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의 제목은 "닥터 프랭클린: 시민 과학자"다. ‘닥터‘라는 직함이 가짜임을 알기에 빙긋 웃음이 나오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 대신 ‘시민 과학자" 부분에 집중한다. 매우 흥미로운 조합이다. 우리는 보통 이 둘을 나란히 놓지 않는다. 시민군 가능하다. 시민 케인? 있고말고. 하지만 시민 과학자? 겨우 1998년에 생겨난 이 용어는 크라우드소싱 연구를 의미한다.
시민 과학자의 다른 말은 ‘무임금 노동‘이다.
시민 과학자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다. 환경단체 어스워치Earthbranch‘와 함께 브라질 열대우림으로 원정을 떠났을 때였다. 여섯 명의 시민 과학자와 나는 기후변화를 막는 데 일조하고 싶은바람으로 브라질의 진짜 과학자들을 도와 열대우림에 나무를 심고 설치류의 건강 상태를 추적했다. 힘들고 궂은 일이었다. 설치류의 미끼를 탁구공 크기로 빚었는데, 바나나와 땅콩버터, 산패 - P192

한 고기를 질퍽하게 섞어 만든 이 미끼는 촉감과 냄새가 정확히여러분이 상상하는 그것과 똑같았다. 씨앗을 채집하고, 심고, 옮겨 심고, 물을 주고, 그밖에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는 뜻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씨앗과 함께했다. 평생 한 것보다 샤워를 더 많이 했는데도 평생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비정상적인 크기의 설치류를 비롯해 수많은 포유류의 무게를 달고 크기를 재고 사진을 찍었다. 포획 틀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겉은 딱딱하고 속은 끈적한 도마뱀 똥을 치웠다. - P193

그때 나는 내 몸으로 일했다. 그냥 일이 아니라 손톱 밑에 때가피고, 열대의 햇볕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모기가 코를 무는 그런고달픈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하고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미친소리로 들리겠지만) 돈을 내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정말로 정신 나간 부분인데) 이 일이 즐거웠다. 지극히 보잘것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내가 이 세상을 더나은 곳으로 살짝 더 푸릇푸릇하고 시원하고 건강한 곳으로 만들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벤이라면 분명 나의 짧고 굵은 시민 과학자 생활을 칭찬했을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벤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길고 쓸모 있는 삶의 상당 부분을 시민이 아닌 대영제국의 자랑스러운 신민으로 살았다. ‘과학자‘는 18세기에는 존재하지 않던 단어였다. 프랭클린은 자연철학자였고 당시에는 자연철학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을 아울러 의미했다. 자연과 철학은 비록골치 아픈 결혼생활이었지만 아직 이혼하기 전이었다. - P193

다시 우리 둘만 남게 되자 내가 이저벨에게 묻는다. "만약 식민지 시대 미국으로 갈 수 있다면 누구와 점심을 먹고 싶으세요?"
프랭클린은 아니라고, 이저벨이 대답한다. "내가 보기에 프랭클린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에요." 나는 이저벨이 프랭클린을 비롯한 모든 역사적 인물을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난프랭클린의 여동생 제인과 먹을 것 같아요. 제인은 여성이라는이유로 집에 갇혀 있었어요. 만약 제인이 남자였다면 또 한 명의벤 프랭클린이 됐을 거예요." 제인 본인이 길었던 삶의 막바지에인정했듯이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 "수많은 보일과 클라크, 뉴턴이 그저 유리한 상황을 만나 적절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사에 무지한 채 보잘것없는 삶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벤 프랭클린의 초상화는 수십 개가 걸려 있지만 제인의 초상화는 단 한 개도 없다. 프랭클린이 살던 시대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도왔던 여성과 노예는 지금도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다. - P198

감정의 측면에서 나는 벌거벗음의 정반대에 있다. 내 몸은 크기와 스타일이 다양한 보호복으로 겹겹이 싸여 있다. 유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호복 중 하나다. 어찌나 몸에 꼭 맞는지 내10대 딸처럼 매우 섬세한 사람만 그 안을 꿰뚫어 보고 꼬집어 언급할 수 있다. 이 옷가지들은 전부 나를 구속하고 몸의 가동 범위를 제한한다. 사람들은 겹겹의 보호복 너머로 나를 만지기는커녕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이면 옷을 벗기가 더 쉽다. 외국인은 벤만큼 푸짐한 내 뱃살이나 수술 자국 같은 내 몸의 수많은 흠결을비판적으로 바라볼 확률이 덜하다. 내 감정의 흠결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들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이다. - P257

좋은 삶이지만 완벽한 삶은 아니었다(삶은 완벽해지는 법이 없다). 크게 존경받는 미국인이었지만 어쨌든 미국인이었던 벤은 결국외부인이었고, 그것도 좋은 혈통이나 대학 졸업장이 없는 외부인이었다. 그는 런던 상류층의 유리창에 코를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봤지만 입장을 허락받지 못했다. 이 클럽의 회원에 가까웠지만결국 회원은 아니었다. 그가 스코틀랜드인 인쇄업자 윌리엄 스트레이핸(프랭클린은 그를 "스트레이니"라고 불렀다)이나 퀘이커교도 식물학자이자 전기 전문가 피터 콜린슨 같은 외부인과 어울린 것도당연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왕실 의사였던 존 프링글을 비롯한 진짜 의사도 많았다.
런던은 활기와 지적 자극이 가득했지만 안식처는 아니었다. 영혼의 장소가 아니었다. 벤은 이따금 한바탕 향수병을 앓았고 벤저민 웨스트 같은 예술가와 동료 식민지 대표 등 런던에서 점점존재감을 키워가는 다른 미국인들과 만나며 향수병을 달랬다. 그밖에도 영국 땅을 잠식한 미국의 식물들이 있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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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우리는 떠나고 나서야 영혼의 장소에 고마움을 느낀다.
때는 1723년이었고, 프랭클린은 일감이 부족해서 불만족스러웠다. 지루해서 엉덩이가 들썩이기도 했다. 프랭클린이 필라델피아의 인쇄소에서 괴팍한 주인과 함께 일하고 있던 어느 날 펜실베이니아의 부총독인 윌리엄 키스가 옷을 완벽하게 차려입고 인쇄소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부총독이 보러 온 사람은 키머가아닌 프랭클린이었다. 보스턴에서 온 10대 소년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고 근처 술집에서 질 좋은 마데이라 와인을 함께 마시자고 찾아온 것이었다.
당시의 필라델피아는 이런 곳이었다. 야심은 가득하지만 학교는 겨우 2년밖에 못 다녔고 주머니에 동전 한 푼 없는 젊은 도망자가 동네 술집에서 식민지 부총독과 질 좋은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그런 곳.
키스는 어린 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직접 인쇄소를 차려 - P111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벤은 배를 타고 보스턴으로 돌아가겸허하게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이 계획이 탐탁지않았던 아버지는 프랭클린의 부탁을 거절했다. 윌리엄 키스 부총독은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프랭클린을 구슬려 런던으로 가라고 권했다. 자신의 신용으로 새 인쇄소에 필요한 장비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724년 11월 5일 열여덟 살의 벤 프랭클린은 희망찬 런던 (이 이름이 역설적이라는 사실을 그는 곧 깨닫게 된다)이라는 이름의 범선에 올라 델라웨어강이 멀어지며 델라웨어만으로 바뀌고, 델라웨어만이 곧 광활하고 험난한 북대서양으로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거칠고 날씨가 험악했다. 희망찬 런던은6주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영국해협에 진입했다. - P112

벤과 나 사이의 공통점. 우리 둘 다 어린 나이에 여행병에 걸렸다. 나는 1970년대 볼티모어에서, 벤은 1710년대 보스턴에서 나는 프렌드십 공항(현재는 볼티모어-워싱턴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들을 고개 들어 바라보며 조종사를 꿈꿨다. 벤은 보스턴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며 선원을 꿈꿨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어린 벤은 아버지가 비좁은 집 벽에 붙여놓은 세계지도 네 개를 들여다보고 여행기를 읽고 보스턴 항구에 내린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머릿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곧 벤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도 여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에 걸쳐 6만76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체신장 - P112

관 대리로서 북동부 전역을 여행했고 일흔 살의 나이에 몬트리올로 향하는 고된 여정을 떠났다. 일흔여섯에는 마차 여행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는 여행에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간 이동한 거리나 자신의 강철 같은 위장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다른승객들이 먹은 것을 배 밖으로 게워낼 때도 그의 위장은 끄떡없었다.
프랭클린에게 여행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매년 여름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 데버라에게 보낸한 전형적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소처럼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잘 지내고 있지만 슬슬 여행이 고파서 며칠 안으로 떠날 예정이오." 프랭클린은 여행 덕분에 청교도 보스턴과여전히 비좁았던 필라델피아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여행은 "삶을 연장하는 한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올바른 마음가짐만 있다면 파리에서 보내는 2주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여섯 달만큼 길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 P113

벤은 여행을 통해 잠시 속도를 늦추고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가장 훌륭한 글과 실험은 길 위나 바다 위에서 탄생했다. 그가 식민지 연합이라는 명석하고 통찰력 있는 계획을 떠올린 것은 1754년에 필라델피아에서 뉴욕 올버니로 향하는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였다. 훗날 "부자가 되는 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유명한 "아브라함 신부의 연설을 쓴 것은 1757년 런던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횡단할 때였다. - P113

여행이 우리의 지평을 넓힌다는 말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자명한 이치가 대개 그렇듯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만 사실이다. 여행은 실제로 우리의 세상을 확장하지만 그건 여행이 우리의 삶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길 위의 삶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제한된다. 이것이 내가 여행에 그토록 끌리는 이유다. 나에겐 축소된삶이 더 낫고 더 행복하다.
여행의 은밀한 비밀은 여행이 그럴싸한 농간이자 심리전이라는 것이다. 길 위에 있는 우리는 집에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파리에서 더 낭만적인 사람이 된 것 같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더느긋한 사람이 된 것 같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도시들이 아무리 멋지다 한들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순 없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 P114

우리는 여행지에서 낭만적이거나 느긋하게나, 하여튼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자유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된다. 우리가 여행 중에 경험하는 모든 것은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다. 그저 훨씬 힘들 뿐이다. 약간의 농간과 자기기만은 도움이 된다. 존 애덤스가 "늙은 마술사"라고 불렀던 프랭클린만큼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애덤스의 이 말은 칭찬이 아니었지만(그는 프랭클린의 이중성을 언급한 것이었다) 벤은 분명 이 별명을 듣고 빙긋 웃었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어릴 때부터 까탈스러운 여행자였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트립어드바이저가 있었다면 프랭클린은 모든 호텔 주인에게 최악의 악몽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는 극히 사소한 문제로 여관 주인들과 입씨름을 했 - P114

다. 영국에서는 포츠머스 호텔을 편지지마저 조악한 "끔찍한 여판으로 묘사했다. 영국 도시 그레이브젠드는 주민들이 능수능란하게 여행자의 돈을 훔치는 "저주받은 악랄한 곳"이었다. 프랭클린은 그곳에서 물건을 사면 그들이 부르는 값의 절반만 줘도 제값의 두 배를 내게 된다"고 말한 뒤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정말 다행이다, 내일이 떠나는 날이어서."


프랭클린이 언제 부총독 키스의 약속을 의심하게 되었는지는정확히 알기 어렵다. 어쩌면 선장이 영국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는 키스의 신용장을 보여줄 수 없다고 말했을 때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용장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때인지도 모른다. - P115

런던에서 만난 상인들이 키스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는커녕 그의 이름을 듣고 욕설을 쏟아냈을 때 아마 프랭클린은 본인이 속았음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키스가 자신에게 신용장을주지 않은 이유는 신용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없었다. 벤은 부총독이 왜 기구한 청년을 속이려고 한 건지 궁금했지만 그에게는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의 입장이 되어보자. 당신은 열여덟 살이다. 인구가 1만 명이 넘는 도시에는 가본 적이 없다. 당신은 믿었던 어른에게 속아 불안한 영혼이 50만 명도 넘는 메트로폴리스, 디포가 말한 "거대한 괴물"에 와 있다. 직업도 돈도 없다. 어떻게하겠는가?
나는 대다수가 어떻게 해서든 필라델피아로 가는 다음 배표를 - P115

손에 넣으리라고 생각한다. 프랭클린은 아니었다. 후츠파(저돌적인 담대함과 배짱을 뜻하는 히브리어-옮긴이)라는 단어를 그가 알았는지, 이 단어가 그때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바로 프랭클린이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슬려 인쇄소 일자리를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구했다. 그는 작가이자 철학자인 버나드맨더빌을 비롯해 런던의 가장 저명한 사상가들을 만났다. 그리고자신의 지위를 ‘이국적인‘ 식민지 개척자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신대륙은 18세기의 암호화폐였다. 버지니아의 담배. 자메이카의 럼. 안티과의 설탕, 전부 새로운 것, 그러므로 좋은 것이었다.
모두가 한몫 챙기고 싶어 했다. 위험하지 않았느냐고? 물론 위험했지만 투자자들은 질문을 그리 많이 던지지 않았다. 잠재적 수익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신대륙에서 온 골동품도 수요가 많았다. 자신감이 어마어마하고 이국적인 물건이 가방에 최소 한개는 처박혀 있던 필라델피아에서 온 젊은 인쇄공보다 이 사실을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먼저 그는 이 거대하고 가혹한 도시를 가진 것 없이 홀로 헤쳐 나가야 했다. - P116

어떤 여정은 분자 수준에서 우리를 뒤바꾼다. 우리는 떠날 때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꼭 마법 같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마법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진다. 여행하는 행위. 이동하는 행위는 우리를 뒤바꾼다기보다는 더욱 단단하게 굳힌다. 길 위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기대에서 자유로워지고, 전에는산산이 쪼개져 있던 우리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 하나의 전체가 된다. 이런 일이 갈라파고스에서 찰스 다윈에게, 남아프리카에서 마하트마 간디에게, 갠지스 강둑에서 조지 해리슨에게 일어났다. 이들 모두 작가 로버트 그루딘이 말한 "돌연한 깨달음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 P131

조금 더 걷다가 멈춰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프랭클린의일기를 읽는다. 필라델피아로의 귀향길을 기록한 이 일기는 귀한자료다. 그는 좀처럼 일기를 쓰지 않았다. 솔직히 약이 오르지만벤을 탓할 순 없다. 그는 자신의 유명 전기 작가인 칼 밴 도렌의말마따나 "철학을 쓰기보다는 철학자가 되는 것을 더 좋아했고",
마찬가지로 여행자로 사느라 너무 바빠서 여행 일지를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프랭클린은 시간을 선물받았다. 진정한 선물이 으레 그렇듯 이 선물도 처음에는 선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벤 프랭클린의 이 바다 횡단은끔찍하고 지독한 데다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아주 운수 나쁜 여정이었다. 버크셔호가 런던에서 출항한 순간부터 문제가 발 - P136

생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고, 분다 해도 잘못된 방향으로 불었다. 배는 망연자실하고 고통스러울 만큼 느리게 나아갔다. 한번은 배가 뒤로 움직였다. 배에 탄 거의 모두가 (프랭클린은 제외하고 뱃멀미에 시달렸다. 상어 한 마리가 배 주위를 맴돌아서 벤은매일 하던 수영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배 안에는 부주의한 요리사와 카드게임 사기꾼이 타고 있었다.
아주 좋은 점도 하나 있었다. 벤에게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시간을 활용했다. 그는 과학(자연사와 항해술, 수학)뿐만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심리학과 도덕에 대해서도 사색했다. 또한그는 자기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때의 일기는 좀처럼 자기내면을 드러내지 않았던 한 은밀한 남자의 정신과 마음을 보여주는 진귀한 창문이다. 벤이 탁 트인 바다를 느릿느릿 나아가는 배위에서 닫힌 마음을 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속도는 우리를 유혹하지만 진정한 돌파구는 삶이 느려진 순간에, 막간의 휴식 시간에 나타난다. - P137

프랭클린이 살던 시대에 사람들은 이동과 변화를, 변화의 구체적 형태가 아닌 변화라는 개념 자체를 깊이 성찰했다. 진보의 세기였던 18세기의 산물 중 하나는 영원한 진보에 대한 믿음이었다. 현재는 과거보다 더 낫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을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발전 개념은 적어도 과학과 기술에 한해서는 매우자명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300년 전 런던의 커피하우스와 파리의 살롱에서 태어난 비교적 새로운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순조롭게 탄생하지 않았다.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목소리는 철학자 장 자크 루소에게서 나왔다. 그는 "인간 이성에 진정한 진보란 없다. 우리가 얻은 것은 다른 방향에서 보면 우리가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신이 영국해협을 헤엄쳐서 건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수영장을 돌며 기운을 소진할 뿐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P140

거리 음악가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는다. "오늘 밤 어디서 잘 건가요……." 젊지는 않은데 그래도 실력이 좋다. 그때 생간이 멈춘다. ‘그래도 ‘라니? 왜 나이 들면 능력이 감퇴할 거라고생각하지? 프랭클린의 능력은 감퇴하지 않았다. 적어도 중요한 능력들은 그랬다.
나이 들면 좋거나 나쁜 성격이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벤이 와이트섬의 전 총독이었던 조지프 더들리를 만나고 나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어디에서나 멸시받았다. 고약한 사람이 늘 그렇듯 더들리는 자신의 고약함을 감추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프랭클린은 그를 보며 한 가지 자명한 진실을 깨달았다. 그가 평생을 품고 살았던, 그리고 그의 간결한 표현 덕분에 우리 역시 평생을 품게 된 그 진실은 바로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이었다. - P141

나는 아무리 악마처럼 간교한 사람도 정직한 사람이라는 이름을무덤까지 가져갈 만큼 간교함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으며 결국이런저런 우연으로 누군가에게 그 본성을 들키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진실함과 정직함은 고유의 독특한 광채가 있어서 결코 완벽하게 위조할 수 없다. 그림으로 똑같이 묘사할 수 없는 불이나 화염과 마찬가지다.


프랭클린도 나처럼 자신을 돌아보며 카우즈를 떠났다. 솔직히말하겠다. 나는 지금 나이 듦의 망령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는 - P141

나이 듦이 무섭다. 죽음도 무섭지만 나이 듦이 더 무섭다. 죽음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가는 시간은 끝이 있는 경험이다. 자연은 절대 그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다(느끼기엔 한없이 길 수 있지만).
나이 듦은 얘기가 다르다. 죽어가는 시간과 달리 나이 듦은 오래도록 계속될 수 있고 규칙도 더 불분명하다. 죽어가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나이 든 사람은…… 뭐지? 더 늙어야 하나? 젊은 척해야 하나? 정답이 뭔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 P142

바다에서 13주라는 길고 긴 시간을 보낸 끝에 마침내 프랭클린의 귀에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 들려왔다. 망보는 사람이 외쳤다. "육지다! 육지가 보인다!" 승객들이 갑판 위로 몰려들었다. 곧대다수 승객이 "나무숲처럼 보이는 동부 연안의 윤곽을 분간할수 있었다. 프랭클린은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그의 시력에는 아무문제가 없었다. 그는 "두 방울의 작은 기쁨이 차올라 눈이 흐릿해졌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벤 프랭클린의 말이 옳았다. 여행은 실제로 삶을 연장한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따금 바람이 변덕을 부리고 파도가 거칠게 몰아칠 때, 속도가 휴가를 떠나고 발생 가능한 모든 문제가 현실이 될 때 여행은 삶에 깊이까지 더한다는 것이다. - P147

프랭클린의 길고 쓸모 있는 삶은 거의 18세기 전체에 걸쳐계몽주의 시대와 나란히 이어졌다. 이 과학적, 철학적 진보의 시기가 거둔 수확이 어찌나 풍성하고 다채로웠는지,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그 산물을 즐기고 있다. 병원에 가거나 국제 엠네스티에돈을 기부하거나 불을 켜거나 커피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프랭클린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물론 풍작은 거저 발생하지 않는다. 근면 성실한 농부와 질좋은 씨앗, 풍성한 햇빛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비옥한 토양이 필요하다. 계몽주의의 토양은 말과 글의 형태를 띤 언어였다.
계몽주의 시대는 대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기나긴 대화는 런던의 커피하우스와 파리의 살롱에서, 학식 넘치는 왕립학회와 애덤 스미스가 여러 경제 이론을 개발한 글래스고의 시끌벅적한 조선소에서 이루어졌다. - P157

좋은 대화 상대가 된다는 것은 자기 의견과 신념을 삼킨다는뜻이 아니다. 프랭클린은 의견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의견을 곤봉처럼 휘두르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의 의견은 뽁뽁이에 싸여서 도착했다. 누가 어떤 주제에 관해 의견을 물으면 프랭클린은 보통 상대에게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대화상대를 소외시키기보다는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답하곤 했다. 프랭클린의 입장을 추측할 수는 있었지만 그는 아무리 확고한 의견이 있어도 결코 그 의견 때문에 갈등을 빚지 않았다. 그에게는 우점을 지키는 것이 논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사사건건 따지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유용한 진실이다. "그들은이따금 승리를 거두지만 본인에게 더욱 유용한 호의는 절대 얻지못한다." 프랭클린은 말했다. 벤에게는 언제나 관계가 문제보다 더 중요했다. - P160

이성의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바츨라프 하벨이 "서사의 위기"라고 부른 불안하고 어수선한 시대를 살았다. 오래된 생각은 쓸려 내려가고 새로운 생각은 아직 밀려들지 않았다. 강한 물살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몰아쳤다. 벤은이 흐름에 맞서 싸우지도 굴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파도를 탔다.
서퍼라면 다들 알겠지만 서핑은 보드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보드 위에 단단히 자리 잡는 것이다. 습관은 벤이 그럴 수 있도록 돕는 접착제였다.
프랭클린에게 습관은 전기만큼이나 강력한 힘이었다. 습관은선한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고 나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는 원인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선하거나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악한 습관과 선한 습관 모두 오랜 시간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형성된다." - P167

덕 있는 삶은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니라고 프랭클린은 말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덕 있는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악한이라도 이루 말할 수 없는행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 선하게 행동할 것이다. 최근의 연구가 이 생각을 뒷받침한다. 이타적 활동에 정기적으로참여하는 사람들은 행복과 만족감, 삶의 의미를 더 많이 느낀다. 그러나 미덕의 인기는 점점 줄고 있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인내와 친절, 감사, 용기, 정직"처럼 미덕이나 품성과 관련된 단어는 20세기 들어 사용 빈도가 가파르게 줄었다.
프랭클린의 터무니없는 발상 중 하나는 전 세계의 덕 있는 사람을 환영하는 미덕 연합당을 창립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비웃음을 살지 몰라도 그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프랭클린은미덕이 행복뿐만 아니라 진보로 향하는 열쇠라고 믿었다.  - P172

1. 절제, 배부를 때까지 먹지 말 것.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말 것.
2. 침묵. 자신이나 타인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은 삼갈 것. 하찮은대화는 피할 것.
3. 질서,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둘 것. 모든 일에 시간을 정할 것.
4. 결단. 해야 할 일은 실행하기로 결심할 것. 결심한 일은 반드시실행할 것.
5. 절약. 자신이나 타인에게 도움되지 않는 지출은 하지 말 것. 즉절대 낭비하지 말 것.
6. 근면, 시간을 버리지 말 것. 늘 쓸모 있는 일을 할 것. 불필요한행동은 전부 끊을 것.
7. 진실. 거짓말로 상처 주지 말 것, 순수하고 올바르게 생각할것. 말한 것은 지킬 것.
8. 정의. 남을 다치게 하거나 마땅히 줘야 할 혜택을 빠뜨리지 - P173

말것.
9. 중용. 극단을 피할 것. 아무리 그럴 만하다고 느끼더라도 분노하며 해를 가하지 말 것.
10. 청결, 몸과 의복, 거처의 불결함을 용납하지 말 것.
11. 평정, 사소한 일, 흔하거나 피할 수 없는 사건에 흔들리지 말것.
12. 순결, 성교는 주로 건강이나 자식을 
위해서만 할 것. 몸이 굼떠지거나 약해지거나 자신 또는 타인의 평화나 평판을 해칠 만큼 하지 말 것.
13. 겸손,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따를 것. - P174

벤의 목록에 없는 미덕은 관용이다. 나는 이것이 실수였다고생각하지 않는다. 벤에게 자비는 덕 있는 삶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왜 13개일까? 고대 그리스의 사추덕인 지혜, 정의, 용기, 절제는 왜 안 될까? 어쨌거나 벤은 단순함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벤은 그 커다란 미덕을 작은 크기로 자르면 숙달하기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미덕이 13개인 또 다른 이유는 철저히수학적이다. 벤의 계획은 한 덕목당 4주씩 할당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13개 덕목을 완성하는 데 딱 1년이 걸린다.
미덕의 순서도 중요했다. 한 덕목이 그다음 덕목으로 이어졌다. 절제를 맨 처음에 놓은 이유는 "머리가 맑고 냉철해지지 않으면" 나머지 12개 미덕에 덤벼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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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은 어릴 때부터 의심이 많았다. "나는 요한계시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종교 전통을 친근하게 조롱하곤했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여느 때처럼 식사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올리자 벤이 유익한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음식통 앞에서 감사기도를 한 번에 끝내면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사이아 프랭클린은 목사가 벤처럼 꾀바른 회의주의자를 절대 받아주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교육의 목적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이제 벤저민의 교육은 무의미했다.
프랭클린의 교육이 도중에 중단되었다는 사실(대다수 건국의 아버지들에 비해 훨씬 부족했다)은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이 사실은 나만큼이나 깊은 벤저민의 한을 설명해준다. 그가 라틴어와 고대그리스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관습을 왜 "돌팔이 문학"이라고 비난했는지 설명해준다. 그가 속물적인 우월의식의 기미만 보여도 알레르기를 일으킨 이유를 설명해준다. 무엇보다 기민 - P45

하고 지략이 풍부한 그의 지성을 설명해준다. 벤을 학교에서 빼낸 조사이아 프랭클린의 결정은 지금 돌아보면 벤저민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섭리를 의심하지 말지어다.
삶은 되돌아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앞을 보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비디오를 되감듯 우리 삶을 거꾸로 돌아볼 때 섭리를 더욱 잘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섭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는데 우리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섭리의 솜씨에 감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거리는 오로지 시간만이 제공해준다. - P46

벤 프랭클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길고 쓸모 있는 삶은 책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쓰고 사고팔고 빌리고 빌려주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선물하고 수집하고 사랑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미국 최초의 관외대출 도서관을 세웠다. 그곳에서 매일 최소 한두 시간 독서했고 "그렇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교에 다니다 도중에 중단된 교육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1790년에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집에 책이 4276권 있었다. 젊은 국가인 미국에서 가장 대규모의 개인 장서중 하나였다.
당시 출판업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구어를 제외하면 출판물이 유일한 정보 전달 매체였고 글쓰기가 유일한 의사소통 형태였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으면 직접 가서 듣거나 관련도서를 읽어야 했다. 무엇을 읽느냐가 곧 그 사람을 정의했고 벤저민 프랭클린만큼 이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 P48

 어릴 때부터 가능성주의자였던 그는 창조적재능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는 성격적 특성, 바로 경험에 대한 개방성을 지니고 있었다. 프랭클린에게는 독서가 곧 경험이었다.
프랭클린은 책을 사랑했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설명할 때 그는 친구들의 직업은 별로 언급하지 않고 그저 그들이 "전부 독서 애호가였다고만 말한다. 책은프랭클린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뉴욕의 왕립총독은 벤이 인상적인장서 목록을 가졌다는 말만 듣고 젊은 벤을 만났다.
벤은 책에 너그러워서 빌린 책을 잘 돌려주지 않는 친구들에게도 선뜻 책을 빌려주었다. 영국인 친구인 조너선 시플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어떤 책을 더 빨리 보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그 책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난다네." 이런 일이 빈번했다. 한번은 자신이 소유한 신문인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자기책을 빌려간 사람은 책을 돌려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싣기도 했다. 관대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벤 프랭클린은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했다. - P53

프랭클린의 가장 기발한 실험 중 하나는 물과 기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기름을 약간 넣으면 격렬한 물살을 잠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날 한 연못에서 그는 의심 많은 남자를만났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합니까? 그러자 프랭클린은 화려한쇼맨십을 선보이며 그 ‘마술‘을 직접 실연했다. 남자는 깜짝 놀라서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남자가 버벅대며 말했다.
"저는 여기서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딱 하나, 직접 본 것만 얻어가세요." 프랭클린이 대답했다.
이게 바로 경험주의다. 프랭클린에게 경험은 얄팍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경험은 지식의 한 형태였다. 책은 우리를 멀리데려가지 못한다. 경험은 다르다. 책의 타당성은 의심할 수 있지만경험의 타당성은 그렇지 않다. 책은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그럴 수 없다. - P65

벤은 인쇄소에서 다양한 책뿐만 아니라 런던의 흥미로운 잡지인 애디슨과 스틸의 <스펙테이터> 같은 정기간행물도 접할 수 있었다. 벤은 특별한 독학 방식을 개발했다. 바로 짧은 글을 읽고 문장을 마구 뒤섞은 다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모방을 통해 배우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반전이 있었다. 그는 저자의 글쓰기 기법을 흉내 낸 다음 자기만의 미사여구를 추가했다. 훗날 벤은 "선인을 모방하는 것과 선인을 가장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모방은 선인을 영광스럽게 한다. 가장은 선인을 모욕한다.
비록 벤보다 늦은 나이였지만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글쓰기를 배웠다. 먼저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잰 모리스, 피코 아이어, 이탈로 칼비노, 존 스타인벡, 폴 서루. 그리고 그들처럼 문장을 구성했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비슷했다. 나는 그들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만들어낸 문장들은 비슷하긴해도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그 문장들은 내 것이었다. 나는 그들 - P73

을 모방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발표한 글은 뉴저지 매디슨 적십자 지부의 뉴스레터에 실렸다. 헌혈 캠페인이나, 아니면 홍수 대비 요령에 관한 글이었을 것이다. 완성된 결과물을 처음 바라보며 느꼈던 기쁨의 전율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여기 내 글이, 나의 것이 내 이름과 함께 실려 있었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는데, 프랭클린의 기준에는 노령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벤은 겨우 열두 살 때 두 편의 시를 썼다. 둘 다 바다가 주제였다. 하나는 악명 높은 해적인 검은 수염의 생포와 처형을 노래했다. 다른 하나는 ‘등대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발라드로, 등대지기와 그 가족이 익사하는 음울한 이야기였다. 열두 살에게는 다소 어두운 소재였지만 그때도 벤은 무엇이 좋은 이야기인지 잘알았다. - P74

철학자이자 1960년대의 구루였던 앨런 와츠는 이 형이상학적 미로의 출구를 제시했다. 더 이상 진정한 자기라는 환상 때문에초조해하지 말고 "진실한 가짜"가 돼라." 진실한 가짜는 사기꾼도 아니고 착각에 빠진 것도 아니다. 진실한 가짜는 자기 역할, 아니 역할들에 너무 깊이 몰입해서 배역과 사람, 가면과 얼굴이 하나가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가면을 쓰느냐가 아니라 그 가면이 우리 얼굴에 얼마나 잘 맞느냐다. 벤 프랭클린의 가면은 그의 얼굴에 잘 맞았다. 그는 진실한 가짜였다.
프랭클린은 ‘마치‘의 철학을 지지했다. 자기 삶을 마치 좋다는듯이 살아가다 보면 삶은 어느새 정말로 좋아져 있다. 동료 인간을 마치 좋은 사람처럼 대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은 정말로 좋은사람, 아니면 적어도 더 나은 사람이 된다. 프랭클린이 자기 가면중 하나인 리처드 손더스를 통해서 한 말처럼 "보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제대로 연기해야 한다." - P87

좁은 골목길로 꺾어 들어가니 관광객으로 붐비는 구시가지에서 노동자들이 사는 동네로 갑자기 내던져진 느낌이다. 가죽 앞치마의 지역이다. 허름한 가게가 보이고("미스터 바 스툴, 재고 수천개보유) 둥근톱과 망치 소리를 박자 삼아 살사 선율이 흐르는 건설 현장이 나타난다. 이들이 프랭클린의 사람들이다. 부자에 전세계적 유명인이 되었을 때도 프랭클린은 본인을 가죽 앞치마로여겼다. "기술을 소유한 자가 재산을 소유한다."
프랭클린과 필라델피아는 꼭 맞는 영혼의 단짝이었다. 둘 다젊고 다급했다. 둘 다 너그러운 정신과 대단한 수완을 지녔다. 둘 - P106

다 꾀죄죄하고 세련미가 없었다. 둘 다 질서를 열망했으나 얻지는 못했다.
필라델피아는 프랭클린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바로 익명성을 제공했다. 형과의 도제 계약을 깨버린 프랭클린은 엄밀히 말하면 도망자였고 체포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에서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 누구도 어디 출신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필라델피아 주민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은 교회가 삶의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 곳이었다. 돈 한 푼없는 꾀죄죄한 도망자들을 환영하는 곳이었다. 선행이 필요한 곳이었다. 이곳은 새롭게 출발하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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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일


맹감나무 열매가 파래지는 유월 아침이었다
개에게 아침을 먹이고 어르신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굴참나무 아래서 만나 산책에 나섰다

어르신이 먼저 늙은 개와 함께 앞장섰고
나는 아직 천방지축인 녀석을 데리고 
뒤따랐다
이 개는 사람 나이로 치면 아흔이 넘어요,
늙은 개는 소나무 빽빽한 숲길에서도
개옻나무가 줄지어 선 오솔길에서도
산딸기 덤불이 우거진 모퉁이에서도
연신 코를 흠흠, 느리게 걸었고
어르신은 느긋하게 걸음을 맞췄다

성우씨, 매운 고추를 뭐라 하지요?
여기서는 땡초라하지 않나요?
어르신은 땡초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며 싱겁고 환하게 웃었다 - P72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걷던 어르신이
문득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남의 집 고구마밭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개를 세워두고
밭 안쪽으로 몇걸음 옮겼다 나온
어르신의 손에는 환삼덩굴이 들려 있었다
그냥 놔두면 무성한 가시 줄기를
거침없이 키워나갈 덩굴풀,

남의 집 밭고랑에 들어가
풀 한포기 뽑아 나오는 마음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 P73

매우 중요한 참견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
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볕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 P104

머위


사는 게 씁쓸하니?
사는 일 허하니 속도 허하다

그래, 머위가 지천이다 몸 일으켜
밤나무 언덕에 올라 머위를 뜯는다
한걸음 오르려다 두걸음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머위를 뜯는다

두어줌 남짓 뜯어 온 머위,
물 보글보글 끓여 데친다 훅훅
올라오는 쌉싸래한 머위 냄새,
찬물에 씻어 둥글둥글 뭉친다

된장 한숟갈 풀어 조물조물
머위를 무친다 외롭다는 말이나
허망타는 푸념 따위도 조물조물
버무려 한입 먹어본다 간이 맞나?
짜지는 않고 짭조름하게 간을 잡아
버무린 머위를 두고 창을 열어본다 - P112

그래 뭐 별거 있간디, 맹숭맹숭
싱겁게 나를 달래기도 하면서
조바심 낼 일도 성화 부릴 일도 없이
사는게 마땅찮다고 혀를 잘 일도 없이

머위 빛깔 초저녁이 마당으로 든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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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오케스트라만의 공연이었고, 2부에 정경화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1부 내내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정경화가 나오길 기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런데 나의 인내심도 모르고 오케스트라연주는 길어지기만 했다. 급기야 오케스트라는 원래 계획에도 없던곡까지 연주를 했다. 정경화가 나와야 하는데, 정경화는 왜 안 나올까.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리고 정경화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바이올린도 없이. 맨손으로, 정경화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바이올린을 잡는 대신 마이크를잡고 무대 위로 올라왔다. 정경화가 말을 했다. 오늘 오전에 갑자기손에 마비가 왔다고. 연주를 하는 대신 말을 했다. 연주를 할 수 없다고 말을 했다. - P136

그때 2층에서 내려다본 정경화는 작았고, 머리숱도 적었다. 나의 영웅 정경화가. 내 롤모델이 나를 그토록 울렸던 그 위대한 연주가가 작았고 적었고 마비가 왔다. 2005년의 일이었다.


***

그 후로 나는 정경화의 비발디 <사계> 공연을 보러 성남에 갔고 바르톡 공연을 보러 인천에도 갔다. 나는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을 해야 했다.
- P137

그리고 2012년. 명동성당에 정경화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소나타를 들고 나타났다. 명동성당과 정경화와 바흐의 조합이라니.
그보다 더 어울리는 조합이 어디 있을까. 길고 딱딱한 성당 나무의자에 앉았다. 이런 분위기에 어떤 드레스를 입고 나올까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정경화는 드레스 대신 하얀 셔츠를 입고 성당 제단 앞에 섰다. 그보다 더 어울리는 차림이 또 어디 있을까. 누구보다 기품있었고,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1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늘이 어머니의 기일이라 했다. 관객들도 숙연해졌다. 그 시절 한국에서 정경화라는 바이올리니스트도 모자라 정명화, 정명훈까지 길러낸 그 어머니. 모를수는 있어도, 알고 난 후에는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 어머 - P137

니에게 그보다 더 흡족한 제사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진공상태와도 같은 침묵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그 공기를 뚫고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그 소리가 명동성당의 높다란 천장을 돌아 뒷벽에 부딪혀 내 귀로 들어왔을 때 나는 우주의 탄생을 귀로 듣는 느낌이었다. 먼 소리가 둥글게 지금의 나에게 도착하고 나는 먼 소리를 지금의 소리라 착각하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소리를좋았다. 높은 소리는 신생 별이었고 낮은 소리는 오래된 별이었다. 활과 바이올린 사이에는 공기가 흘렀고 지구와 달처럼 그 공기는 아득했고 멀리서 도착한 빛과 소리는 아름다웠다. - P138

그리고 <파르티타>. 그리고 무려 <샤콘느> 연주가 시작되었다. 바흐 《파르티타 2번의 마지막 악장인 <샤콘느>. 연주가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곡. 하지만 그만큼 연주가의 깊이를 들키기 쉬운곡. 그래서 브람스는 이 곡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가장 깊은 생각과 가장 강렬한 느낌의 완전한 세계"라고. 젊은 연주가의 <샤콘느>는 깊이가 없고, 늙은 연주가의 <샤콘느>에는 기교가 부족하기 십상이다.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그 팽팽한 긴장감의 나이에 <샤콘느>를 위한 나이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이 정경화의 <샤콘느>가 아닐까?
어느새 나는, 20년 전 그때처럼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 턱에고였다. 닦을 생각도 못하고 펑펑 울어버렸다. 1974년, 정경화가 아 - P138

주 어렸을 때 녹음한 바로 그 바흐 <샤콘느> CD를 수십 년 동안 성경처럼 간직하며 들어온 나였다. 그런 내 앞에서, 예순도 넘은 정경화가 그 나이만큼 단정한 셔츠를 입고, 바흐를 연주하고 있었다. 작지 않았고 적지 않았고, 유연했고, 거대했고, 전부였다.


***

한때 정경화처럼 연주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때때로 정경화의 CD를 틀어놓고 정경화의 선율을 따라서 연주해보곤 했다. 물론단 한 음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늘 몇 음 따라 하다 말고 바이올린을 내리고 정경화의 연주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예쁘고 작고 예민하기 짝이 없는 바이올린은 나에게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  - P139

안다. 타고난 기억력의 소유자인지라 나는 그 곡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곡의 제목조차 알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키스 자렛의 곡들을 다시 찾아서 들어봤지만 비슷한 곡도 찾아내지 못했다. 실은 한 소절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할 기준조차 없다. 아마 다시 그 곡을 들려줘도 나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혹은 음악이 너무 좋다며 이게 무슨 곡이냐고 물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곡을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꼭 기억하고 싶다. 피아노와 새들의 합주를 피아노가 멈추는 순간 시작되었던 새들의 독주를 새들의 독주를 듣기 위해 멈춘 피아노를, 그제야 들리고 보이고 만져졌던 보석들을 그 보석들을 지금 우리가 오롯이 누리고 있다는 깨달음을. 행복에 정수리까지찌릿찌릿해지던 순간을, 그 순간의 나를. 우리를. - P148

카메라라는 걸 손에 쥐고 처음 나간 순간을 기억한다. 안보이던 게 보였다. 방금 있었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았고, 지금의 빛은 1분 후에 다른 빛이 되는 걸 보았다. 나는 경이에 차 있었는데,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 옆을 지나갔다. 노을이 지고있는데, 저렇게 노을이 지고 있는데, 노을빛 때문에 이 벽이 이렇게아름답게 빛나는데.
그때 깨달았다. 나는 카메라를 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쥐게 되었다는 걸. 남들 눈에는 안 보이는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다는 걸. - P153

외국 여행을 갈 때에도 언제나 이 카메라부터 챙긴다. 무겁고, 귀찮다. 하지만 이 카메라가 없는 순간이 두렵다. 너무 찍고 싶은 순간이 왔을 때 이 카메라가 없어서 난감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카메라를 탐낸 적은 없다. 다른 렌즈를 사고 싶어 한 적도없다. 비싼 라이카도 최신식 카메라도 나에겐 관심 밖의 이야기다. 다행이라 생각한다. 장비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다만 다른 사진에대한 욕심은 많다. 끝도 없다. 남들이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내 사진과 비교하며 초라해진다. 어쩜 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 탄복을 하면서 그 실력에 욕심을 낸다.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래로 이 욕심은 더해가기만 할 뿐 줄어들진 않는다. 아마 평생 그렇게 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평생 잘 찍지 못할 것이다. 평생 잘 찍는 누군가의 사진을보며 부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또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평생 찍을 것이라는것을. 그렇게 찍는 순간은 어쨌거나 나만의 순간이 된다는 것을. 대단하진 않을지라도 나만의 시선은 끊임없이 버려지리라는 것을. - P156

처음부터 의도는 없었다. 의도가 있었다면 이토록 성실할수 없었을 것이다. 늘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멀리서도 보였고, 다가갈수록 가슴이 뛰었다. 찍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랬다. 기분이 너무 좋아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그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실했다. 좋은 기분을 위해 성실했다. 아니, 어쩌면 성실하다는 표현은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을 따라갔을 뿐이다. 마음의 움직임에 몸의 움직임을 맡겼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에게는 수많은 나라들의 수많은 도시들의, 수많은 벽의 기억이 생겼다. - P159

사진을 배우고 난 후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은 사람만큼 사진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는 요소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사진 앞에서도 사람의 눈은 신기하게도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낸다. 아무리 구석에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어김없다. 어떤 사진 앞에서도, 어떤 사람이라도 똑같다. 덕분에 사람이 없는 사진은생기가 없기 십상이다. 물론 사람 하나 없이도 눈을 사로잡는 위대한 사진도 많다.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 내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나는 사람이라는 피사체가 필요했다. 그 순간, 그 표정, 그 몸짓, 그러니까 그때가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그 사람을 찍고 싶었다. 그 - P167

래서 사람을 중심으로 찍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벽 사진만은 예외였다. 벽 사진에는 사람이 필요치 않았다. 누군가가 신경 써서 가꿔놓은 창가, 창문마다 다르게 걸려 있는레이스 커튼들, 거리낄 것 없이 다 내보이는 창문들, 해를 향해 가슴을 열어젖힌 빨래들, 해가 넘어간 뒤에도 바람에 걸려 있는 빨래들, 벽에 무심하게 기대 있는 자전거, 새 칠을 입은 벽, 한 번도 칠해지지않은 벽, 지금 막 누가 그림을 그려넣고 있는 벽, 폐허에 홀로 남은벽, 노란 벽, 파란 벽, 주황색 벽, 그 모든 색이 다 섞인 벽 등, 벽은언제나 그 자체로 완벽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 P169

하지만 그런 걸 감히 꿈이라 불러도 되나. 그건 그저 욕망이라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나는 늙어버렸으면좋겠다고 생각했다. 10대엔 10대라 힘들었고, 20대엔 20대라 너무힘들었다. 왜 이렇게 시간은 무정형이지. 왜 이렇게 나는 휘청일까. 사소한 상처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나이가 분명 있을 텐데. 울음이멈추는 나이가 나에게도 분명 올 텐데. 그건 또 언제인가. 60이 되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고요한 시간이 드디어 내게도 찾아올 것 같았 - P180

다. 어떤 자극이 찾아와도 무심하게 고요하게.
60이 되고 싶었다. 그게 꿈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그저 늙어가는 것이 꿈이 될 수 있는 건가. 그냥 늙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지 않은가. 60살이 된 내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고요한 얼굴이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풍파도 감히 박살낼 수 없는 깊고 따뜻한 얼굴이면 좋겠다 싶었다. 그렇다면 그저 늙는 것이 아니라잘 늙어야 했다. 그때면 얼굴에 모든 것이 다 새겨져 있을 텐데, 지금까지의 시간과 만남과 선택과 마음이 모두 새겨져 있을 텐데, 그얼굴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잘 늙고 싶다는 것도 꿈으로서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모든 취업 원서에 ‘잘 늙기‘를 꿈으로 써냈다.
50군데 원서를 내고도 50군데에 다 떨어진 건 어쩌면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 P181

물론 이제는 안다.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그런 말짱한 나이는없다는 걸. 60이 되어도 내가 꿈꾸는 것처럼 무심하게 고요할 리 없다는 걸. 오늘은 여기가 아파 우울할 것이고, 내일은 저기가 골칫거리일 것이다. 내가 괜찮은 어떤 날에는 남편이 말썽일 것이다. 그때내게 일거리가 있다면 그 일이 하기 싫어 몸부림일 것이고, 그때 내가 백수라면 앞으로 남은 세월 동안의 가계가 걱정일 것이다. 전세계를 여행하고도 남을 시간이 있지만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돈이 있더라도 몸이 안 따라줄 수도 있다. 장기하의 노래처럼 ‘별일 없이 산다‘라는 친구의 말이 제일 부러운 말이 될 수도 있다. 별일이 없다니.
난 아직도 순간순간이 별일이라 미치겠구먼. 어쩌면 루르마랭의 그할아버지도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이 지긋지긋해 혼자서 여행을 온•걸지도 모른다. 나름의 방법으로 도피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은아무도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의 60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젊음의 형광빛보다는 늙음의 희미한 빛 - P188

에 끌린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배 나온 할아버지들의 나뭇둥걸 색깔을 좋아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부부가 서로를 챙겨줄 때의 빛바랜노을색은 늘 찡하다. 골목골목 수다를 떨고 있는 할머니들의 하얀머리를 보면 경쾌해진다.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할머니의 회색표정도 꽤 귀엽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분홍색으로 차려입고, 할아버지에게도 분홍색 니트 티셔츠를 입힌 할머니를 봤을 때는 가던 길을 되돌아갔다. 할머니를 붙잡고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한 번도 좋아해본 적이 없는 그 색깔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60살의 나를 모른다.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모든 세월을 통과한 노인들을 볼 때면 늘 뛰어가서 사진을 찍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 각각의 시간을 사진으로 찍으며 막연하게 나의 시간을 상상해보는 걸지도 모른다. 60이 되었을 때 나의 색깔. 그 상상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핑크빛으로 두근거린다. - P190

나는 내가 비옥한 토양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여기에서어떤 나무가 자라날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무가 튼튼했으면,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물론 이미 카피라이터라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 나무를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 나무가 나의 마지막 나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않는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또 어떤 나무가 뿌리를내리기 시작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 나무를 키우기로 결심을 한다면, 잘 키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비옥한 토양을 가꿔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열심히 토양을 가꿨는데도 아무나무도 안 자란다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내게비옥한 토양은 남을 테니까. 그 토양을 가꾸는 과정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할 테니까. 그 토양을 가지고 있다면 도대체 행복하지 않을도리가 없으니까. - P200

영어, 독일어, 라틴어, 희랍어, 일어, 불어, 사람들은 내 언어 욕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박장대소를 한다. 그리고 하나라도기억하는 언어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같다. 기역할 리가 없다. 기본적으로 단어를 외우는 뇌세포가 없다. 그런데왜 그렇게 많은 언어에 욕심을 냈느냐고? 모르겠다. 언어에 유독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그냥 배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이 열망, 어쩄거나 확실한 것은 뭔가를 배울 때의 나는 확실히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즐거워하고,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기어이 짬을 내서 배우러 달려간다. 그러니 나에게 ‘배운다‘ 라는 말은 장밋빛 미래를 위한 말이 아니라 장밋빛 현재를 위한 말이 된다. - P209

말이 지겹고, 글이 구차하다 느껴질 때 아무 생각 없이 흙을 만질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큰 위로였다. 흙을 만지는 시간만큼은정직해지는 느낌이었다. 흙이 정직했으니까.
무게를 실어 미는 방향으로 정직하게 흙은 나갔다. 흙이 달라지면 결도 색깔도 결과물도 달라졌다. 같은 흙이라고 해도 날씨에 따라 성질이 달라졌다. 흙끼리 붙일 땐 끝에서부터 한 땀 한 땀. 절대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해야 했다. 공기가 들어가면, 가마 속에서 흙이 터졌다. 약간이라도 갈라진 곳이 있으면, 어김없이 가마 속에서쩍 하고 갈라졌다. 흙은 정직했다. - P214

하지만 엄마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탈춤반 공연을할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걸 보면 내 성적이 떨어지는 이유를 굳이 탈춤반에서 찾지는 않은 것 같다. 떨어지는 성적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그냥 내가 공부를 점점 못 따라가는 거지.
방목, 완전한 방목. 엄마는 나를 방목했다. 이제 와서 엄마는 그걸 엄마의 교육철학이라고 말하지만,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동생도알고 모두가 안다. 그걸 철학이라고까지 포장할 순 없다. 엄마는 나를 방목했지만, 동생에 대해선 전혀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방목을 해놔도 나는 울타리 밖으로 안 나가는 아이였기 때문에 방목을 했던 것이고, 동생은 아무리 묶어놔도 어느새 울타리를 뛰어넘는아이였기 때문에 그냥 각자에 맞게 반응을 했을 뿐이다. - P242

어떤 부모가 안 그렇겠냐만은, 나에 대한 엄마의 믿음은 신앙에가까운 측면이 있다. 정말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방치에 가까운 방목아니냐면서 내가 엄마를 놀리지만, 나도 알고 엄마도 안다. 그 방목이 아니었다면, 나는 울타리 안에서 영원히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울타리만 넘어가면 더 풍성한 풀밭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울타리 안에서 먹을 풀이 없다고 투덜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믿음은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고, 멀리멀리 떠나보낸다. 그래도된다는 용기를 준다. 내 맘대로 해도 결국 엄마는 나를 믿을 거니까. 엄마는 그럴 거니까. - P245

오스카 와일드 다음은 누구를 이야기하실까 궁금해하던 찰나, 최근 팀장님은 우리가 써간 카피를 보시고는 "너무 인문학이 많은거 같아."라고 하셨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채지 못하고 멍한 나에게 "요즘 스무 살처럼 써. 걔들은 이런 말투 아니야. 이런 논리로 말안 해, 인문학을 버려."라고 첨언을 하시더니 급기야 "인문학은 개뿔."이라는 말을 하셨다. 인문학으로 광고하시는 분의 입에서 "인문학은 개뿔"이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물론 그 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문학‘이 주어였으니 인문학으로 광고한 게 맞긴 맞지만,
팀장님은 ‘인문학으로 광고하신다. 그런 팀장님 밑에서 10년을일했다. 이러다가 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읽지 않은 책으로 카피 쓰는 방법‘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 P253

결국 잘 쓰기 위해 좋은 토양을 가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수밖에 없는 것이다. 잘 살아야 잘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나는 그런 인간인 것이다. ‘쓰다‘와 ‘살다‘는 내게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나는 이 문장 속에서도 언제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행이다. ‘다행이다‘라고 쓸 수 있어 진실로 다행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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