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여학생에게 물어서 역 앞에서 공동묘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묘지에 도착하자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 정문으로 많은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날씨 좋은 토요일이라묘지를 찾은듯했다. 장례식도 몇 건이나 치러졌다.
광대하게 펼쳐진 묘지로 들어가서 유대인 묘역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묘역 입구 철문이 닫힌 채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유대교 안식일에 해당하므로 묘역의 문을 아예 닫아버린다. 알고 있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밀라노에서 하루 이틀 쉬다 보니 요일 감각이 헝클어져버린 탓이다. 모처럼 멀리서 찾아왔는데 프리모 레비의 무덤에 가볼 수가 없다니.
철책 너머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그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17451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왼쪽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죄수번호다. - P211

그러면서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피신하도록 도와주는 활동을 펼쳤고 프리모 레비의 어머니와 여동생과도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고 한다. 종전 후해도 아우슈비츠에서 생활한 프리모 레비와의 친분은 이어졌다. 그가 자살하기 며칠 전까지도 경치가 좋은 언덕으로 함께 산책을 갔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프리모 레비가 타자기로 쳐서 보내온 「회색지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수록)의 초고 상태의원고를 보여줬고 레비와 산책했다는 언덕으로 안내했다. 토리노를 둘러싼 흰 산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녀는 "저 고개 너머가프랑스죠. 우리는 저기를 넘어가서 파르티잔에게 무기를 전달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0세에 은퇴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프리모 레비의 담당 편집자로 일했던 발터 바르베리스 씨였다.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조금 소개해본다.


프리모 레비는 단순히 소설가라기보다 ‘기억의 작가‘이며 무엇보다 우선 ‘중증인‘이었습니다. 현재 역사수정주의나 역사적 사건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 P219

는 유럽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하나의위기라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경향은 증언의 역할을 하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정반대쪽으로 향하게 하는 셈입니다. 그런의미에서 프리모 레비의 문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늘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했는데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어요. 결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만년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어쩌면 개인적인 일.
가정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221

또 하나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 사람들에게 자행한일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똑같이 벌이는 게 아니냐고 우려했어요. 그래서 유대인 사회와 맺는 공식적인 교류나 관계로 인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유대인 사회는 같은 유대인인 레비가 이스라엘의 정책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프리모 레비와 같은 인물이 전해준 증언을 - P221

이어나가야 할 윤리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줄리아나 테데스키 씨와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아우슈비츠의 생환자다. 프리모 레비의 친구였던 그녀는 1965년에열린 수용소 해방 기념식에 즈음해서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를다시 방문했다. 줄리아나 씨는 오랜 세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앞서 언급한 레비의 담당 편집자 발터 바르베리스 씨도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왼팔에는 죄수 번호를 새긴 문신이 남아 있었다. - P223

이 숫자를 레이저 수술로 지운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결코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날씨가 추워져도 반팔을 입고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게끔 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의무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류가 앞으로 인종, 민족, 종교 같은 장벽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해갈 수 있을까요?" 나의 순진한 질문에 그녀는 절레절레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요.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무리일 테지요." - P223

전후에는 공화제를 실현한 진보적 운동의 지적·문화적 기반이장소다. 넓은 거리에 서서 살짝 고개를 들어 보면 하얗게 빛나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험한 산길을 반파시주의 투사나 망명자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간성의 이상으로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들." 다큐멘터리촬영을 위해서 토리노를 방문했을 때 주위를 둘러싼 험준한 산들을 가리켜 나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산들은 변함없이 거기에 있지만 이상의 광휘는 위협받고 있다. 반파시즘 투쟁의 사명을짊어지고서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한 세대는 세상에서 거의 퇴장했다. 이제는 거칠고 천박한 포퓰리스트의사나운 목소리가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일본이야말로 한층 더 심각하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이후 40년도 더 지난 지금, ‘인간성의 재건을 위해 힘겨운증언자의 역할을 맡았던 프리모 레비가 살아있었다면 이사회를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했을까. - P231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자택은 레 움베르토 거리 Corso Reto 75번지에 있다. 이 거리는 로마 거리와 나란히 시내 중심부Umberto에서 남서방면으로 뻗어 있다. 길 양쪽으로는 19세기 말 무렵에솜씨 좋게 지어진 아파트가 늘어서 있다. 화려한 장식도 없이 실용적인 인상을 주는 안정감있는 풍경이다.
"이 거리의 기본적인 성격은 멜랑콜리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쓴 말이다.


멀리 사라져가듯 흐르는 포 강은, 한낮에도 해질녘을 연상케 하는 보랏빛 안개로 싸인 지평선을 향해 아득히 멀어져간다. 어디에 있어도 매연이 내뿜는 우울하고 분주한 듯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 우리들의 거리는 이제는 모두가 깨닫고 있듯 잃어버린 벗. 이거리를 사랑했던 그 벗과 닮았다. 우리들의 거리는 그가 그러했듯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성실히 일하며 열심히, 그리고 한결같이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욕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날을 보내며 꿈꾸는 듯도 보인다.(나탈리아긴츠부르그, 「어느 친구의 초상」, 1957년 『빛은 토리노에서」, 노르베르트 보비오 지음, 나카무라 가쓰미 옮김, 세이도사, 2003년)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벗"이 바로 체사레 파베세다. - P237

나중에 신부님 계신 곳에 가면 내가 묻힌장소를 가르쳐주실 겁니다."라고 남겼다. 예순한 살의 재봉사 주세페 안셀미는 세상에 남게 될 가족에게 이렇게 썼다. "오늘 밤, 처형된다고 들었다. (……) 잘들어라, 나는 죄가 없어. 단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자들이 꾸민 덫에 희생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보다 더욱 가슴을 펴고 떳떳이 살아야만하는거야." 가구를 만드는 마흔한 살의 장인 피에트로 베네데티는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공부와 노동을 사랑하거라. 정직한삶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며 인생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란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삶의 신조로 삼고서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의 소망과 고통에 항상 마음을 쓰거라. 자유를 사랑하고이 보물을 위해서는 부단한 희생을,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예의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어머니 조국을 사랑하거라. 하지만 진정한 조국은세계라는점, 세상 어디에도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바로 너희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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