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게 아니라 엽서는 너무나 낱장이고 자신을 보호해줄그 어떤 보호막도 없는 채로 우체통에 담겼다. 속도가 생명인 소식이거나 유실되면 큰일날 말들이라면 애초에 엽서에적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엽서는 태생적 불안을 끌어안은 존재다. 언제든 틈새에 빠지고 빗물에 젖을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잉크로 쓴 글씨라면 더더욱 벼랑 끝이다. 그럼에도 엽서는 번번이 나를 설득시켰다. 한 번만 더 나를 믿어보지 않을래? 내가 너의 확률이 될게. 놀랍게도 그 위태로운 약속들은 미래의 나에게 속속들이 도착해주었다. 심해로 가라앉아버린 시간도 없지는 않았으나 통통배로도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증명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100퍼센트의 환희는 아니어도 0퍼센트의 절망은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귀국 전 마지막 도시에서 보낸 엽서는 여행의 여운과 그에 따른 부작용- 현실 부정으로 나날이 쇠약해져가는 나에게 부적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 P86
엽서 위에 엽서는 두둑이 쌓여간다. 그건 당신에게 꺼내보일 내 사랑의 선택지가 늘어간다는 뜻. 이 엽서들이 영영 서랍을 떠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어떤 마음은 보내지 않음으로써 완성되기도 하니까. 아무려나 오늘도 나는 당신을 위한 마음을 고른다. 통통배로도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믿음으로 물가에 선다. 밤낮없이 톱니가 돌아가고 있다. - P90
8월 한 달간 곶감 단지에서 곶감을 꺼내 먹듯 존 버거의 책을 아껴 읽었다. 참여중인 독서모임에서 존 버거의 노동 3부작을 함께 읽기로 했는데 그중 첫 권인 『끈질긴 땅」(열화당,2019)부터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평소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어떤 경우에는자발적으로 책에 감상을 적어넣을 때가 있다. 이번 책을 읽고 나서도 일렁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다시 책의 맨 앞장을 펼쳤고 ‘어느 페이지를 펼치는 죽음이 있고 울부짖음이있다‘라는 문장을 연필로 적어넣었다. 울부짖음. 내게 이 책은 울부짖음의 동의어로 기억될 것 같다. - P112
존 버거의 소설을 경유하고 난 뒤의 하모니카는 이전과 달랐다. 그의 소설 속 하모니카 연주는 내게 악기와 음악의 본질을 깨우쳐주었다. "모든 음악은 살아남는 일에 관한 것이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바치는 것이다"라는 문장은 악기를다룰 자격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부여하거나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악기에 내재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의악기로 말미암은 수천수만의 음악이 어디로 향하는가. 누구에게 고이는가. 연주자가 바라봐야 할 지점은 오직 그뿐이라는 것을. - P118
내가 알아차리지못한 위험 신호가 있었을까. 그저 잠시 주변과 연락을 끊고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괜찮지만 혹 긴급하게 도움을 필요로하는 상황이라면 어쩌지. 명랑은 자기 이야기를 자주 하는친구가 아니었다.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에 서운함을 느낀 적은 없다. 그것이 명랑의 방식이라는 걸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검은 천으로 뒤덮인 상자를 마주한 기분이다. 지금껏 내가 알아온 건 무엇이었나 싶다. 한 사람을 안다는 건 무엇일까. 그의 생김새나 이름, 주소지를 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그의 무엇을 보고 있었나 생각을 털어내려 고개를 젓는다. 명랑에게는 그저 외부와 단절될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되뇐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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