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져요.

지난겨울 언니와 나는 짬을 내어 공주를 찾았다. 길게는아니고 다른 일로 지방을 다녀오던 길에 반나절 정도 잠시선로를 이탈한 것이다. 이번 공주 방문에는 소기의 목적이있었다. 이름하여 아바타 여행. 우리 자매를 뒤에서 조종한이는 다름 아닌 엄마였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공주는 엄마와 아빠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이자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잡고 달밤을 걷다 평생이고자 약속한 곳. 그로부터 사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시간의 증거인 두 딸은 엄마 아빠의 가장 예뻤을때를 만나러 물살을 거슬러오른 것이었다.
언니와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교대 정문으로 들어가면사제동행상이 있으니 일단 거기서 사진을 한 장 찍어. 정문둥지고 왼편에 음악실이 있었어. 음악실에서 풍금 연습하고시험도 보고 그랬었는데 생각해보니 아빠를 거기서 처음 만났어. 풍금 시험 낙제해서 재시험 보러 온 몇 학번 위 선배들이 있었는데 아빠가 그중 하나였던 것 같아. - P19

그날 밤의 차창에서 마주한 것은 내 부모의 그러한 시절이었다. 몸은 반환점을 돌아 기차에 실려왔으나 마음은 아직그곳에 남아, 어떤 고통에도 침식당하지 않고 침식당해서도안 되는 얼굴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그땐 살아 있었던 아빠를.
이 악물고 운동장을 달리던 엄마를.
풍금 재시험을 보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온 무리 속에서 두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저 먼 우주로부터 전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을 때. - P23

첫 캔은 식전주 느낌으로 써머스비나 버니니 레몬이 좋지. 두번째 캔은 향긋한 IPA. 세번째 캔은 역시 깔끔한 라거여야 할 테고, 마무리는 부드러운 흑맥주로화룡점정을 이루리라. 편의점에서 집까지는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2분. 가끔은 그 2분이 못 견디게 길어 골목에서 맥주캔을 따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다. 목이 말랐던 건지 하루가 말랐던 건지. 그럴 때 맥주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이다. 기쁜날에도 슬픈 날에도 맥주는 맥주로서 맥주의 일을 한다. 맥주의 쓸모에 대해서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쓸모,쓸모는 내게 무척 중요한 단어다. 
용도, 기능, 소용등 유의어는 여럿이지만 쓸모는 그중에서도 가장 품이 넓은 단어 같다. 호주머니의  쓸모, 울타리의 쓸모, 침묵의 쓸모, 밤의 쓸모......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쓸모가 있고 그것을일깨우는 것이 쓸모의 쓸모다. 시인에게도 쓸모는 있을 것이다. 시인의 쓸모를 생각하면 이런 문장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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