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일
맹감나무 열매가 파래지는 유월 아침이었다 개에게 아침을 먹이고 어르신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굴참나무 아래서 만나 산책에 나섰다
어르신이 먼저 늙은 개와 함께 앞장섰고 나는 아직 천방지축인 녀석을 데리고 뒤따랐다 이 개는 사람 나이로 치면 아흔이 넘어요, 늙은 개는 소나무 빽빽한 숲길에서도 개옻나무가 줄지어 선 오솔길에서도 산딸기 덤불이 우거진 모퉁이에서도 연신 코를 흠흠, 느리게 걸었고 어르신은 느긋하게 걸음을 맞췄다
성우씨, 매운 고추를 뭐라 하지요? 여기서는 땡초라하지 않나요? 어르신은 땡초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며 싱겁고 환하게 웃었다 - P72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늙은 개의 목줄을 잡고 걷던 어르신이 문득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남의 집 고구마밭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개를 세워두고 밭 안쪽으로 몇걸음 옮겼다 나온 어르신의 손에는 환삼덩굴이 들려 있었다 그냥 놔두면 무성한 가시 줄기를 거침없이 키워나갈 덩굴풀,
남의 집 밭고랑에 들어가 풀 한포기 뽑아 나오는 마음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아침이었다 - P73
매우 중요한 참견
호박 줄기가 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있다
느릿느릿 길을 밀고 나온 송앵순 할매가 호박 줄기 머리를 들어 길 바깥으로 놓아주고는
짱짱한 초가을볕 앞세우고 깐닥깐닥 가던 길 간다 - P104
머위
사는 게 씁쓸하니? 사는 일 허하니 속도 허하다
그래, 머위가 지천이다 몸 일으켜 밤나무 언덕에 올라 머위를 뜯는다 한걸음 오르려다 두걸음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머위를 뜯는다
두어줌 남짓 뜯어 온 머위, 물 보글보글 끓여 데친다 훅훅 올라오는 쌉싸래한 머위 냄새, 찬물에 씻어 둥글둥글 뭉친다
된장 한숟갈 풀어 조물조물 머위를 무친다 외롭다는 말이나 허망타는 푸념 따위도 조물조물 버무려 한입 먹어본다 간이 맞나? 짜지는 않고 짭조름하게 간을 잡아 버무린 머위를 두고 창을 열어본다 - P112
그래 뭐 별거 있간디, 맹숭맹숭 싱겁게 나를 달래기도 하면서 조바심 낼 일도 성화 부릴 일도 없이 사는게 마땅찮다고 혀를 잘 일도 없이
머위 빛깔 초저녁이 마당으로 든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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