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코스모스에서

다시 이 빛나는 점을 보라. 그것은 바로 여기, 우리 집, 우리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아는 사람, 소문으로들었던 사람, 그 모든 사람은 그 위에 있거나 또는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숭상되는 수천의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 이론,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민, 서로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앞날이 촉망되는아이들, 발명가와 개척자, 윤리 도덕의 교사들, 부패한 정치가들, ‘슈퍼스타‘, ‘초인적 지도자‘, 성자와 죄인 등 인류의 역사에서 그 모든 것의 총합이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 창백한 푸른 점에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칼은 자연에 묻혀서 사색하며 글쓰기를 즐날·겼다. 뉴욕 주, 이타카 시 소재의 우리 집을 둘러싼 바로 그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의 창을 통하여 폭포로 비스듬히 이어지는 뜰이 가득히 밀려온다. 칼은 몇 시간씩뜰에 놓인 테이블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고는 했다. 백색 소음의 물소리가 만들어 내는 음악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내게 하고는 했다. 나와 칼이 『잊혀진 조상들의그림자 shadosur of Fiongoutern Anceton』를 공동 집필할 당시의 일이다. 컴퓨터에서눈을 떼어 시선을 창 밖으로 잠시 돌렸더니, 덩치가 엄청나게 큰 사슴한 마리가 칼의 어깨 너머로 원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은 등 뒤에사슴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자기 앞에 놓인 우리의 원고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집중하기는 사슴도 마찬가지였다. 칼이 원고에 뭐라고쓰는지 알고 싶기라도 하다는 표정으로 칼의 어깨 너머를 뚫어지게보고 있었던 것이다.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 영겁의 역사가 층층이새겨져 있는 저 절벽, 그리고 사슴을 비롯한 각종 야생 동물들은 아직그대로인데, 칼이 앉아서 글을 쓰던 의자만이 텅 비어 있구나. - P8

칼은 평소에, 첨단 과학 기술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이 건전한 시민으로 성숙하는 데에는 효율적인 과학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곤 했다. 그러므로 나는, 칼 세이건 재단 Carl Sagan Foundation이 칼 세이건 아카데미 Carl Sagan Academy를 운영하기로 한 결정에 칼이 매우 흡족해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CSA는 플로리다 주 힐스보로Hillsborough 카운티의 탬파Tampa 지역 중등학생들이 현대 과학이 찾아낸자연의 경이로움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계획은 우리가 플로리다 주의 휴머니스트 연맹과 이 지방 침례교회들과함께 이루어낸 놀라운 협력의 결과이다. 이 세 기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목적을위하여 함께 일했다. 이 협력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세상의실현 가능성을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해인 금년에는 모두 78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은 미국에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낙후 지역의 어린이들이다. 나는 행성 학회 회원들 중에서 과학적사고의 가치를 높이 여기고, 사회 문제에 대해 건전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며, 칼의 이상에 동조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칼 세이건 재단의 문을 두드려 주기 바란다. - P13

칼은 별을 향한 긴 여정에서 우리가 방향을 잃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인류의 의지가 혹시 사그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크게우려했다. 침대에 누워서 죽어 가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이 하려던 기조 연설의 내용을 있는 힘을 다해 구술해 갔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부통령 고어는 칼의 구술 내용을 대독하는 것으로예정됐던 백악관 회의를 시작했다. 칼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그에게들려줄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야기들 중 하나가 바로, 칼의 메시지가 백악관 사람들에게 전달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이야기에 미소로 답했다. 이미 담갈색으로 변해 가던 그의 두 눈망울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읽어 낼 수 있었다. 앨 고어에 대한 고마움, 우주 과학 정책을 결정하는이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전했다는 안도감, 우주 과학의 미래에 대한일말의 불안감 등이 그의 눈빛에 섞여 있었다. 우주 과학의 미래에 대한 그의 우려는, 적어도 짧은 시간 척도로 보았을 때, 아주 타당한 것이었음이 그 후에 곧 판명됐다. - P16

앞으로 두 걸음 나갔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식의 변화로 인류는 역사의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별을 향한 여정에서도 우리는우회로들을 종종 만나곤 했다. 우회로야말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효과적인 방편이 아닌가.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서 결국, 지구인들은칼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갈 것이다. 칼이 앉아 있던 그 의자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됐지만 그가 우리에게 전한 이상과 가치관은 여기 그대로 있다. 그가 가꿔 오던 꿈들마저인류 전체의 꿈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은가.
2006년 가을
앤 드루얀



이 글은 칼 세이건 서거 10주기를 맞아 부인인 앤 드루얀이 세이건 사후 10년을 추억하며 <행성 보고서> 2006년 11/12월호에 쓴 글이다. ‘코스모스, 특별판을 출간하면서 앤드루얀과 칼 세이건 재단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 한국어판 서문을 대신하여 게재했다. ― 옮긴이 - P17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한다면, 지금은 짙은 암흑 속에 감춰져 있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거기에 빛이 비쳐 그 안에 숨어 있는 진리의 실상이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생애로는 부족하다. 누가 자신의 일생을 하늘을 연구하는 데만 온동 바친다고 하더라도, 우주와 같은 엄청난 주제를 다진리는루기에 한 사람의 일생은 너무 짧고 부족하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밝혀지게마련이다. 우리 먼 후손들은 자신들에게는 아주 뻔한 것들수없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었음을 의아해 할 것이다.
이 많은 발견이 먼 미래에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서 밝혀야 할 그 무엇을 우주가무궁무진으로 품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 우주가 혹시라도 그러한 우주라면, 우리는 그것을 한날 보잘것없고 초라함존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는 단 한 번에 한꺼번에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네카, 자연학의 문제, 제7권, 1세기 - P19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태어났지만 이제는 많이 자라 코스모스와 멀리 떨어진 지오래됐다. 이제 코스모스는 우리의 일상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별개의 세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학은 이와는 아주 다른 우주의 실상을또한 우리에게 알려 준다. 우주는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로 황홀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결코 아니다. 우리도 코스모스의 일부이다. 이것은 결코 시적 수사가 아니다. 인간과 우주는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연결돼 있다. 인류는 코스모스에서 태어났으며인류의 장차 운명도 코스모스와 깊게 관련돼 있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있었던 대사건들뿐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까지도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우리를 둘러싼 우주의 기원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우주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본질과 만나게 될 것이다. - P22

한마디로 과학의 성공은 자정 능력에 있다. 과학은 스스로를 교정할 수 있다. 과학에서는 새로운 실험 결과와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때마다 그 전에는 신비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있던 미지의 사실이 설명될 수 있는 합리적 현상으로 바뀌어 간다. 9장에서 논의한 중성미자의문제가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중성미자라는 포착하기조차 어려운입자가 태양 내부에서 이론적 예상보다 적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안들이 속속 등장했다. 10장에서 다루는 문제도 좋은 예이다. 현대 우주론은 우주의 물질 밀도가 충분히 커서 멀리 있는 은하들의 후퇴 운동을 종국에 가서는 멈추게 할수 있을 건지, 우주는 그 나이가 무한대인 존재이고 따라서 우주의 창조를 부정할 수 있을지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문제들도과학적인 방법으로 논의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 P22

『코스모스』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나는 앤드루얀 Ann Druyan과 스티븐 소터Steven Sorter에게 참으로 많은 빚을 졌습니다. 이분들은 ‘코스모스‘ 텔레비전 시리즈의 공동저자로서 『코스모스』집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해 주셨습니다. 이 저작물 전반에 흐르는 기본 아이디어의 구상에서부터, 그 아이디어들 이면에 숨어 있는 깊은 연계성의 발굴과, 그리고 시리즈 각 편에 담아 낸 내용의 지적 수준과 구조, 또 멋들어진문체의 구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책의 초고를 왕성한 의욕과 비판적 시각으로 철저하게 읽어주셨습니다. 나에게 준 이들의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제언들이 수없이이어지는 퇴고의 과정을 통해서 이 책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텔레비전 시리즈의 공동 저자로서 이분들이 쓰신 대본이 이 책의 내용을결정하는 데 주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나는 이분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열띤 토론과 심도 깊은 토의를 하면서 크나큰 기쁨을 맛볼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기쁨이 내가 ‘코스모스‘ 프로젝트에서 얻을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보상들 중 하나였습니다.

1980년 5월
이타카와 로스앤젤레스에서 - P32

맨 처음에 창조된 사람들은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밤의마법사", "야만인", "어둠의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지혜를 부여받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알아챌수 있었다. 이들이 눈을 떠 세상을 둘러보자, 그 즉시 모든것을 인지하였으며 거대한 천구와 땅의 둥그런 얼굴도모두 알아보았다. (그러자 창조주께서 입을 여셨다.) "저들은 전지全知하구나, 이제 저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저들의 눈길이가까운 곳에만 이르게끔 하고, 땅의 얼굴도 조금씩밖에 보지못하게 하리라! 저들은 우리 손에서 나온 한갓 피조물이 아니던가? 저들마저 신이 된대서야 어디 말이 되겠는가?"

- 퀴체 마야의 성전 <포폴 부흐> - P35

네가 넓은 땅 위를 구석구석 살펴 알아 보지 못한 것이 없거든, 어서 말해 보아라. 빛의 전당으로 가는 길은 어디냐?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어디냐? - 욥기」 - P35

나의 위엄을 찾을 곳은 우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사고의 제어 기제에서 찾아져야합니다. 내가 세상들을 차지했다면 더 가질 것이 없습니다. 우주는 공간을 온통 둘러싸서 나를 원자 알갱이 하나 삼키듯이 먹어 버립니다. 나는 생각함으로써 세상을 이해합니다.  - 블레즈 파스칼, 팡세 - P36

앎은 한정되어 있지만 무지에는 끝이 없다. 지성에 관한 한 우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
끝없는 무지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 섬을 조금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다. ㅡ토머스 헉슬리, 1887년 - P36

코스모스 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당연한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류는 영원 무한의 시공간에 파묻힌 하나의 점, 지구를 보금자리삼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주제에 코스모스의 크기와 나이를 헤아리고자 한다는 것은 인류의 이해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사는, 우주적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요키는커녕 지극히 하찮고 자질구레하기까지 하다.  - P36

우리가 이제 떠나려는 탐험에는 회의의 정신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에만 의존한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로 빠져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탐험은 상상력 없이는 단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여정의 연속일 것이다. 회의의 정신은 공상과 실제를 분간할 줄 알게 하여 억측의 실현성 여부를 검증해 준다. 코스모스는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보물 창고로서 그 우아한 실제, 절묘한 상관관계 그리고 기묘한 작동 원리를 그 안에 모두 품고 있다.
코스모스를 거대한 바다라고 생각한다면 지구의 표면은 곧 바닷가에 해당한다. ‘우주라는 바다‘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대부분 우리가 이 바닷가에 서서 스스로 보고 배워서 알아낸 것이다.
직접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것은 겨우 발가락을 적시는 수준이었다. 아니, 기껏해야 발목을 물에 적셨다고나할까 - P37

코스모스는 너무 거대하여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길이 단위인 미터나 마일로는 도무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미터나 마일은 지상에서 쓰기에 편리하도록 고안된 단위일 뿐이다. 천문학에서는 그 대신빛의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거리를 잰다. 빚은 1초에 약 18만 6000마일 또는 거의 30만 킬로미터, 즉 지구 7바퀴를 돈다. 빛은 태양에서 지구까지 8분이면 온다. 그러므로 태양은 지구에서 약 8광분 만큼 떨어져 있다. 빛은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약 6조 마일을 간다. 천문학자들은 빛이 1년 동안 지나간 거리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1광년年이라고 부른다. 광년은 시간을 재는 단위가 아니라 거리를, 그것도 엄청나게 먼 거리를 재는 단위이다.
지구는 우주에서 결코 유일무이한 장소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전형적인 곳은 더더욱 아니다. 행성이나 별이나 은하를 전형적인 곳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은 코스모스의 대부분이 텅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스에서 일반적인곳이라 할 만한 곳은 저 광대하고 냉랭하고 어디로 가나 텅 비어 있으며 끝없는 밤으로 채워진 은하 사이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참으로 괴이하고 외로운 곳이라서 그곳에 있는 행성과 별과 은하 들이 가슴 시리도록 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 P39

코스모스의 어느 한구석을 무작위로찍는다고 했을 때 그곳이 운 좋게 행성 바로 위나 근처일 확률은 10-33이다! 우리가 살면서 일어날 확률이 그렇게 낮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본다면 우리는 그 일에 매혹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에서 본다면 바다 물결 위의 흰 거품처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희미하고 가냘픈 덩굴손 모양의 빛줄기가 암흑을배경으로 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이것들이 은하다. 이들 중에는 홀로떠다니는 고독한 녀석도 있지만, 대부분은 은하단이라는 집단을 이루며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코스모스의 암흑 속을 끝없이 떠다닌다. 이것이우리가 아는 코스모스의 가장 거시적인 모습이며, 여기가 바로 성운들의 세계이다. 지구에서 80억 광년 떨어진 곳, 우리가 우주의 중간쯤으로알고 있는 머나먼 저곳이 성운들의 세상이란 말이다. - P40

나선 팔 안은 물론이고 나선 팔과 나선 팔 사이를 지나다 보면 스스로 빛을 내는 별들이 모인 지극히 아름다운 집단들이 우리에게 깊은인상을 남기며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 집단들 중에는 비눗방울처럼 가냘프게 생겼으면서, 태양 1만 개 또는 지구 1조 개나 들어갈 수있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것들이 있다. 또 천체들 중에는 크기는 작은 마을만 하지만 그 밀도는 납의 100조 배나 되는 것도 있다. 태양처럼 홀몸인 별도 있지만 동반성과 함께하는 별이 더 많다. 별들은 주로 - P42

두 별이 서로 상대방 주위를 도는 하나의 쌍성계를 이룬다. 그리고 겨우 별 셋으로 이루어진 항성계에서 시작하여, 여남은 별들이 엉성하게 모여 있는 성단, 수백만 개의 구성원을 뽐내는 거대한 구상 성단까지 천차만별의 항성계들이 은하에 있다. 쌍성계들 중에는두 구성 별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 상대방 ‘별의 물질‘을 서로 주고받는 근접 쌍성계들도 있다. 대부분의 쌍성계에서는 두 별이 태양과목성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초신성같이 저혼자 내는 빛이 은하 전체가 내는 빛과 맞먹을 만큼 밝은 천체가 있는가 하면, 블랙홀 black hole과 같이 겨우 몇 킬로미터만 떨어져도 보이지않는 어두운 별이 있다. 밝기만 보더라도 일정한 빛을 내는 별이 있는가 하면 불규칙하게 가물거리는 별이 있고 틀림없는 주기로 깜빡이는 별도 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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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 기암은 사람에게 많은 기(氣)를 불어넣어준다는 속설이 있다.
대지의 기, 바다의 기, 설문대할망이 보내주는 기를 한껏 들이켜며 풍광에 취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어느새 구상나무자생지에 도착하게 된다. 검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뛰면서 구상나무 숲길을 지나노라면 자연의 원형질 속에 내가 묻혀가는듯한 맑은 기상이 발끝부터 가슴속까지 느껴진다. 영실이 인간에게 기를 선사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보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전세계에서 우리나라제주도 지리산·덕유산 무등산에서만 자생하고 있다. 키는 18미터에 달 - P187

하며 오래된 줄기의 껍질은 거칠다. 어린 가지에는 털이 약간 있으며 황록색을 띠지만 자라면서 털이 없어지고 갈색으로 변하며, 멀리서 보면나무 전체가 아름다운 은색이다.
구상나무는 소나무과 전나무속으로, 원래 지구 북반구 한대지방이 고향인 고산식물이다. 빙하기 때 빙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빙하기가 끝나자 고지대에 서식하던 전나무속 수종이 미처 물러가지 못하고고지대에 고립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란다. 가을부터 정확한 삼각뿔 모양의 보랏빛 솔방울이 맺힌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해발 1,500미터부터 1,800미터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다. 영실의 키 큰 구상나무들은 곧잘 바람과 폭설 때문에 많이 쓰러져 있다. 그렇게 고사목이 된 구상나무는 그 죽음조차 아름 - P188

답게 비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고사목은 단순히 기후나 병으로 고사한게 아니라 멸종의 과정이란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할수록 고산식물은 고지대로 이동할 텐데이미 1,800미터까지 왔으니 한라산 정상에 다다르면 결국 더 이상 오를곳이 없어 멸종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따른고산식물의 위험성을 측정한 연구에서 구상나무는 위험 2등급으로 발표되었다. - P189

구상나무의 학명(學名)은 Abies koreana이다. 분비나무 계통을 뜻하는 Abies에 koreana가 붙은 것은 한국이 토종이라는 의미로, 이를 명명한 사람은 영국인 식물학자 어니스트 헨리 윌슨(E. H. Wilson, 1876~1930)이다. 프랑스 신부로 왕벚나무 표본의 첫 채집자인 타케(E. J. Taquet,1873~1952)와 포리(U. Faurie, 1847~1915)는 1901년부터 수십년동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만여 점의 식물종을 채집해 구미 여러나라에 제공했다. 특히 포리는 1907년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한라산에서 ‘구상나무‘를 채집하여 미국 하바드대 아널드식물원의 식물분류학자인윌슨에게 제공했다. 그는 이것이 평범한 분비나무인 줄 알았다.
윌슨은 포리가 준 표본을 보고 무엇인가 다른 종인 것 같다는 생각이들어 1917년에 제주에 왔다. 그는 타케와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가 구상나무를 채집했다. 그리고 윌슨은 정밀연구 끝에 1920년 아널드식물원 연구보고서 1호에 이 구상나무는 다른 곳에 존재하는 분비나무와는 전혀 다른 종으로 지구상에유일한 ‘신종(種)‘이라며 구상나무라 명명했다. - P189

윌슨은 이 나무의 이름을 지을 때 제주인들이 ‘쿠살낭‘이라고 부르는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살‘은 성게, ‘낭‘은 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상나무의 잎이 흡사 성게가시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인들은 이 나무를 상낭(향나무)이라고 해서 제사에 올리는향으로 사용해왔다. 실제로 구상나무에서 풍기는 향기는 대단히 고상하고 또 매우 진하여 폐부에 스미는 듯하다. 이런 구상나무 숲길이 있어한라산 등반에서는 나의 발길이 자꾸만 영실 쪽으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 P190

윌슨은 동양의 식물을 연구한 몇 안 되는 서양 식물학자로 특히 경제적 가치가 높은 목본식물을 위주로 채집하고 연구했다. 윌슨은 아널드식물원에서 구상나무를 변종시켜 ‘아비에스코레아나 윌슨‘을 만들어냈다.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수·공원수 등으로 좋으며, 재질이 훌륭하여 가구재 및 건축재 등으로 사용된다. 특히 이 나무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비싸게 팔리는 나무로 유럽에서는 ‘Korean fir‘로 통한다. 그 로열티로 받는 액수가 어마어마하단다.
지금 아널드식물원에는 윌슨이 그때 한라산에서 종자를 가져다 심은 구상나무가 하늘로 치솟아 자라고 있다. 윌슨의 별명은 ‘식물 사냥꾼‘ (plant hunter)이었는데 그는 이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가 개발한 구상나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 종자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제국주의가 총칼만 앞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 P190

위쪽으로 있는 세 오름(삼형제오름)이라 해서 ‘윗‘자가 붙었다. 뭉쳐 부르면 윗세오름이지만 세 오름 모두 독자적인 이름이 있어 위로부터 붉은오름·누운오름·새끼오름이다. 이들을 삼형제에 빗대어 큰오름(1,740미터), 샛오름(1,711미터), 족은오름(1,698미터)이라고도 한다.
큰오름인 붉은오름은 남사면에 붉은 흙이 드러나 있어 한라산의 강렬한 야성미를 보여주고, 새끼오름인 족은오름은 영실로 통하는 길목에서 아주 귀염성 있게 다가온다. 길게 누운 듯한 누운오름은 누운향나무와 잔디로 뒤덮였고 꼭대기에 망대 같은 바위가 있어 방목으로 마소를키우는 테우리들은 망오름이라고 한다.
바로 이 누운오름의 남쪽 자락이 선작지왓이다. 크고 작은 작지(자갈)들이 많아 생작지왓이라고도 한다. 선작지왓은 한라산 최고의 절경으로꼽을 만한 곳이다. 한라산을 끔찍이 사랑했던 제주의 언론인이자 산사나이 김종철이 쓴 『오름나그네』는 말한다.

늦봄,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의 넘실거림에 묻혀 앉으면 그만 미쳐버리고 싶어진다. - P192

겐테 박사는 일찍이 극동 항해 중 제주 근해를 지나면서 한라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한라산에 올라 높이를 정확히 측량하고 다음과 같은 백록담 인상을 남겼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크고 찬란한 파노라마가 끝없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이처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감동적인 파노라마가 제주의 한라산처럼 펼쳐지는 곳은 분명 지구상에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바다 한가운데 위치하여 모든 대륙으로부터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면서 아주 가파르고 끝없는 해수면에서 거의 2,000미터 높이에 있는 이곳까지 해수면이 활짝 열리며 우리 눈높이까지 밀려올 듯 솟구쳐오른다. 한라산 정상에 서면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무한한 공간 한가운데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높은 산 위에 있으면 마치 왕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주위 사방에는 오직 하늘과 바다의 빛나는 푸르름뿐이다. 태양은 하루 생애의 절정에 이르러있었건만 아주 가볍고 투명한 베일이 멀리 떨어진 파노라마에 아직남아 있었다. 물과 공기의 경계가 섞여서 한없는 비현실적인 푸른빛의 세계에서 헤엄치고 날아다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라도 하듯,
뚜렷한 공간적인 경계가 없이 동화 같은 무한으로 이어져 있다. - P193

그러면 남들은 산정에 올라 어떤 감정일까? 백록담에서 느끼는 감상은 무엇일까? 정상에 오른 쾌감일까?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해방감일까? 아마도 그런 마음은 잠시뿐일 것이다.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왜소함이나 두려움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제까지의 속세에서는 일어나지않았던, 미미한 자연의 한 존재로서 자아의 발견일 가능성이 크다.
「향수」와 「고향」으로 널리 사랑받는 정지용(鄭芝溶, 1902~50)이 39세되는 1941년에 간행한 시집 백록담에는 ‘한라산 소묘‘라는 부제가 붙은 모두 아홉 개의 시편이 있는데 평소 그의 시와 아주 다르다. 그 마지막 시는 이렇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 - P195

나는 한라산을 무한대로 사랑하고 무한대로 예찬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한라산을 말하면서 곧잘 잊어버리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제주섬이 곧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곧 제주섬이라는 사실이다. 잠깐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속에 그렇게 새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라산은 산이면서 또한 인간이 살 수 있는 넉넉한 땅 6억평을 만들어주었다는 고마움을 잊곤 한다.
면암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내 6, 7만 호가 이곳을 근거로 살아가니, 나라와 백성에게 미치는 이로움이 어찌 금강산이나 지리산처럼 사람들에게 관광이나 제공하는 산들과 비길 수 있겠는가?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대학자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 P196

미술품은 하나의 물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물(物) 자체로 보는것이 아니라 그 물체를 통해 나타나는 상(像)을 갖고 이야기한다. 유식하게 말해서 오브제(objet)가 아니라 이미지(image)로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전환해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미술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이미지를 극명하게 부각해낼 수 있는가를고민해왔다.
그런 중에 옛사람들이 곧잘 채택했던 방법의 하나는 시각적 이미지를 시(詩) 영상으로 대치해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제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라도 엄두를 못 내는 이 방법을 조선시대에는 웬만한 선비 - P199

라면 제화시(題畵詩) 정도는 우리가 유행가 한가락 부르는 흥취로 해치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침묵의 물체를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였다. 이는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인 것이다.
조선왕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山) 정원용(鄭元容)은 비록 그 자신이 문장가이기는 했지만 글씨에 대하여 특별한 전문성을 갖고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네 사람의 명필을 논한 논제필가(論諸筆家, 여러 서예가를 논함)」에서는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 P200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는 여름비가 바야흐로 흠뻑 내리는데 늙은농부가 소를 꾸짖으며 가는 듯하다.
서무수(徐懋修의 글씨는 반쯤 갠 봄날은일자(隱逸, 세상을 피해 숨어지내는 사람)가 채소밭을 가꾸는 듯하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가을달이 창에 비치는데 근심에 서린 사람이 비단을 짜는 듯하다.
이원교(李圓嶠)의 글씨는 겨울눈이 쏟아져내리는데 사냥꾼이 말을타고 치달리는 듯하다. - P200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 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사이 대청에서 낮잠 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 - P201

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몇 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우리 어머니가 택한 것은 운문사 전경이었고 나는 부석사를 꼽았었다. - P202

영주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한 건축잡지에서 건축가 2백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이라는 항목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당 1위를 한 것이 부석사였다. 그 "가장 잘 지었다"는 말에는 건축적 사고가 풍부하고 건축적 짜임새가 충실하다는뜻이 들어 있으리라. 그런 전문적 안목이 아니라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눈이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 없이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 P203

부석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량수전에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서가 아니며, 그것이 국보 제18호라서도아니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해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조화하여 두 모습으로 나눠이 없고,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하나됨"이라는 원융(圓融)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람 배치가 부석사이다.
그러니까 부석사는 곧 저 오묘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이미지를 건축이라는 시각매체로 구현한 것이다. 이 또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이며,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대화일 것이다. - P203

부석사는 백두대간(태백산맥)이 두 줄기로 나뉘어 각각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鳳凰山) 중턱이 된다. 이 자리가 지닌 지리적·풍수적 의미는 그것으로 암시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국토의 오지라는 사실에서 사상사적·역사적 의미도 간취된다.
부석사 아랫마을 북지리에서 이제 절집의 일주문을 들어가 천왕문,
요사채, 범종루,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조사당과 응진전(應眞殿)까지 순례하는 길을 걷게 되면 순례자는 필연적으로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세 종류의 길을 걷게끔 되어 있다. - P204

절 입구에서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에 이르는 돌 반, 흙 반의 비탈길은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천왕문에서 요사채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르는 부석사의 본채는 정연한돌축대와 돌계단이라는 인공의 길이다. 그것은 엄격한 체계와 가지런한 질서를 담고 있으며 그 정상에 무량수전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에 이르면 자연의 장대한 경관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치달리는 소백산맥의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것은 곧 극락세계로 들어가는서막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우리는 상처받지 않은 위대한 자연으로돌아온 것이다.
 무량수전에서 한 호흡 가다듬고 조사당, 웅진전으로 오르는 길은 떡갈나무와 산죽이 싱그러운 흙길이다. 자연으로 돌아온 우리를 포근히감싸주는 여운이다. - P205

사과나무의 줄기는 직선으로 뻗고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도록가지치기를 해야 사과가 잘 열린다. 한 줄기에 수십 개씩 달리는 열매의하중을 견디려면 줄기는 굵고 곧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과나무는 운동선수의 팔뚝처럼 굳세고 힘있어 보인다. 곧게 뻗어 오른 사과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대지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역기를 드는 역도 선수의 용틀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사과나무의 힘은 꽃이 필 때도 열매를 맺을 때도 아닌 마른 줄기의 늦가을이 제격이다.
내 사랑하는 사과나무의 생김새는 그 자체로 위대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묵은 줄기는 은회색이고 새 가지는 자색을 띠는 색감은 유연한 느낌을 주지만 형체는 어느 모로 보아도 불균형을 이루면서 전체는 완벽한 힘의 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뿌리에서나온다.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서 더욱더 사과나무를 동경하게되었다.
"세상엔 느티나무 뽑을 장사는 있어도 사과나무 뽑을 장사는 없다." - P209

나의 주관적 견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건축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찰 건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중 뛰어난 절집이라면 당연히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경주 불국사가 꼽힐 만하다고 생각하고있다. 그런데 이 세 절은 건축적 지향점, 특히 자연과의 조화 관계가 아주 다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여맥을 절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선암사는 부드러운 조계산 자락이 사방에서 감지되는 아늑한 산중에 자리 잡았는데, 불국사는 산자락을 타고 올라앉았으면서도 비탈을 평지로 환원하여 반듯하게 경영되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자리앉음새 (location)가 뛰어나고, 선암사는 건물과 건물 간의 공간(space) 운영이 탁월하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technic)와 가람배치(design)의 묘가 압권이다. 그런 저마다의 특징으로 인하여 한국사람은 부석사를, 일본 사람은 선암사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를 더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부석사의 호방스러운 기상을, 일본 사람은 선암사의 유현(幽玄)한 분위기를, 서양 사람은 불국사의 공교로운 인공(人工)의 멋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 P256

불국사는 토함산자락에 자리잡았지만 평지 사찰 개념으로 경영하였다. 불국사는 화엄세계를 추구하는 교종의 사찰이지 선종사찰이 아니었다. 더욱이 불국토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부처님의 궁전이었다. 그래서 불국사 안마당에는회랑은 있지만 산사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밭도, 나무도 없다. 그대신 산비탈을 평지로 환원하기 위한 엄청난 축대를 쌓아야 했다. 그것이 불국사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장 큰 아름다움이 되었다.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 불국사 석축은 누구에게나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일연스님은 석축의 구름다리를 일러 "동부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한마디로 마감했다. 조선 후기의 한 낭만적 문인인 박종(朴琮)이 쓴 「동경(경주)기행」이라는 글에서는 "그 제도가 심히 기이하고 장엄하다"는 말로 감탄을 대신했다.
어쩌다 외국의 미술관에서 오는 손님이 있어 불국사로 안내하면 열이면 열 모두가 석축 앞에서는 "판타스틱!" (fantastic) 아니면 "원더풀!"
(wonderful)을 연발한다. 불국사가 24년이 걸리도록 완공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석축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 P266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네모난 돌에 버들잎 모양으로 홈을 파고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내놓은 용도 미상의 석물이 있다. 환자용 변기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신영훈 선생은 이것이 실내에 설치한 수세식 변기로서 여성용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하였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꾸 보니까 변기가 아니라 혹시 용변 후 물을 담아 밑을 씻던 물받이 석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드 관장과 왔을 때도이것을 골똘히 관찰하고 있는데 그는 또 내게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때나의 짧은 영어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한마디뿐이었다. "8세기의 비데"
(8th century‘s bidet) 그러자 다른 때 같으면 "리얼리?"(really)라고 동의성 반문을 했을 텐데 이 순간에는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못 당하겠네" (You win)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P279

그러나 이 자리에서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작은 일각문너머 있는 뒷간에 다녀오는 일이다. 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서멀리 불국사 강원(講院)을 합법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보이는 강원, 그것은 우리가 늘 보아온 산사의 한 정경인데 불국사가 회랑이 있는 평지 사찰로 경영되는 바람에 여기서 보는 산사의 편안한 분위기가 새삼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그것을 우리는 불국사의 여운으로 삼아도 좋겠다.
우드 관장이 멀리 솔밭 아래 오붓하게 들어앉은 강원을 보면서 "나는세계의 무수한 나라를 방문했는데 자연이 예술과 건축에서 차지하는비중이 이렇게 큰 나라는 처음 보았다"고 신기한 느낌을 말하였다. 그때 나는 "이것은 단지 예고편일 뿐입니다"(It‘s only a preview)라고 대답했다. - P280

불국사 답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결론 삼아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언젠가 나는 답사엔 초급,중급, 고급이 있다고 했는데 불국사는 당연히 초급 코스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급자가 초급 코스를, 중급자가 중급 코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초급자가 오히려 중급 코스를 더가고 싶어 하고, 중급자는 고급 코스에서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고급자가 되어야 비로소 초급 코스의 진가를 알고 거기를 즐겨 찾게 된다. 그런 진보와 순환의 과정이 인생유전의 한 법칙이고 묘미인지도 모른다. 결국 불국사는 답사의 시작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 P281

내포땅을 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다. 이 길을 지나면서 잠을 잔다거나 한밤중에 이 길을 간다는 것은 거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창밖에 스치는 풍광이라고 해봤자 낮은 산과 넓은 들을 지나는 평범한 들판길이다. 그러나 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길은 찻길이 항시언덕을 올라타고 높은 곳으로 나 있기 때문에 넓게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원한 조망을 제공한다.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란 흔히 강을 따라난 길, 구절양장으로 기어오르는 고갯길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면서 평범한 들판길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기다. - P285

들판엔 추수를 기다리는 벼 포기들이 문자 그대로 황금빛을 이루면서 초가을의 따스한 햇볕 속에 해맑은 노랑의 순색을 발하고 있다. 벼포기의 초록빛과 벼 이삭의 누런빛이 어우러져 설익은 논은 연둣빛이되고 농익은 논은 갈색이 되지만 엷은 바람에는 너나없이 단색의 노랑으로 변하며, 그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 속에 먼산의 단풍도 길가의 화사한 꽃들도 모두 묻혀버린다. 나는 언젠가 가을 답사 때 동행했던 나의주례 어른이신 고 리영희 선생이 가을 들판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흘렸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가을날의 단풍이라고 하면 먼 산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화려한 색감을 말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단풍의 주조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나이가들고서야."

이처럼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풍광이 느끼기에 따라선기암절경보다도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충청도 땅, 옛 백제의 아름다움 속에 피치 못하게 개입해있을 풍토적 성격일지도 모른다. - P286

서산마애불의 또 다른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은 저 나무꾼도 감동한환한 미소에 있다. 삼국시대 불상들을 보면 6세기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친 불상들에는 대개 미소가 나타나 있고, 이는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불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6,7세기 불상의 미소는 당시 동북아시아 불상의 보편적 유행 형식이었다. 이 시대 불상의 미소란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한 상징으로 7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이 미소가 사라지고대신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된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6,7세기 동북아시아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은 사실성보다 상징성을 겨냥하여 입체감보다 평면감, 양감보다 정면관(正面觀)에 치중했다는 데 있다. 불상을 사방에서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 서서 시점의 이동 없이 본다는 전제하에 제작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옷주름과 몸매를 표현한 선은 날카롭고 엄격하며 직선이 많다. 그로 인하여 불상은인체를 기본으로 했지만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의 모습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서산 마애불을 비롯하여 백제의 불상들을 보면 오히려 인간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점에 착목하여 삼불(三佛) 김원용(金元龍) 선생은 서산 마애불이 발견된 이듬해에 한국 고미술의미학」(『세대』 1960년 5월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 P291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군수리 출토 여래좌상은 인자한 아버지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도 듣고 앉은 것 같은 인간미 흐르는 얼굴과 자세를 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의 안락하고 현세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중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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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급수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 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 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 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 간의 공통점과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 P141

확인해가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경지에 다다른 답사객은 언뜻 보기에 답사에의 열정과 성심이 식은 듯 돌아다니기보다는 눌러앉기를 좋아하고 많이 보기보다는 오래 보기를 원한다. 지나가는 동네 분과 시답지 않은 객담을 늘어놓고 가겟방을 기웃거리다가 대열에서 곧잘 이탈하곤 한다. 허나 그것은 불성실이나 나태함의 작태가 아니라 그 고장 사람들의 사는 냄새를맛보기 위한 고급자의 상용수단인 것을 초급자들은 잘 모른다. 고급자는 문화유산의 개별적·상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그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단계인 것이다. 하기야 사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수준이 개별적·상대적·총체적 차원으로 발전해가는 일이 어디 답사뿐이겠는가. - P142

답사 코스를 보면 그 자체에도 급수가 있다. 같은 절집이라도 경주 불국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정도라면 당연히 초급반 과정이 될 것이고 남원실상사, 안동 봉정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영천 은해사 등이라면 중급 과정이라 할 만하다.
초급과 중급의 차이는 대중적 지명도와 인기도, 사찰의 규모, 문화재보유현황, 교통과 숙박시설의 편의 등을 고려하여 분류될 수 있겠는데,
그러면 고급 과정은 어떤 곳일까? 그것은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다. 심심산골에 파묻혀 비포장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리다가 차에서 내려 다시 심릿길, 오릿길을 걸어서야 당도하는 폐사지. 황량한 절터에는집채란 오간 데 없고 절집 마당에 비스듬히 박힌 주춧돌들이 쑥대 속에곤히 잠들어 있다. 덩그러니 석탑 하나가 서 있어 그 옛날의 연륜을 말해주는 폐사지의 고즈넉한 정취는 답사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 산청의 단속사,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 - P142

터, 경주 암곡의 무장사터,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 강릉사굴산의 굴산사터.....…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선림원터다. 지금 우리는 거기를 찾아가고 있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의 속칭 탑골. 양양 낙산사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쯤 올라가다가 속초비행장(현 속초공항으로 꺾어 들어가는 강현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설악산을 바라보고 계곡을 따라, 계곡을 건너 20리(약8킬로미터)길을 오르면 둔전리 마을이 나온다. 진전사(陳田寺)가 있었다고 해서 진전리였던 것이 음이 변해 둔전리 (屯田里)가 되었다. - P143

마을에서 10분쯤 더 산길을 오르면 산둥성을 널찍하게 깎아 만든 제법 평평한 밭이 보이는데, 그 밭 한가운데 까무잡잡하고 아담하게 생긴삼층석탑이 결코 외롭지 않게 오뚝하니 솟아 있다. 산길은 설악산 어드메로 길길이 뻗어올라 석탑이 기대고 있는 등의 두께는 헤아릴 길 없이두껍고 든든하다. 석탑 앞에 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계곡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산자락 아랫도리가 끝나는 자리에서는 맑고 맑은 동해바다가 위로 치솟아 저 높은 곳에서 수평선을 그으며 밝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모든 수평선은 보는 사람보다 위쪽에 위치하며 빛을 반사한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까만 석탑은 거기에 세워진 지 천년이넘도록 그 동해 바다를 비껴 보고 있는 것이다. - P143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차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는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 P146

남아 있는 자료를 종합해보면 선림원은 애장왕 5년(804) 순응(順應)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순응은 당나라 유학 출신으로 가야산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애장왕왕비의등창을 고쳐주어 왕의하사금으로해인사를 세운 스님이다. 해인사를 802년에 세운 순응이 2년 후에 선림원을 세우고 다시 수도처로 삼았다.

그때 세운 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이 동국대 발굴팀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그 구조와 생김새는 진전사탑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선림원탑이 훨씬 힘찬 기상을 보여준다. 순응은 선림원을 세울 때 범종 하나를 주조하였다. 그 종은 선림원이 무너질 때 땅에 묻혀버렸는데 1948년 10월, 해 - P159

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 발굴되었다. 정원(貞元) 20년(804) 순법사가 절을 지으면서 만들었다는 조성 내력과 절대연대가 새겨져 있는 이좋은 상원사 범종·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었다.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대산은 치열한 전투지로 변하였고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월정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이 불리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이르자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렸다(현재 선림원 범종의잔편들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윈 도면을 참고해 만든 복원품이 전시되어있다). - P160

나는 이것이 적군도 아닌 아군의 손에 불탔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배신감 같은 것이 일어났다. 국군이 월정사 위쪽 상원사까지 불을 지르러올라갔을 때 방한암 스님은 법당 안에 들어앉아 불을 지르려면 나까지태우라 호령했고 이 호령에 눌려 군인들은 형식적으로 문짝만 뜯어 절마당에서 불태우고 내려갔다. 이렇게 상원사 범종(국보 제36호)과 세조가발원한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고리영희(李泳禧) 선생은 자서전인 『역정』(창비 1988)에서 국군이 설악산 신흥사 경판을 소각한 것을 말하면서 군인들은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 P160

할 것인가. 차라리 발견되지 않고 땅속에 묻혀 있었더라면 이 시대에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을까.
순응법사 이후 선림원에 주석한 스님은 홍각(弘覺)선사였다. 홍각선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사문(鳳林寺門)으로 말년에 선림원에 머물다886년에 입적한 스님이었다. 홍각선사의 사리탑과 탑비는 당대의 명작이었다. 특히 탑비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들어 금석학의 귀중한 유물로 되었고 돌거북 받침과 용머리 지붕돌은 하대 신라의 문화 능력을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잘생긴 석등과 조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리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무너져버린 것만도 안타까운데 그 폐허의 잔편들마저 또 상처를 받았다. 홍각선사의 사리탑은 어찌된 일인지 기단만 남고 팔각당은 오간 데 없으며, 탑비의 돌거북 받침대와 용머리 지붕돌은 완연하건 - P162

만 비는 박살이 나서 150여 자 잔편만 수습되었다. 석등은 지붕돌 귀꽃이 반은 깨져버린 상처를 입었고 조사당터엔 주춧돌만이 그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하늘 아래 끝동네 선림원터의 상처와 망실은 그 뒤에도 일어났다.
1965년 3월, 양양교육청에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오늘날의 문화재청)이 소속되어 있던 문교부(오늘날의 문화체육관광부)에 급한 전갈을 보냈다. 지금설악산 신흥사에 있다는 스님 두 명이 인부를 데리고 와서 선림원터 유물들을 모두 옮기고 있고, 진전사탑도 반출 작업 중이라는 것이었다. 문교부는 정영호 교수를 급파하였다. 그가 실상을 낱낱이 보고하자 문교부는 모든 유물을 원위치에 복귀시키고 이 유물들을 일괄하여 급히 보물로 지정, 보존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것을 반출하려던 무리가 스님이었단 말인가? - P163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으리라.

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소." 어린아이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와 애비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 교수가 사경을 헤매느라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들을 수 있었던 분은 부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수 있었다. - P165

영남대 교수 시절 이야기다. 미술대학 스케치 여행이 제주도로 결정되자 학회장 맡은 학생이 코스를 짜기 위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샘, 제주도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곳은 어디예요?"

이런 게 경상도식 질문이다. 그것은 누구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경우 답을 구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미술평론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조언하기를, 전시장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갈 때 그냥 가지 말고지금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딱 한 점만 골라본다면 전시회도 다시 보이고 그림 보는 눈도 좋아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 - P167

런데 한 점만 고르기가 무척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바꾸었다. "지금 본 그림 중에서 아무거나 한 점 가져가라고 하면 어떤 것을 가질까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가장 좋은 그림입니다." 그러자 아주쉽다고들 했다. 그러면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제주도의 한 곳을 떼어가라면 어디를 가질 것인가?
그것은 무조건 영실(靈室)이다.

"영실! 한라산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야."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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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행복 및 권리에 대한 헌의 이상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무의 핵심이 동물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는 데 있다는 생각과도 거리가 멀다. 반려동물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그보다 훨씬 엄격하며, 지속적인 학대와 무관심처럼 다루기 벅찬 문제들도 의무의 영역에 속한다. 환경여성주의자인 크리스 쿠오모ChrisCuono가 설명하는 번영의 윤리는 헌과 비슷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훈련이라는 관계적 실천의 세계로 무언가 중요한 것, 모든 - P182

참여자를 개조하는 것이 들어온다. 헌은 언어에 대한 언어를 사랑했고, 메타플라즘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 P183

내 선생님처럼 훌륭한 어질리티 스승은 자기 학생이 개를 내버려둔 곳이 정확히 어디이며, 정확히 어떤 몸짓 · 행동 · 태도가 신뢰를 망치는지 알려줄 수 있다. 모두 말 그대로다. 처음에는 변화가 사소해 보인다.
타이밍은 너무 까다롭고 어렵다. 일관성은 너무 엄격하고, 선생님이 바라는 게 너무 많은 듯 보인다. 그러다가 개와 인간은 함께 행동하는 법과 티 없는 기쁨과 솜씨로 어려운 코스를 통과하는 법, 소통하는 법, 솔직하게 대하는 방법을 찰나에 불과한 순간일지라도 깨닫게 된다. 훈육된 자발성이라는 모순 어법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개와 조련사 모두가 활동을 주도하는 법과상대를 따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일관성 없는 세계에서 일관성을 충분히 지님으로써 육신 속에, 경주 속에, 코스 위에, 존중과응답을 빚어내는 공동 존재의 춤에 참여하는 것이 과제다. 그리고 모든 척도에서, 모든 파트너와 함께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기억하는 것. - P193

가축 파수견은 사냥감이나 물건을 물어오는 솜씨가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 이들의 생물사회적 성향과 양육은 높은 수준의 복종 경연대회에서 틀어주는 사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게 하는 공모자 중 하나다. 하지만 이들이 복잡한 역사 생태학 속에서 독립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인상적이다. 암양의출산을 돕고 갓 태어난 새끼 양을 핥아 씻기는 가축 파수견 이야기는 그들 자신이 지켜야 할 양들과 결속하는 능력을 한 편의드라마로 만든다. 그레이트 피레니즈 같은 가축 파수견은 양들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낮을 보내고, 밤에는 순찰을 돌며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지켜볼 것이다. - P199

였을까?
이 개들 중 일부는 준비가 덜 된 그레이트 피레니즈였다.
내무부는 목축업자들의 의사에 반하여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늑대를 투입했다. 가축 파수견을 다루는 아이다호 농무부 사람들과의 협력도 없었고 내 추측으로는 중년 후반의 백인 여성이자,
품종 기준에 맞는 멋진 개들을 보여줄 박식한 피레니즈 브리더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무부와농무부는 기술과학 문화에서는 서로 동떨어진 세계다. 늑대들은 공원 경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늑대, 가축, 개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 아마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야생 관련 업무를담당하는 공무원들이 길 잃은 늑대를 125마리 이상 죽였고 목축업자들이 최소 수십 마리 이상을 불법적으로 쏘아 죽였다. 야생보호론자, 관광객, 목축업자, 관료, 공동체들이 분열되었다.
아마 이것도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곳에서, 처음부터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반려종의 관계가 더 잘 구성될 필요가있었다. - P212

개들은 사회성 동물이라 영토를 방어하는 습성이 있다. 늑대 역시 사회성 동물이며 영토를 방어한다. 안정적이고 규모가충분히 큰 집단에서 경험을 많이 쌓은 가축 파수견이었다면 북 ㅁ부회색늑대의 가축 사냥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늑대가 자리를 잡은 뒤에야 피레니즈를 들여오거나 경험이 전 - P212

혀 없는 개들을 너무 적은 수로 들여오는 것은, 두 갯과 종 모두와 야생을 목축 윤리와 함께 엮는 상황에서는 기필코 재앙을 불러오고야 말 조합에 해당한다. 야생의 수호자들 Defenders of Wildlife이라는 단체는 늑대에게 가축을 내주고 있는 목축업자들을 위해 피레니즈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늑대들은 개를 늑대 자신이소유한 부동산에 침입해온 경쟁자로 보고 적극적으로 추적해죽이는 것처럼 보였다. 늑대들이 개들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을만한 실천 양식은 없었다. 늑대가 번성하는 와중에 목축업자와보호론자가 동맹을 맺고 있을지도 모르는 형편이라면 가축 파수견이 효과적인 행위자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늦은 감이 있다.
또 어쩌면 늑대는 피레니즈가 밤에 집 안에서 보호를 받는 동안코요테를 다스릴지도 모른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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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 카옌 페퍼Ms. Cayenne Pepper가 내 세포를 몽땅 식민화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말하는 공생발생symbiogenesis의 분명한 사례다. DNA 검사를 해보면 우리 둘 사이에 감염이 이루어졌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카옌의 침에는 당연히 바이러스 벡터가 있었을 것이다.
카옌이 거침없이 들이미는 혓바닥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우리가 함께 속하는 자리는 척추동물이라는 문門, phylum에머물 뿐 다른 속屬, genera 및 분화된 과자/가족 families, 심지어 아예다른 목目/질서 orders 속에서 살아가지만 말이다.
우리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갯과/사람과, 애완동물/교수, 암캐/여성, 동물/인간, 선수/훈련사. 우리 둘 중 하나는 목덜미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했고, 다른 하나는 증명사진이 박힌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지녔다. 우리 중 하나는 20대를 거 - P115

슬러 올라가는 혈통서가 있고 다른 하나는 증조부모의 이름조차 모른다. 우리 중 하나는 유전자가 폭넓게 혼합된 결과물인데
"순종"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그 못지않은 잡종인데도 "백인"
이라 부른다. 이런 각각의 이름은 인종 담론을 표시하며 우리둘 모두는 우리의 육신으로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우리 중 하나는 젊음과 생기가 타오르는 정점에 있고 다른하나는 열정적이지만 변곡점을 넘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카옌의 조상이 메리노 양을 치던 곳, 선주민족에게서 몰수한 땅에서어질리티(민첩성) agility"라는 이름의 팀 경기를 즐긴다. 식민화가 완료된 상태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목축 경제의 구성원으로살던 메리노 양들은, 19세기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California GoldRush 49ers 붐을 타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수입되었다. 역사의 층위, 생물학의 층위, 자연문화 natureculture의 층위에서 우리가 즐기는 게임의 이름은 복잡성이다. 자유에 목마른 우리, 정복의 후예이자 백인 정착민 식민지의 산물인 우리 둘은, 운동장에서 장애물을 뛰어넘고 터널을 기어 통과한다.
우리의 유전체는 이론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 P116

더 닮았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 중 하나는 나이가 많아서, 다른하나는 수술을 받아서 생식하지 않는 여성/암컷fcmale이지만, 우리 둘의 접촉은 분자로 기록된 생명의 암호가 되어 이 세계에자취를 남길 것이다. 카옌은 붉고 얼룩덜룩한 오스트레일리아셰퍼드의 축축한 혓바닥으로 내 혀의 조직은 물론 그 속에 있는열망하는 면역계 수용체를 날름날름 핥았다. 누가 알겠는가? 나를 남과 구분하며 신체 내부와 외부를 묶는 화학 수용체chemicalreceptor가 카옌의 유전 메시지를 내게 옮겼거나, 카옌이 나의세포계에서 무언가를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금지된 대화를 나눠왔다. 우리는 입으로 정을 통해왔다. 우리는 사실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로 묶여 있다. 우리는 불통에 가까운 대화로 서로를 훈련하는 중이다. 우리는 구성적으로 본바탕이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다. 우리는 서로를 살fesh 속에 만들어 넣는다. 서로 너무 다르면서도 그렇기에 소중한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저분한 발달성 감염을 살로 표현한다. 이 사랑은 역사적 일탈이자 자연문화의 유산이다. - P117

<반려종 선언>은 개인적인 기록이고, 반밖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영토를 급습하는 학문적 시도이며, 전 지구적 전쟁이임박한 세계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정치적 행위이자, 원칙적으로 끝없이 계속되는 작업이다. 나는 개가 잘근잘근 씹어놓은 근거와 훈련되다 만 논의를 내놓아서, 내가 속한 시공간에서 학자및 개인으로 아주 관심이 많은 이야기를 다시 써보려 한다. 이글은 대부분 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문제인 만큼, 이 이야기가 독자들을 삶을 위한 개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심지어 개를 싫어하거나 고결하고 숭고한 문제에 몰두하느라 바쁜 사람이라도, 우리가 살게될지도 모를 세계에서 중요한 주장이나 이야기를 이 글에서 찾아낼 수 있길 바란다. 개 세계의 실천 양식과 행위자들은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기술과학 연구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나는 독자들이 개에 대 - P118

한 글쓰기가 왜 페미니즘 이론의 한 갈래가 되며 또 그 반대 방향의 경우도 마찬가지인지 알게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내가 처음 쓴 선언문은 아니다. 1985년에 발표한<사이보그 선언>에서 나는 기술과학 속 현대의 삶이 내파implo-sions" 하는 현상을 페미니즘을 통해 이해하려 했다. "인공두뇌유기체인 사이보그는 정책 및 연구 프로젝트에 침투해 있던 기술 인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상상, 우주 개발 경쟁, 냉전으로 점철된 1960년에 생긴 이름이다. 나는 축복도 저주도 하지 않는대신 우주 전사는 꿈도 꾸지 못할 목표를 아이러니하게 전유하려는 정신, 곧 비판적 정신을 통해 사이보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동거와 공진화 coevolution 그리고 종의 경계를 넘어 구현된 사회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금의 선언문은 적당히꿰맞춘 두 형상 사이보그와 반려종-중 어느 쪽이 현대의 생활 세계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정치와 존재론에 더 생산적으로 관여하는지 묻는다. 사이보그와 반려종 각각의 형상은 서로정반대라고 할 수 없다. 둘 다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적인 것과 - P119

기술적인 것, 탄소와 실리콘, 자유와 구조, 역사와 신화, 부자와빈자, 국가와 주체, 다양성과 고갈, 근대와 근대 이후, 자연과 문화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함께 묶어준다. 게다가 사이보그나반려동물은 종의 경계를 더 잘 관리하면서 범주 이탈자의 번식을 막는, 순수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슬리기 짝이 없을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이보그와 평범한 개의 차이는 중요하다.
나는 1980년대 중반 레이건의 스타워즈 시대에 페미니즘작업을 하기 위해 사이보그를 전유했다. 지난 천년이 끝날 무렵, 사이보그는 비판적 탐사에 필요한 실마리를 엮어내는 일을 웬만한 양치기 개보다 잘해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살 만한 자연문화의 느린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물 없이 불가능한 지구 살림을 탄소에 기반을 둔 예산으로 통치하겠다고 두 번째 부시 정권이 위협하는 지금, 과학학 및 페미니즘의 이론적 도구를 제작하는 일을 거들 마음으로, 기분 좋게개에게 다가가서 개집의 탄생을 탐사할 생각이다. "지구에서 살아남으려면 사이보그가 되자 Cyburgs for earthly survival!" 라는 주홍글씨를 충분히 오래 달고 살아왔으니, 이제는 개 스포츠를 즐기는슈츠훈트 Schutzhund 여성이 아니면 절대 떠올릴 수 없는 구호를 - P120

내 로고로 만들 생각이다. "빨리 뛰어! 꽉 물어!"
이 이야기는 기술과학 못지않게 생명권력biopower 및 생명 사회성 biosociality과 결부된다. 훌륭한 다윈주의자가 으레 그렇듯, 나도 진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핵) 천년왕국주의 (nucleic) acidic -millennialism의 양태로 분자적 차이를 논하는 나의 이야기는, 신식민주의적 "아프리카 탈출을 감행한 미토콘드리아 이브 Mitochon-drial Eve의 설화보다 (남성) 인간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스스로를 다시 창조하려는 찰나에 난입한 최초의 미토콘드리아 암캐 설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암캐들은 반려종의 역사를, 그러니까 오해 · 성취 ·범죄 그리고 재생 가능한 희망이 한가득 들어 있는, 아주 세속적이며 끝없이 계속되는 이야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내 이야기는 말 그대로 개에게 홀딱 빠진과학자 겸 페미니스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여기서 개들은 예사적 복잡성을 통해 중요해진다. 개들은 무슨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아니다. 개들은 기술과학 속에 물리-기호적 육체로 현 - P121

전한다. 개들은 이론의 대리물도 아니고 사유의 대상이 되려고있는 것도 아니다. 개들은 함께 살기 위해 있다. 인간 진화의 공범자인 개들은 태초부터 에덴에 있었고 코요테만큼 영악하다. - P122

내가 화이트헤드를 사랑하게 된 건 생물학을 통해서였지만내가 경험한 페미니즘 이론의 실천에서는 그의 철학이 훨씬 중요했다. 이 페미니즘 이론은 유형학적 사고, 이항적 이원론, 다양한 취향의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모두를 거부하며 창발, 과정,
역사성, 차이, 구체성, 동거, 공共구성co-constitution 및 우연을 다루는 방법들을 풍부하게 제공한다. 상당수의 페미니스트 저자들이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모두를 거부해왔다. 주체, 객체, 종류,
인종, 종, 장르, 젠더 모두는 관계의 산물이다. 이 글은 다정하고선한 "여성적인"-세계를 찾지도 않고 권력의 생산성과 유린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페미니즘의 탐구는 오히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누가 행위를 하고 있으며 무엇이 가능할지, 어떻게세속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책임감 있게 대하면서 덜 폭력적인방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이해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 P124

스트래선은 "부분적 연결", 즉 참여자들이 전체도아니고 부분도아닌 패턴을 이룬다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소중한타자성의 관계라고 부른다. 내가 볼 때 스트래선은 자연문화의민족지학자로서, 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개집에 초대해도 불편해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직감이 든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세계에 있는 것이 누구이며 그것이무엇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두 층위의 시간, 즉 화학적으로 세포마다 DNA 속에 새겨진 심층의 시간, 그리고 좀 더냄새나는 흔적을 남기는 최근의 행위들로 이루어진 시간 속에서 반려종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데 아주 효과적으로 보이는 일종의 철학적 미끼다. 구식 용어로 표현하면 <반려종 선언>은 무수한 실제 사건들이 이룬 포착의 합생에 의해 가능해진, 친족관계에 대한 주장이다. 반려종은 우연적 기초 위에 놓여 있다. - P126

나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대리모 계약서를 하나 쓰려고 했다.
사이보그는 불가피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핵이후 세계 속에서, 영구적인 전쟁 장치 apparatus와 그로부터 생긴 초월적이고 현실적인 거짓말들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의 기술과학 기법과 실천 양식을 존중하고 그 내부에서 살아갈 수 있게해주는 비유 내지 형상이었다. 사이보그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평범한 활동이 이루는 자연문화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기가자기 자신을 낳는다는 험악한 신화에 반대한다. 또한 존재의 필멸성을 삶의 조건으로 포용하면서, 그 모든 우연적 규모에서 세계를 실제로 채우고 있는 창발적이고 역사적인 잡종체들의 존재에 민감하다.
하지만 사이보그적 재형상화는 기술과학의 존재론적 안무에 필요한 수사학적 작업을 전부 해낸다고 보기는 힘들다. 나는 - P128

사이보그를 더 크고 이반적인queer 반려종 가족에 속한 동생으로여기게 되었다. 이 가족에게 재생산 생명공학정치는 의외의 일로, 심지어 좋은 사건이 되기도 한다. 개와 어질리티 경주를 즐기는 미국의 백인 중년 여성 한 명은 철학 연감이나 자연문화민족지의 항목을 뽑는 경쟁에서 전자동화된 전사나 테러리스트및 그들의 형질변환 친족transgenic kin과 맞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 밖에도 (1) 자기 형상화는 내가 할일이 아니고, (2) 형질변환체는 적이 아닐뿐더러, (3) 길들인 갯과 동물을 털북숭이 아이로 만드는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서구세계의 투사와는 반대로, 개는 인간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 개의 매력이 있다. 개들은 투사 대상도,
의도를 구현한 물체도, 다른 무언가의 텔로스도 아니다. 개는개다. 즉, 인간과 의무적이고 구성적이며 역사적이고 변화무쌍한 관계를 맺는 종이다. 이 관계는 다른 관계들보다 특별히 나을 것은 없다. 기쁨·발명·노동·지성·놀이로 가득한 만큼, 낭비·잔인함·무관심·무지함 · 상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동-역사의 이야기를 잘 들려줄 방법과 자연문화적 공진화의 결과를 물려받을 방법을 배웠으면 한다. - P129

"반려종"은 반려동물보다 크고 이질적인 범주다. 인간의 삶을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반대로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 한, 쌀이나 꿀벌, 튤립 및 장내세균총같은 유기체적 존재자들을 다 포함하는 범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 나는 반려종의 키워드를 적어서, 이 용어를 발음할 수 있게해주는 언어적·역사적 발성 기관에서 동시에 공명하는 네 개의음조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다윈의 딸로 도리를 다하기 위해나는 진화생물학의 역사와 그 범주인 개체군, 유전자 흐름의 속도, 변이, 선택, 생물학적 종에서 비롯된 음조를 강조한다. "종"
이라는 범주가 생물학적 실체를 뜻하는지 아니면 편의상 만든분류학적 상자를 나타낼 뿐인지를 둘러싼 지난 150년간의 논쟁이 음조의 상음과 저음을 이룬다.  - P133

그래서 나는 <반려종 선언〉에서 소중한 타자의 관계 맺음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보고 싶다. 짝을 이루는 이들은 이 관계를 통해 육체와 기호 모두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다. 뒤에 나오는 진화, 사랑, 훈련, 종류 및 품종과 관련된 이야기는 인간이 이 행성에 자신과 함께 출현한 무수히 많은 종과 더불어 - P146

시간, 신체, 공간의 그 모든 척도 속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 내가 제시하는 설명은체계적인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다. 그 대신 색다르고 시사적이며 신중하기보다는 과격하고, 명석판명한 가정보다는 우연한근거를 따른다. 여기서 개는 반려종이 이루는 거대한 세계에서는 하나의 행위자에 불과하다. 이 선언이나 자연문화의 삶에서는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 대신나는, 마릴린 스트래선이 말한 "부분적 연결"을 찾고 있다. 이와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영원한합일 communion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번역이 필요하다. - P147

은유적으로라도 개를 털투성이 아이로 간주하게 되면 개와아이 모두 품위가 떨어지며, 아이들은 물리고 개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2001년에 와이저는 개 열한 마리와 고양이 다섯 마리를 데리고 살았다. 그녀는 성인이 된 이래 늘 개들을 소유하고 번식시키면서 대회에도 출전시켜왔다. 이와 함께 인간 아이를 셋 길렀으며 시민으로서 정치적인 삶의 전부를 좌파적 경향의 페미니스트로 살아왔다. 와이저의말에 따르면 자신의 아이들, 친구들, 동지들과 인간 언어로 나누는 대화는 대체할 수 없다. "(내 생각에) 개들이 나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들과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눠본 적은 없다. 반면내 아이들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진정한 "동물"의 느낌은 없으므로 나와 그토록 다른 종의 "존재",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감격스러운 현실을 단 한 순간도 만지게 해줄 수가 없다." (그레이트 피레니즈 토론 리스트, 2001년 11월 14일)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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