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블록들은 희끗하게 얼어 있었다. 뒤축이 닳은 구두가 자꾸 미끄러졌다. 중심을 잡기 위해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두 손을 뺐다. 날카로운 바람이 손등을 깎았다. 금세 붉어진 주먹을 쥐고 나는 계속걸었다. 버스 정류장의 대가 여남은 걸음 앞으로 다가왔을 때,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랐다.
꿈의 다른 정황은 흐릿해 잡히지 않고, 하얗고 목이 긴 새 한 마리가 마른 땅 위에 서 있던 것만 떠올랐다. 새가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부터 흰빛이 빠져나갔다. 내 눈앞에서 새의 목 아래까지 투명해졌다. 흰 날갯죽지로 덮인 몸뚱이 아랫부분과 가늘고 긴 두 개의 다리만 남았다. 이제 더 노래하면 완전히 투명해지겠구나, 생각하다 눈을뜨자 깊은 밤이었다.
투명하게 사라져버린 새를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입김으로 손등 - P7

을 덥히며 정류장의 푯대 뒤에서 발을 구르는 동안, 그걸 만져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차가운 공기를 갑자기 두려워졌다. 이제부터 내가 쓰려는 게 그런 노래라는 걸 알려주는 꿈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나는 더 이상 흰 새가 아니게될까. 차갑고 텅 빈 공기가 될까.
상관없어.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흰 새로 사는 것, 좋지도 않았으니까.
마을버스가 다가와 멈춰 섰다. 앞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손잡이를 한 손으로 붙잡고, 훈기로 흐려진 안경알을닦기 위해 안경을 벗었다. 모든 것의 윤곽이 일제히 뭉개어졌다.
후회하지 않을 거다. - P8

나는 침묵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침묵할 수 있는 공간과 약간의 돈을갖기 위해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면어깨를 주무르며 오디오를 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두 손을 뻗어빛을 쬐듯, 한 끼니의 따뜻한 밥을 먹듯, 침묵의 연하고 막막한 파장속에 몸을 담근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 정적을 견디기 어렵다. 그렇다고 음악을 들을 수는 없다. 나를 놓고 싶지 않다. 지금은, 나를 놓아서는 안 된다. 나는 팔을 뻗어 책장을 더듬는다. 책을 꺼낸다. 이런 순간에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 - P17

나는 먹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잇닿은 두 벽면에 모두 다섯 점의그림이 걸려 있었다. 거대하고 검은 밤하늘에서 크고 작은 별들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별은 손바닥만큼 작아, 먹을 입힌 이백호의 장지가 무한하게 깊고 어두워 보였다. 다섯번째 그림에 이르러나는 걸음을 멈췄다. 비교적 작은 백 호쯤의 그림이었다. 역시 먹을입힌 이합 장지였지만 흰 별 대신 푸른 별의 불꽃이 번져 있었다. 삼촌이 하던 작업과 방식은 비슷해 보였지만 분명히 달랐다. 먹의 가장자리 선만 남고 온전히 푸른색이 드러난 별의 형상이었다.
이해하기 위해 나는 거기 서 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할 때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그 대상을 보고, 들여다보고, 또 본다. 대체 이것들은 뭘 의미하는 건가. 이 작업들에 바쳐진 인주의 일 년은 마지막이 되어버린 일 년은. - P30

납작함 속에서 치열하게, 납작함 속에서 안이하게, 납작함 속에서 웃고 말하고 병들고 춤춘다. 납작한 세계의 안쪽을 땀 흘리며 껴안는다. 죽음의 순간까지, 아니, 죽음 뒤에도 육체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다만 시선과 생각들, 의식들만이 이상한 생명처럼, 혼령처럼성운 사이의 텅빈 어둠 속을 헤엄쳐 다닌다.
지금 내 생각을 들었다면 삼촌은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입가의 주름을 여러 겹으로 파이게 하는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무언가를수줍어하거나 미안해하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이제는 아니지... 보이저호가 있으니까.
1978년 우주 공간으로 진수된 보이저호가 해마다 보내온 사진들이신문들과 과학잡지에 컬러 화보로 실리면, 삼촌은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오려 작업실 책상 앞에 붙여놓곤 했다. 그는 호들갑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깊은 감동이나 충격을 받은 일은 오히려 되도록 말하지않았다. 그 사진들 앞에 말없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꼭 한 번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오십 년 안에 보이저호는 태양계를 벗어날 거야. 그때부턴 별들 사이의 무한하고 텅 빈 공간 속으로 끝없이 나아가겠지. ...... 그렇게 은하의 중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쯤이면, 지구에선 수억년이 흘러 있겠지. - P39

삼촌으로부터, 그리고 삼촌이 읽던 책들로부터 배운 바에 따르면, 우주의 시작은 양자역학적인 물리량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뒤를따질 수 있는 고전적인 시공간은 태초 이전에는 무의미하다. 고전적인 우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우주의 에너지는 0이지만, 시공간은 양자역학적 혼돈 상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다.
그러던 어느 확률적 순간, 에너지의 벽을 뚫은 시공간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적용된다. 오랜혼돈이 갈라지고 천지가 창조되는 짧은 시간, 우주는 급팽창하고 물질이 생성된다. 놀랍도록 신화에 가깝게, 플랑크의 시간이라고 불리는 10초, 그 찰나의 찰나에. - P44

나는 1970년 11월 27일생이다. 거기서 아홉 달을 소급해 내 부모가 몸을 섞었고, 어느 확률적 순간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포 하나가 분열되며 급팽창했을 것이다. 물질의 벽을 뚫고 생명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처음 내 생일을 삼촌에게 말했을 때, 삼촌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책장에서 두툼한 화집 한 권을 꺼내 왔다. 날카로운 책장에 손을 베이지 않기 위해 삼촌은 면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겼다.
마크 로스코라는 화가야.
삼촌은 말했다.
1906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가족과 함께 브루클린으로망명했고, 1970년 2월 25일에 죽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죽던 날을 전후해서 너는 처음 생겨났겠구나.
나는 잠자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의 가운데가 분할되었고, 서로 다른 색채의 커다란 사각형 두 개가 바탕색을 향해 번지며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색채가 번지게 하기 위해서, 붓 대신 스펀지를 쓰기도 했다고해.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놀랐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 P45

가게를 정리할 무렵 어머니가 얻은 무릎 관절염은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아버지를 먼저 여읜 뒤 오빠의집에서 조카들을 키우며 지내는 어머니를 찾아가 주름진 손을 잡을때면 나는 은밀한 고통을 느꼈다. 늙어가는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진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전화기를 움켜쥐고 ‘빨리, 신문지 갖고 와라! 아주 많이!‘라고 울부짖던 어린아이가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가정의 평화, 아들들의 출세. 딸의 행복한 결혼. 오순도순한노부부의 말년. 종내에는 무릎을 무너뜨려 계단조차 오르내릴 수 없게 만든 삶을 그녀는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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