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계엄 선언 자막을 보면서도 이 책을 읽고 있었다. 환멸과 절망사이에서 잠을 설치고 출근한 하루, 분분한 의견들과 뉴스 속에서 나는 계속 되뇌인다.. 제발, 가라.
그러나 당신의 별을 본다. 두 페이지를 가로질러 빛나는 폭발을 하얗게 드러난 중심을 본다. 인주의 얼굴을 본다. 그늘진 얼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말하는 얼굴, 볼우물이 파이도록 활짝 웃는 얼굴을 본다. 세살, 일곱 살, 열한 살 난 얼굴을 본다. 치켜 깎은 머리, 단발머리, 양쪽으로 땋은 머리를 본다. 검은 코트를 입고, 회색 털모자를 쓰고, 전시 작업 중인 명화랑 1층에서 소리쳐 말하는 옆모습을 본다. 검푸른 심해의 밑바닥을 향해 자맥질해 들어가는 육체들, 불붙은 나무들 고통도 슬픔도 멎은 어두운 숲들을 본다. - P211
얼음을 깎은 사금파리 같은 저녁 바람이 목덜미로 파고든다. 바로 지금이 겨울의 정점이다. 곧 가파르게 봄이 올 것이다. 쇼윈도안에 진열된 저 폭신한 코트들은 한순간 무겁게 느껴져, 햇빛 분분한 가게 앞으로 밀려나가 염가로 팔려나갈 것이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다. 목이 마르지 않다. 목도리를 눈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나는 걷는다. 복면을 쓴 것 같은 내 얼굴이 보석상 진열장들의 유리 위에 어른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얼어붙은 보도블록위로, 비슷하게 얼굴을 가린 행인들이 서로의 어깨를 과격하게 밀치며 걷는다. - P212
바지락칼국수를 파는 한산한 식당에서 읽은 모든 문장들이 나를 향해 이빨을 세우고 있다. 조개껍데기들은 수북하게 앞접시에 쌓여 있었고, 물잔 옆으로는 내가 흘린 물자국들이 의미 없는 무늬를 그렸고, 강석원이 창조해낸 인주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절름거리며 건너다녔다. 강석원의 문체는 딱딱함과 열의, 반짝임과 둔감함, 진지함과얄팍함이 뒤섞인 묘한 것이었다. 무엇인가가 불쾌했고, 무엇인가가가짜였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진짜였다. 흔히 예술혼이라고 불리는 과장된 열정, 새 발자국 같은 필체로 적힌 편지들 ㅡ그중 어떤 것들은 나를 실망시켰다ㅡ, 지인들이 부풀리고 때로 미화한 기억들을 나는 읽었다. 유년 시절은 언젠가 인주가 명은숙에게 지나가며 말했던 한마디 ‘나는 아주 힘이 센 아이였어요‘ 로, 사춘기는 설치작가 B의 슬럼프를 위로하며 했던 고백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쑥하고 마늘만 먹었던 건 아니구요......‘로 요약된 전기를 읽었다. 허점이 드러날 만한 - P212
곳마다 수사와 감상이 조악하게, 때로는 말끔하게 덧칠된 책을 읽었다. 아름답게 편집된 책, 방금 세상의 것이 된 책, 인주가 무수히 덧그은 검은 선들이 꿈틀거리는 책을 읽었다. 손가락에 닿은 책장들이 뜨겁게 부스러질 것 같은 책. 불같은 책. 아니, 얼음 같은 책. 소리치는책. 아니,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책. 벙어리 책. 더러운 책.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책. 방금 이 세상에 폭약처럼 던져진 책.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읽은 책. 한 문장 한 문장, 한 단어 한 단어가 짧고 얕은 무수한 칼자국들처럼,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처럼 이마를 가르고 들어와박힌 책을 읽었다. - P213
적막에도 형상이 있다고 삼촌은 말했다.
적막은 육각형의 작은 눈송이 하나 속에, 빙하기에 내리는 눈과 다르지 않게, 얼음에 싸인 불꽃처럼 거기 있다고 했다.
차가운 차창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나는 오래 눈을 보았다. 눈은 국도를 덮고, 서울로 접어드는 외곽도로를 덮고, 고가도로와 상가. 전신주와 전화 부스를 덮고, 불법 주차 중인 차량들, 교회의 십자가들, 저녁 어스름 속에 서 있는 아파트들을 덮고, 행인들의 우산을, 우산 없이 걷는 사람들의 검은 머리칼을 덮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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