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신들의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나도 길에서 뱀들과 마주쳤으며 그 만남으로 상태가 바뀌어 이상하게도말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나도 실은 길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나도 그 만남으로 상태가 바뀌어 이상하게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운명을 면하게 되었다. - P63
마침내 그는 자기만의 완벽한 장소를 찾았다. "너무 거대해서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지 짐작조차 못할 만한 광경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날 오후 그는 그곳에서 제인의 뼛가루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가 하늘로 날려 보낸 제인의 뼛가루는 별안간 바람이 사라진 공기 중에 한참 머무르다 느릿하게, 조금씩 빛바랜 사암을 등지고 날아갔다." 그는 뼛가루를 담은 도자기 병을 발밑 모래에 반쯤 묻었다. 그리고 몸을 낮춰 온기가 남은 바위에 가만히 뺨을 댔다. 그가 바위에 뺨을 대고 있는 동안 쓸쓸한 구름이 그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리고 다른 일도 있었다. "하늘나리 꽃밭에서 점심 식사를 끝낸 벌새 한 마리가 날갯짓하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아무리 슬퍼도 그냥 흘려보낼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단지 몇 분에 불과하지만그는 그 시간 동안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삶에 생긴 구멍이 하늘과 반들반들한 바위와 나팔꽃이 있는 더 넓은 세상으로 메워지는 듯"했다. - P66
슬픈 자아가 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경이로운 생명들의 관계였다. 그는 이것을 마치 고대 중국의 풍수지리를 내적으로 체험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생명을 이렇게정의한다. "몸으로 표현된 관계들의 망."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생각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가? 고대 중국의 풍수지리를 내적으로 체험하다니? 몸은 관계들의 망이라니? 그가 들려주는 것은 이야기의 시작도 자기 자신, 이야기의끝도 자기 자신, 하루의 시작도 자기 자신, 하루의 끝도 자기 자신인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말을 몸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뭔가가 우리에게 있다. 맹목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한 맹목, 주변 세계를 다르게 볼 기회를 막고, 자신을 새롭게 알 기회, 회복의 기회마저 막아버리는 것, 너무 자주 두려움에 빠지거나 공허하거나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너무 자주 우리 삶을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것, 바로 지나친 자기중심주의다. - P68
이 자기중심주의가 세상을 성스럽게 경험하는 것을 막고, 세상을 풍요롭게가 아니라 그 정반대로 세상을 빈곤하게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신체는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기관들로 만들어져 있다. 자아의 고통은 자아의 바깥으로 나와야만 덜어지고 게리 퍼거슨이 보여준 세상이 바로 자아 바깥 세상, 아직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세상이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관계‘ 속에서 에너지와 힘을 얻고 ‘회복‘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게 된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에게 ‘회복‘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일까? "삶은 내 안에도 더 많은 삶을 탄생시킬 것이다. 더욱 다양한관계와 경험을, 감사를, 아름다움을. - P69
내가 만약 교통사고를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4월에, 너무나 아름답다는 검은머리물떼새들의 선회를 보러 유부도로 여행을 갔을 것이다. 내가 사고로 보지 못한 검은머리물떼새가 머리 위를날다니. 이를 어쩐다지? "복 피디님, 검은머리물떼새예요!" 나는 복 피디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사고 이후 처음으로 새가 날아간 쪽을 향해 절뚝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 몸만 생각하던 에너지의 방향과 흐름이 바뀌었다. 에너지가 바깥을 향하기 시작했다. 위기상황일수록 바깥을 바라보는 힘내가 그토록 절실하게의지하던 힘, 나를 수차례 살려준 힘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세상의 아름다운 장소들은 무거운 영혼을 가진 사람의 발걸음을 조금 더 가볍게 내밀게 돕는다.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한다. 나는 내 몸의 회복을 걱정하는) 나이면서 나 자신 너머, 내 바깥에 있는 존재가 되어갔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바깥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다. 나는 다시 사고 이전의 자유롭던 내가 되어갔다. 자연은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를 놀라게 할 일을 선물한다. 이래서 감사라는 단어가 생겨났을 것이다. 게리 퍼거슨이말한 대로 ‘회복은 더 많은 감사를, 더 많은 아름다움을‘ - P71
지속적인 부정의만큼 유족들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었다. 그날 세상을 떠난 쌍둥이 중 한 명인 나현이는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저는 소망유치원에 다닙니다. 저는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햇님반 선생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날 머문 씨랜드는 학생 1인당 5천 원의 리베이트 비용이 오가는 곳이었다. 유족들은 아이들의 믿음을 저버리는 세상이 미웠다. 유족들은 한 인간의 생명, 자유, 꿈이 누구의 손에 달렸는지를 따져보고 마음속 깊이 흔들렸다. 우리 모두 깨끗해지지 않는 한 대책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고 유족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저절로 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현실의 추악함과 절대로 이해관계를 나누어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을 유족들은 고통과 분노로 피눈물을 쏟으면서도 끝까지용감하게 진실을 감당했고 경험을 보존했다. 2000년 4월, 유족들은 ‘그날 밤 씨랜드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라는 부제를 단 「씨랜드 참사 백서를 냈다. 유족들은 이 - P78
책에 「우리의 다짐 글이란 글을 남긴다.
과연 무얼 걸고 맹세해야 우리의 다짐이 변하지않을까? 우선 우리 유가족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함께하길바란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이 편할 것이고 우리의 사랑 또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기때문이다 외롭고 슬플 땐 오늘을 다시 되돌아봤으면 한다 우리가 함께했던 세월을 아이들을 맨 처음 잃었을 때부터 그리고 그 긴 여정을 함께했던 세월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어떻게 해야 바로 사는 건지, 무엇이 옳은 건지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알고 있다 우리가 영원해야만 그리고 우리가 언제까지나 깨끗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린 바라고 싶다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고 사랑받기를 - P79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우리 아이들을 잃은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미래를 위해서 자라나는 새싹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2017년이나 2018년경, 나는 처음 이 글을 읽었다. 읽고 나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작아졌다. 깨끗하게 살아야만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 신비로운생각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 말은 할 수만 있다면 불타는 지옥에 가서라도 아이들을 업고 나오고 싶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사랑했던 기억, 몸의 따뜻함, 그 몸의 훼손, 피, 눈물, 검은 상복, 흰 상복의 기억이 유족들의 말 안에 다 녹아 들어가 있다. 어떤 경험을 들을 가치가 있는 말로 바꾸는 것은 미치도록 어려운 일인데 유족들은 바로 그 일을 했다. 현실을 그대로 보면서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방법을 상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돌덩이 같은 현실을 깨려고 숯덩이 가슴에서 나온 말들이다. 비극과 꿈의 가슴 찢어지는 결합이다. 나는 이 말들이 그들을 부축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지상에 묶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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