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의 급수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 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 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 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 간의 공통점과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 P141
확인해가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경지에 다다른 답사객은 언뜻 보기에 답사에의 열정과 성심이 식은 듯 돌아다니기보다는 눌러앉기를 좋아하고 많이 보기보다는 오래 보기를 원한다. 지나가는 동네 분과 시답지 않은 객담을 늘어놓고 가겟방을 기웃거리다가 대열에서 곧잘 이탈하곤 한다. 허나 그것은 불성실이나 나태함의 작태가 아니라 그 고장 사람들의 사는 냄새를맛보기 위한 고급자의 상용수단인 것을 초급자들은 잘 모른다. 고급자는 문화유산의 개별적·상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그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단계인 것이다. 하기야 사물에 대한 인간 인식의 수준이 개별적·상대적·총체적 차원으로 발전해가는 일이 어디 답사뿐이겠는가. - P142
답사 코스를 보면 그 자체에도 급수가 있다. 같은 절집이라도 경주 불국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정도라면 당연히 초급반 과정이 될 것이고 남원실상사, 안동 봉정사, 강진 무위사 부안 내소사, 영천 은해사 등이라면 중급 과정이라 할 만하다. 초급과 중급의 차이는 대중적 지명도와 인기도, 사찰의 규모, 문화재보유현황, 교통과 숙박시설의 편의 등을 고려하여 분류될 수 있겠는데, 그러면 고급 과정은 어떤 곳일까? 그것은 절도 중도 없는 폐사지다. 심심산골에 파묻혀 비포장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리다가 차에서 내려 다시 심릿길, 오릿길을 걸어서야 당도하는 폐사지. 황량한 절터에는집채란 오간 데 없고 절집 마당에 비스듬히 박힌 주춧돌들이 쑥대 속에곤히 잠들어 있다. 덩그러니 석탑 하나가 서 있어 그 옛날의 연륜을 말해주는 폐사지의 고즈넉한 정취는 답사객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 산청의 단속사,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 - P142
터, 경주 암곡의 무장사터,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 강릉사굴산의 굴산사터.....…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선림원터다. 지금 우리는 거기를 찾아가고 있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의 속칭 탑골. 양양 낙산사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쯤 올라가다가 속초비행장(현 속초공항으로 꺾어 들어가는 강현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설악산을 바라보고 계곡을 따라, 계곡을 건너 20리(약8킬로미터)길을 오르면 둔전리 마을이 나온다. 진전사(陳田寺)가 있었다고 해서 진전리였던 것이 음이 변해 둔전리 (屯田里)가 되었다. - P143
마을에서 10분쯤 더 산길을 오르면 산둥성을 널찍하게 깎아 만든 제법 평평한 밭이 보이는데, 그 밭 한가운데 까무잡잡하고 아담하게 생긴삼층석탑이 결코 외롭지 않게 오뚝하니 솟아 있다. 산길은 설악산 어드메로 길길이 뻗어올라 석탑이 기대고 있는 등의 두께는 헤아릴 길 없이두껍고 든든하다. 석탑 앞에 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계곡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 산자락 아랫도리가 끝나는 자리에서는 맑고 맑은 동해바다가 위로 치솟아 저 높은 곳에서 수평선을 그으며 밝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모든 수평선은 보는 사람보다 위쪽에 위치하며 빛을 반사한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까만 석탑은 거기에 세워진 지 천년이넘도록 그 동해 바다를 비껴 보고 있는 것이다. - P143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차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는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 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 P146
남아 있는 자료를 종합해보면 선림원은 애장왕 5년(804) 순응(順應)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순응은 당나라 유학 출신으로 가야산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애장왕왕비의등창을 고쳐주어 왕의하사금으로해인사를 세운 스님이다. 해인사를 802년에 세운 순응이 2년 후에 선림원을 세우고 다시 수도처로 삼았다.
그때 세운 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이 동국대 발굴팀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그 구조와 생김새는 진전사탑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선림원탑이 훨씬 힘찬 기상을 보여준다. 순응은 선림원을 세울 때 범종 하나를 주조하였다. 그 종은 선림원이 무너질 때 땅에 묻혀버렸는데 1948년 10월, 해 - P159
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 발굴되었다. 정원(貞元) 20년(804) 순법사가 절을 지으면서 만들었다는 조성 내력과 절대연대가 새겨져 있는 이좋은 상원사 범종·에밀레종과 함께 통일신라 범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유물이었다.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다. 오대산은 치열한 전투지로 변하였고 인민군에 밀리던 국군이 월정사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이 불리하여 낙동강까지 후퇴하기에이르자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렸다(현재 선림원 범종의잔편들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윈 도면을 참고해 만든 복원품이 전시되어있다). - P160
나는 이것이 적군도 아닌 아군의 손에 불탔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배신감 같은 것이 일어났다. 국군이 월정사 위쪽 상원사까지 불을 지르러올라갔을 때 방한암 스님은 법당 안에 들어앉아 불을 지르려면 나까지태우라 호령했고 이 호령에 눌려 군인들은 형식적으로 문짝만 뜯어 절마당에서 불태우고 내려갔다. 이렇게 상원사 범종(국보 제36호)과 세조가발원한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고리영희(李泳禧) 선생은 자서전인 『역정』(창비 1988)에서 국군이 설악산 신흥사 경판을 소각한 것을 말하면서 군인들은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고 한탄했다. 이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 P160
할 것인가. 차라리 발견되지 않고 땅속에 묻혀 있었더라면 이 시대에 얼마나 큰 대접을 받았을까. 순응법사 이후 선림원에 주석한 스님은 홍각(弘覺)선사였다. 홍각선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사문(鳳林寺門)으로 말년에 선림원에 머물다886년에 입적한 스님이었다. 홍각선사의 사리탑과 탑비는 당대의 명작이었다. 특히 탑비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들어 금석학의 귀중한 유물로 되었고 돌거북 받침과 용머리 지붕돌은 하대 신라의 문화 능력을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잘생긴 석등과 조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리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무너져버린 것만도 안타까운데 그 폐허의 잔편들마저 또 상처를 받았다. 홍각선사의 사리탑은 어찌된 일인지 기단만 남고 팔각당은 오간 데 없으며, 탑비의 돌거북 받침대와 용머리 지붕돌은 완연하건 - P162
만 비는 박살이 나서 150여 자 잔편만 수습되었다. 석등은 지붕돌 귀꽃이 반은 깨져버린 상처를 입었고 조사당터엔 주춧돌만이 그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하늘 아래 끝동네 선림원터의 상처와 망실은 그 뒤에도 일어났다. 1965년 3월, 양양교육청에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오늘날의 문화재청)이 소속되어 있던 문교부(오늘날의 문화체육관광부)에 급한 전갈을 보냈다. 지금설악산 신흥사에 있다는 스님 두 명이 인부를 데리고 와서 선림원터 유물들을 모두 옮기고 있고, 진전사탑도 반출 작업 중이라는 것이었다. 문교부는 정영호 교수를 급파하였다. 그가 실상을 낱낱이 보고하자 문교부는 모든 유물을 원위치에 복귀시키고 이 유물들을 일괄하여 급히 보물로 지정, 보존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이것을 반출하려던 무리가 스님이었단 말인가? - P163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않으리라.
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소." 어린아이의 웅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와 애비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 교수가 사경을 헤매느라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들을 수 있었던 분은 부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수 있었다. - P165
영남대 교수 시절 이야기다. 미술대학 스케치 여행이 제주도로 결정되자 학회장 맡은 학생이 코스를 짜기 위해 나를 찾아와 물었다.
"샘, 제주도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곳은 어디예요?"
이런 게 경상도식 질문이다. 그것은 누구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런 경우 답을 구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미술평론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조언하기를, 전시장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갈 때 그냥 가지 말고지금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좋은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딱 한 점만 골라본다면 전시회도 다시 보이고 그림 보는 눈도 좋아진다고 말하곤 했다. 그 - P167
런데 한 점만 고르기가 무척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나는 말을 바꾸었다. "지금 본 그림 중에서 아무거나 한 점 가져가라고 하면 어떤 것을 가질까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가장 좋은 그림입니다." 그러자 아주쉽다고들 했다. 그러면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제주도의 한 곳을 떼어가라면 어디를 가질 것인가? 그것은 무조건 영실(靈室)이다.
"영실! 한라산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야."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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