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이런 거짓도 있다. 아빠 돌아가시던 날, 막내 외삼촌에겐 두 가지 미션이 있었다. 늦은 밤 병원 주차장에 세워진삼촌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린 자매를 집에 데려다놓고 앨범에서 매형의 영정 사진을 꺼내올 것. 그리고다음날 사돈어르신(할머니)과 어린 조카들을 빈소로 다시 데려올 것. 그날 밤 나는 눈에 졸음이 가득한 채로 가족 앨범이어디 있냐고 묻는 삼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돈어르신오늘은 일단 주무세요. 자세한 사정은 내일 말씀드릴게요. 그런 말들이 차례로 오가던 것을 기억한다. 진실을 유예하는 - P36

것도 거짓의 일종일까. 결국 삼촌은 할머니가 빈소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아빠의 죽음을 선고하지 않았다. 할머니라고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어느 쪽도 먼저 말하거나 듣지 않은 채로 건너온 그 하룻밤이 내게는 일생일대의 거짓으로 남아 있다. 그 밤, 우리가 머문 곳은 비눗방울로 만들어진 방공호 안이었다. 곧 터져버릴것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안전했다. 돌아오지 않는 막내아들을 불안 속에서 기다렸을 할머니도, 앨범 위치를 묻는 삼촌말에 아빠의 죽음을 직감했다는 겨우 열 살짜리 언니도, 혼곤한 잠에 빠져 있던 어린 나도 그 밤만큼은 거짓의 비호를받았다. 그다음은 예견된 대로였다. 밀려들었고, 휩쓸렸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떠내려갔다. - P37

거짓의 쓸모를 필요와 불필요로 단순하게 가를 수는 없을것이다. 거짓에는 수천수만의 층위가 있음을 삶이 내게 가르쳐주었으니까. 어떤 거짓은 붉고 어떤 거짓은 서글프다. 어떤 거짓은 축축하고 어떤 거짓은 창백하다. 악랄하고 섬뜩한 거짓 앞에선 몸이 굳기도 할 테지만 귀여운 거짓 앞에선 사랑이 건너가기도 할 것이다. 맥주를 마실 수는 없지만 맥주 - P37

한 모금이 절실한 사람에게 논알코올맥주의 존재는 진실을능가하는 거짓이듯이.
고백하자면 딱 한 번, 논알코올맥주를 사 마신 적이 있다. 밤길이 자꾸 나를 유년의 골목으로 데려다놓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던, 어느 쓸쓸했던 밤의 귀갓길에서 말이다. - P38

다만 무언가를 먹는 일이 그것을 잘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사인 시인의 시 「먹는다는 것」(「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에 이런 구절이 있다. 먹는다는 것은 "내 안을 허락하는 행위인 동시에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몸 너머 영혼 속에까지 너를 들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입을 탐욕스럽게 벌리겠지만, "먹는다는 것은 먹힌다는 것"인 까닭에 "죽음처럼 아찔한 기억을 남긴다고,
나는 내 입안으로 들어온 그 아찔한 죽음들을 잊지 않으려한다. 굴을 먹는다는 건 굴을 둘러싼 바다를, 굴의 탄생과 슬픔, 그늘과 가난까지를 끌어안는 일, 내 몸은 수많은 죽음의 정거장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오늘도 식탁에 앉는다.  - P65

칼라디움은 꽃은 거의 피지 않고, 대신 잎의 아름다움을마주하는 관엽식물이다. 개량된 것까지 포함하면 수천 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잎의 색과 모양이 워낙 다채롭기로유명한데 붉은 기가 강하게 도는 것도 있고 허여멀건 창백한쪽도 있다. 처음에는 잎의 아름다움에 홀린 것이 맞지만 여러 날을 함께하다보니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칼라디움은 정말 예민하다는 것. 잎 하나가 지면 잎 하나가 반드시나는데 새 줄기는 이전 줄기 안에서 줄기를 가르며 올라온다는 것. 그걸 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안에 있어. 바깥이아니라 안에 있어.
내게 없는 것을 밖에서 억지로 구할 때마다 칼라디움은 말했다. 애쓰지 마. 결국엔 흘러가게 되어 있어. 그건 하엽 지는 시간이란다.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져요.

지난겨울 언니와 나는 짬을 내어 공주를 찾았다. 길게는아니고 다른 일로 지방을 다녀오던 길에 반나절 정도 잠시선로를 이탈한 것이다. 이번 공주 방문에는 소기의 목적이있었다. 이름하여 아바타 여행. 우리 자매를 뒤에서 조종한이는 다름 아닌 엄마였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공주는 엄마와 아빠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이자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잡고 달밤을 걷다 평생이고자 약속한 곳. 그로부터 사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시간의 증거인 두 딸은 엄마 아빠의 가장 예뻤을때를 만나러 물살을 거슬러오른 것이었다.
언니와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교대 정문으로 들어가면사제동행상이 있으니 일단 거기서 사진을 한 장 찍어. 정문둥지고 왼편에 음악실이 있었어. 음악실에서 풍금 연습하고시험도 보고 그랬었는데 생각해보니 아빠를 거기서 처음 만났어. 풍금 시험 낙제해서 재시험 보러 온 몇 학번 위 선배들이 있었는데 아빠가 그중 하나였던 것 같아. - P19

그날 밤의 차창에서 마주한 것은 내 부모의 그러한 시절이었다. 몸은 반환점을 돌아 기차에 실려왔으나 마음은 아직그곳에 남아, 어떤 고통에도 침식당하지 않고 침식당해서도안 되는 얼굴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그땐 살아 있었던 아빠를.
이 악물고 운동장을 달리던 엄마를.
풍금 재시험을 보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온 무리 속에서 두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저 먼 우주로부터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을 때. - P23

첫 캔은 식전주 느낌으로 써머스비나 버니니 레몬이 좋지. 두번째 캔은 향긋한 IPA. 세번째 캔은 역시 깔끔한 라거여야 할 테고, 마무리는 부드러운 흑맥주로화룡점정을 이루리라.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2분. 가끔은 그 2분이 못 견디게 길어 골목에서 맥주캔을 따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다. 목이 말랐던 건지 하루가 말랐던 건지. 그럴 때 맥주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이다. 기쁜날에도 슬픈 날에도 맥주는 맥주로서 맥주의 일을 한다. 맥주의 쓸모에 대해서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쓸모,쓸모는 내게 무척 중요한 단어다. 
용도, 기능, 소용등 유의어는 여럿이지만 쓸모는 그중에서도 가장 품이 넓은 단어 같다. 호주머니의  쓸모, 울타리의 쓸모, 침묵의 쓸모, 밤의 쓸모......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쓸모가 있고 그것을일깨우는 것이 쓸모의 쓸모다. 시인에게도 쓸모는 있을 것이다. 시인의 쓸모를 생각하면 이런 문장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로 햇빛 때문이랍니다. 봄 햇살을 잘 받을 수 있는 남쪽 방향으로 향한 겨울눈의 생장호르몬이 더 왕성하게 분비되어 더욱 빨리 자라나 벌어지게 되니 자연스레 꽃봉오리가 북쪽을 향해 굽은 것이지요. 알고 보면 간단한일이죠.
백목련의 꽃봉오리 방향을 한번쯤 눈여겨보는 일, 혹은 백목련과 목련을 구별해 보는 일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얀 꽃이 피는목련 종류도 있지만 꽃잎의 겉만 자줏빛이고 안은 하얀 자목련‘이나겉과 안이 다 자줏빛인 자주목련‘ 도 요즘 많이 피어나지요. 우리가 흔히 보는 목련은 몇 종류 안 되지만 목련 집안에 속하는 식물은 그 종류가 세계적으로 400여 종이나 된답니다.
이처럼 사소한 듯하지만 자연에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수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이 봄을 맞이하면 어떨까요. - P14

그러고 보니 봄에 꽃을 피우는 풀들은 유독 키가 작습니다. 아무리 풀이라고 해도 사람보다 더 크게 자라는 풀들도 얼마든지 많은데 말합니다. 왜 봄꽃들은 키가 작을까요? 바로 살아가는 전략 때문입니다. 세상에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만 같은 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꽃들도 사실은 공정하고 엄격한 자연속에서 서로 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때론 빛을, 때론 수분을, 때론 양분을...
높이 자란 나무들이 아직 잎을 내지 않아 봄볕이 그대로 쏟아지는 봄의 숲 속은 이 작은 풀들에게 아주 유리한 시기이지요. 그러니 서로 키를 올려가며 볕을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이 살아가는 데필요한 전략은 키를 키우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다른 경쟁자들이 숲 속에 - P22

출현하기 전에 빨리 꽃을 피우고 결실까지 끝내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곤 느긋하게 잎을 내고 천천히 영양분을 만들어 뿌리에 저장하기도 하죠. 물론 성격이 급한 식물들은 여름이 오기 전에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백두산 같은 고산지역이나 여름이 아주 짧은 툰드라 지역에 사는 식물들도 작은 키로 짧은 여름동안 일제히 꽃을 피우지요.
그런데 늦은 봄이나 여름철에 꽃이 피는 풀들은 대부분 잎을 내고 키를 충분히 키운 후에 꽃이 달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자라는 경쟁식물끼리 좀더 많은 볕과 공간을 차지하려고 자꾸 키를 높이기도 하고 또는 우거져서 눈에 띄지 않는 꽃을 곤충들이 잘 찾아오게 하려고 색깔을 화려하게 하거나 짙은 향기를 뿜는 등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하느라 애를 씁니다. 키 작은 봄꽃들에게는 불필요했던 노력이지요.
그러고 보니 봄꽃들의 부지런함이 더욱 돋보이기도 합니다. 뒤늦게 철들어 공부하면 더욱 어렵고, 남보다 앞선 생각을 하면 성공이 더욱가깝다고 하죠. 사람 살아가는 이치와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 P23

자운영을 아십니까? 토끼풀처럼 생긴 짙은 분홍빛 꽃이 피는 풀 말입니다. 특히 남부지방이 고향인 분들 중에는 그 아름다운 빛깔의 꽃무리를 기억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예전에 그리도 흔했는데 왜 지금은 보기 어려울까요? 우리의 논과 밭이 금비(화학비료)로 덮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운영의 고향은 중국이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에 들어와 심정적으로 우리 꽃이 되어 버린 콩과 식물입니다. 예전에는 벼농사가끝나고 나면 녹비(풀이나 나뭇잎 따위로 만든 거름) 작물로 자운영을심었습니다. 그리 되면 땅이 비옥하게 변해 이듬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영양생장을 돕는 것이 질소입니다. 그래서 농작물에는 질소비료를 많이 줍니다. 공기 중에는 질소가 80%나있어 가장 많지만 식물들이 이용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하므로 무용지물이지요. 그 - P39

런데 자운영을 비롯한 콩과식물의 뿌리에 혹처럼 붙어사는 뿌리혹박테리아가 공기 중에 있어 사용하지 못하던 질소를 쓸모 있게 고정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운영과 뿌리혹박테리아는 서로 공생합니다. 자운영이 광합성으로 만들어 낸 탄수화물을 얻어 쓴 대신 뿌리혹박테리아는 자운영에게 필요한 흙 속의 질소를 고정하여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 질소가 비료의 역할을 하므로 보통농사를 짓고 나서 가을이 되면 자운영 씨앗을 뿌립니다. 싹이 터서 겨울을 난 자운영이 이듬해 봄에 잘 자라 오르면 갈아엎고 모를 심게 됩니다.
요즘은 아름다운 자운영의 꽃 무리를 볼 수 없는 것도 아쉽지만, 제초제와 화학비료로 죽어가는 땅이 아닌, 흙 속의 작은 박테리아와 자운영이 지혜롭게 서로 도우며 기름지게 만든 살아있는 땅에서 키웠던 그때의 깨끗한 곡식들을 만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교롭게도 계엄 선언 자막을 보면서도 이 책을 읽고 있었다. 환멸과 절망사이에서 잠을 설치고 출근한 하루, 분분한 의견들과 뉴스 속에서 나는 계속 되뇌인다.. 제발, 가라.

그러나 당신의 별을 본다.
두 페이지를 가로질러 빛나는 폭발을 하얗게 드러난 중심을 본다.
인주의 얼굴을 본다.
그늘진 얼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말하는 얼굴, 볼우물이 파이도록 활짝 웃는 얼굴을 본다.
세살, 일곱 살, 열한 살 난 얼굴을 본다.
치켜 깎은 머리, 단발머리, 양쪽으로 땋은 머리를 본다.
검은 코트를 입고, 회색 털모자를 쓰고, 전시 작업 중인 명화랑 1층에서 소리쳐 말하는 옆모습을 본다.
검푸른 심해의 밑바닥을 향해 자맥질해 들어가는 육체들, 불붙은 나무들 고통도 슬픔도 멎은 어두운 숲들을 본다. - P211

얼음을 깎은 사금파리 같은 저녁 바람이 목덜미로 파고든다.
바로 지금이 겨울의 정점이다. 곧 가파르게 봄이 올 것이다. 쇼윈도안에 진열된 저 폭신한 코트들은 한순간 무겁게 느껴져, 햇빛 분분한 가게 앞으로 밀려나가 염가로 팔려나갈 것이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다. 목이 마르지 않다. 목도리를 눈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나는 걷는다. 복면을 쓴 것 같은 내 얼굴이 보석상 진열장들의 유리 위에 어른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얼어붙은 보도블록위로, 비슷하게 얼굴을 가린 행인들이 서로의 어깨를 과격하게 밀치며 걷는다. - P212

바지락칼국수를 파는 한산한 식당에서 읽은 모든 문장들이 나를 향해 이빨을 세우고 있다. 조개껍데기들은 수북하게 앞접시에 쌓여 있었고, 물잔 옆으로는 내가 흘린 물자국들이 의미 없는 무늬를 그렸고, 강석원이 창조해낸 인주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절름거리며 건너다녔다.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흔히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과장된 열정, 새 발자국 같은 필체로 적힌 편지들 ㅡ그중 어떤 것들은 나를 실망시켰다ㅡ, 지인들이 부풀리고 때로 미화한 기억들을 나는 읽었다. 유년 시절은 언젠가 인주가 명은숙에게 지나가며 말했던 한마디 ‘나는 아주 힘이 센 아이였어요‘ 로, 사춘기는 설치작가 B의 슬럼프를 위로하며 했던 고백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쑥하고 마늘만 먹었던 건 아니구요......‘로 요약된 전기를 읽었다. 허점이 드러날 만한 - P212

곳마다 수사와 감상이 조악하게, 때로는 말끔하게 덧칠된 책을 읽었다.
아름답게 편집된 책, 방금 세상의 것이 된 책, 인주가 무수히 덧그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는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닿은 책장들이 뜨겁게 부스러질 것 같은 책. 불같은 책. 아니, 얼음 같은 책. 소리치는책.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벙어리 책. 더러운 책.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책. 방금 이 세상에 폭약처럼 던져진 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읽은 책.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박힌 책을 읽었다. - P213

적막에도 형상이 있다고 삼촌은 말했다.

적막은 육각형의 작은 눈송이 하나 속에,
빙하기에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게,
얼음에 싸인 불꽃처럼 거기 있다고 했다.

차가운 차창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나는 오래 눈을 보았다. 눈은 국도를 덮고, 서울로 접어드는 외곽도로를 덮고, 고가도로와 상가. 전신주와 전화 부스를 덮고, 불법 주차 중인 차량들, 교회의 십자가들, 저녁 어스름 속에 서 있는 아파트들을 덮고, 행인들의 우산을, 우산 없이 걷는 사람들의 검은 머리칼을 덮었다. - P2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번의 획에 모든 걸 담아봐, 하고 삼촌은 말했다.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한 번의 획에 필요하다고 생각해봐. 자연, 너를 키운 사람, 기르다 죽은 개, 네가 먹어온 음식들, 걸어 다닌 길들…… 그 모든 게 네 속에 있다고. 네가 쥔 붓을 통과해 한 획을 긋는 사람은, 바로 그 풍만한 경험과 감정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내가 풍만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 호흡을 참으며 선 하나를 그었을 때, 내 몸속에 미처 몰랐던 공간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 안에숱한 요철과 구멍들이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을 알았다. 잠자코 선을 그어가는 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침묵에 씻겨 사라졌다. 어머니가 깊은 밤 식탁에서 우는 것을 몰래 지켜보았던 기억. 화장실 문을 잠그고 김서린 거울에 왼손으로 바보, 병신이라고 쓰던 기억. 마늘을 까다가 매운 손으로 눈을훔쳤을 때 어머니의 거친 손바닥이 이끄는 대로 대야에 얼굴을 박고, 차가운 물속에서 처음 두 눈을 껌벅이던 기억. - P56

아무리 정밀하고 설득력 있는 가설들을 내놓았다 해도, 우주의 기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신한 과학자는 없었다.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팽창하고 있는 것일 수도있다. 지금도 작은 빅뱅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여러 겹의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삼촌과 오랜 시간 토론했던 여러 가설들 가운데 내가 좋아했던 것은, 팽창하던 우주가 마지막 임계점에이르러 수축을 시작하리라는 것이었다. 급속도로 수축된 우주는 마침내 한 점 이전의 무, 혼돈으로 돌아간다. 그 혼돈은 다시 양자역학적으로 흔들리며, 플랑크의 시간을 통과해 대폭발을 일으킨다.
지금의 우주가 그렇게 몇 번째로 태어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주란 단지 그렇게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영원 속에 있을 뿐이다.
존재의 뭍으로 밀려온 시간이 흰 포말을 터뜨리며 부서지고, 그렇게밀려난 파도는 다시 거대하게 밀려와 산산이 부서진다. 혹은 거대한나비의 날개처럼,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날갯짓 속에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 P66

기억할 수 있는 그 시절의 모든 것 사이로 이 별의 형상은 스며 있다. 한지에 먹을 입히기 시작한 첫 순간 이후, 삼촌의 생활은 잠시도그 그림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날씨에 극도로 민감했는데, 기압과습도에 따라 물과 먹이 번져가는 양상과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마른다는 것은 모세관 현상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을, 그림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 됐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수시로 그림의 물기를 확인해야 했고, 적절한 시기에 물을 더 뿌려줘야 했다. 더 힘 있게 번져가도록 할 부분과 얼마 안 있어 멈춰야 할부분을 택해 물의 양을 조절해야 했다. 콩알만 한 종이죽 뭉치에 물을 흠뻑 적셔 그림에 붙이면, 그 부분의 물의 밀도가 높아져 그쪽으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시각적 예민함 이상의 감각이 필요했다. 먹의 감각, 종이의 감각, 물과 공기의 감각, 무엇보다 시간의 감각이 필요했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나눌 때조차도 그것들을 놓쳐선 안 되었다. - P84

삼백 호에 가까운 그 그림은 누군가의 집에 걸리기에는 내 집에는 물론-너무 컸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미술관보다 지하철 환승구간 어디쯤의 벽에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둡고 살풍경한 지하의 통로에 걸린 그 그림을 그 옆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가슴 한편이 떨렸다.
내면의 살과 근육을 으깨어놓은 듯 겹겹이 덧그은 어두운 선들 아래. 마치 스스로 어둠 속에서 태어난 것 같은 빛이 어려 있고, 한 사람의 검은 형상이 두 팔을 아래로 뻗고 그 빛을 향해 내려간다. 얼굴도 이목구비도 없이, 육체의 세부도 없이, 그 역시 어둠에서 스스로태어난 듯, 그 으깨어진 선들 사이에서 형상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적인 듯, 그러나 결코 뭉개어지지 않은 단단한 윤곽으로, 예의 자생(自生)한 것 같은 빛이 어린 곳, 수만 킬로미터 아래의 심해를 향해내려가는 사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니, 아직 소리가 태어나지 않은 곳으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대한 고요함, 무서운고요함으로 내려가는 사람. - P87

빛도 형체도 부피도 없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질량과 자력을 가진검은 구멍들이 은하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흐를까. 영원히 멈춰 있거나, 영원히 연장될까. 검은 구멍의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형체를 늘어뜨리며 빨려들어간 죽은 별은, 마침내 구멍의 심장부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만나게 될까. 부피 없이 뭉쳐진전 세계의 그림자를, 무자비한 암흑의 총량을 통과하게 될까. 수억년 전에 폭발한 별의 형상이 어둠의 핏속을 더듬어 우리에게 오는 동안, 죽은 별의 몸이 검은 구멍 속에서 겪는 것은 무엇일까. - P114

삼촌의 흰 별이, 아니, 인주의 흰 별이 검푸른 먹 속에서 타오르고있다.
오래전 삼촌의 방을 나오면서 뒤돌아보고는 저건 보석 같아. 하고중얼거렸었다.
물의 결정이자 불의 한순간.
0과 무한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너무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덮쳐오고, 미처들여다보기 전에 바스라지며 사라진다. 사라지는 짧은 틈마다 흰별이 먹 속에서 타오른다. 타는 듯한 뜨거움이 두 눈에 고였다 사라질때마다, 이지러졌던 모든 사물이 얼음처럼 선명해진다. - P114

어둠이 왜 어두운지 알기 위해 어둠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있었다. 빛이 왜 밝은지 알기 위해 태양을 올려다본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뉴턴은 태양을 관측하다 홍채를 다쳤다.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데 평생을 바쳤던 케플러는 올버스가 태어나기 전 이미 갈릴레오에게 장문의 논쟁적인 편지를 썼다. 우주의 시작이 없다면, 왜 밤하늘은 어두운 것입니까.


케플러의 세번째 법칙을 배웠을 때를 잊을 수 없어.


어두운 창을 등진 삼촌의 눈이 빛났다.


그 수식은 마치 음악 같았어. 간결하고, 고유하고, 아름다웠어. 별들의 궤도가 저마다 그 음악을 변주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어.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음악 속에 존재한다는 걸 잊을 수 없었어. - P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