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희생자 대책위를 만든 유족들은 질문을 던졌다.
"가족을 잃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복수를 꿈꾸는자, 냉소주의자, 은둔자, 알코올 중독자, 이중 어떤 것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정의의 문제였고 고독의 문제였다. 가족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 후에도 여전히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유족들은 고독했다. 유족들은 많은 것이 될 수 있었지만 가장 어려운 정체성을 택했다. 바로 ‘사랑하는 자‘였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유족들이 만든희생자 대책위 4대 과제 중 두 번째는 ‘안전한 지하철 만들기‘였다. 2005년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은 대구지하철 노조와 함께 대구 지하철 전 차량의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했다. 우리는 불연재로 된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 P86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그 전해에 태안 해병대 캠프참사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들은 참사 소식을 듣자 즉시 팽목항으로 출발했고 진도의 체육관과 경찰서 문을박차고 들어갔다.
"당신들 누구요?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나? 나는 해병대 캠프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을 둔 아버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말합니다. 지금 잘하면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꼭 좀 구해주세요."
그 순간 내 자식의 목숨이나 남의 자식의 목숨이나차별하고 말 것이 없었다. 똑같이 중요했다.


춘천 산사태 유족들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사고 지역의 산에 여섯 번이나 올라 산사태가 인재임을 밝혀냈고 아이들의 꿈을 기억하고 싶어 했다. 유족들은 자식들이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가 목숨을 잃게 된 상천초등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해마다 장학금을 기부한다. 자원봉사에 관한 조례 또한 개정했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자 김용균의 동료들에게 물었다. - P87

"말해줘.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상한 질문이다.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묻다니 순리에 맞지 않는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이 이상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갔고 죽음을 막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일하다 죽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원했고 그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김용균 사후 만들어진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랑으로도, 하늘까지 들릴 듯한 통곡으로도 결코 자식을 되살려놓을 수 없었던 어머니의 고통과 비탄이 녹아 들어간 이름이다. - P88

유족들은 한결같이 "내가 이렇게 슬프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게 너무 많아요"라고 말한다. 그들의 슬퍼하는 눈에는 보이는 것이 있다. 그들은 비극이 자꾸 일어나는 것에대해서 기이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일을 겪었지만 그 일을 재료로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세상을만들려고 했고 타인이 살아갈 힘을 뺏기는 일이 없는 데힘이 되려고 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뭘까? 믿어지지 않게도 희망 때문이다. - P88

희망은 정말 묘한 것이라서 희망을 가진다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는 곳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된다. 유족들은차마 겪어내기 힘든 일을 겪었지만 슬픈 자아의 일부분은 눈물겨운 희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체 희망이 무엇이길래 이 슬픈 사람들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유족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만 말한다. "유족이 되면 그렇게 돼버려요."
나로서는 그 대답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곳을 바라는 열망이다. 희망은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차마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들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랑하는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변화뿐인데, 더 나은 곳으로의 변화만이 시간과 이야기 밖으로 떨어져 나간 가족들을 다시 시간과 이야기 속에 자리 잡게 할 수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냈다.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살려내지 못한 것이 한이라서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다. - P89

세월호 이후 내게 가장 크게 바뀐 점이 있다면 삶이 사라지는 것을, 삶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리의 인간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무척 아까워하게 되었다는점이다. 내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그것을 다른 무엇보다도 훨씬 더 많이 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유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법을 배웠다. 유족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구해야 할것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다는 그 무의미와 싸우며, 자신의 아픈 가슴속 생각 중 가장 좋은 것을 내주면서 변화의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것이 유족들의 사랑이다. 나는 유족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나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알고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큰 사랑과 더 큰 세상"
에 대해 생각한다면 유족들 덕분이다. 유족들은 슬픈 마음의 일부분을 해방시키고 그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 P91

이렇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매한 행위로서의 사랑을 발명했다. 이것이 많은 유족들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는 한문장 안에 담긴 말 없는 말들이다. 나는 사랑은 창조 행위라는 말을 그들을 보면서 이해한다.
단, 유족의 말이 나를 숙연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유가족이 더는 없는 세상을 꿈꿔야만 한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유한한 삶속에 무한한 것은 오직 슬픔뿐인 것만 같은, 혼자서 겪어내고 혼자서 감당해야 할 괴로움이 너무 많은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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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신들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나도 길에서 뱀들과 마주쳤으며 그 만남으로 상태가 바뀌어 이상하게도말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나도 실은 길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나도 그 만남으로 상태가 바뀌어 이상하게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운명을 면하게 되었다. - P63

마침내 그는 자기만의 완벽한 장소를 찾았다. "너무 거대해서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지 짐작조차 못할 만한 광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날 오후 그는 그곳에서 제인의 뼛가루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가 하늘로 날려 보낸 제인의 뼛가루는 별안간 바람이 사라진 공기 중에 한참 머무르다 느릿하게, 조금씩 빛바랜 사암을 등지고 날아갔다." 그는 뼛가루를 담은 도자기 병을 발밑 모래에 반쯤 묻었다. 그리고 몸을 낮춰 온기가 남은 바위에 가만히 뺨을 댔다. 그가 바위에 뺨을 대고 있는 동안 쓸쓸한 구름이 그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리고 다른 일도 있었다. "하늘나리 꽃밭에서 점심 식사를 끝낸 벌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슬퍼도 그냥 흘려보낼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단지 몇 분에 불과하지만그는 그 시간 동안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삶에 생긴 구멍이 하늘과 반들반들한 바위와 나팔꽃이 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메워지는 듯"했다.
- P66

슬픈 자아가 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이로운 생명들의 관계였다. 그는 이것을 마치 고대 중국의 풍수지리를 내적으로 체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생명을 이렇게정의한다. "몸으로 표현된 관계들의 망."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생각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가? 고대 중국의 풍수지리를 내적으로 체험하다니? 몸은 관계들의 망이라니? 그가 들려주는 것은 이야기의 시작도 자기 자신, 이야기의끝도 자기 자신, 하루의 시작도 자기 자신, 하루의 끝도 자기 자신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말을 몸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뭔가가 우리에게 있다.
맹목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한 맹목, 주변 세계를 다르게 볼 기회를 막고, 자신을 새롭게 알 기회, 회복의 기회마저 막아버리는 것, 너무 자주 두려움에 빠지거나 공허하거나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너무 자주 우리 삶을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것, 바로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다. - P68

이 자기중심주의가 세상을 성스럽게 경험하는 것을 막고, 세상을 풍요롭게가 아니라 그 정반대로 세상을 빈곤하게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신체는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기관들로 만들어져 있다. 자아의 고통은 자아의 바깥으로 나와야만 덜어지고 게리 퍼거슨이 보여준 세상이 바로 자아 바깥 세상, 아직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세상이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관계‘ 속에서 에너지와 힘을 얻고 ‘회복‘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된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회복‘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일까? "삶은 내 안에도 더 많은 삶을 탄생시킬 것이다. 더욱 다양한관계와 경험을, 감사를, 아름다움을. - P69

내가 만약 교통사고를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4월에, 너무나 아름답다는 검은머리물떼새들의 선회를 보러 유부도로 여행을 갔을 것이다. 내가 사고로 보지 못한 검은머리물떼새가 머리 위를날다니. 이를 어쩐다지?
"복 피디님, 검은머리물떼새예요!"
나는 복 피디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사고 이후 처음으로 새가 날아간 쪽을 향해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 몸만 생각하던 에너지의 방향과 흐름이 바뀌었다. 에너지가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다. 위기상황일수록 바깥을 바라보는 힘내가 그토록 절실하게의지하던 힘, 나를 수차례 살려준 힘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들은 무거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밀게 돕는다.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한다. 나는 내 몸의 회복을 걱정하는) 나이면서 나 자신 너머, 내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바깥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나는 다시 사고 이전의 자유롭던 내가 되어갔다. 자연은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를 놀라게 할 일을 선물한다. 이래서 감사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것이다. 게리 퍼거슨이말한 대로 ‘회복은 더 많은 감사를, 더 많은 아름다움을‘ - P71

지속적인 부정의만큼 유족들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었다. 그날 세상을 떠난 쌍둥이 중 한 명인 나현이는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저는 소망유치원에 다닙니다. 저는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햇님반 선생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날 머문 씨랜드는 학생 1인당 5천 원의 리베이트 비용이 오가는 곳이었다.
유족들은 아이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세상이 미웠다.
유족들은 한 인간의 생명, 자유, 꿈이 누구의 손에 달렸는지를 따져보고 마음속 깊이 흔들렸다. 우리 모두 깨끗해지지 않는 한 대책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고 유족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저절로 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현실의 추악함과 절대로 이해관계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을 유족들은 고통과 분노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끝까지용감하게 진실을 감당했고 경험을 보존했다. 2000년 4월, 유족들은 ‘그날 밤 씨랜드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라는 부제를 단 「씨랜드 참사 백서를 냈다. 유족들은 이 - P78

책에 「우리의 다짐 글이란 글을 남긴다.


과연 무얼 걸고 맹세해야 우리의 다짐이 변하지않을까?
우선 우리 유가족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길바란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이 편할 것이고
우리의 사랑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기때문이다
외롭고 슬플 땐 오늘을 다시 되돌아봤으면 한다
우리가 함께했던 세월을
아이들을 맨 처음 잃었을 때부터
그리고 그 긴 여정을 함께했던 세월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바로 사는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알고 있다
우리가 영원해야만 그리고 우리가 언제까지나
깨끗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린 바라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사랑받기를 - P79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우리 아이들을 잃은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미래를 위해서
자라나는 새싹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2017년이나 2018년경, 나는 처음 이 글을 읽었다. 읽고 나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작아졌다. 깨끗하게 살아야만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 신비로운생각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말은 할 수만 있다면 불타는 지옥에 가서라도 아이들을 업고 나오고 싶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사랑했던 기억, 몸의 따뜻함, 그 몸의 훼손, 피, 눈물, 검은 상복, 흰 상복의 기억이 유족들의 말 안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어떤 경험을 들을 가치가 있는 말로 바꾸는 것은 미치도록 어려운 일인데 유족들은 바로 그 일을 했다. 현실을 그대로 보면서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방법을 상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돌덩이 같은 현실을 깨려고 숯덩이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다. 비극과 꿈의 가슴 찢어지는 결합이다.
나는 이 말들이 그들을 부축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지상에 묶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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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부터 1951년 4월까지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 일곱 개 나라가 주도한 BC급 전범재판이 50회 넘게 열렸다. 전범재판은 이제야말로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으리란 점에서당시 사람들의 뜨거운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어떤 법정에도 조선인 판사, 조선인 검사는 없었다. 조선인들 기소 이유의 대부분은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약 위반과 관련이 있었다. 연합군 포로의 기억이 생사를 갈랐다. 강제노역, 뺨 때리기는 거의 모든 포로 학대의 유력한 증거였다. 조선인 전범 149명 중90퍼센트는 포로감시원이었다. 그중 23명은 조국을 해방시킨 연합국에 의해 사형당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이사형을 당하는 동안 천황, 731부대 책임자,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기획자, 전쟁으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기업인누구도 전범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1945년 무렵의 정의는 맥 빠지고 싱겁게 실현되었다. 인간은 애절할 정도로정의를 갈구하지만 분별력을 갖기는 힘들다. - P32

이제 역사에 마지막 전범으로 기록될 사람, 전남 보성 출신, 10만 명이 사망한 악명 높은 태국 콰이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 일했고 호주 포로 학대죄로 1947년 싱가포르 호주군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돼살아남은 사람. 그가 바로 정창수가 일본에 가서 만난 그 사람이었다.
이학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조문상의 유서를 복사해서 나눠주곤 했다. 이학래는 그날 정창수에게 이렇게말했다.
"전범의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젊은이들은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사세요."
이학래의 이 말은 사형당하기 전날, 죽음이야말로 정직해질 기회라고 생각한 조문상이 쓴 유서의 한 부분과 - P47

연결된다.


역시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 이런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말은 본심이 아니었다. 역시 이 세상이 그립다.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다면 영혼만이라도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싶다. 가능하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라도 남고 싶다. 26년이 거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할 만하다. 이 짧은 일생 동안 무엇을 했는가. 완전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흉내와 허망. 왜 좀 더 잘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삶을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친구야! 아우야! 자신의 지혜와 사상을 가져라. 나는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나의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처음 조문상의 유서를 읽었을 때 조문상의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말에 놀랐다. 내일 죽을 사람에게 놀랄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런데 있었다. 고통도 진짜, 두려움도 진짜, 죽음도 진짜. 그런데 삶은 가짜였다면? 그것을너무 늦게 알았다면‘? 정말 그랬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말인가? - P48

살아남은 전범들은 교수대에 올라가는 동료들에게 그저 "잘 가"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것을 괴로워했고, 죽음을 뼛속 깊이 두려워해봤고, 살아서 삶 속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원했고, 자신들이 한 일을 부끄러워했고, 감옥에서 무엇이 우리를 죽게 하나 물었듯이 살아 나와서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를 물었다. 그리고 무엇이 부조리인지 알게 된 뒤에는 그것에 맞서 지속적으로 싸웠다. 듣는 사람이 거의 없어도 그렇게 했다.
나는 내가 들은 이 이야기를 조선인 전범 재판에 문제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야 적절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들은 당시 역사가 필요로 했던 정의를 채워주는 역할을 한 역사의 엑스트라에 불과했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그들만의 역사를 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들의 이야기가 삶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태까지 나의 삶이라고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는 앎. 식사는식사 이상, 노래는 노래 이상, 삶은 자고 먹고 노래하는 그이상의 것, 우리가 뭐라고 말하든 그 이상의 것, 죽을 때돌아보고 후회할 우리의 것, 소중한 것이라는 앎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가? - P51

전범들이 자신과 친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세계는 이전과 달라 보였을 것이다. 그전까지 알았던 것은 더 이상 ‘앎‘이 아니었다. 세계는 과거에 알던그 세계가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계는 그들이 더 이상 알고 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 그 세계가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도 바로 그런 시대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배경‘이 바뀌었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코로나와 기후위기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바이러스와 기후위기가 우리 인생 이야기를 쓰고 있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대유행어는 "부자되세요!"가 아니라 "건강하세요!"와 "별일 없죠?"였다. 그 말을 할 때 마음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세계에 대한 안정감을 잃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나아닌 것들, 나의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방법을 찾아야하지만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우리가 경고를 무시하는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이다. 하루하루 두려움에 시달리며 외로움에 떨면서 사는삶에 적응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는 것을 두려워하다 - P55

니 참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살고 싶어 하는데.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서라도 세계에 대한 앎이어야 한다. 세상을 이전과는 다르게 알아야 한다. 알았던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다행히 어떤 앎은 지도다. 새로운 앎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어야 가능성이 태어난다. - P56

내가 살릴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내 운명을 그들에게 걸어야겠다
특별한 힘도 없이 세상을 재구성하는 그들에게.
_에이드리언 리치

우리는 누구인가
어둠 속에서 우리가 만드는 그 무엇이 아니라면
어맨다 고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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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아무튼, 메모」, 「앞으로 올 사랑」,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등이 있다. 기후위기시대 예술창작집단 이동시 (이야기와 동물과 시) 일원이다.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지난 4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에 부딪힌 나는 3미터를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부서진 치아조각들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앉아 있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구급차와 경찰차가 달려왔다. 꼭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한 구절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어렵지만 양손으로 세수를 할수 있게 되었다. 한 달 반이 지나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봄이 한창이었다. 나는 병원 정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처음으로 안양천에 가봤다.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노란 나비들이 꽃 사이를 팔랑거리며 날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야생의 생명력이 가슴으로 흘러들어 왔다. "너무 예뻐!"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자연과 그늘 없는 관계를 맺었다. 많은 것이 그리워졌 - P5

다. 스페인 내전에서 총상을 당한 뒤 조지 오웰이 한 말이생각났다. "따지고 보면 마음에 드는 것이 많은 세상이었다. 회복되려면 슬플 정도로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앞으로 또 슬픈 일을 겪게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기쁨을위해 태어났다. 나는 이 상처투성이 지구를 엉뚱하게도 회복의 장소로 경험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교통사고가 난 날은 겸손을 배우기 딱 좋은 날이었다. 내가 무엇을 누리든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또 한 번 주어졌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가. 나를 통해 묻는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다. 경이롭게 재생할수 있다면 나를 위해 슬퍼해준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될 것이다. - P6

시간이 흐를수록 ‘반복‘이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나는 어렵게 세수를 배웠고 어렵게 이를 닦는 것을 배웠고어렵게 샤워를 하는 것을 배웠다. 어렵게 등 지퍼를 올려원피스를 입고(이것은 아직도 힘들다) 반복적으로 재활훈련을 하고 어렵게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소중했다. 밀란 쿤데라의 말 - P6

이 생각났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살고 있다는것을 알아야 인간적인 것이다."
카탈루냐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수십 년간 아침에 일어나면 피아노로 바흐의 푸가를 두 곡씩 연주하곤 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었다. 그는 그것은 집을 축복하는 방식이자 세계를 재발견하는 방식이고 그 일부가 되는 기쁨을 누리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파블로 카잘스의 이 말을 읽은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잊은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똑같은 유리컵에 찬물을 한 잔 마실 때마다, 똑같은 빨간 컵에 커피를한 잔 마실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곤 했다. 일을 할 때도책을 읽을 때도 생각이 났다. - P7

사고가 나기 전, 나는 그의 말에 영향을 받아 「삶의발명』이라는 책을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우리에게는 유일무이한 삶, 고유한 삶,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창조의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개별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정과 존중을, 사랑과 우정과 의미를 원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누군가를, 공동체를찾아 헤맨다. 나는 이것을 관계의 에너지라고 부른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야기는 관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 P7

가 쓰던 책 「삶의 발명은 창조의 에너지와 관계의 에너지가 균형 있게 만나 기쁘게 이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존재 방식을 찾고자 하는 이야기였다.

지난 몇 년간 내 열정의 대상이 바뀌면서 관계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오로지 인간, 인간, 인간만 생각하고 있던 내가 동물과 야생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동물의 눈에 담긴 다른 세상을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열정은 힘이 강해서 읽는 책, 듣고 싶은 이야기, 가고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레이첼 카슨의 말 같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예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 해돋이와 해넘이, 만에 비치는 달빛, 음악, 좋은 책, 지빠귀의 노랫소리, 지나가는 야생 거위의 울음소리를 함께 즐길 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자연에 빠져들 때가 기후위기와 동물 대멸종 시대이기도 했다. 이 말은 매 순간 아름답고 고유한 것이 사라지는 중이라는 뜻이다. 자연은 나를 웃게도 울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삶의 발명」은 기후위기와 동물 대멸종의 시대에 기쁘게 인간이 될 방법을 찾고 지구에서의 삶을 깊고 풍요롭게 누리는 방법을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 - P8

삶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고 모든 생명체는 모두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다.
내 평생 가장 많이 해온 말이 있다.
"그 이야기 참 좋다."
이 말의 힘을 나는 백 퍼센트 믿는다. 이야기가 좋으면 나도 모르게 감탄하면서 마음이 환해진다. 감탄할 때현실이 달리 보였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게 분명존재한다고 느껴졌고, 사는 것이 더 재미있어지고 더 좋아지고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세상은따라 해야 할 일투성이로 보였고 세상 또한 사랑할 만한것으로 보였다. 감탄 속에 있을 때 나는 잘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 잘 모르겠다.
힘이 필요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르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어."
공허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
지겨울 때도 그렇게 말했다. 변화가 필요할 때도 그렇게 말했다.
선택이 어려울 때는? - P9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말을 해야 할 때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 있게 하고 싶어?"
가장 삭막한 사이는?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는 사이"
사랑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것"
나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걸 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
행복할 때는?
"내가 찾고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는 것."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 곳은?
"좋은 이야기 속."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법은?
"적어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안다."(나는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선의 나로 사는 법은?
"감탄한 이야기에 나를 결합시키는 것."
사는 동안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 만나고 만드는 것"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동물로 진화한 데는 분명히 이 - P10

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아니면 우리에게 일어났던일을 이해하고 나눌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이야기하는 공동체로서 좋은 이야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야기하는 공동체로서 좋은 이야기를 돌려줄 수 있는 것보다더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들려주는이야기는 내적 정체성의 핵심이다.
나에게 삶은 좋은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마음으로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에너지로 변해 나를 내 자아 바깥으로 끌고 나오고 움직이고 살아 있게 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에너지는 이야기가 변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향을 받는 이야기, 의미를 두는 이야기가 바뀌면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고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바뀐다. 창조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미를 둘 줄 안다는 뜻이니까.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더 나은‘, ‘더 좋은‘, ‘더 새로운‘
이라는 단어만 넣으면 삶은 갑자기 도전할 가치가 있는모험으로 변한다. 이것도 삶의 발명이다. 이럴 때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어렵게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자 다시 꺼낸 원고가 바로 이 책 『삶의 발명이다. 무엇이 나를 만들 - P11

어왔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언제 기쁨을 느끼는지 아는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순간들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만들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으로서, 살고 싶은 세상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고 사랑할까라는 오래된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존재로서, 장미는 장미로서, 새는 새로서, 고래는 고래로서, 별은 별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으로서, 변화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우선 모든 생명이 지금보다 더 햇살과바람을 즐겼으면 한다. 모든 생명이 지금보다 더 존중받고 자부심을 느끼고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모든 생명이 자신의 힘을 찾고 자기 자신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나는 이 글에 에너지를 쏟아부어보려고 한다. 물론 이야기들이 변신한 에너지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동안 하나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수년 전 어느 비 오는 날 서귀포의 호텔에 묵었던적이 있다. 새벽 네 시와 다섯 시 사이 어디쯤에 눈을 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창가에 앉아 아침이 오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비가 약간 뜸해지자 서귀포 걸매생 - P12

태공원 뒷산 상공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검은 새 무리였다. 새들은 무리를 지어 돌고 돌면서 나선형으로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새들의 선회였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그 순간 행복했다.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나를 조금더 앞으로 가보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마음이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있었다. 어두운 날도 저 밑바닥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내가지금부터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들은 편의상 제목을 달긴 했지만 앎, 우정, 사랑, 연결, 회복, 경이로움, 아름다움, 자부심, 기쁨과 슬픔, 희망같이 우리에게 대체 불가능한가치를 갖는 단어들이 이렇게 저렇게 섞여 있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돌려주는 이야기들이 기쁘게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더 나은 존재 방식을 원하고 만들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힘이 된다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이야기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다. - P13

그 대화를 나눈 지도 벌써 3년은 흘렀다. 내 친구가 바빴던 것은 그때 만난 카리푸나족 추장의 형을 리스본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카리푸나족과 아마존의 운명을 어깨에 걸머진 추장의 형은 리스본 대학에서 두 차례 강연을 하고 언론 인터뷰도 했다.
"카리푸나족의 리스본 방문은 어땠어? 사람들이 질문 많이 했어?"
내 친구는 3년 전에 나에게 한 말을 거의 똑같이 들려주었다.
"세상에 원주민이 있어서 다행이야. 숲을 지키는 것은그들이야. 그래도 리스본 사람들이 카리푸나족이란 부족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야. 카리푸나족이 우리 앎의 지도, 인식의 지도 안에 들어왔어."
그러고 나서 우리는 브라질 대통령이 바뀌면 아마존의 상황이 나아질까 같은 대화들을 조금 더 나눴다. 그런데어쩐지 내 마음은 조금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까 네가 한 말 중에 앎의 지도라는 말 있잖아. 그말 네가 만들었어?"
"뭐, 그냥 지금 생각났어." - P21

"그런데 네 말을 들으니 앎의 지도가 보물섬 지도 같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앎의 지도‘라는 말이 자꾸만 궛가에 맴돌았다. 카리푸나족이 앎의 지도 안에 들어왔다고 말하던 친구의 목소리는 얼마나 힘이 넘쳤던가?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평소에 "추해지지 말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내 친구는 원주민의 삶에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아름다움을 봤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그들의 삶은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내 생각에 아름다움이야말로 시간을 들여서 알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멸종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없애면 된다. 우리 인류는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함을 견디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죽음만큼 오래되고 영원한 것이다.
어쨌든 앎의 지도라는 말을 들으니 소설가 존 쿳시가 생각이 난다. 그가 자주 쓰는 문장 중에 "앎을 살아낸다"는 문장이 있다. 그에게 삶은 그냥 삶이 아니고 어떤 앎과 - P22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침 사과가 건강에 좋다는 앎을 살아내고 양배추가 위장에 좋다는 앎을 살아낸다. 소고기를 지금처럼 먹으면 아마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앎을 살아내고 오래가는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앎을 살아낸다. 그런데 이 ‘앎‘이라는 단어 뒤에 ‘지도‘라는 단어가 붙으니 어떤 ‘앎‘은 우리를 중요한 곳으로 데려다줄 단서처럼 느껴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어떤 앎은 길을 잃게 만든다. 덫이 되고수렁에 빠지게 한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약해지게 만든다. 사실 내 친구처럼 뭔가를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힘이다. 그런 일이일어난다면 우리 삶은 방향을 바꾸게 된다. 가만히 있는것보단 사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사랑할 것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길을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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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여학생에게 물어서 역 앞에서 공동묘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묘지에 도착하자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 정문으로 많은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날씨 좋은 토요일이라묘지를 찾은듯했다. 장례식도 몇 건이나 치러졌다.
광대하게 펼쳐진 묘지로 들어가서 유대인 묘역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묘역 입구 철문이 닫힌 채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유대교 안식일에 해당하므로 묘역의 문을 아예 닫아버린다. 알고 있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밀라노에서 하루 이틀 쉬다 보니 요일 감각이 헝클어져버린 탓이다. 모처럼 멀리서 찾아왔는데 프리모 레비의 무덤에 가볼 수가 없다니.
철책 너머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그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17451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왼쪽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죄수번호다. - P211

그러면서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피신하도록 도와주는 활동을 펼쳤고 프리모 레비의 어머니와 여동생과도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고 한다. 종전 후해도 아우슈비츠에서 생활한 프리모 레비와의 친분은 이어졌다. 그가 자살하기 며칠 전까지도 경치가 좋은 언덕으로 함께 산책을 갔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프리모 레비가 타자기로 쳐서 보내온 「회색지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수록)의 초고 상태의원고를 보여줬고 레비와 산책했다는 언덕으로 안내했다. 토리노를 둘러싼 흰 산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녀는 "저 고개 너머가프랑스죠. 우리는 저기를 넘어가서 파르티잔에게 무기를 전달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0세에 은퇴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프리모 레비의 담당 편집자로 일했던 발터 바르베리스 씨였다.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조금 소개해본다.


프리모 레비는 단순히 소설가라기보다 ‘기억의 작가‘이며 무엇보다 우선 ‘중증인‘이었습니다. 현재 역사수정주의나 역사적 사건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 P219

는 유럽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하나의위기라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경향은 증언의 역할을 하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정반대쪽으로 향하게 하는 셈입니다. 그런의미에서 프리모 레비의 문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늘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했는데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어요. 결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만년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어쩌면 개인적인 일.
가정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221

또 하나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 사람들에게 자행한일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똑같이 벌이는 게 아니냐고 우려했어요. 그래서 유대인 사회와 맺는 공식적인 교류나 관계로 인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유대인 사회는 같은 유대인인 레비가 이스라엘의 정책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프리모 레비와 같은 인물이 전해준 증언을 - P221

이어나가야 할 윤리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줄리아나 테데스키 씨와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아우슈비츠의 생환자다. 프리모 레비의 친구였던 그녀는 1965년에열린 수용소 해방 기념식에 즈음해서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를다시 방문했다. 줄리아나 씨는 오랜 세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앞서 언급한 레비의 담당 편집자 발터 바르베리스 씨도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왼팔에는 죄수 번호를 새긴 문신이 남아 있었다. - P223

이 숫자를 레이저 수술로 지운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결코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날씨가 추워져도 반팔을 입고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게끔 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의무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류가 앞으로 인종, 민족, 종교 같은 장벽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해갈 수 있을까요?" 나의 순진한 질문에 그녀는 절레절레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요.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무리일 테지요." - P223

전후에는 공화제를 실현한 진보적 운동의 지적·문화적 기반이장소다. 넓은 거리에 서서 살짝 고개를 들어 보면 하얗게 빛나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험한 산길을 반파시주의 투사나 망명자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간성의 이상으로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들." 다큐멘터리촬영을 위해서 토리노를 방문했을 때 주위를 둘러싼 험준한 산들을 가리켜 나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산들은 변함없이 거기에 있지만 이상의 광휘는 위협받고 있다. 반파시즘 투쟁의 사명을짊어지고서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한 세대는 세상에서 거의 퇴장했다. 이제는 거칠고 천박한 포퓰리스트의사나운 목소리가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일본이야말로 한층 더 심각하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이후 40년도 더 지난 지금, ‘인간성의 재건을 위해 힘겨운증언자의 역할을 맡았던 프리모 레비가 살아있었다면 이사회를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했을까. - P231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자택은 레 움베르토 거리 Corso Reto 75번지에 있다. 이 거리는 로마 거리와 나란히 시내 중심부Umberto에서 남서방면으로 뻗어 있다. 길 양쪽으로는 19세기 말 무렵에솜씨 좋게 지어진 아파트가 늘어서 있다. 화려한 장식도 없이 실용적인 인상을 주는 안정감있는 풍경이다.
"이 거리의 기본적인 성격은 멜랑콜리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쓴 말이다.


멀리 사라져가듯 흐르는 포 강은, 한낮에도 해질녘을 연상케 하는 보랏빛 안개로 싸인 지평선을 향해 아득히 멀어져간다. 어디에 있어도 매연이 내뿜는 우울하고 분주한 듯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 우리들의 거리는 이제는 모두가 깨닫고 있듯 잃어버린 벗. 이거리를 사랑했던 그 벗과 닮았다. 우리들의 거리는 그가 그러했듯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성실히 일하며 열심히, 그리고 한결같이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욕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날을 보내며 꿈꾸는 듯도 보인다.(나탈리아긴츠부르그, 「어느 친구의 초상」, 1957년 『빛은 토리노에서」, 노르베르트 보비오 지음, 나카무라 가쓰미 옮김, 세이도사, 2003년)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벗"이 바로 체사레 파베세다. - P237

나중에 신부님 계신 곳에 가면 내가 묻힌장소를 가르쳐주실 겁니다."라고 남겼다. 예순한 살의 재봉사 주세페 안셀미는 세상에 남게 될 가족에게 이렇게 썼다. "오늘 밤, 처형된다고 들었다. (……) 잘들어라, 나는 죄가 없어. 단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자들이 꾸민 덫에 희생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보다 더욱 가슴을 펴고 떳떳이 살아야만하는거야." 가구를 만드는 마흔한 살의 장인 피에트로 베네데티는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공부와 노동을 사랑하거라. 정직한삶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며 인생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란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삶의 신조로 삼고서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의 소망과 고통에 항상 마음을 쓰거라. 자유를 사랑하고이 보물을 위해서는 부단한 희생을,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예의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어머니 조국을 사랑하거라. 하지만 진정한 조국은세계라는점, 세상 어디에도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바로 너희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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