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기마상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이 실현되어 가까이서보니 과연 페기 구겐하임이 썼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감탄이 나왔지만 그 부분만을 너무 응시해서도 안 되었다.
현대 세계의 고뇌를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마리니는 한편으로는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지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마리니의 표현이 가진 온화함과 풍성함의 비밀이며, 초상 조각에서 회화 작품까지 관통하고 있는,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머가 느껴진다. 파시스트에게 남편을 참혹하게 잃은 작가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격을‘이탈리아적‘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 - P193

권의 예술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특징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징이다.
뜻하지 않게 마리니의 작품을 만끽할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미술관가장 위층에 있는 두오모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좋은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탈리아를 위해 죽는 것은 죽는것이 아니다."

1937년의 크리스마스, 밀라노 대성당의 정면에는 불사를 약속하는 글귀를 크게 써넣은 거대한 장막이 걸렸다. 스페인 시민전쟁 당시 프랑코파 반란군지원에 파병된 이탈리아군 전몰자를 추도하기 위한 문구였다. 한편 이탈리아 각지로부터 인민전선파의용병으로 참전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으며, 이러한 투쟁이 훗날반파시즘 레지스탕스로 이어졌다.
지금 그 광장은 전 세계로부터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빈다.중국인처럼 보이는 신혼부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보고 있는 것은 환영일까?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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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별의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기위해서는 프랑스 혁명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예전에 베네치아의 옛 게토를 방문했을 때, 그곳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서 "게토의 문을 나폴레옹이 열어주었다."라는 취지를 담은, 주민들의 감사장을 본적이 있다.
중정에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희생당한 주민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이곳 페라라에서도 같은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녹슨 경첩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게토에서 겨우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나치가 유럽의 점령지에 게토를 신설하여 전근대를 훨씬 뛰어넘는 학살 행위를 차례차례 펼쳐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최악의 형태를 띠고서. - P113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나치 강제수용소터에는 몇번이나 찾아갔다. 한국에 가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종종 찾는다. 일부러 그런 장소에 발걸음을 옮기는 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모순된 감정이다. 지적탐구심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셰익스피어의작품(예를 들면 「멕베스』)에서 유발되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 P117

어머니는 1980년에 돌아가셨다. 60세의 나이였다. 한국의 감옥에 갇힌 아들 둘을 두고 석방의 희망도 갖지 못한 채 비참한 병으로 죽어갔다. 출혈이 심해 점점 체온이 떨어져가던 어머니의 귀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아침까지 참아야돼. 아침이 되면 편해질 거야!" 그러자 이미 의식이 없는 듯했던 어머니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침까지? 아직 아직 멀었잖아.." 겉치레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그런 의미였을까.
몇 시간 후 차가워진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3년 후, 아버지도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잔혹한 도상과 그림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어느덧 길게도, 한순간처럼 짧게도 생각되던 그런 세월이 흘러버린 후 형들은 석방되었고, (행운이라고 말해야만 하겠지만) 나는 글쟁이가 되어 책을 내고대학에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진실은 이렇지 않아, 이럴 리는 없어.‘라는 - P137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과연 나 자신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을 걸까. 이 생각은 언제까지나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꿈일지언정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났다. 그 꿈은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 내려와 나에게 경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가 쓰고자 하는 소설에는 아직 번지르르한 겉치레나 자기보신적인 속임수가 있다고, 진실은 더욱, 더욱 어두운 것이라고. - P139

「이것이 인간인가는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47년에 간행되었다. 1972년에 출간된 개정판에서 레비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였다.


지금, 파시즘은 패배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자신들이 바랐던 전쟁에 의해 일소되었다. 두 나라는 완전히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폐허로부터 일어나 힘겨운 재건의 길을 걷고자 했다. (......)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라는 걱정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말 뒤에 레비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시구를 덧붙여 인용한다.


이런 괴물을 낳은 자궁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때로부터 또 8년이 지나, 볼로냐 역 대합실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 P149

결국 모란디는 6일 동안 구치소에 갇혔다가 친구들이 당국을 상대로 벌인 탄원 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실제로 모란디는 행동당의 젊은이들과 단순한 친분 관계였을 뿐이었다. 다만 파시즘에 저항했던 젊은이들이 모두 모란디의 숭배자였고 볼로냐 대학에서 미술사 강좌를 열었던 로베르토롱기의 제자였다. 롱기는 이후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렸다.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바꿔 말하면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조 모란디는유서 깊은 도시 볼로냐에서 위대한 유럽 장인의 노래를 이탈리아풍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오카다 아쓰시, 앞의 책) - P167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아무래도 실천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갔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비판적 주석이 덧붙여지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화가 - P167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개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지적이다.(오카다. 앞의 책) 다시 말해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예술운동의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리‘를 두는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수 있겠다.
시청사를 나와 마졸레 광장 남쪽으로 걸으면 아르키진나시오궁Palazzo della Archiginnasio이라는 건물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옛볼로냐 대학이 있다. 그곳에 들러 세계 최초로 인체 해부가 이루어졌다는 해부학 계단강의실을 구경했다. 현재 대학은 시내의 볼로냐 시립가극장 옆으로 이전했다.
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왼편 몬테그라파 거리에 위치한 다넬로da Nello라는 오래된 레스토랑에 갔다. 수백 년 전부터 영업을 했을 법한 레스토랑 지하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산지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는 맛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모란디는 때때로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거리 산책을 좋아했고 맛좋은 음식과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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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빌리 궁Palazzo Costabili(고고학 박물관)에서 스키파이아궁milanzo Schifanon으로 한 바퀴 돌았다. 에스테 가문의 옛 별장이던 스키파노이아 궁은 현재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내부 ‘열두 달의 방Salone dei Mesi‘의 벽에는 페라라파 화가 프란del Cossa (c.1430~c.1477)와 코시모 투라Cosimo체스코 넬 코사 Francesco,
Turn(c.1430~1495) 등이 그린 훌륭한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민박 주인이 추천한 레스토랑 라카노에서 점심을 먹은 후 페라라 공의 거처였던 에스텐세 성으로 향했다. 1385년에 지어진이성은 네 개의 탑을 갖고 있으며 건물 주위를 해자로 둘렀다. 성주변과 중정에는 천막을 친 노점상이 펼쳐져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서 쉬고 있었다. 내부를 구경한 후 지하 감옥에 다다랐다.
사실 이 성의 지하에 감옥이 있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지는판단하기 힘들었다. 이런 구경을 무서워하는 F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나 역시도 마음을 못 정한 상태였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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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로마를 방문하고 2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는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땐 예상을 못했지만 두 형은 살아서 출소했고 나는 글쟁이가 되어 대학에 직장도 얻었다. 전에는 언제나혼자서 여행을 떠났지만 15년 정도 전부터는 F라는 동행도 생겼다. 나 개인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불만 없는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안을 찾지 못한다. 내가 이런 안정을 얻은 것은 단순한 우연과 행운의 덕이라는 의식, 과거 언젠가의 시점에 가혹하고무참한 운명 속으로 떠밀렸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 레비식으로 말하자면, 좀 더 어울리는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따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실제 내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혹한 운명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러 우연이 겹쳐진 결과로 나자신은 30년가량의 세월을 이렇게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인간은 조금도 나아진 바 없다는 생각이 늦가을의 그림자처럼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 P19

원래 전설 속 메두사는 여성이지만 여기에 그려진 대상은소년이다.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물론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렸겠지만) 목을 내려친 순간 자기의 표정을 어떻게 자신의 눈을 통해 보고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하물며 눈을 맞추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그런 대상을 무엇보다 이렇게 무섭고도 처참한 자화상을 그리고자 했던 자는 대체 어떤 자의식을 지닌 사람이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이탈리아에서 본 아름다운 것들을 회고하려 할 때마다, 그 이상한 이미지가 떠올라 나를위협했다. 막 잘려나간 목이 내지르는 금속성 섞인 외침이 언제나 귓가를 울렸다. 그 후로도 서양 각국의 미술관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을 많이 봐왔지만, 정작 로마는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다.  - P25

카라바조의 초기작 중에는 「카드 사기꾼」과 「여자 점쟁이라는 그림이 있다. 모두 우의화지만 현실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400년 이상 전에도(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도)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로마 체류 중에 계속 이러한 종류의 ‘피곤함이 따라다녔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보르게세 공원 근처에 있던 고급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아무 생각없이 영수증을 확인했더니 주문도 하지 않고 먹은 적도 없는샴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와 F는 얼굴을 맞대고 "치러야할 대가, 대가......"라고 중얼거렸다. - P31

카라바조는 전 생애에 걸쳐 약 열두 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사람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두 눈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왼쪽 눈에는 생명의 잔광이 느껴지지만 오른쪽 눈은 이미 흐릿해져버렸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협 없는그의 묘사가 인간의 잔혹함, 현실 바로 그대로의 잔혹함과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 P47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목적은 이탈리아 문학 연구자이자 번역가인가와시마 히데아키 선생의 저서 『이탈리아 유대인의 풍경』(이와나미쇼텐, 2004년)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유대인의 흔적을 찾은 후, 프리모 레비의 무덤을 세 번째로 방문하여 여정을 마무리하는것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였다. 레비는 수용소에서 생환한 후 곧바로 이것이 인간인가』(에이나우디, 1947년)라는 제목으로 증언을 묶어냈고 마지막 작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이나우디, 1986년)를간행한 이듬해 토리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6년 1월, 나는 프리모 레비의 자살 현장이자 마지막까지살았던 집, 그리고 그의 묘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처음으로 토리노를 방문했다. 그 첫 번째 토리노 여행 경험을 기초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2006년,
원서는 아사히신분샤, 1999년)를 썼다. 이 책의 일본어 원서가 초판을 발행한 지 15년이 지난 2014년에 개정판이 나오게 되어 다시토리노를 찾아 한 꼭지를 덧붙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 P49

1980년과 1983년,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후처음으로 유럽 여행에 나섰지만 지금 나는 그때의 부모님 나이를 넘고 말았다. 60세가 지나 다시 이 그림 앞에 서게 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변함없이 비관적이지만 그 비관의 성질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예전에는 나 자신이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고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느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거치고 이토록 수많은 잔혹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관한다. - P53

저녁 무렵에는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 작은 교회의 지하에서 만돌린과 통주저음 연주를 들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의 작품을 비롯한 17~18세기 악곡가운데 총 여섯 곡과 앙코르 한 곡. 머리가 벗어지고 살집이 있던 만돌린 연주자는 시종 우울한 표정이었다. 통주저음 연주자는 선생님같이 착실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아주잘 맞아서 수수하면서도 좋은 연주를 들려줬다. 17세기의 이탈리아, 이 올곧고 우아한 악곡과, 카라바조와 푸생이 그린 잔혹함이 공존하는 세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듯해 이해할 길이 없으면서 또한 매혹적이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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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게 아니라 엽서는 너무나 낱장이고 자신을 보호해줄그 어떤 보호막도 없는 채로 우체통에 담겼다. 속도가 생명인 소식이거나 유실되면 큰일날 말들이라면 애초에 엽서에적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엽서는 태생적 불안을 끌어안은 존재다. 언제든 틈새에 빠지고 빗물에 젖을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잉크로 쓴 글씨라면 더더욱 벼랑 끝이다. 그럼에도 엽서는 번번이 나를 설득시켰다. 한 번만 더 나를 믿어보지 않을래? 내가 너의 확률이 될게.
놀랍게도 그 위태로운 약속들은 미래의 나에게 속속들이 도착해주었다. 심해로 가라앉아버린 시간도 없지는 않았으나 통통배로도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증명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100퍼센트의 환희는 아니어도 0퍼센트의 절망은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귀국 전 마지막 도시에서 보낸 엽서는 여행의 여운과 그에 따른 부작용- 현실 부정으로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나에게 부적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 P86

엽서 위에 엽서는 두둑이 쌓여간다. 그건 당신에게 꺼내보일 내 사랑의 선택지가 늘어간다는 뜻. 이 엽서들이 영영 서랍을 떠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어떤 마음은 보내지 않음으로써 완성되기도 하니까. 아무려나 오늘도 나는 당신을 위한 마음을 고른다. 통통배로도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물가에 선다. 밤낮없이 톱니가 돌아가고 있다. - P90

8월 한 달간 곶감 단지에서 곶감을 꺼내 먹듯 존 버거의 책을 아껴 읽었다. 참여중인 독서모임에서 존 버거의 노동 3부작을 함께 읽기로 했는데 그중 첫 권인 『끈질긴 땅」(열화당,2019)부터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평소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어떤 경우에는자발적으로 책에 감상을 적어넣을 때가 있다. 이번 책을 읽고 나서도 일렁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다시 책의 맨 앞장을 펼쳤고 ‘어느 페이지를 펼치는 죽음이 있고 울부짖음이있다‘라는 문장을 연필로 적어넣었다. 울부짖음. 내게 이 책은 울부짖음의 동의어로 기억될 것 같다. - P112

존 버거의 소설을 경유하고 난 뒤의 하모니카는 이전과 달랐다. 그의 소설 속 하모니카 연주는 내게 악기와 음악의 본질을 깨우쳐주었다. "모든 음악은 살아남는 일에 관한 것이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바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악기를다룰 자격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부여하거나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악기에 내재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의악기로 말미암은 수천수만의 음악이 어디로 향하는가. 누구에게 고이는가. 연주자가 바라봐야 할 지점은 오직 그뿐이라는 것을. - P118

내가 알아차리지못한 위험 신호가 있었을까. 그저 잠시 주변과 연락을 끊고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괜찮지만 혹 긴급하게 도움을 필요로하는 상황이라면 어쩌지. 명랑은 자기 이야기를 자주 하는친구가 아니었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에 서운함을 느낀 적은 없다. 그것이 명랑의 방식이라는 걸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 천으로 뒤덮인 상자를 마주한 기분이다. 지금껏 내가 알아온 건 무엇이었나 싶다. 한 사람을 안다는 건 무엇일까. 그의 생김새나 이름, 주소지를 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그의 무엇을 보고 있었나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젓는다. 명랑에게는 그저 외부와 단절될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되뇐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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