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들은 희끗하게 얼어 있었다. 뒤축이 닳은 구두가 자꾸 미끄러졌다. 중심을 잡기 위해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두 손을 뺐다. 날카로운 바람이 손등을 깎았다. 금세 붉어진 주먹을 쥐고 나는 계속걸었다. 버스 정류장의 대가 여남은 걸음 앞으로 다가왔을 때,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꿈의 다른 정황은 흐릿해 잡히지 않고, 하얗고 목이 긴 새 한 마리가 마른 땅 위에 서 있던 것만 떠올랐다. 새가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부터 흰빛이 빠져나갔다. 내 눈앞에서 새의 목 아래까지 투명해졌다. 흰 날갯죽지로 덮인 몸뚱이 아랫부분과 가늘고 긴 두 개의 다리만 남았다. 이제 더 노래하면 완전히 투명해지겠구나, 생각하다 눈을뜨자 깊은 밤이었다.
투명하게 사라져버린 새를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입김으로 손등 - P7

을 덥히며 정류장의 푯대 뒤에서 발을 구르는 동안, 그걸 만져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차가운 공기를 갑자기 두려워졌다.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게 그런 노래라는 걸 알려주는 꿈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는 더 이상 흰 새가 아니게될까. 차갑고 텅 빈 공기가 될까.
상관없어.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흰 새로 사는 것, 좋지도 않았으니까.
마을버스가 다가와 멈춰 섰다. 앞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손잡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훈기로 흐려진 안경알을닦기 위해 안경을 벗었다. 모든 것의 윤곽이 일제히 뭉개어졌다.
후회하지 않을 거다. - P8

나는 침묵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침묵할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을갖기 위해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면어깨를 주무르며 오디오를 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두 손을 뻗어빛을 쬐듯, 한 끼니의 따뜻한 밥을 먹듯, 침묵의 연하고 막막한 파장속에 몸을 담근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 정적을 견디기 어렵다. 그렇다고 음악을 들을 수는 없다. 나를 놓고 싶지 않다. 지금은, 나를 놓아서는 안 된다. 나는 팔을 뻗어 책장을 더듬는다. 책을 꺼낸다. 이런 순간에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 - P17

나는 먹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잇닿은 두 벽면에 모두 다섯 점의그림이 걸려 있었다. 거대하고 검은 밤하늘에서 크고 작은 별들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별은 손바닥만큼 작아, 먹을 입힌 이백호의 장지가 무한하게 깊고 어두워 보였다. 다섯번째 그림에 이르러나는 걸음을 멈췄다. 비교적 작은 백 호쯤의 그림이었다. 역시 먹을입힌 이합 장지였지만 흰 별 대신 푸른 별의 불꽃이 번져 있었다. 삼촌이 하던 작업과 방식은 비슷해 보였지만 분명히 달랐다. 먹의 가장자리 선만 남고 온전히 푸른색이 드러난 별의 형상이었다.
이해하기 위해 나는 거기 서 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 때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 대상을 보고, 들여다보고, 또 본다. 대체 이것들은 뭘 의미하는 건가. 이 작업들에 바쳐진 인주의 일 년은 마지막이 되어버린 일 년은. - P30

납작함 속에서 치열하게, 납작함 속에서 안이하게, 납작함 속에서 웃고 말하고 병들고 춤춘다. 납작한 세계의 안쪽을 땀 흘리며 껴안는다. 죽음의 순간까지, 아니, 죽음 뒤에도 육체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다만 시선과 생각들, 의식들만이 이상한 생명처럼, 혼령처럼성운 사이의 텅빈 어둠 속을 헤엄쳐 다닌다.
지금 내 생각을 들었다면 삼촌은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입가의 주름을 여러 겹으로 파이게 하는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무언가를수줍어하거나 미안해하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이제는 아니지... 보이저호가 있으니까.
1978년 우주 공간으로 진수된 보이저호가 해마다 보내온 사진들이신문들과 과학잡지에 컬러 화보로 실리면, 삼촌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오려 작업실 책상 앞에 붙여놓곤 했다. 그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감동이나 충격을 받은 일은 오히려 되도록 말하지않았다. 그 사진들 앞에 말없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꼭 한 번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오십 년 안에 보이저호는 태양계를 벗어날 거야. 그때부턴 별들 사이의 무한하고 텅 빈 공간 속으로 끝없이 나아가겠지. ...... 그렇게 은하의 중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쯤이면, 지구에선 수억년이 흘러 있겠지. - P39

삼촌으로부터, 그리고 삼촌이 읽던 책들로부터 배운 바에 따르면, 우주의 시작은 양자역학적인 물리량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뒤를따질 수 있는 고전적인 시공간은 태초 이전에는 무의미하다. 고전적인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주의 에너지는 0이지만, 시공간은 양자역학적 혼돈 상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확률적 순간, 에너지의 벽을 뚫은 시공간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적용된다. 오랜혼돈이 갈라지고 천지가 창조되는 짧은 시간, 우주는 급팽창하고 물질이 생성된다. 놀랍도록 신화에 가깝게, 플랑크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10초, 그 찰나의 찰나에. - P44

나는 1970년 11월 27일생이다. 거기서 아홉 달을 소급해 내 부모가 몸을 섞었고, 어느 확률적 순간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포 하나가 분열되며 급팽창했을 것이다. 물질의 벽을 뚫고 생명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처음 내 생일을 삼촌에게 말했을 때, 삼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책장에서 두툼한 화집 한 권을 꺼내 왔다. 날카로운 책장에 손을 베이지 않기 위해 삼촌은 면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겼다.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야.
삼촌은 말했다.
190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브루클린으로망명했고, 1970년 2월 25일에 죽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죽던 날을 전후해서 너는 처음 생겨났겠구나.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해.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 P45

가게를 정리할 무렵 어머니가 얻은 무릎 관절염은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아버지를 먼저 여읜 뒤 오빠의집에서 조카들을 키우며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가 주름진 손을 잡을때면 나는 은밀한 고통을 느꼈다. 늙어가는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진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전화기를 움켜쥐고 ‘빨리, 신문지 갖고 와라! 아주 많이!‘라고 울부짖던 어린아이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가정의 평화, 아들들의 출세. 딸의 행복한 결혼. 오순도순한노부부의 말년. 종내에는 무릎을 무너뜨려 계단조차 오르내릴 수 없게 만든 삶을 그녀는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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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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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는 달다


바다 오후 두시
쪽빛도 연한
추봉섬 봉암바다
아무도 없다.
개들은 늙어 그늘로만 비칠거리고
오월 된볕에 몽돌이 익는다.
찐빵처럼 잘 익어 먹음직하지
팥소라도 듬뿍 들었을 듯하지

천리향 치자 냄새
기절할 것 같네 나는 슬퍼서.
저녁 안개 일고 바다는 낮 붉히고
나는 떨리는 흰 손으로 그대에게 닿았던가
닿을 수 없는 옛 생각
돌아앉아 나는 소주를 핥네.

바람 산산해지는데
잔물은 찰박거리는데 아아

어쩌면 좋은가 이렇게 마주 앉아
대체 어쩌면 좋은가.
살은 이렇게 달고
소주도 이렇게 다디단
저무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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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내가 눈을 치우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눈을 치우는 거다
눈을 치우는 줄도 모르고
눈을 치워주는 눈사람
택배 오토바이도 가고
폐지 수레도 가고
빙판이 아찔한 구두들도
지나가라고
내가 눈을 뭉치는 게 아니라
눈사람이 나를 뭉치는 거다

눈을 쓴다

오늘은 빗자루가 펜
백지를 넘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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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나기전 두 분이 함께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이 함께 늙어가며 계속 살아가는 상상의 미래까지 이어지는 연대기다. 현실에서 제이비의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있고 이모들도 살아 있지만, 이 그림들 속에는 서른여섯 살 때 돌아가신 제이비의 아버지도 있다. 연작은 열여섯 점이고, 그중 다수는 제이비의 전작들보다 크기가 작다. 그는 제이비의 스튜디오에 걸린 이 가족 판타지 장면들 -사과 씨를 파내고 있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샌드위치를 만드는 어머니,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는 일흔 살의 아버지와 그뒤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다리만 보이는 어머니- 을 보면서 자기의 삶 역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모습일 수 있었는지를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윌럼과 살던 시절에서 가장 그리운 순간이 바로 그런 장면들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같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순간들이지만,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부재의 순간들.
- P364

초상화 사이사이에는 제이비 부모님의 생활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물건들을 그린 정물화들이 있었다. 침대 위의 베개 두개. 베개들은 숟가락 뒷면으로 굳은 아이스크림 위를 꾹꾹 누르면서 지나간 것처럼 살짝 눌려 있다. 커피잔 두 개. 그중 한 개의 가장자리에는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연하게 묻어 있다. 10대의 제이비와 아버지 사진이 들어 있는 사진 액자 하나. 제이비가 등장하는 유일한 그림이다. 이 그림들을 보면 그는 제이비가 함께하는 생활을, 윌럼과 함께한 그의 생활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했는지에 생각이 미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의 아파트에 있는 모든 물건들 아직도 세탁 바구니 테두리에 걸쳐져 있는 윌럼의 바지, 욕실 세면대 위 유리잔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윌럼의 칫솔, 사고 때 유리가 깨어진 채로 손도 안 대고 협탁 위에 - P364

올려둔 윌럼의 시계은 그만이 읽을 수 있는 룬 문자로 이루어진 토템이 됐다. 랜턴 하우스의 침대 옆 윌럼의 협탁은 의도치 않게 윌럼에게 바치는 일종의 사당이 됐다. 그 위에는 윌럼이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컵과 최근 쓰기 시작한 검은 테 안경이 고스란히 있고, 읽고 있던 책이 여전히 그가 두고 간 모양 그대로 거꾸로 펼쳐져 있다.
"아, 제이비." 그는 한숨을 쉬었고, 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비는 그래도 고맙다고 했다.
이제 그들은 같이 있을 때 별로 말이 없었다. 제이비 자체가 변한 건지, 아니면 그와 함께 있을 때 모습이 변한 건지 그는 알수가 없었다. - P365

그는 윌럼이 해석한 자신을 절대 진심으로 믿을 수 없었다. 윌럼은 그가 용감하고 재주 있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월럼에게 사기라도 치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윌럼이 묘사하고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심지어 그의 고백조차 윌럼의 인식을 바꿔놓지 못했다. 사실 그 고백은 그에 대한 윌럼의 존경심을 더 높여준 것 같았고, 그건 절대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위로는 됐다. 납득은 못 해도 누군가그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그의 인생을 의미 있는 걸로 봐준다는 건 어쩐지 힘이 됐다.
윌럼이 죽기 전 봄, 그들은 몇몇 사람들-그냥 그들 넷과 리처드, 아시안 헨리 영을 불러 저녁 모임을 가졌다. 맬컴과 소피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맬컴은 가끔씩 후회에 시달렸고, 그러면 다들 그들은 애초부터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고 상기시켜주었다. 그날은 맬컴이 그런 후회에 빠져 있던 때였다. "난 궁금해. 아이들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다들 그런 걱정 안 돼? 우리 인생이 의미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는거지?" - P381

인생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안달복달하지 않았지만, 왜 자기가, 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지는 늘 궁금했다. 때로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 수백만, 수십억의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는 비참 속에서, 터무니없이 극단적인 궁핍과 질병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다들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간다. 그러니 삶을 계속 살아나가는 결의는 선택이 아니라 진화적 완성이 아닐까? 마음 그 자체에 힘줄처럼 질기고 상처투성이인 뉴런 무리가 있어서 논리가 그렇게 자주 주장하는 바를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본능이 절대 틀리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한 번 본능을 극복한 적있다. 하지만 그 후 그 본능은 어떻게 되었을까? 약해졌을까, 아니면 더 유연해졌을까? 계속 살기를 선택할 정도로 그의 삶이 자기 것일까? - P383

이제 그는 그들을 위해 살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그 드문 이타심이야말로 결국 그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왜 자기가 살아 있기를 원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았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결국에는 만족을, 심지어 즐거움까지 재발견하게 됐다. 하지만 그게 시작은 아니었다.
이제 다시 한 번 사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매일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불가능해진다. 그의 나날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시커멓게 죽어가는 그 나무에는 가지 하나가 허수아비의 유일한 의족처럼 오른쪽으로 튀어나와 있고, 그는 그가지에 매달려 있다. 머리 위에서는 비가 늘 안개처럼 흩뿌리고있어서 가지가 미끄럽다. 피곤해 죽을 지경이지만, 아래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멍이 나 있어서 그는 매달려 있다. 손을 놓으면 그 구멍 안으로 떨어질 테니까 뻣뻣하게 굳은채 매달려 있지만, 결국에는 손을 놓을 거라는 걸 안다. 놓아야한다는 걸 안다. 너무 고단하다. 한 주,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손아귀 힘이 조금, 아주 조금씩 약해진다. - P384

적어도 거짓말 하나는 진실이다. 정말로 일이 너무 많다. 한달 뒤 항소심이 있고, 그는 로젠 프리처드에서, 이제껏 어떤 나쁜 일도 벌어진 적 없는 로젠 프리처드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안도한다. 그곳에서는 심지어 윌럼마저 그 예측 불가능한 출현으로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어느 날 밤에는 산제이가 그의 사무실 앞을 황급히 지나가며 혼자 중얼거려서ㅡ "젠장, 그 여자가 날 죽일 거야" ㅡ 고개를 들어보니 밤이 아니라 벌써 낮이고, 허드슨 강이 끈적끈적한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있다. 그걸 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의 인생이 정지된다. 여기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어디든갈 수 있다. 원하는 만큼 늦게까지 있을 수 있다. 누구도 그를기다리지 않고, 그가 전화하지 않아도 누구도 실망하지 않고, 집에 가지 않아도 누구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 P385

이번에는, 처음으로 정말로 로이만 박사와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의 질문들에 답하고, 정직하게 답하려고 애쓴다. 전에 딱 한 번만 했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너무 힘들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이야기할 때마다 윌럼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애너처럼 그를 바라봐준 사람, 그를 직시하면서도 그걸 넘어서 봐준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을 완전히 봐준 사람과 있었다. 그러자 숨이 가쁘고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어그는 휠체어 ㅡ다시 의족을 차고 걸으려면 아직 2, 3킬로그램이 모자란다ㅡ를 휙 돌리고는 실례한다고 말한 후 로이만의 진찰실에서 나가 복도를 달려 화장실로 간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으로 심장을 달래려는 듯이 가슴을 문지른다.  - P401

루크 수사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잡혀가지 않았다면. 케일럽을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더라면. 애너 말을 좀 더 들었더라면.
그는 계속한다. 머릿속에서 비난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윌럼을 절대 만나지 못했더라면. 해럴드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줄리아나 앤디나 맬컴이나 제이비나 리처드나 루시엔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로즈와 - P401

시티즌과 페드라와 일라이저를 헨리 영들과 산제이를. 가장 끔찍한 ‘만약‘들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좋은 ‘만약‘들도 마찬가지다.
드디어 그는 마음을 진정하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떠나도 된다는 건 안다. 엘리베이터는 저기 있다. 아메드 씨를 보내 코트를 가져오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대신 방향을 바꿔 진찰실로 돌아간다. 로이만 박사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주드." 로이만 박사가 말한다. "돌아왔군요."
그는 심호흡을 한다. "네, 있기로 했어요." - P402

때로는 우리가 관계를 거꾸로 살고 있는 것 같았어. 난 점점걱정을 덜 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많이 주드 걱정을 하고 있었어. 해가 갈 때마다 주드의 허약함이 더 의식됐고, 내 능력에 확신이 없어졌어. 제이컵이 아기였을 때는, 걔가 한 달 더 살 때마다 더 확신이 들었어. 이 세상에서 더 오래 살수록 삶에 더 깊이닻을 내릴 것 같았지. 마치 살아 있다는 것으로 삶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어.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지만. 하지만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 삶이 삶을 구속한다는 거 말이야. 하지만 어느 시점 시점을 잡아야 한다면 케일럽 이후부터 난주드가 꼭 열기구를 타고 있는 것 같았어. 긴 밧줄로 땅에 고정되어 있는 열기구 말이야.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 기구가 하늘로 날아가려고 해서 그 줄이 점점 더 팽팽해지는 거지. 아래에서는 우리가 기구를 다시 땅으로 잡아당기려고, 다시 안전한 곳으로 가져오려고 기를 쓰고 있고, 그래서 난 늘 주드 때문에 겁이 났고, 주드가 늘 겁이 났어. - P409

무서워하는 사람과 진짜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물론 넌 할수 있어. 하지만 난 여전히 주드가 무섭다. 힘을 가진 사람이 주드고, 난 없으니까, 주드가 죽어버린다면, 자의로 내게서 떠나버린다면, 살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런 생존은 지루한 일일 뿐일 거야. 그러고 나면 난 영원히 설명을 찾아 헤맬 테고, 과거를이 잡듯이 뒤지며 내 실수를 검사하게 되겠지. 물론 주드가 너무나 그리울 거야. 영원히 떠나버리기 전 그걸 위한 시운전 시도들이 있었지만, 난 그 상황들을 다루는 데 결코 더 능숙해지지 않았고, 절대로 거기 익숙해질 수 없었어. - P409

주드는 널 그리워했어. 나도 네가 그리웠다. 우리 다 그랬어. 이건 알아줘, 네가 주드를 더 좋게 만들었기 때문에 네가 그리웠던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좋아하는 일들을하던 걸 즐겁게 봤던 게 그리웠어. 음식을 먹던 모습, 테니스공을 치려고 쫓아가던 모습, 수영장에 뛰어들던 모습, 다. 너와 이야기하던 게 그리웠어. 네가 방 안을 돌아다니던 모습이, 로런스의 증손자들한테 깔려 잔디밭에 누운 채 무거워서 못 일어나는 척하던 게 그리웠어. (그날 로런스의 막내 증손자, 널 짝사랑했던 애가 민들레를 엮어 팔찌를 만들어줬는데, 넌 고맙다며 그걸 하루 종일 차고 다녔고, 네 손목에 걸린 팔찌를 볼 때마다 그애는 달려가 아빠 등에 얼굴을 묻었지. 그것도 그립구나.) 하지만 무엇보다 너희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게 그리웠어. 네가 주드를 보고, 주드가 널 보던 모습이. 서로를 늘 배려해주던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진심으로 다정하던 그 모습이 서로의 이야기를 너무나 열심히 경청하던 모습이 너무 그리웠어. 제이비의 그림 <주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윌럼>은 정말 진짜였어. 딱 그 표정이었지. 제목을 보기도 전에 난 그림 속에서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 - P413

주드가 내게 어떤 존재가 될지는 절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날 어떻게 떠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내 모든 희망과 애원과 암시와 위협과 마법 같은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난 알고 있었어. 5개월 후인 6월 12일, 어떤 기념일과도 관계없는 아무것도 아닌 날, 주드는 떠났어. 전화가 울렸고, 불길한 밤 시간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전조로 돌이켜볼 어떤 일도 없었는데,
난 알았어. 전화기 너머에서는 제이비가 폭발하듯 가쁘게, 이상하게 숨을 쉬고 있었고, 그가 말도 하기 전에 난 알았지. 주드는쉰셋이었어. 쉰셋이 된 지 2개월도 되지 않았지. 동맥에 공기를주사해서 뇌졸중을 일으켰다더군. 앤디는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이었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온라인에서 찾아보니 거짓말이었어. 벌새 부리 정도는 되는 굵기의 바늘로 적어도 두 번은 찔러야 하는 거였어. 엄청나게 괴로웠을 거야. - P422

그로부터 몇 주는 더 지나고서야 난 마침내 식탁 위에 남겨둔 우리 몫의 편지를 읽을 수 있었어. 그전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 지금도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읽었어. 루크 수사에 대해, 트레일러 박사에 대해, 주드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타이핑한 여덟 페이지짜리 고백이었지. 우리가 그 편지를 다 읽는 데는 여러 날이 걸렸어. 짧았지만 끝없는 이야기였고, 우린 읽다가 편지를 놓고 어디 멀리 갔다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ㅡ준비됐어?ㅡ 다시 앉아 읽었어.
"미안해요." 그 글은 그렇게 시작됐지. "부디 용서해줘요. 절대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아직도 그 편지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그 편지를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난 주드가 누구며 왜 주드인지에 대해 그 모든 대답들을 원했지만, 이제 그 대답들은 오로지 고통스럽기만 하다. 주드가 그렇게 혼자서 죽었다는 걸 생각 - P425

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주드가 우리에게 사과해야 한다고생각하며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 주드가-너를만나고, 나를 만나고, 그를 사랑한 우리 모두를 만나고도-자신에게 가르친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철썩같이 믿으며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내 인생도 결국 실패였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에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럴 때면 난늦은 밤 아래층에 내려가 <주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윌럼> 앞에 서서 너한테 이야기하지. "윌럼." 난 네게 물어. "너도 이런기분이니? 주드가 나와 행복했다고 생각해?" 주드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어. 행복을 보장받는 사람은 없지. 모두 다 그래. 하지만드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어. 하지만 넌 내게가 아니라 내뒤의 누군가에게 미소를 지을 뿐이고 아무 대답도 들려주지 않아. 그럴 때면 내세 같은 걸 믿고 싶어져.  - P426

우리한테 다리가 아니라 꼬리가 있어서 바다표범처럼 대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공기자체가 무수한 단백질과 설탕 분자로 이루어진 자양물이어서그저 입만 벌리고 흡입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조그만 빨간행성 같은 곳, 다른 우주. 너희 둘은 거기서 함께 대기 속을 떠다니고 있을 거야. 아니면 주드는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지. 요새 우리 옆집 바깥에 앉아 내가 손을 뻗으면 가르랑거리는 저회색 고양이일지도, 어쩌면 다른 이웃이 잡고 있는 저 강아지일지도, 몇 달 전 뒤에서 뭐라 하며 쫓아오는 부모님은 아랑곳 않은 채 기쁨에 겨워 깩깩거리며 광장을 뛰어다니던 그 걸음마쟁이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한 저 철쭉 덤불에 갑자기 피어난 꽃일지도, 저 구름, 저 파도, 저비, 저 안개일지도 몰라. 주드가 죽었다거나 어떻게 죽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을 믿으며 죽었는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 그래서 - P426

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친절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모든것들에서 주드를 봐.
하지만 그때,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 서 있을 때는 이런 걸 몰랐어. 그때 우린 그냥 서서 그 붉은 벽돌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난 주드 때문에 두려워해야 할 필요 없는 척하고 있었고, 그는 그런 척하는 나를 봐주고 있었지. 주드가 저지를 수 있었던 그 모든 위험한 일들, 내 가슴을 찢어놓을 수도 있었던 그온갖 방법들은 이야깃거리인 과거 속에 있었고, 우리 뒤에 놓인 시간은 무서웠지만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은 그렇지 않았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난 주드 말을 되풀이했어. "도대체 그런 짓을 왜 했는데?"
"긴 이야기예요." 그는 심지어 싱긋 웃으며 말했어. "이야기해드릴게요."
"그러렴." 난 말했어.
그리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어.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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