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차별의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기위해서는 프랑스 혁명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예전에 베네치아의 옛 게토를 방문했을 때, 그곳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서 "게토의 문을 나폴레옹이 열어주었다."라는 취지를 담은, 주민들의 감사장을 본적이 있다.
중정에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희생당한 주민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이곳 페라라에서도 같은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녹슨 경첩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게토에서 겨우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나치가 유럽의 점령지에 게토를 신설하여 전근대를 훨씬 뛰어넘는 학살 행위를 차례차례 펼쳐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최악의 형태를 띠고서. - P113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나치 강제수용소터에는 몇번이나 찾아갔다. 한국에 가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종종 찾는다. 일부러 그런 장소에 발걸음을 옮기는 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모순된 감정이다. 지적탐구심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셰익스피어의작품(예를 들면 「멕베스』)에서 유발되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 P117

어머니는 1980년에 돌아가셨다. 60세의 나이였다. 한국의 감옥에 갇힌 아들 둘을 두고 석방의 희망도 갖지 못한 채 비참한 병으로 죽어갔다. 출혈이 심해 점점 체온이 떨어져가던 어머니의 귀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아침까지 참아야돼. 아침이 되면 편해질 거야!" 그러자 이미 의식이 없는 듯했던 어머니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침까지? 아직 아직 멀었잖아.." 겉치레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그런 의미였을까.
몇 시간 후 차가워진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3년 후, 아버지도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잔혹한 도상과 그림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어느덧 길게도, 한순간처럼 짧게도 생각되던 그런 세월이 흘러버린 후 형들은 석방되었고, (행운이라고 말해야만 하겠지만) 나는 글쟁이가 되어 책을 내고대학에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진실은 이렇지 않아, 이럴 리는 없어.‘라는 - P137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과연 나 자신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을 걸까. 이 생각은 언제까지나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꿈일지언정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났다. 그 꿈은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 내려와 나에게 경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가 쓰고자 하는 소설에는 아직 번지르르한 겉치레나 자기보신적인 속임수가 있다고, 진실은 더욱, 더욱 어두운 것이라고. - P139

「이것이 인간인가는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47년에 간행되었다. 1972년에 출간된 개정판에서 레비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였다.


지금, 파시즘은 패배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자신들이 바랐던 전쟁에 의해 일소되었다. 두 나라는 완전히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폐허로부터 일어나 힘겨운 재건의 길을 걷고자 했다. (......)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라는 걱정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말 뒤에 레비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시구를 덧붙여 인용한다.


이런 괴물을 낳은 자궁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때로부터 또 8년이 지나, 볼로냐 역 대합실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 P149

결국 모란디는 6일 동안 구치소에 갇혔다가 친구들이 당국을 상대로 벌인 탄원 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실제로 모란디는 행동당의 젊은이들과 단순한 친분 관계였을 뿐이었다. 다만 파시즘에 저항했던 젊은이들이 모두 모란디의 숭배자였고 볼로냐 대학에서 미술사 강좌를 열었던 로베르토롱기의 제자였다. 롱기는 이후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렸다.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바꿔 말하면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조 모란디는유서 깊은 도시 볼로냐에서 위대한 유럽 장인의 노래를 이탈리아풍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오카다 아쓰시, 앞의 책) - P167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아무래도 실천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갔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비판적 주석이 덧붙여지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화가 - P167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개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지적이다.(오카다. 앞의 책) 다시 말해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예술운동의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리‘를 두는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수 있겠다.
시청사를 나와 마졸레 광장 남쪽으로 걸으면 아르키진나시오궁Palazzo della Archiginnasio이라는 건물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옛볼로냐 대학이 있다. 그곳에 들러 세계 최초로 인체 해부가 이루어졌다는 해부학 계단강의실을 구경했다. 현재 대학은 시내의 볼로냐 시립가극장 옆으로 이전했다.
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왼편 몬테그라파 거리에 위치한 다넬로da Nello라는 오래된 레스토랑에 갔다. 수백 년 전부터 영업을 했을 법한 레스토랑 지하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산지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는 맛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모란디는 때때로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거리 산책을 좋아했고 맛좋은 음식과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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