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획에 모든 걸 담아봐, 하고 삼촌은 말했다.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한 번의 획에 필요하다고 생각해봐. 자연, 너를 키운 사람, 기르다 죽은 개, 네가 먹어온 음식들, 걸어 다닌 길들…… 그 모든 게 네 속에 있다고. 네가 쥔 붓을 통과해 한 획을 긋는 사람은, 바로 그 풍만한 경험과 감정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내가 풍만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 호흡을 참으며 선 하나를 그었을 때, 내 몸속에 미처 몰랐던 공간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 안에숱한 요철과 구멍들이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을 알았다. 잠자코 선을 그어가는 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침묵에 씻겨 사라졌다. 어머니가 깊은 밤 식탁에서 우는 것을 몰래 지켜보았던 기억. 화장실 문을 잠그고 김서린 거울에 왼손으로 바보, 병신이라고 쓰던 기억. 마늘을 까다가 매운 손으로 눈을훔쳤을 때 어머니의 거친 손바닥이 이끄는 대로 대야에 얼굴을 박고, 차가운 물속에서 처음 두 눈을 껌벅이던 기억. - P56

아무리 정밀하고 설득력 있는 가설들을 내놓았다 해도, 우주의 기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신한 과학자는 없었다.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히 팽창하고 있는 것일 수도있다. 지금도 작은 빅뱅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여러 겹의 우주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삼촌과 오랜 시간 토론했던 여러 가설들 가운데 내가 좋아했던 것은, 팽창하던 우주가 마지막 임계점에이르러 수축을 시작하리라는 것이었다. 급속도로 수축된 우주는 마침내 한 점 이전의 무, 혼돈으로 돌아간다. 그 혼돈은 다시 양자역학적으로 흔들리며, 플랑크의 시간을 통과해 대폭발을 일으킨다.
지금의 우주가 그렇게 몇 번째로 태어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주란 단지 그렇게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는 영원 속에 있을 뿐이다.
존재의 뭍으로 밀려온 시간이 흰 포말을 터뜨리며 부서지고, 그렇게밀려난 파도는 다시 거대하게 밀려와 산산이 부서진다. 혹은 거대한나비의 날개처럼,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날갯짓 속에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 P66

기억할 수 있는 그 시절의 모든 것 사이로 이 별의 형상은 스며 있다. 한지에 먹을 입히기 시작한 첫 순간 이후, 삼촌의 생활은 잠시도그 그림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날씨에 극도로 민감했는데, 기압과습도에 따라 물과 먹이 번져가는 양상과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마른다는 것은 모세관 현상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을, 그림이 종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만 됐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는수시로 그림의 물기를 확인해야 했고, 적절한 시기에 물을 더 뿌려줘야 했다. 더 힘 있게 번져가도록 할 부분과 얼마 안 있어 멈춰야 할부분을 택해 물의 양을 조절해야 했다. 콩알만 한 종이죽 뭉치에 물을 흠뻑 적셔 그림에 붙이면, 그 부분의 물의 밀도가 높아져 그쪽으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시각적 예민함 이상의 감각이 필요했다. 먹의 감각, 종이의 감각, 물과 공기의 감각, 무엇보다 시간의 감각이 필요했다.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나눌 때조차도 그것들을 놓쳐선 안 되었다. - P84

삼백 호에 가까운 그 그림은 누군가의 집에 걸리기에는 내 집에는 물론-너무 컸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미술관보다 지하철 환승구간 어디쯤의 벽에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둡고 살풍경한 지하의 통로에 걸린 그 그림을 그 옆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가슴 한편이 떨렸다.
내면의 살과 근육을 으깨어놓은 듯 겹겹이 덧그은 어두운 선들 아래. 마치 스스로 어둠 속에서 태어난 것 같은 빛이 어려 있고, 한 사람의 검은 형상이 두 팔을 아래로 뻗고 그 빛을 향해 내려간다. 얼굴도 이목구비도 없이, 육체의 세부도 없이, 그 역시 어둠에서 스스로태어난 듯, 그 으깨어진 선들 사이에서 형상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적인 듯, 그러나 결코 뭉개어지지 않은 단단한 윤곽으로, 예의 자생(自生)한 것 같은 빛이 어린 곳, 수만 킬로미터 아래의 심해를 향해내려가는 사람.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니, 아직 소리가 태어나지 않은 곳으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대한 고요함, 무서운고요함으로 내려가는 사람. - P87

빛도 형체도 부피도 없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질량과 자력을 가진검은 구멍들이 은하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 안에서 시간은 어떻게흐를까. 영원히 멈춰 있거나, 영원히 연장될까. 검은 구멍의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형체를 늘어뜨리며 빨려들어간 죽은 별은, 마침내 구멍의 심장부에 다다랐을 때 무엇을 만나게 될까. 부피 없이 뭉쳐진전 세계의 그림자를, 무자비한 암흑의 총량을 통과하게 될까. 수억년 전에 폭발한 별의 형상이 어둠의 핏속을 더듬어 우리에게 오는 동안, 죽은 별의 몸이 검은 구멍 속에서 겪는 것은 무엇일까. - P114

삼촌의 흰 별이, 아니, 인주의 흰 별이 검푸른 먹 속에서 타오르고있다.
오래전 삼촌의 방을 나오면서 뒤돌아보고는 저건 보석 같아. 하고중얼거렸었다.
물의 결정이자 불의 한순간.
0과 무한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너무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덮쳐오고, 미처들여다보기 전에 바스라지며 사라진다. 사라지는 짧은 틈마다 흰별이 먹 속에서 타오른다. 타는 듯한 뜨거움이 두 눈에 고였다 사라질때마다, 이지러졌던 모든 사물이 얼음처럼 선명해진다. - P114

어둠이 왜 어두운지 알기 위해 어둠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있었다. 빛이 왜 밝은지 알기 위해 태양을 올려다본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뉴턴은 태양을 관측하다 홍채를 다쳤다.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데 평생을 바쳤던 케플러는 올버스가 태어나기 전 이미 갈릴레오에게 장문의 논쟁적인 편지를 썼다. 우주의 시작이 없다면, 왜 밤하늘은 어두운 것입니까.


케플러의 세번째 법칙을 배웠을 때를 잊을 수 없어.


어두운 창을 등진 삼촌의 눈이 빛났다.


그 수식은 마치 음악 같았어. 간결하고, 고유하고, 아름다웠어. 별들의 궤도가 저마다 그 음악을 변주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어. 우주의 모든 것이 그 음악 속에 존재한다는 걸 잊을 수 없었어.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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