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의 제목은 "닥터 프랭클린: 시민 과학자"다. ‘닥터‘라는 직함이 가짜임을 알기에 빙긋 웃음이 나오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 대신 ‘시민 과학자" 부분에 집중한다. 매우 흥미로운 조합이다. 우리는 보통 이 둘을 나란히 놓지 않는다. 시민군 가능하다. 시민 케인? 있고말고. 하지만 시민 과학자? 겨우 1998년에 생겨난 이 용어는 크라우드소싱 연구를 의미한다. 시민 과학자의 다른 말은 ‘무임금 노동‘이다. 시민 과학자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다. 환경단체 어스워치Earthbranch‘와 함께 브라질 열대우림으로 원정을 떠났을 때였다. 여섯 명의 시민 과학자와 나는 기후변화를 막는 데 일조하고 싶은바람으로 브라질의 진짜 과학자들을 도와 열대우림에 나무를 심고 설치류의 건강 상태를 추적했다. 힘들고 궂은 일이었다. 설치류의 미끼를 탁구공 크기로 빚었는데, 바나나와 땅콩버터, 산패 - P192
한 고기를 질퍽하게 섞어 만든 이 미끼는 촉감과 냄새가 정확히여러분이 상상하는 그것과 똑같았다. 씨앗을 채집하고, 심고, 옮겨 심고, 물을 주고, 그밖에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는 뜻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씨앗과 함께했다. 평생 한 것보다 샤워를 더 많이 했는데도 평생 흘린 땀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다. 비정상적인 크기의 설치류를 비롯해 수많은 포유류의 무게를 달고 크기를 재고 사진을 찍었다. 포획 틀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겉은 딱딱하고 속은 끈적한 도마뱀 똥을 치웠다. - P193
그때 나는 내 몸으로 일했다. 그냥 일이 아니라 손톱 밑에 때가피고, 열대의 햇볕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모기가 코를 무는 그런고달픈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하고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미친소리로 들리겠지만) 돈을 내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정말로 정신 나간 부분인데) 이 일이 즐거웠다. 지극히 보잘것없지만 부인할 수 없는 방식을 통해 내가 이 세상을 더나은 곳으로 살짝 더 푸릇푸릇하고 시원하고 건강한 곳으로 만들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벤이라면 분명 나의 짧고 굵은 시민 과학자 생활을 칭찬했을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벤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길고 쓸모 있는 삶의 상당 부분을 시민이 아닌 대영제국의 자랑스러운 신민으로 살았다. ‘과학자‘는 18세기에는 존재하지 않던 단어였다. 프랭클린은 자연철학자였고 당시에는 자연철학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을 아울러 의미했다. 자연과 철학은 비록골치 아픈 결혼생활이었지만 아직 이혼하기 전이었다. - P193
다시 우리 둘만 남게 되자 내가 이저벨에게 묻는다. "만약 식민지 시대 미국으로 갈 수 있다면 누구와 점심을 먹고 싶으세요?" 프랭클린은 아니라고, 이저벨이 대답한다. "내가 보기에 프랭클린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에요." 나는 이저벨이 프랭클린을 비롯한 모든 역사적 인물을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난프랭클린의 여동생 제인과 먹을 것 같아요. 제인은 여성이라는이유로 집에 갇혀 있었어요. 만약 제인이 남자였다면 또 한 명의벤 프랭클린이 됐을 거예요." 제인 본인이 길었던 삶의 막바지에인정했듯이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 "수많은 보일과 클라크, 뉴턴이 그저 유리한 상황을 만나 적절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사에 무지한 채 보잘것없는 삶을 살다 죽었을 것이다." 벤 프랭클린의 초상화는 수십 개가 걸려 있지만 제인의 초상화는 단 한 개도 없다. 프랭클린이 살던 시대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도왔던 여성과 노예는 지금도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다. - P198
감정의 측면에서 나는 벌거벗음의 정반대에 있다. 내 몸은 크기와 스타일이 다양한 보호복으로 겹겹이 싸여 있다. 유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호복 중 하나다. 어찌나 몸에 꼭 맞는지 내10대 딸처럼 매우 섬세한 사람만 그 안을 꿰뚫어 보고 꼬집어 언급할 수 있다. 이 옷가지들은 전부 나를 구속하고 몸의 가동 범위를 제한한다. 사람들은 겹겹의 보호복 너머로 나를 만지기는커녕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이면 옷을 벗기가 더 쉽다. 외국인은 벤만큼 푸짐한 내 뱃살이나 수술 자국 같은 내 몸의 수많은 흠결을비판적으로 바라볼 확률이 덜하다. 내 감정의 흠결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들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다 한들 뭐 어쩌겠는가? 그냥 지나가면 될 일이다. - P257
좋은 삶이지만 완벽한 삶은 아니었다(삶은 완벽해지는 법이 없다). 크게 존경받는 미국인이었지만 어쨌든 미국인이었던 벤은 결국외부인이었고, 그것도 좋은 혈통이나 대학 졸업장이 없는 외부인이었다. 그는 런던 상류층의 유리창에 코를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봤지만 입장을 허락받지 못했다. 이 클럽의 회원에 가까웠지만결국 회원은 아니었다. 그가 스코틀랜드인 인쇄업자 윌리엄 스트레이핸(프랭클린은 그를 "스트레이니"라고 불렀다)이나 퀘이커교도 식물학자이자 전기 전문가 피터 콜린슨 같은 외부인과 어울린 것도당연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왕실 의사였던 존 프링글을 비롯한 진짜 의사도 많았다. 런던은 활기와 지적 자극이 가득했지만 안식처는 아니었다. 영혼의 장소가 아니었다. 벤은 이따금 한바탕 향수병을 앓았고 벤저민 웨스트 같은 예술가와 동료 식민지 대표 등 런던에서 점점존재감을 키워가는 다른 미국인들과 만나며 향수병을 달랬다. 그밖에도 영국 땅을 잠식한 미국의 식물들이 있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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