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평일 저녁 5시와 주말 아침 11시면 제이비는 지하철을타고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평일에 갈 때가 제일 좋았다. 그는 커넬 역에서 지하철을 타서 정류장에 설때마다 기차 안이 온갖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로 끝없이 변화무쌍하게 채워지고 비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열 블록 정도마다지하철의 인구는 폴란드와 중국, 한국, 세네갈 사람들에서 세네갈, 도미니카,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 또 파키스탄, 아일랜드, 살바도르, 멕시코 사람들, 그러고는 멕시코와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티베트 사람들이 뒤섞인 정신없고 놀라운 조합으로 재구성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고는 미국에 새로 왔다는 것과 이민자들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결의와 체념이 혼재된 지친 표정들뿐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과 자신이 사는이 도시에 대한 감상적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둘 다 자주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고향을 화려한 모자이크라고 찬양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러는 사람들을 놀려댔다. 하지만 이 지하철 공간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분명 그날 해냈을 노동, ‘진짜‘ 노동의 총량은 대단하게 생각했다.  - P43

지금 그는 이 사진을 작업하는 중이고, 이 그림을 그리려고기존 형식을 버리고 1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캔버스로 바꿨다. 주드의 홍채에 어울리는 오묘한 녹색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며칠 동안이나 실험을 했고, 머리카락 색들도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또다시 칠했다. 그건 대단한 그림이었고, 그는 그걸알았다. 이따금 찾아오는 절대적 확신이었다. 그는 그림이 어딘가의 갤러리 벽에 걸릴 때까지는, 그래서 주드가 그 그림에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그림 속 자신이 너무 연약하고, 너무 여성적이고, 너무 취약해 보이고, 너무 ‘어려‘ 보인다고 주드가 싫어할 거라는 걸, 또한 그림 속에서 그 외 수많은 가상의 것들, 주드 같은자기혐오 종자가 아닌 제이비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온갖것들을 발견하고 싫어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이비에게 있어 이 그림은 이 연작에서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건 연서였다. 문헌이었다. 대하소설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의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때로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갤러리들과 파티들과 다른 예술가 - P59

들과 야심의 세상이 저 아래 까마득한 한 점으로 작아진 나머지, 그냥 축구공처럼 뻥 차서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멀고 먼 어느 궤도로 휘휘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6시가 거의 다 됐다. 곧 빛이 바뀔 것이다. 비록 저 멀리서 철로 위를 덜컹덜컹 달리는 열차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지금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 공간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의 앞에는캔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붓을 들고 시작했다. - P60

지하철에는 시들이 있었다. 움푹 파인 플라스틱 좌석과, 우편으로 대학 학위를 딸 수 있다고 약속하는 회사들과 피부과 광고들 사이의 빈 전시 공간을 시가 인쇄된 기다란 코팅 종이들이채우고 있었다. 이류 스티븐스와 삼류 로스케와 사류 로웰들, 누구의 마음도 흔들어놓지 못하는 운문, 공허한 경구로 전락한분노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렇게 제이비는 늘 말했다. 그는 그 시들에 반대했다. 그것들은 제이비가 중학교 때 처음 나타났고, 지난 15년 동안 그는계속 거기 반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 예술이랑 진짜 예술가들한테 투자하는 대신, 노처녀 사서들이랑 카디건 걸친 게이들한테 이런 쓰레기들을 고르라고 돈을 주고 있잖아." F 열차가 끼이익 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위로 제이비가 윌럼에게 소리 질렀다. "그리고 이건 다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유형의 쓰레기들이라고. 아니면 사실은 좋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 - P60

이 거세시켰든지. 게다가 이 사람들은 다 백인이야. 그거 눈치쳤어? 거기에 새로울 게 젠장 뭐가 있냐고?"
다음 주 윌럼은 랭스턴 휴스 포스터가 걸린 걸 보고 제이비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랭스턴 휴스?!" 제이비는 신음했다.
"내가 맞혀볼게- <유예된 꿈>, 맞지? 그럴 줄 알았어! 그 쓰레기는 치면 안 되지. 어쨌거나 뭔가가 ‘정말로‘ 폭발하는 일이 생기면, 그 쓰레기는 딱 2초 만에 거기서 내려질걸."
그날 오후 윌럼의 맞은편에는 톰 건의 시가 걸려 있었다. "그들의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건 토론 속에 존재했다." 그 아래 누군가가 검정색 마커로 이렇게 써놓았다. "걱정 마 친구 나도 계집은 못 얻는 처지니." 그는 눈을 감았다. - P61

사실 그에게는 제이비와 주드가 가진 그런 식의 야망, 그런 묵묵하고 모진 결의는 없었다. 그들은 그 결의로다른 누구보다 더 오래 스튜디오에 사무실에 남아 일했고 어딘가 꿈꾸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그들의 일부는 이미 오직자기들에게는 명료하게 보이는 상상 속 미래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비의 야망에 불을 지피는 것은 그 미래에 신속하게 도달하고픈 욕망이었다. 하지만 윌림이 보기에, 주드의야망을 자극하는 것은 공포,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순식간에과거로, 절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이전 생활로 다시 돌아가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이런 특성은 주드와 제이비만 가진게 아니었다. 뉴욕은 야심가들이 사는 곳이었다. 종종 그건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야망과 무신론, "야망이 내 유일한 종교야." 맥주에 얼큰하게 취해 있던 어느 늦은 밤 제이비가 윌럼에게 말했다. 그 말에선 언젠가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진짜로 말할 때를 대비해 무심히던지는 말투를 연마하려고 리허설이라도 한 것처럼 약간 연습한 티가 났다. 하지만 윌럼은 그게 진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오로지 이곳에서만은 자신의 일을 위해서라면 광기를 제외한 무엇이든 정당화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오로지 이곳에서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 대한 믿음은 변명의 대상일 수밖에없다. - P69

건축학교에 간 이유조차 최악인 것 같았다. 그는 그냥 건물이좋아서 갔다. 그건 괜찮은 열정이었고,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함께 여행을 다닐 때마다 집들과 기념비들을 구경시켜줬다. 심지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는 늘 상상의 건물들을 그렸고, 상상의 구조물들을 만들었다. 그게 위안이고 보고였다. 말할 수없는 모든 것, 결정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건물에 녹여낼 수 있는 것 같았다.
근본적으로, 가장 부끄러운 점은 이것이었다. 섹스에 대한 빈약한 이해도, 불충스러운 인종적 관점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못 한다거나 돈을 못번다거나 자율적 존재로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력도 아니었다. 밤에 그와 동료들이 사무실에 앉아 모두각자의 야심찬 꿈의 건축물에 깊이 몰두해 있을 때, 다들 있을법하지 않은 건물들을 스케치하고 계획하고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매일 밤, 다른 사람들이 창조하고 있을 때, 그는 모방을했다. 여행하면서 본 건물들, 다른 사람들이 꿈꾸고 건설한 건물들, 자기가 살았거나 들어가본 건물들을 그렸다. 이미 만들어 - P100

진 건물들을 개선할 생각조차 없이 그저 흉내만 내면서 다시, 또다시 만들었다.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상상력은 사라졌고, 모방꾼이었다.
그는 겁이 났다. 제이비에게는 연작이 있다. 주드에게는 자기일이 있다. 윌럼도 자기 일이 있다. 하지만 다시는 아무것도 못만든다면 맬컴은 어떻게 하나? 자기 방에서 모눈종이 위로 손만 움직이고 있으면 충분하던 시절이 그리웠다. 결정과 정체성의 나날 이전, 결정은 부모님이 대신 해주고 자기는 그저 깨끗하고 날카로운 선, 줄자의 완벽하게 예리한 날에만 집중하면 되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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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YAYANAGIHARA
한야 야나기하라
아시아계 미국 소설가.
현재 뉴욕 시에서 살고 있다.

에즈라는 예술가였고, 그리뛰어나진 않았지만, 뛰어날 필요도 없었다. 제이비가 자주 상기시켜주듯이. 그는 평생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에즈라뿐만이 아니라, 에즈라의 자식들의 자식들의 자식들까지도 일할 필요가 없었다. 팔리지도 않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형편없는 예술품을 대대손손 만들고도, 마음 내키는 대로 최고급 기름을 넣고 맨해튼 도심에 위치한 비실용적으로 넓은 로프트들을사서 형편없는 미감으로 엉망진창 꼬락서니를 만들어놓을 수있었다. 그리고 예술가 생활에 진력이 나는 날이 오면 -제이비는 에즈라가 언젠가 그럴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신탁 관리인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네 사람(음, 어쩌면 맬컴은 빼고)은 평생 꿈도 꾸지 못할 어마어마한 현금 더미를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에즈라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제이비와 몇몇 학창 시절 친구들을 자기 아파트들에서 살게해줘서만이 아니라 로프트의 이곳저곳에는 언제나 네다섯 명정도가 기어 들어와 살고 있었다-착하고 기본적으로 관대한사람인 데다가 음식과 마약과 술을 마음껏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파티를 여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 P15

한번은 제이비가 맬컴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맬컴은 윌럼이 눈치를 못 채기 때문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이에 제이비는 그냥 툴툴댔지만, 그의 생각은 이랬다.
맬컴이야말로 자기가 아는 사람들 중 제일 둔해빠진 인간인데, 그런 맬컴마저 윌럼 주위의 여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렸다면 윌럼 본인이 모르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중에 주드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윌럼은 주위 남자들이 자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여자들에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가설이 더 말이 됐다. 윌럼은모두의 사랑을 받았고 사람들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는 일종의 무지를 가장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구경은 여전히 흥미로웠고, 구경도, 그 일로 나중에 윌럼을 놀리는 것도 세 친구에게는 절대 질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보통 윌럼은 그저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 P23

주드와는 그 일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주드가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조그만 상처에 움찔하는 모습을, 때로 너무 막대한 고통이 덮치면 구토를 하거나 바닥에 고꾸라지거나 그냥 의식을 잃고 기절해버리는 모습들을 봐왔다. 지금 거실에 있는 주드의 모습처럼.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왜 주드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지 않았는지, 왜 주드에게 그럴때 어떤 기분인지 말해보라고 하지 않았는지, 왜 본능이 시키는대로 감히 행동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냥 옆에 앉아 다리를 문질러주고, 멋대로 어긋나는 신경말단을 주물러 가라앉히려 해보지 않았을까. 대신 그는 여기 욕실에 숨어 바쁜 체하고 있다. 가장 소중한 친구 하나가 바로 저기지저분한 소파에 철저히 홀로 앉아 산 자들의 땅으로 돌아오기위한, 의식을 되찾기 위한 느리고 슬프고 고독한 여행을 하고있는데 말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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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은 어떻게 500만 권이 팔린 대중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격 공개한 유홍준의 글쓰기 비법서이다. 그를 자라게 한 토양과 지적 교류의 망, 현장의 생생한 교훈과 문장쓰기의 요령에 이르기까지, 그가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기록이다. 자전적이면서 시대적인 기록!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간결하면서도 깊고 문학적이고, 사사로우면서도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글 중국작가 루쉰이 즐겨 쓴 잡문이다. 유홍준 선생의 잡문도 그렇다. 특히 루쉰이 삶을회고하면서 쓴 잡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좁다를 닮았다. 이슬 머금은 꽃을 아침에 따지 않고 저녁에 줍는 사람은 삶에서 시간이 지닌 의미. 삶의 위대함과 허무를 아는 이다. 루쉰 목판화 운동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시더니, 이번에는 루쉰의 정문전통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녹여 유홍준의 백자 달항아리 같은 잡문을 받았다.
이욱연(서강대 교수, 홀로 중국을 걷다. 저자

유홍준 선생님의 묻어둔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이 잡문집은 한국미술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생에 대한 섬세한 시선으로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집처럼 나가온다. 각 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우리가 잊고 있던 한국문화의 깊은 정서를 되살려주며, 그 속에 담긴 위트와 통찰력은 한국적 미의 본질을 깨닫게 하여 일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열어준다. 예술적 영감과 선동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깊은 사유를 전하는 소중한 책이다.
양태오(공간 디자이너)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작과비평사 1995) 홍세화(1947~2024)가 세상을 떠났다. 홍세화의 이름 앞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한 시대를 울린 명저의 작가, 『한겨레 초대 시민편집인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잡지 『말과 활』의 편집·발행인을 지낸 언론인, 명칼럼 「빨간 신호등」의 진보 논객,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학벌 없는 사회‘의 공동대표, 진보신당 대표, 그리고 장발장 은행장을 지낸 사회운동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현재의 모습으로 이야기되지만, 죽음은 그의 삶 전체를 드러낸다. 홍세화는 1947년 해방공간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로 8.15 해방 - P270

이 되자 귀국하여 새 가정을 꾸려 홍세화를 낳았다. 그 기쁨과 회망을 담아 아들의 이름에 세상 세(世)자,고를 화(和) 자를 넣어 세상을 평화롭게 하라며 세화라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였고, 가정마저 파탄이 나 홍세화는 5세 때부터 외가에 떠맡겨졌다. 그러나 홍세화는 반듯하게 자라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66년 서울대 공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바로 그해 가을 아버지를 따라 선조의 묘가 있는 충남 아산군 염치면 황골마을에 성묘 갔다가 남양 홍씨 집안 어른으로부터 6.25 동란 때 황골 양민학살 사건에서 어머니와 함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삶과 죽음, 국가와 민족, 전쟁과 평화, 이런 상념들이 온몸을 휩싸고 돌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민족적 비극의 현장이야기를 몰랐다면 자신은 어영부영한 생을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 P271

 1년 만에 30만 부가 팔리고 현재까지 50만 부가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워낙에 명문인 데다 그 사연이 절절하고 우리가 몰랐던 서구 사회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오고 그가 주장하는 내용에 독자들이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프랑스에서 수입하고 싶은 제1덕목으로 내세운 톨레랑스(tolerance)는 정말로 우리 사회에 긴요하고 간절한 것이었다.
톨레랑스는 타인과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관용(寬容)‘이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홍세화는 이보다는 ‘용인(認)‘에 가깝다고 했다. 프랑스 사전은 이 단어를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풀이한다. 한자로 풀자면 ‘화이부동(和而不同)‘에 가깝다. 즉 ‘(남을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남으로 하여금 당신을)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뜻이다. 홍세화의 화(和)이다. - P276

여기에서 우리는 그동안 메일 속에 감추어져 있던 김민기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누구 못지않게 각별한 사이였던 나조차 몰랐던 그의 삶의 세세한 편린들을 보면서 ‘아, 민기가 그때 저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많이 미안했다.
「아침 이슬」 발표 이후 독재정권이 그를 회유하는데 넘어가지않고 1977년 군에서 제대한 후 경기도 연천 민통선 마을로 내려가 농사지으며 자신을 감추고 그 동네 주민들과 어울리던 모습은 실로 장해 보였다. 원인 모를 화재로 연천 집을 잃고는 인천 피혁공장에 들어가 일하며 여공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 - P282

다. 잡히면 의문사로 희생될 줄 알면서도 「공장의 불빛」을 송창식의 녹음실에서 제작하여 채희완의 집에서 카세트테이프로 만들어 비밀리에 알음알음 보급하던 그 용기에는 내가 초라해지고 부끄럽기만 하였다.
김민기는 난곡동 판자촌 달동네의 야학교에 교사로 나가기도했다. 1978년 전남대 2학년생 박기순이 광주 들불야학 선생을 하면서 위장 취업으로 공장에서 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때 김민기가 장례식에 내려가 「상록수」를 불렀다는 대목에서는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 박기순은 내 친구 ‘광주 민주화 운동의 대들보‘인 박형선의 여동생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다시보기로 세 번 돌려보면서 앞으로 누군가가 김민기를 이야기하고 그의 평전을 쓰려면 그 기준을 여기에 두지 않으면 안 될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김민기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들을 위하여 다행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그 내용을 새삼 소개할 필요성은 전혀 못 느끼며 다만 그 속에 삽입하고 싶은 몇 장면을 덧붙인다. - P283

1. 주제를 장악하라
글쓰기의 핵심은 주제를 장악하는 것이다. 주제가 명확하지 않으면 글이 흔들린다. 간혹 소재와 주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소재는 글의 재료이고 주제는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비유하자면깍두기는 주제이고 소재는 무이며 양념의 배합은 글의 구성이다.
제목만으로 그 주제를 전달할 수 있을 때 좋은 글이 된다. 제목만으로 전달이 잘 안 될 때는 부제(副題)를 달아보면 명확해질 때가 있다. 이를테면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해남 답사기」, 「봄의전령: 홍제천변의 개나리 같은 식이다.
나는 제목이 먼저 정해져야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다 써놓고 제목을 달려면 늦다. 글만 쓰고 제목은 편집자에게 맡기는 것은 주제가 약한 글이다. 「전함 포템킨」으로 유명한 몽타주 이론의 영화감독 예이젠시테인(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은 영화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한 컷의 장면을 찾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 P302

2. 잠정적 독자를 상정하라
글이란 내가 아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누군가가 읽어줄 것을 기대하고 쓴다는 점에서 공급자 입장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을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 항상 내 글을 - P302

읽을 잠정적 독자를 머리에 떠올리고 쓴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내 전공인 미술사 논문을 쓸 때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분들을 염두에 두고 쓰지만, 산문, 칼럼, 답사기 등 대중적 글쓰기를 할 때는전공이 다른 독자들을 머릿속에 두고 쓴다. 심지어 미술평론을 쓸때도 미술평론가나 미술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미술에 관심 있는 일반인이 읽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잠정적 독자가 이해 못할 얘기나 용어는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예를 들어 ‘미니멀아트‘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경우, 전공자들이라면 그 단어로 족하지만 일반인을 염두에 둘 때는 ‘조형적 표현방식을 최대한 (맥시멈)이 아니라 최소한 (미니멈)으로 압축한다는 미니멀아트에서는‘
하는 식으로 풀어 써준다. - P303

독자는 그 글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독자는 일단성실하게 읽는다. 그러나 독자는 언제고 글이 시시하면 읽다 말수 있다. 그 점에서 독자는 매우 단호하다.
글을 쓸 때는 독자를 가르치려들지 말고, 독자에게 호소해야 한다. 신문에 실린 칼럼을 읽다 보면 많은 필자들이 정연한 논리로 정론을 펴지만 어떤 글은 필자가 유식하고 똑똑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독자 입장에서 ‘야단맞는 것 같아 끝까지 못 읽는 경우가 많다.
독자를 우습게 보다가는 크게 다치거나 망신당한다. 독자 중엔나보다 훨씬 명석하고 사회적 경험이 많은 분이 많다. 다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이 나의 독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독자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 이는 글 쓰는 이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하다. - P303

3. 기승전결을 갖추고, 유도동기를 활용하라
나열식 서술은 읽는 이를 피곤하게 만든다.
 ‘지루한 웅변‘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절대 금물이다. 하나의 글은 어떤 식으로든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글의 짜임새이다.
기승전결에서 기(起)는 들어가는 말로 여러 방식이 있다. 예를들어 가을에 열리는 어떤 서예전에 대해 쓴다고 할 때 "9월로 들어서면서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라고 편하게 말머리를 시작하는 방법, "지금 예술의전당에서는 근대서예전이 열리고 있다"라고 첫머리부터 치고 나오는 방법, "서예는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대중적 관심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지만" 하고 주제를 암시하고 풀어가는 방법 등이 있다. 여러 방법 중 자신의 취향 또는 글의내용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런 출발 의식을 갖고시작했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 P304

승(承)은 글의 내용에 해당하므로 있는 사실대로 풀어가면 되지만 전(轉)에서는 글에 활력을 넣어주어야 한다. 이때 반전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할 수 있으면 좋은 글이 된다.
결(結)에 이르기 전에 주의할 점은 결론은 감추고 전개해와야지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늘어놓으면 맥이 빠진다. 결을 맺는 데도여러 방법이 있다. 핵심을 요약하는 법,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시 - P304

한번 강조하는 방법, 잔잔하게 조용히 마무리하는 방법 등이 일반적인 마무리인데 때론 무대에서 마지막에 징을 한 방 울리듯 간결하게 끝내는 방법도 있다. 내가 이 책의 「꽃차례」에서 "나이가 드니 이제 꽃이 보이기 시작하네요"로, 「우리 어머니 이력서에서
"우리 어머니 이름은 신자, 영자, 전자이다"로 끝낸 것이 이 수법이다.
긴 글을 쓸 때는 독자를 계속 끌고 갈 계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오페라나 교향시에서 일정한 곡조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유도동기(誘導動機, 독어 leitmotiv) 기법을 빌려올 수 있다. 한예로 답사기 2권의 청도 운문사 답사기에서 나는 자칫 지루해질수 있는 절집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하여 내가 잘 알고 있는 지기 스님을 등장시켰다. 이름은 밝히지 않고 계속 그분의 설명, 잊을 만하면 그분과의 대화를 삽입하면서 글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긴 이야기를 이렇게 끝냈다. "나의 지기, 그분의 법명은 진광이다." - P305

4. 에피소드로 생동감을 불어넣어라
글을 쓰면서 그 주제에 맞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글은 무조건성공한다. 답사기 1권의 경주 답사기에서 <삼화령 애기부처>는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애기처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재해설하듯 하자면 이와 같은 통일신라 직전 고신라의 불상 조각 - P305

은 절대자의 친절성을 반영하여 인간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애기부처가 보여주는 예술적 감동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 애기부처에 얽힌 생생한 에피소드 하나를 알고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정양모 선생님이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된 내력을 얘기해준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은절대로 손으로 만지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박물관에 단체로 견학 온 초등학생들이 인솔 교사를 따라 진열장 유물들을 보면서 지루하게 지나가다가 이 애기부처를 보는 순간 그 귀여운 모습에 예술적 공감 내지 어린이로서 동질감을 느껴 경비원 몰래 발가락을 살짝 만지고 돌아서는 바람에 애기부처의 발가락이 까맣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가 있어서 <삼화령 애기부처>답사기를 쓸 수 있었다. - P306

5. 이미지를 차용하라
누구나 글을 쓰면서 가장 애태우는 것 중 하나는 어휘력의 부족이다. 특히 슬프다, 그립다, 안타깝다, 아쉽다 등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의 경우는 너무도 슬프다. 한없이 그립다, 애가 타도록 안타깝기만 하다. 마냥 아쉬운 감정이 일어난다 등 걸맞은 부사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던 이미지로 대체하여 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때가 많다. - P306

답사기 1권의 강진 답사기에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만덕산의 야트막한 산길은 봄이면 길가에 춘란이 피어나고 솔밭 속에서 벌 나비가 날아들고 산새소리가 답사객을 맞이해주는, 우리네 야산의 정겨운 고갯길이다. 그런데 어느 해 찾아갔더니 솔잎혹파리 피해로 소나무들이 모두 죽어 마른 가지가 허공을 향해뻗어 있고 살충제를 살포하는 바람에 벌 나비가 다 사라져 산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적막강산에 대한 아쉬움을 나는 형용사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면서 아쉬움을느꼈던 때로 당시의 감정을 대신했다.


솔밭과 산새가 사라진 만덕산의 봄, 그것은 마치 외할머니 돌아가신 외갓집을 찾는 듯한 허전함으로 다가왔다. - P307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에서도 이미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답사기에서 불국사 석가탑의 단아한 아름다움과 고선사탑의 장대한 멋을 이야기하면서 서양 여배우를 예로 들어 석가탑은 잉그리드 버그먼, 고선사탑은 소피아 로렌에 비유한 바 있다. 당시 독자들은 그것을 나의 유머 감각과 함께 절묘한 비유로 받아들이고 그 미감을 선명히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시효가 있어 지금 MZ세대들에게도 통하는지는 알 수 없다. - P307

6. 유머를 적절히 구사하라
유머는 글의 재미와 멋을 살려준다. 유머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글이 전개되는 상황과 긴밀히 맞물릴 때 효과가 있다. 요즘 시골은 젊은이를 보기 힘들고 노인들만모여 사는데, 안타깝지만 이것이 시골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나는 답사기 6권의 부여 답사기에서 내가 반교리 마을에 휴휴당을 마련하고 이장님에게 마을회비를 건넸을 때 이장님이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 한 말로 대신 전했다.

"아직 환갑은 안 됐지?"
"안되고말고요."
"그럼 청년회로 들어가." - P308

7. 은유를 음미하게 하라
문장 속에 은유와 상징이 함축될 때 독자들의 사색을 일으킨다. 설명이 아니라 글의 행간에 서린 의미를 음미해볼 수 있는 계기를제공할 때 좋은 문장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답사기 1권의 강진 무위사 답사기에서 극락보전 건축의 단아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답사기 1권의 문경 봉암사 답사기에서는 가양주 9단이 과실주 담는 과정을 설명했다. 가양주 9단이 과실을 맑은 물에 헹구어 병에 넣고 증류주를 넣은 다음 3개월 후에 과실은 빼어내고 엑기스만 담아 밀봉한 다음 어두운 곳에 놓아두어야 한다고 했을 때 한사람이 선반에 놓고 보면 안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양주 9단은 느린 어조로, 그러나 단호하게 반드시 어두운 곳이어야 한다며 이 - P310

렇게 말했다.

"술은 자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이런 은유 속에는 인생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거기서 끝내야지 여기에 잇대어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라고 풀어놓으면
말의 밀도가 확 떨어진다. 독자가 음미하며 사색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P311

8. 비판하려면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라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아둔한 현실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히 초기의 1권, 2권이 심하다. 그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도 당하였고 개인적으로 사과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가 글쓰기에 서툴러 직설적으로 비난했기 때문이다. 문학적수사를 동원하여 불특정 다수를 비판한 경우는 좋은 유머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
「국토박물관 순례』 1권의 부산 영도 답사기에서 나는 부산의중요한 문화유적지로 복천동 고분군을 말한 적이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가야 고분군으로 여기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복천박물관은 한때 박물관문화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 꾸며져 있다. 그런데 정작 부산 사람들에게는 덜 인식되어 있어 이를 비판 - P311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를 만났는데 부산 사람이라고 하면 우선 복천동 고분군 이야기를 꺼내 이를 아는 분과 모르는 분, 가본 분과 안 가본 분으로 문화적 소양을 평가하곤 한다.

답사기 1권의 강진 답사기에서는 천일각에서 구강포 바다 건너로 보이는 칠량면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으로 수사기관의 수배망을 뚫고 미국으로 망명한 민주투사 윤한봉의 고향임을이야기하면서, 당시 민주화운동에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윤한봉의 이름이 낯선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어리거나 세상을 너무 쉽게 산 사람이다. - P312

9. 인용으로 내용을 보강하라
글의 생명은 거기에 담긴 내용에 있다. 형식이 서툴더라도 내용이 충실하면 독자들이 용서하지만 내용이 빈약한데 형식만 번지르르하면 독자가 흉보거나 욕한다.
내용이 정확하고 충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 인용이다. 답사기 2권에서 부석사 답사기를 쓰면서 최순우 선생의 - P312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인용한 것은 그 아름다움을 나의 표현력으로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 내용을 보강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답사기 2권에서 석굴암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남천우 교수가
‘신라인들은 사인(sin) 9도에 대한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있는 기하학을 최소한도의 것으로 갖고 있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은고미술의 과학을 증언하는 구체적인 예시였다.
답사기 6권의 선암사 답사기에서는 일주문 앞에 있는 삼인당이라는 연못을 설명하면서 연못 속에 작은 섬이 조성되어 있는 것은물길을 유도하기 위함이면서 연못이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되는 효과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나의 견해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하여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미술과 시지각』(1954)에서 "하나의 공간에 나타난 물체는 또 다른 공간을 창출해낸다"라는 명제를 인용하였다.
이로써 내 주장에 근거가 있음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자를 미학적 사고로 이끄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처럼 적절한 인용은 글의격조를 높여준다. - P313

10. 각 문체의 특징을 파악하라
문체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간결체, 화려체, 서사체 세가지가 기본이다.  - P313

11. 구어체로 글맛을 살려라
글은 문법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생활 속의 관습이기때문에 바뀐다. 그래서 문법에 얽매이면 글맛이 사라질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글맛을 내기 위해 구어체를 사용해볼 수도 있다. 구어체는 글에 생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대가인양 단정적으로 말하였다"의 경우 "자기가 무슨 대가라고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면 글에 힘이 생긴다. 그렇다고 말하는 투로 쓰라는 것은 아니다. - P315

12. 접속사를 절제하고 ‘의‘를 활용하라
가능한 한 ‘그리고, 그러나, 그리하여, 그런데, 아무튼, 하지만등 접속사 없이 글을 써라. 접속사를 자주 쓰면 글에 맥이 빠지기십상이다. 글은 문장의 논리로 이어져야 힘을 받는다. 잘 안될 경우, 앞 문장의 핵심적 단어를 이끌어 다음 문장의 주어로 연결하는 것도 방법이다.
토씨 중 ‘의‘의 용법은 아주 다양하여 이를 잘 활용하면 글이 간명해진다. - P315

13. 글의 길이에 문체와 구성을 맞춰라
글의 길이에 따라 문체도 달라야 하고 구성도 달라야 한다. 짧은 글(200자 원고지 기준 10매 이하)은 문장이 단문으로 이어가야 좋다. 짧은 글에서 긴 문장은 글의 호흡이 늘어지게 한다. 중간 길이의 글(25매 내외)은 문단을 4~5개의 토막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경우는 중간 제목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긴 글 (30매 이상)의 문장은긴 호흡으로 써야 한다. 문장이 짧거나 단문으로 이어가면 글의흐름이 튄다. 중간중간 에피소드나 사례, 또는 인용문을 적당히배치해야 글에 활력이 생긴다.
요구된 매수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쓸 때 일단 처음에는 글의 논리, 문장의 호흡에 내맡기고 써라. 그러다 3분의 1까지 오면 일단멈추고 다시 첫머리로 돌아가 줄이거나 늘리면서 이어간다. 다 써놓고 매수를 조절하는 것보다 이것이 효과적이다. 여기부터는 끝날 때까지 한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 P316

14. 문장의 리듬을 생각하며 윤문하라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윤문을 거쳐야 한다. 이발소와 미장원으로 치면 마지막 손질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윤문을 할 때는 독자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 문장이 읽기 편하려면 글 전체에 리듬이 있어야 한다. 독자는 한 문장도 두세 번은 끊어 읽는 것이 보통이니거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글에 리듬을 줄 때는 부사, 강조어의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때론 주어 앞에 놓아 강조할 수도 있다. - P317

15.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점검하라
글을 쓰기 전에 친구나 동료 등 적당한 대상에게 미리 말로 풀어보면 좋다. 나는 모든 글을 반드시 리허설해보고 쓴다. 내 경우는 친구, 출판사 편집자, 연구실 연구원 등 좋은 스파링파트너가많다. 나는 이들과 대화하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그의 반응을 보며내 생각을 정리해본다.
나 개인적으로는 설계도를 그리고 나서 시공하는 방법을 쓴다. - P317

결론: 대중성과 전문성의 조화
대중적 글쓰기라고 해서 전문성이 약하면 안 된다. 전문성이 떨어지면 내용이 가벼워 글의 격이 낮아진다. 전문적인 내용을 대중도 알아듣게 하는 것이 진정한 대중성이다. 어려운 내용을 알기쉽고 재미있게 쓰는 것이 대중적 글쓰기이다. 그래서 글쓰기의 진정한 프로는 쉽고, 짧고, 간단하게 쓸 줄 안다. 그러나 내용은 내용대로 충실히 갖추어야 한다.
당송8대가의 한 분인 당나라 한유(韓愈)는 「양양 우적 상공께올리는 편지(襄陽相公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마디 군더더기가 없고
축약했으되 한마디 놓친 게 없다
豊而不餘一言 約而不失一辭 - P320

홍준아!
오늘 너의 글을 읽고 그동안 좀 더 네게 자주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였다. 다시 한번 말하마, 미안하다. 어둠 속에서 글을 읽고 대본을 세우며 살아가는 모습은 장하였다. 나는 바로 너희에게 그처럼 자기의 위치를알고 하나씩 능동적으로 창조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작풍을원하였고, 네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우선 네가 시를 쓸 때, <빈산> <황토> 등이 어른거린다는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으나우선은 동시대적인 경험이나 비슷한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 P357

너무 절망적인 느낌‘으로 의식할 필요 없고 그렇다고 자기목소리를 발견하는데 등한시해서도 안 되겠지.

나의 시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면 첫째, 섬약하게 이것저것에 마음이 묶여 제품에 자꾸 자지러드는 문사 기질을 던저버리고, 뜨겁게 살고, 건강하게 먹고, 날카롭게 싸우고, 밤새 떠들고, 미친 듯이 읽고, 비참 앞에선 이를 갈며 통곡하고, 꽃님 앞에선 다소곳해지고, 순결한 사랑을 품고, 거대한우주적 진보와 이 설운 땅의 대변혁을 꿈꾸고, 칼을 갈며 야망의 홍소를 터뜨리고, 말술을 마시고...... 그리고 그 기분, 그 울분, 그 애틋한 마음과 포부와 슬픔을 그냥 써라! 형식으로 하여금 네 뜻을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당당한 큰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개방할 때 다만 허풍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는 자기도 뭐라 논리적으로 규정못할 자기만의 목소리가 기어 나오고 마는 법이니까.

둘째, 우리가 건설해야 될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힘>이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개인적으로는 바닥에 뿌리내리는 끈덕진 생명력과 확신에 찬 미래에의 집중에서 나온다. 집단적 차원에서는 민중의 조직된 힘의 무서운 창조력과 그 힘을 확고한 과학적 비전 아래 집중, 목표를 하나하나 깨뜨려버리는 지도력 간의 통일에서 나온다. - P358

이것은 예술의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다 같이 적용된다.
막연한 민중이란 기만이기 쉽다. 특히 손이 흰 인텔리에진민중과 관련된 생존이 증발해버린, 냉랭히 그것만인 ‘고도의 집중‘도 허망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 볼토요 미망이 된다. 그래서 진보적 인텔리 작가도 ‘다리‘라는말이 나오고, 또 민중적 생존의 구체적인 싸움의 과정에서살지 않으면 피 없는 혁명의 시가 된다는 말이다. 인텔리 출신의 작가에겐 이때 ‘다리‘이되 훌륭한 ‘다리‘ 이고자 하는 즉 제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접수하려는 태도가 하나!
그 제약이 분명한 현실이되, 민중을 향한, 민중을 통한 민중에서의 정치적 · 감상적 실천과 감동의 축적에 의하여 무단히 그 제약을 넓히고 미래로 밀고 나아가는 노력이 또 하나!
참된, 완전히 상상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참된 예술로 꽃피는 가능성과 정치적 조치와 실천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훌륭한 결과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결합하는 <정치적 상상력>에 우리 시대의 힘의 예술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또 실천하려는 의지가 셋째다.
훌륭한 ‘다리‘는 상승욕에 좀먹은 피안보다 우수하고 아무리 탁월한 ‘다리‘라도 투박하고 진실한 피안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보다는 못하다. 명심해두어라. 이상의 문제를이미 접수하고 그 기초 위에서 나름대로 당차고 옹골차게<힘>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 P359

셋째, 다작의 습관과 그중에서도 오직 참으로 우수한 것만을 작품으로 인정하는 자기 노작에 대한 잔인한 비평의 눈을 갖는 것, 또 형식, 기교, 처리, 다시 말해 장인으로서의 기량과 이론, 훈련, 문학사, 예술사, 미학, 그리고 민요 수집,
민족의 지식 등등에 관해서 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특히 앞으로 엄청난 논쟁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능숙하고 눈부신 이론가로서의 준비를 하는 것.
대체로 이상 세 가지 점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부딪히고있는 내심의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점과 비교, 검토, 결론이난다면 <황토> 등이 어른거린다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내가 읽은 시를 말한다면,
(1) 작품이 담고 있는 정신이 명확히 옳고 명확히 진보적이고 민중의 애착과 현실 모순에 비판적이다. 기본 조건이 충족되었다.
(2) 개념적 어휘들에 의해서 표백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느껴져온다는 점도 매우 좋다. 장려해야할 점이다. 대개의 참여시라는 것에서 느끼는 참괴감 무안스러움 억지스러움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어찌 보아감상적인 듯한 그런 정서 표백의 자연스러움(목가적 서정시) - P360

의 규범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첫째의 그런 정신 내용이 생활화, 체취화되려고 하는 과정이 좋은 예요 본보기여서 반갑다는 것이다.
(3) 호흡이 (네 체질인 듯싶은데) 퍽 길고 여유가 있어서 반같다. 아마 시든 뭐든 써도 훗날 대성할 가장 중요한 자질로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다만 생래적이라면 더욱 좋겠다.
앞으로 우리가 건설해야 할 중요한 문학 장르의 하나가 에픽(서사시)이라 할 때 요즈음 유행하는 부질없는 반복, 의식적인 조악성, 가파른 호흡, 조작적인 민중 관점, 눈치는 진보성, 참새 같은 사회윤리, 새끼 한 마리를 못 낳을 것같이생겨 먹은 황량하고 뾰족하기만 한 미의식(특히 요즘에 나오는젊은 시인들) 가지고는 에픽이라는 거창한 대하는 어림없다.
그들은 단지 가능성이요, 징조요, 접촉 반응제이다. 이런 점에서 너의 호흡 계발이 중요하다. 말로만 하지 말고 판소리를 진정으로 공부해보아라. 너의 서구적인 미학 교양, 사론적 지식과 판소리가 가진 무규정한, 그러나 엄청난 무서운심미적 형식과 예술 정신의 보물창고를 연결시켜보아라.
(4) 욕 좀 하자. 행과 행의 이전, 말과 말의 전환 등에 의식이 없고 의미가 주어져 있지 않다. 시가 산문이 아닌 한 시행의 전환에 그만큼 필연적인 의미 - 음악성의 요구나 필요가있는 것이다. 이 점에 의식이 없었음으로 해서 언어의 강화와 약화, 의미의 양각과 음각, 즉 내용의 미묘하고 찌르는 듯 - P361

한 날카로운 제시 및 호소력과 그에 결부된 리듬 및 행 변화의 묘한 율동의 힘이 전무하다. 따라서 감동이 느리고 둔하며 한마디로 촌스럽다. 어미의 낡은 투 등은 그 자체로 흠이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흠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인것이다.
(5) 담고 있는 내용, 의미 또는 메시지 같은 것이 선명치못하고 탁하며 구체적인 감동이 없고 미묘한 각성이나 찌르는 듯한 아픔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내용이 구체적인 실천, 투쟁, 삶의 피투성이, 절규나 결단 등 극적인 것뿐만 아니라, 은은한 인식이나 조용한 생의 용기 등과 같이 뿌리박고 결부되지 못한 데서 온다. 한마디로 해이하다. 긴장(텐션) 모순의 운동갑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미의 고양이나 감동의 심화등이 없다.
(6) 때로는 너무 감상적이고 너무 설명적이다. 발라드가아닌 한 설명은 시에 있어 최대의 금물이다.

홍준아! 열심히 써라.


지하로부터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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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윤의 민중미술에는 민중의 고통이 그냥 고통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 그것을 날 선 투쟁으로 형상화한 적도 없다. 울음도 없고 슬픔도 없이 때로는 익살로 때로는 신명으로 민중적 삶이한껏 고양되어 있다.
오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며 인간적으로도 진짜 좋아한 선배는 시인 김지하였다. 김지하가 『사상계』 1969년 5월호에 발표한「오적」의 삽화는 기실 오윤이 그린 것이었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은퇴했을 때 한 스포츠평론가가 ‘알리(권투선수)보다는 잘했고 펠레(축구선수)만은 못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김지하가 ‘오윤의 그림이 내 시보다 한 수 위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김지하는 오윤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한(恨)과 그늘과 귀곡성(鬼哭聲)에서마저도 흥과 신바람이 터져나오는 오윤 예술의 정점은 어디일까. ‘봄‘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 P198

김지하(1941~2022)를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외면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그의 아우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원이 아니라 해도 김지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자영웅적인 민주투사였다. 70년대에 그가 7년간 감옥살이를 한것은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넬슨 만델라의 옥살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지하는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로 오윤(미술), 김민기(노래), 이애주(춤), 채희완(탈춤), 임진택(창작판소리) 등 민족예술제1세대들을 길러냈다. 80년대에는 생명사상과 동학을 다시 일으킨 - P201

사상가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정확히 1991년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발표한 이후 민주화운동의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처신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사람들조차 그의 곁을 떠났다.
김지하의 변절이란 오랜 세월 가혹한 감옥생활에서 얻은 골병이 낳은 후유증이었다. 7년의 감옥생활 끝에 출소한 그는 말하자면 ‘상이군인‘이었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생명사상의 기치를 내걸고 쉼 없이 나아갔다. 거기까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지하는 가고자하는 길을 너무 빨리 앞질러 갔다. 눈앞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민중은 6월민주항쟁으로 숨 가쁘게 나아가고 있는데, 생명운동을 시대의 과제 - P202

로 삼은 것이었다. 여기서 세상이 김지하에게 기대하는 것과 김지하가 세상에 바라는 것이 어긋나고 그 사이에 큰 간극이 생겼다.
급기야는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정치 노선마저 달리하며, 진보적 지성과 문인을 매도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김지하는 더욱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병적 징후였다. 그때 김지하는 심신이많이 아팠다. 정신과 치료도 여러 번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991년 이전까지 김지하의 삶과 예술은 한국문학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었다. 김지하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원주의 한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내가 이제까지 본 장례식 중 가장 초라하고 쓸쓸하였다.  - P23

2024년 7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 ‘백운서경(白雲書境)‘은 잊혀가는 우리나라 근대의 위대한 역사 인물을 오늘에 되살리는 아주 뜻깊은 전시였다. 근대서예가의 개인전으로 이처럼 대규모 전시가 열린 것은 위창 오세창이후 처음이다. 위창이 전서(篆書)에서 당대 일인자였다면 동농은 행초서(行草書)의 대가였다.
동농이 서예의 대가였음은 당대의 명성이 그러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말해준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비롯한 정자 19곳의 현판과 주련, 안동 봉정사 등 전국 주요 사찰과관아 현판이 그의 글씨로 되어 있다. - P212

동농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암각서도 여러 곳에 있다. 그중 대표작은 서울성곽 창의문 아래 백운동 골짜기에 있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별서 뒤편 큰 바위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대자를 새겨놓은 것이다. 동농은 한때 여기에 백운장을 짓고 살았다.
이 암각 글씨는 단정함 속에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희대의명작이다.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을 ‘백운서경(白雲書境)‘이라 한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을 보면서 나는 동농이 왜 정법의 행서만을 고수했는가 생각해보았다. 동농 이전만 하더라도 추사 김정희 - P223

가 일으킨 ‘완당바람‘이 풍미하여 글자 구성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동농은 철저히 정법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동농의 인품 자체가 그러하였고 또 왕조 말기 어지러운 상황과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는 불우한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에 글씨에멋을 부린다는 것은 세상을 가볍게 사는 태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올곧게 일생을 살아온 동농 김가진은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지조가 있었다. 그래서 동농은 정법의 행서로 일관하였던 것이고 그렇게 낳은 그의 서예는 우리 근대서예사를대표하고 있다. - P224

부모님의 허락을 얻은 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주례 선생으로 장준하 선생을 모실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면목동 장준하선생댁에 자주 드나들어 장남인 장호권 형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그해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로 돌아가셨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주례 선생님만은 인생의 사표(師)로 삼을 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오른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을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선생님과는 한번 찾아뵈었다는 인연밖에 없으며,
또 선생님은 나이가 젊어서 거절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용기 내어 제기동으로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뜻밖에 흔쾌히 승낙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을 불렀다.

"여보, 유군이 결혼을 한다는구려. 술상 좀 내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항상 술상을 내올 명분을 그렇게 강조하시곤 한 것이었다. 사모님은 그놈의 술 좀 작작 마시길바랐고, 선생님은 항시 구실을 찾곤 했던 것이다. - P232

선생님의 주례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것이었다. 당시는 비디오라는 것이 없어 남은 흔적이 없고 내 기억 속에만 있는데 내게는 잊히지 않는 두 마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히 들려온다.

"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 보면 의사 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 P235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 차가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나는 이 충고를 항시 잊지 않았다. 내 인생에 두어 번 큰 갈림길같은 것이 있었을 때, 나는 내 아내에게 판단해줄 것을 물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판단에 따랐다.  - P236

그리고 선생님은 당신의 주례 제자들이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교수도 되고, 문화재청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흐뭇해하셨다. 내가 문화재청장이 되어 경복궁 경회루에 이어 창덕궁 후원과 희정당, 대조전을 개방할 때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시범답사를 했고 그 시간을 그렇게 즐거워하셨다.
사모님인 윤영자 여사님도 우리 주례 제자단을 기특해하셨다. 사모님은 주례 제자 중에서 특히 나를 귀여워하셔서 우리들이 찾아가면 나를 ‘반장‘이라고 하시며 우리 어머니 안부를 따로 묻곤하셨다. 민주화운동 가족모임으로 ‘한결모임‘이 있는데 공덕귀 여사,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 이철 의원의 어머니 모두 돌아가시고지금은 이해동 목사님 부부와 우리 어머니만 아직 생존해 계셔서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함께 버텨온 정이 각별하게 든 것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나는 사모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 P239

백기완(1932~2021) 선생은 평생을 민족통일, 반독재, 노동해방운동에 앞장선 민주투사로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투쟁의 횃불을 내려놓지 않았다. 데모대의 맨 앞장에 서서 바람결에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호랑이 눈매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불호령을 치는영원한 거리의 투사가 백기완 선생의 본모습이다.
그러나 투쟁의 현장에서 돌아오면 백기완 선생은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중적 삶의 싱싱한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이 『장산곶매 이야기』 (우등불 1993)에서 『버선발 이야기』(오마이북 2019)까지 민중설화를 토속어로 이야기한 백기완 선생의 구비문학이다. - P241

외래어는 물론 한자어도 하나 없는 순우리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름(정서)과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든메(사상)와 하제 (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해엔 더 달구름(세월)이 가기 앞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글로 엮으려다가그만 덜컹, 가슴탈(심장병)이 나빠져 아홉 때결(시간)도 더 칼을 댄끝에 겨우 살아났다. 이어서 나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글로 써서 매듭을 지은 것이 이 ‘버선발 이야기‘라.(백기완 버선발 이야기』, 오마이북 2019) - P242

2016년 1월 15일, 우리 시대의 ‘참스승‘ 신영복(1941~2016) 선생님이 기어이 가셨다. 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제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부음이 전해진 그날 밤부터 인터넷에는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글이 쉼 없이 올라왔다. 장례식장에선 선생님 가시는 길에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어하는 조문객들이 열 명씩 조를 이루며 문상하였다. 각계의 인사들이 다녀감이야 마땅한 일이지만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음을 보셨다면 아무리 하늘의 명을받아 가시는 길이지만 잠시 발길을 돌려 생전의 그 밝은 미소로 손이라도 한번 들어주실 만하지 않은가. - P252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합니다.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2018)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그 ‘더불어 숲‘이라 쓴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이는 어쩌면 신영복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 - P256

주고 싶었던 절명구였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스스로 호를 지어 우이(牛)라 하고, ‘쇠귀‘라고 쓰면서 소처럼 우직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만 우리에게 비친 당신의 삶은 그 반대였다. 고단한 삶이 이어지는 힘들고 강퍅한 세상을 살면서도 선생님 같은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위안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과거형으로 돌리자니 너무도 허전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과 글씨들은저 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발할것이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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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유책(有)‘, 즉 ‘사람마다 책임 있다‘는 표어는 차라리 감동적이다.


‘거리 청결 인인유책‘
‘문화재 보호 인인 유책‘
‘문명 창달 인인유책‘


이에 나도 하나 덧붙여본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책임 있다.


‘민족 장래 인인유책‘
‘문화 창달 인인유책‘ - P148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소화하여 이룩한 문화의 내용은 일본의 특질이다. ‘죄다 우리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 문화를 성숙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독일과 네덜란드로 퍼져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로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 한국, 일본이 주요 구성원이 되어 유럽의 문명과 맞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답사기에서 나는 한국과 일본, 두 문화를 계속 비교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정원과 우리나라 정원은 너무도 다르다. 일본은 나무를 일일이 가위질하며 인공미를 극대화하고 한국은 자연미를 더 존중한다.
대구 삼격동에 사는 한 사업가는 일본과의 거래가 많아 아래 윗집에 한국식 정원과 일본식 정원을 꾸며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 - P158

다기에 한번 이 댁을 답사해보았다. 주인에게 정원 만들 때 얘기를 들어보니 두 나라 정원사는 돌 다루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더라는 것이다. 정원에 돌 10개를 깔아놓는다면 일본 정원사는 9개를 반듯이 놓고 나서 1개를 약간 비스듬히 틀어놓으려고 궁리하는데, 한국 정원사는 9개는 아무렇게 놓고 나서 1개를 반듯하게놓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다. 일본은 인공미, 한국은 자연미를 그렇게 구현하는 것이다.
일본과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 있으면서 이렇게 다르다. 한일 두나라가 이룩한 각자의 문화적 결실은 중국의 그것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의 내용을 이룬다. 그 다양한 문화적 성취는 동아시아의 세계적 위상을 그만큼 더 높여주는 것이다.
- P159

일본에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또는 일본에선 강한데 우리나라에서 약한 것도 많이 보인다. 문화유산의 입장에서 내가 본 일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장인정신과 직업윤리 의식이다. 이전통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랜 것이다. 1,200년 전, 헤이안 시대에천태종을 일으킨 승려 사이초(最澄)가 세운 절 엔랴쿠지(延曆寺)에는 그가 말한 경구가 큰 비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조천일우 차즉국보(照千一隅 此則國寶)."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나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말해주는 표어다. 그런 정신에서 일본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했고 직업윤리 의식이 형성되었다. - P159

내가 일본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문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모든 제품에서 디테일이 아주 강하다는 미덕을 날았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일본 제품의 가장 큰장점이자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IT시대에 일본이 발전하는 것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장인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아날로그에 익숙하여 신용카드보다 현금 사용을 선호하고 인터넷소통이 우리처럼 원활하고 신속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한일 두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운명적으로 함께 세상을 살아갈수밖에 없다. 이미 두 나라의 경제적 협력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어 있다. 문화적 교류도 한류가 말해주듯 아주 깊이 흘러갔다. 이제 우리는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겠고, 일본은 혐한론을 멈추고 갈등의 원인인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여 두 나라가 공존과 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일본 답사기를 썼다. - P162

신학철은 작품을 팔아가며 근근이 생활을 하였다. 화상들은 좀 예쁜 그림을 그려 와야 하는데 무서운 그림만 가져와 팔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였다.
한번은 그 미술애호가를 모시고 난곡동 달동네 신학철 집까지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신학철은 <신기루>라는 작품을 그리고있었다. 화폭 아래쪽에는 들판에서 농사꾼들이 새참을 먹고 있는데 멀리 한 처녀가 서울로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미술애호가는 아련하게 펼쳐지는 목가적 풍경에 반하여 이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신학철은 이 그림은 아직 미완성으로, 화면 위쪽에 도시 풍경이 신기루처럼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미술애호가가 지금 이 상태에서 하늘만 칠하고 달라고 하니까 신학철은 안된다며 큰소리로 "시골이 이렇게 평화로운 줄 아세요!" 하고 화를냈다. 이런 분이 신학철이라는 화가다. 그래서 신학철이다. 이것이 신학철에 대한 나의 비평적 증언 중 한 대목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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