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로마를 방문하고 27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는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땐 예상을 못했지만 두 형은 살아서 출소했고 나는 글쟁이가 되어 대학에 직장도 얻었다. 전에는 언제나혼자서 여행을 떠났지만 15년 정도 전부터는 F라는 동행도 생겼다. 나 개인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로는 점점 불만 없는일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법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안을 찾지 못한다. 내가 이런 안정을 얻은 것은 단순한 우연과 행운의 덕이라는 의식, 과거 언젠가의 시점에 가혹하고무참한 운명 속으로 떠밀렸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 레비식으로 말하자면, 좀 더 어울리는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따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실제 내가 아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혹한 운명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러 우연이 겹쳐진 결과로 나자신은 30년가량의 세월을 이렇게 어려움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인간은 조금도 나아진 바 없다는 생각이 늦가을의 그림자처럼 하루하루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 P19
원래 전설 속 메두사는 여성이지만 여기에 그려진 대상은소년이다.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물론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렸겠지만) 목을 내려친 순간 자기의 표정을 어떻게 자신의 눈을 통해 보고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하물며 눈을 맞추면 돌이 되어버린다는 그런 대상을 무엇보다 이렇게 무섭고도 처참한 자화상을 그리고자 했던 자는 대체 어떤 자의식을 지닌 사람이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이탈리아에서 본 아름다운 것들을 회고하려 할 때마다, 그 이상한 이미지가 떠올라 나를위협했다. 막 잘려나간 목이 내지르는 금속성 섞인 외침이 언제나 귓가를 울렸다. 그 후로도 서양 각국의 미술관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을 많이 봐왔지만, 정작 로마는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다. - P25
카라바조의 초기작 중에는 「카드 사기꾼」과 「여자 점쟁이라는 그림이 있다. 모두 우의화지만 현실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400년 이상 전에도(아마 그보다 훨씬 전에도)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로마 체류 중에 계속 이러한 종류의 ‘피곤함이 따라다녔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보르게세 공원 근처에 있던 고급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아무 생각없이 영수증을 확인했더니 주문도 하지 않고 먹은 적도 없는샴페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와 F는 얼굴을 맞대고 "치러야할 대가, 대가......"라고 중얼거렸다. - P31
카라바조는 전 생애에 걸쳐 약 열두 점에 이르는 목이 잘린사람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그렸다. 참수에 매혹된 화가라고 해도 좋겠다. 나폴리에서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비드」에 등장하는 골리앗은 자화상이다. 두 눈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왼쪽 눈에는 생명의 잔광이 느껴지지만 오른쪽 눈은 이미 흐릿해져버렸다. 카라바조는 스스로에게 절망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자신을 철저히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자화상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히 ‘근대적인 자아‘라는 의미가 아닐까. 나는 이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아, 얼마나 혹독하며 무참한가.......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잔혹하다는 뜻이 아니다. 타협 없는그의 묘사가 인간의 잔혹함, 현실 바로 그대로의 잔혹함과 길항하고 있는 것이다. - P47
이번 여행의 또 다른 목적은 이탈리아 문학 연구자이자 번역가인가와시마 히데아키 선생의 저서 『이탈리아 유대인의 풍경』(이와나미쇼텐, 2004년)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유대인의 흔적을 찾은 후, 프리모 레비의 무덤을 세 번째로 방문하여 여정을 마무리하는것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였다. 레비는 수용소에서 생환한 후 곧바로 이것이 인간인가』(에이나우디, 1947년)라는 제목으로 증언을 묶어냈고 마지막 작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이나우디, 1986년)를간행한 이듬해 토리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6년 1월, 나는 프리모 레비의 자살 현장이자 마지막까지살았던 집, 그리고 그의 묘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처음으로 토리노를 방문했다. 그 첫 번째 토리노 여행 경험을 기초로「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2006년, 원서는 아사히신분샤, 1999년)를 썼다. 이 책의 일본어 원서가 초판을 발행한 지 15년이 지난 2014년에 개정판이 나오게 되어 다시토리노를 찾아 한 꼭지를 덧붙이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 P49
1980년과 1983년,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후처음으로 유럽 여행에 나섰지만 지금 나는 그때의 부모님 나이를 넘고 말았다. 60세가 지나 다시 이 그림 앞에 서게 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변함없이 비관적이지만 그 비관의 성질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예전에는 나 자신이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고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느꼈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거치고 이토록 수많은 잔혹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관한다. - P53
저녁 무렵에는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나가 작은 교회의 지하에서 만돌린과 통주저음 연주를 들었다.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의 작품을 비롯한 17~18세기 악곡가운데 총 여섯 곡과 앙코르 한 곡. 머리가 벗어지고 살집이 있던 만돌린 연주자는 시종 우울한 표정이었다. 통주저음 연주자는 선생님같이 착실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아주잘 맞아서 수수하면서도 좋은 연주를 들려줬다. 17세기의 이탈리아, 이 올곧고 우아한 악곡과, 카라바조와 푸생이 그린 잔혹함이 공존하는 세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듯해 이해할 길이 없으면서 또한 매혹적이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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