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이런 거짓도 있다. 아빠 돌아가시던 날, 막내 외삼촌에겐 두 가지 미션이 있었다. 늦은 밤 병원 주차장에 세워진삼촌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린 자매를 집에 데려다놓고 앨범에서 매형의 영정 사진을 꺼내올 것. 그리고다음날 사돈어르신(할머니)과 어린 조카들을 빈소로 다시 데려올 것. 그날 밤 나는 눈에 졸음이 가득한 채로 가족 앨범이어디 있냐고 묻는 삼촌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돈어르신오늘은 일단 주무세요. 자세한 사정은 내일 말씀드릴게요. 그런 말들이 차례로 오가던 것을 기억한다. 진실을 유예하는 - P36
것도 거짓의 일종일까. 결국 삼촌은 할머니가 빈소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아빠의 죽음을 선고하지 않았다. 할머니라고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어느 쪽도 먼저 말하거나 듣지 않은 채로 건너온 그 하룻밤이 내게는 일생일대의 거짓으로 남아 있다. 그 밤, 우리가 머문 곳은 비눗방울로 만들어진 방공호 안이었다. 곧 터져버릴것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안전했다. 돌아오지 않는 막내아들을 불안 속에서 기다렸을 할머니도, 앨범 위치를 묻는 삼촌말에 아빠의 죽음을 직감했다는 겨우 열 살짜리 언니도, 혼곤한 잠에 빠져 있던 어린 나도 그 밤만큼은 거짓의 비호를받았다. 그다음은 예견된 대로였다. 밀려들었고, 휩쓸렸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떠내려갔다. - P37
거짓의 쓸모를 필요와 불필요로 단순하게 가를 수는 없을것이다. 거짓에는 수천수만의 층위가 있음을 삶이 내게 가르쳐주었으니까. 어떤 거짓은 붉고 어떤 거짓은 서글프다. 어떤 거짓은 축축하고 어떤 거짓은 창백하다. 악랄하고 섬뜩한 거짓 앞에선 몸이 굳기도 할 테지만 귀여운 거짓 앞에선 사랑이 건너가기도 할 것이다. 맥주를 마실 수는 없지만 맥주 - P37
한 모금이 절실한 사람에게 논알코올맥주의 존재는 진실을능가하는 거짓이듯이. 고백하자면 딱 한 번, 논알코올맥주를 사 마신 적이 있다. 밤길이 자꾸 나를 유년의 골목으로 데려다놓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던, 어느 쓸쓸했던 밤의 귀갓길에서 말이다. - P38
다만 무언가를 먹는 일이 그것을 잘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사인 시인의 시 「먹는다는 것」(「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5)에 이런 구절이 있다. 먹는다는 것은 "내 안을 허락하는 행위인 동시에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몸 너머 영혼 속에까지 너를 들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입을 탐욕스럽게 벌리겠지만, "먹는다는 것은 먹힌다는 것"인 까닭에 "죽음처럼 아찔한 기억을 남긴다고, 나는 내 입안으로 들어온 그 아찔한 죽음들을 잊지 않으려한다. 굴을 먹는다는 건 굴을 둘러싼 바다를, 굴의 탄생과 슬픔, 그늘과 가난까지를 끌어안는 일, 내 몸은 수많은 죽음의 정거장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오늘도 식탁에 앉는다. - P65
칼라디움은 꽃은 거의 피지 않고, 대신 잎의 아름다움을마주하는 관엽식물이다. 개량된 것까지 포함하면 수천 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잎의 색과 모양이 워낙 다채롭기로유명한데 붉은 기가 강하게 도는 것도 있고 허여멀건 창백한쪽도 있다. 처음에는 잎의 아름다움에 홀린 것이 맞지만 여러 날을 함께하다보니 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칼라디움은 정말 예민하다는 것. 잎 하나가 지면 잎 하나가 반드시나는데 새 줄기는 이전 줄기 안에서 줄기를 가르며 올라온다는 것. 그걸 볼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안에 있어. 바깥이아니라 안에 있어. 내게 없는 것을 밖에서 억지로 구할 때마다 칼라디움은 말했다. 애쓰지 마. 결국엔 흘러가게 되어 있어. 그건 하엽 지는 시간이란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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