토함산자락에 자리잡았지만 평지 사찰 개념으로 경영하였다. 불국사는 화엄세계를 추구하는 교종의 사찰이지 선종사찰이 아니었다. 더욱이 불국토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부처님의 궁전이었다. 그래서 불국사 안마당에는회랑은 있지만 산사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밭도, 나무도 없다. 그대신 산비탈을 평지로 환원하기 위한 엄청난 축대를 쌓아야 했다. 그것이 불국사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장 큰 아름다움이 되었다.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국사 석축은 누구에게나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일연스님은 석축의 구름다리를 일러 "동부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한마디로 마감했다. 조선 후기의 한 낭만적 문인인 박종(朴琮)이 쓴 「동경(경주)기행」이라는 글에서는 "그 제도가 심히 기이하고 장엄하다"는 말로 감탄을 대신했다. 어쩌다 외국의 미술관에서 오는 손님이 있어 불국사로 안내하면 열이면 열 모두가 석축 앞에서는 "판타스틱!" (fantastic) 아니면 "원더풀!" (wonderful)을 연발한다. 불국사가 24년이 걸리도록 완공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석축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 P266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네모난 돌에 버들잎 모양으로 홈을 파고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내놓은 용도 미상의 석물이 있다. 환자용 변기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신영훈 선생은 이것이 실내에 설치한 수세식 변기로서 여성용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하였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꾸 보니까 변기가 아니라 혹시 용변 후 물을 담아 밑을 씻던 물받이 석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드 관장과 왔을 때도이것을 골똘히 관찰하고 있는데 그는 또 내게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때나의 짧은 영어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한마디뿐이었다. "8세기의 비데" (8th century‘s bidet) 그러자 다른 때 같으면 "리얼리?"(really)라고 동의성 반문을 했을 텐데 이 순간에는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못 당하겠네" (You win)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P279
그러나 이 자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작은 일각문너머 있는 뒷간에 다녀오는 일이다. 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멀리 불국사 강원(講院)을 합법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보이는 강원, 그것은 우리가 늘 보아온 산사의 한 정경인데 불국사가 회랑이 있는 평지 사찰로 경영되는 바람에 여기서 보는 산사의 편안한 분위기가 새삼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그것을 우리는 불국사의 여운으로 삼아도 좋겠다. 우드 관장이 멀리 솔밭 아래 오붓하게 들어앉은 강원을 보면서 "나는세계의 무수한 나라를 방문했는데 자연이 예술과 건축에서 차지하는비중이 이렇게 큰 나라는 처음 보았다"고 신기한 느낌을 말하였다. 그때 나는 "이것은 단지 예고편일 뿐입니다"(It‘s only a preview)라고 대답했다. - P280
불국사 답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결론 삼아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언젠가 나는 답사엔 초급,중급, 고급이 있다고 했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급자가 초급 코스를, 중급자가 중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가 오히려 중급 코스를 더가고 싶어 하고, 중급자는 고급 코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고급자가 되어야 비로소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거기를 즐겨 찾게 된다. 그런 진보와 순환의 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도 모른다. 결국 불국사는 답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 P281
내포땅을 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다. 이 길을 지나면서 잠을 잔다거나 한밤중에 이 길을 간다는 것은 거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창밖에 스치는 풍광이라고 해봤자 낮은 산과 넓은 들을 지나는 평범한 들판길이다. 그러나 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길은 찻길이 항시언덕을 올라타고 높은 곳으로 나 있기 때문에 넓게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원한 조망을 제공한다.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란 흔히 강을 따라난 길, 구절양장으로 기어오르는 고갯길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면서 평범한 들판길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기다. - P285
들판엔 추수를 기다리는 벼 포기들이 문자 그대로 황금빛을 이루면서 초가을의 따스한 햇볕 속에 해맑은 노랑의 순색을 발하고 있다. 벼포기의 초록빛과 벼 이삭의 누런빛이 어우러져 설익은 논은 연둣빛이되고 농익은 논은 갈색이 되지만 엷은 바람에는 너나없이 단색의 노랑으로 변하며, 그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 속에 먼산의 단풍도 길가의 화사한 꽃들도 모두 묻혀버린다. 나는 언젠가 가을 답사 때 동행했던 나의주례 어른이신 고 리영희 선생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흘렸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가을날의 단풍이라고 하면 먼 산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화려한 색감을 말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풍의 주조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나이가들고서야."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풍광이 느끼기에 따라선기암절경보다도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충청도 땅, 옛 백제의 아름다움 속에 피치 못하게 개입해있을 풍토적 성격일지도 모른다. - P286
서산마애불의 또 다른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은 저 나무꾼도 감동한환한 미소에 있다. 삼국시대 불상들을 보면 6세기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친 불상들에는 대개 미소가 나타나 있고, 이는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불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6,7세기 불상의 미소는 당시 동북아시아 불상의 보편적 유행 형식이었다. 이 시대 불상의 미소란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한 상징으로 7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이 미소가 사라지고대신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된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6,7세기 동북아시아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은 사실성보다 상징성을 겨냥하여 입체감보다 평면감, 양감보다 정면관(正面觀)에 치중했다는 데 있다. 불상을 사방에서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 서서 시점의 이동 없이 본다는 전제하에 제작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옷주름과 몸매를 표현한 선은 날카롭고 엄격하며 직선이 많다. 그로 인하여 불상은인체를 기본으로 했지만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의 모습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서산 마애불을 비롯하여 백제의 불상들을 보면 오히려 인간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점에 착목하여 삼불(三佛) 김원용(金元龍) 선생은 서산 마애불이 발견된 이듬해에 한국 고미술의미학」(『세대』 1960년 5월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 P291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군수리 출토 여래좌상은 인자한 아버지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도 듣고 앉은 것 같은 인간미 흐르는 얼굴과 자세를 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의 안락하고 현세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중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 P2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