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절망에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가 있었으나, 이를 차치하고라도 나의 공적 자아는 더 이상 한국에 돌아와야 할 동기를 부여받지 못했다. 마로니에 공원 맞은편, 커다란 게시판에촘촘히 붙은 포스터를 기웃거려도, 볼 만한 공연, 가슴 뛰게하는 이름 하나를 찾을 수 없었다. 자기만의 언어로 연극을 만드는 이름 두어 개가 나는 필요했기에. 게시판 위에는 흰 바탕에 파란 글씨로 쓰인 낡은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연극은 시대의 희망이다.‘ 그때, 연극은 도무지 희망이 아니었다. 그때, 내 속에서 오래 간직한 꿈 하나가 사그라졌다. - P54
나의 꿈은 언젠가 관객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관객觀客 보는 사람들의 학교. 이때 관은 행위이며 객은 그 행위의 주체를가리킨다. 또 객을 풀어보면 집을 뜻하는 갓머리 부에 음을 제공하는 각자가 결합돼 있는데, 후자는 뒤쳐짐과 입이 결합되어, 앞에 온 사람과 뒤에 오는 사람의 말이 다름을 지시한다. 요컨대 각자 다른 생을 살다가 하룻밤 극장의 지붕 아래 결집하여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는 우연의 공동체가 관객인 것. 그들 저마다의 시선이 자유로이 편력할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내가 꿈꾸던 학교의 일이었다. 서구에서 극장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테아트론dhicarron에서 찾을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테아트론은 무대가 아니라 객석을 칭하는 용어였다. 극장이란 무엇보다 보는곳이었고, 그곳의 제1주체는 관객이었던 것이다. - P54
쩌면 극장에서뿐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도, 우리의 주체성은 관객의 주체성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순간 무언가를 바라보고, 이미 본 것과 지금 본 것을 연결하며, 그렇게 펼쳐가는 의식의 지형도로 생을 꾸리고, 자신을 구축한다. 이때 바라보는 일이 그저 매끄럽기만 하다면 생은 아프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때로 무언가에막히고, 충격으로 아득해지고, 성찰의 거리를 취하고, 다시금용기와 다정으로 몰두하고, 기필코 뒤돌아 나 자신을 또한 응시함으로써 굳건해진다. 그리고 어떤 예술은 이 같은 시선의아찔한 편력을 돕는다. 종종 그런 작품은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말해지는데, 스캔들의 어원인 스칸달론skandalon은 ‘발을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를 의미하며, 이때 넘어지는 것 역시, 시선의 일이라 할 수 있다. - P55
관객으로서 나는 언제나, 걸려 넘어지고 틈으로 추락해버릴 아름다움을 좇아 극장에 간다. 객석에 운집한 각각의 생이 동시에 떨리는 순간은 얼마나 귀한지. 그 전율이 일으키는파문은 또 얼마나 다채로운지. 살면서 그런 연극을 만날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한지. 고백하건대 나의 경우, 한국 연극에서스캔들을 만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자면 드라마적 과잉의 천편일률뿐이었다. 관객에게 슬픔이 내려앉기도 전에 무대 위에서 배우가 오열했다. 그러면 관객은 멀찍이물러섰다. 지극히 섬세한 조형적 아름다움과, 응집된 절제와, 고요와, 의식을 깨우는 현실의 난입과, 때로 퍼포먼스가 그 자체로 발생시키는 감각의 충격이 거기 없었다. 드라마적 서사나감정적 해소를 다수의 관객이 선호해서라기에는 애초에 관 - P55
객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예술가의 자유가 보장되지도 않았다. 선택하는 주체는 도리어 지원 심사를 하는 비평가에 국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취향과 유행과 명분을 핑계로, 작품들의 세계는 단조로워졌다. 하여 나는 감히 다른 세계를 꿈꾸었고, 창작자나 비평가를 변화시키는 대신 관객을 변화시키는 일에서 희망을 보았다. 기실 한국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주저하는법을 배우며 자라왔다. 그리하여 창작자의 의도나 비평가의답안을 모범으로 여기고, 미처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무지탓이라 꼬리를 내리는 유순한 관객이 되었다. 허나 겸양의 태도는, 관객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다지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 P56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러워 않고 스스로 느끼는 좋음과나쁨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새로움을 요청한다면. 보다 섬세한 사유와, 대상화하지 않는 예의와 고유한 형식미를 갖출 것을 우리가 작품들에 요구한다면 그 형식들이 다채로워지고, 관객은 그 하나하나의 힘을 바라보고, 의미를 풀어내고, 그래서 언젠가 오직 관객이 좋다고 하는 연극이 지속가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일이 삼백 년쯤 뒤에 이루어지더라도 삼백 년 전의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하고 싶던 꿈. 그런 꿈이 내게 있었다. - P56
어떤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보면 거기 어김없이 박탈이 있다는 것을. 질서가 부여되는 순간 혼돈으로 명명되어 사라지는것들. 고대 그리스, 문명이 꽃피고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진시대, 그보다 먼 옛날, 문명이 야만을 분리시키기 전에, 도시국가에서 의사를 표결하는 시민이 남성에 국한되기 전에, 니체를 따르자면 아폴론적 밝음이 디오니소스적 어둠을 물들이기 전에, 도취와 환각 속에 봄이 오는 것을 기뻐하며 부활의신에게 포도주를 바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모든 혼돈이생의 근본으로 인정되었고, 여성과 이방인도 춤을 추었다. 그때는 아직 춤과 노래가 이야기를 입지 않았다. 특정 생을 대변하는 서사도, 서사의 주인공도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저마다의 그늘진 서사를 품고 그럼에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봄 앞에 생의 요동을 찬미했다. 그러다 BC 6세기,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저 축제를 도시국가의 연례행사로개편시켰고, 거기 비극 경연 대회가 도입되었다. 매년 선발된세 명의 작가가 비극 세 편씩을 준비했고, 사흘에 걸쳐 종일각 작가의 연작을 공연한 뒤 마지막 날에 우승자를 선정했다. - P72
그렇지만 배워야해, 가르치던 사람이 답한다. 우리는 곧저들의 침입 속에서 저들 언어의 물살에 휩쓸려 갈 거야. 그물살이 어느 바다를 향해 가는지 알기 위해서 이 말을 알아야 해. 그러나 저들은 우리의 말을 배우지 않잖아? 저들도 배울 거야. 다만 필요한 용어들을 익히겠지. 그것을 점유하기 위해. 잠시 후 두 사람은 가면을 벗고 자신들의 몸이었던 허물마저 벗는다. 천장에서 내려온 바에 흙빛 허물을 걸쳐 올려 보낸다. 벗은 것은 남자의 허물이나 드러난 것은 여자의 몸이었다. 다시 어둑해진 무대에 한 농부와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둘은 영어로 대화한다. 오줌에 피가 섞이고배가 부풀어 올라, 여자가 말한다. 의사를 보러 갈까? 남자가묻자, 뭘 타고? 우리가 팔아버린 말을 타고? 여자가 되묻는다. 겨우 수확한 썩은 감자들을 내어 보이며, 여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으나 아무래도 신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돕기로 한 것 같다고 말한다. 남자는 그래도 신께 기도하자권하고, 둘은 농기구를 내려놓고 가만히 두 손을 쥔다. - P75
연출가 루이 주베와 함께 일하다 레지스탕스 운동가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작가 샤를로트 델보는 수용소의 고돌 속에서 밤마다 침상을 찾아 대화해준 알세스트와 엘렉트라. 옹딘을 회고하며 『유령들, 나의 벗Spectres, mes compagnons』이라는 책을 썼다. 그토록 허약한 시절에 조금 더 살 용기를, 잊지않고자 하는 힘을, 지켜낼 사랑을 주었던 비극의 인물들. 유령들 갔지만 미처 못 떠난 우리를 위해 다시 오는 지금도 세계속에 가득한. 죽임 당한 동물들과 함께 우는. 끝끝내 우리가 기대 살아갈. 얼마 전 몸이 아파 CT 촬영을 앞두고 나는 잔뜩 겁을 먹었던 적이 있다. 일전에 그 기계 안에서 돌연 혈관이 다 터져버릴 듯한 통증을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두려웠고, 이번에는 정말로 혈관이 다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기계 안에 누워 두 팔을 들고 숨을 멈추고, 그때, 나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당신. 동굴에서겁탈당한 당신, SOS를 남긴 당신과 그것을 발견하는 당신. 기계가 움직이고, 나는 당신에게로 가는 거야, 생각하니 안심이되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자리. 우리들의, 비극의 기원으로. - P81
가까운 이들의 장례를 치를 때마다 알게 된다. 슬픔의 더께와무관하게 계속되는 의식의 절차 속에서 우리는 때로 비통한애도를 잠깐씩 쉰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듯, 울음을 유발하는 특정 순간들은 꼬리를 물고 되돌아온다. 그장치들 앞에 사랑했던 우리가 무력해지는 것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잔혹하고 명백하게, 사라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빳빳한 삼베가 죽은 이의 얼굴에 씌워질 때, 그 몸이 관에 들어갈 때, 화장장 문 뒤로 그를 떠나보낼 때, 곧 불길이 치솟을 단단한 철문 너머로 화면 속 관이 사라질 때, 돌이킬 수없는 소멸을 목도하는 마음들이 거듭 우는 일.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회화와 같은공간예술이 한번 완성되고 나면 공간 속에 지속적으로 존재 - P83
하는 것과 달리,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은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된다. 작품의 존재는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오직 그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관객은 사라짐의 목격자가 되어 영영 혼자만 알아볼 흐릿한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더 이상 존재가 없으므로 점차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중 어떤 기억은 되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몸에 기입된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과 존재가 남는 것은 아득히도 다른 일이다.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 언젠가 매우 뚜렷하게 완전한 행복을 체감한 순간, 나는그 순간의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격렬하게 망설인 적이 있다. 그때 그 공간의 구조, 햇살의 농도, 바닥의 온도와 내 몸의 기울기를, 그 순간을 둘러싼 모든 지나온 시간의적확한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기 위해 몸을 움직임으로써 행복의 구체를 깨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것을잊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이내고개 저었던 내 안의 순전함만을 기억할 뿐. - P84
끔찍한 고통은 몸에 각인되므로 쫓으려 해도 영원히 돌연한 소스라침으로 우리를 깨우는 반면,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끝내 잊히고 만다. 나는 삶으로부터 그것을 배웠고 그리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다. 특별히 공연을 보고 돌아온 밤이면, 덧붙여 그 공연이 아름다웠던 날이면 졸음을 붙들고 아직은 생생한 기억을 풀어 내가 본 것들을 남겨두려 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수첩을 뒤적이며 종종 과거의 내게 감사해하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도 현쟁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 P84
삶에서 가장 진실한 문장은 하루의 끝, 중국 식료품점에 들어가 나누는 대화라고 리델은 쓴다. "빵이 남아 있나요?" "네." "얼마인가요?" "60상팀입니다." 그렇게 한덩이 빵을 받고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한 뒤 돌아나오는 것. 추악한 밑바닥을알아볼 만큼 서로를 더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은 차원에서 그녀는 먼 나라의 무용한 언어를 배우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주 간단한 문장만을 말하며 모르는 거리를 걷는 기분은 삶에의 비- 종속감을 견디게 해주므로. 가령 남은 생애 무지한 학생으로 중국어를 배우다 늙는 일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일 것인지. "4,000자를 다 배우고 나면나는 구원받은 기분일 거야. 이미 너무 늙었을 거고, 생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바깥에위치했다 느낄 거고, 어쩌면, 어쩌면,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겠지." - P100
그날 본 연극은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연출한 <오이디푸스왕>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가 쓴 원작을 1804년 횔덜린이 번역한 버전이었다. 횔덜린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보다 이성적 사유에 얽매인 것에서 보다 기인했다고 여겨, 도시 국가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기이전, 술과 춤에 취한 농민들이 봄을 예찬하던 옛 축제의 광란과 야만의 정신을 번역 속에 되살렸다. 이에 더해 카스텔루치는 비극 이전의 세계가 모계 사회였음을 시사하며, 오직 여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무대에 세운다. 장막 너머로 느리게움직이는 우아한 몸들의 유영. 이성 바깥에 놓인, 혼란하고 야만적인 사랑과 고통. 연극은 무사히 끝이 났고, 나는 밤의 정거장에서 버스를기다렸다. 그 극장 앞에서 나의 집까지, 가장 아름다운 길을 - P110
따라 돌아가게 해주는 버스가 있었다. 오래 서 있어도 지겹지않도록 일렁이는 강물을 구경할 수 있던 정거장이 있었다. 거기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2014년 4월에 나는 혼자 운 적이 있다. 그 배가 가라앉은 지 나흘쯤 지나고, 이제 더 이상 그 어떤무지한 희망으로도 그들이 버텨주기를 바랄 수 없던 날에 그아이들 한 사람도 구하지 못했어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원망과 탄식이 치밀어 올라. 어쩐지 그들의 몸을, 오직 그 몸들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내가 몸을 갖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렇게 나를 몰아갔다.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사람들은 여성으로서의 내 몸을 증오하도록 내게 가르쳤다. 그들은 내가 여성인 것에 죄책감을 느끼도록 몰아세웠다. - P111
리델이 말했듯 세계가 우리의 몸을 지울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끝없이 감각한다.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그 몸이 존재하는 일이다. 몸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는 일. 더 아름답지 못한 것이 언제나 책망되는 몸을 데리고걷는 일. 그 몸이 수치스럽게 만져지고 살덩이로, 또는 자궁으로 취급되는 일. 그즈음 나는 특히나 더 내 몸과 관련한 바닥같은 자존감을 끌고 다녔고, 그날 버스 정류장에서 문득 수장된 아이들의 몸을 떠올렸다. 퉁퉁 불어버렸을. 형체가 일그러지고 손발이 녹아내린, 아직도 물속을 부유하는 그들을 찾아안고 아름답다고 말하며 울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고 흘러도바닷물에 섞여 흔적 없을 수면 아래서. - P111
앙헬리카 리델의 연극 <힘의 집>(2009)에 나오는 대사에서 볼수 있듯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들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마치 그녀가 죽임당해 마땅했다는듯이. 사실상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같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세계는 무관심하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델보의 희곡 속에서프랑수아즈가 예견했듯,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당한 치욕을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소비되었다.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충분히 끔찍하지 않았고, 심지어 강간도 아니었다고 세계는 선고했다. 살아 돌아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죽어야했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죽으라는 말이다. 영영 침묵하라는 것이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여자는 죽임당한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열등의 조건을 스스로 체화하며 살았다. 세계가 가르친대로 겁탈당한 내 몸을 치욕스러워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결박했다. 그렇 - P119
게 가부장제의 명예 남성이 되어 제목을 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트라우마가 된다. 깨닫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말들이 너무도 뼈아프기때문이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을 부인해야 하기때문이다. 무지했기에 방관했고 무감했기에 동조했던 순간들 속에 나 자신이 또한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여성의 고발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 찢어지는 감정이라기보다. 몸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물리적인 소스라침에 가깝다. 그몸들의 비명으로 온 세계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일. 그 환멸과 피로에 휘청이는 것. - P120
그러므로 몹시 아프고 고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귀 기울인다. 왜냐하면 누군가 기어코 ‘그 말들을 가지고 돌아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세월호 유가족들이 파리에 와 ‘국가 테러 및 재해 희생자 연대FENVAC‘ 대표와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연대가 현재 누리고 있는 상식적인 권리들이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유럽 땅에 전무했다고, 기차 사고로 딸을 잃은 한 사람의 싸움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고, 그러므로 오직 유가족만이 끝내 할 수 있다고, 아마도 용기를 주기 위해 그들은 말했다. 유가족만이, 희생자만이, 피해자만이 할 수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끌어안고 운다. - P120
연극계 내 성폭력에 대한 대부분의 고발은 우리가 알고 있는이야기였다. 나는 밀양연극제에 간 적이 있고, 거기서 안마에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안마만 시키는 것은 아닐 거라고, 모두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고발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아득히 자책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토록 긴 시간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않았나. 그러다 차츰 다시 반문했다. 알고 있었다고 하여 무엇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진실에 대한 고발은, 슬프게도, 오직 피해자로부터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며 또 한 번 깊이 아팠고, 고발자들의 세세하고 뼈아픈 진술을 읽다 결국 나는 실제로 아무것도 알지못했음을 깨닫고 다시 무너졌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이 기억하는 것, 그들이 살아낸 것, 그것이 내가 몰랐던, 진실이었다. - P121
훗날 델보가 회고하기를, 아우슈비츠에서는, 날마다 목도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사실은 나의 죽음일 수 있었으리라는 공포가 그 슬픔이 온몸을 지배했노라 했다. 저것이 나일 수도있었지만 저 사람이 죽음으로써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일. 그런의미에서 모든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이었노라는 감각, 수용소 바깥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프랑수아즈는 말했지만, 이곳, 우리의 현실 속에서, 모든 여자는서로를 대신해 유린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울고 있는저 존재는 나의 얼굴이다. 이토록 뼈아픈 이입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유가족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연극을 끝까지 올리는 일을. 이 연극을 끝까지 보는 일을. - P124
한 장르를 한 사람에게 빚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는 동안 사람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처음 맛보게 해준 과일을 철마다 찾아 먹고, 누군가 들려준 문장을 슬픔의 어귀마다 만져보는 일, 나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한시절 매우 고유한 방식으로 내 삶에 도래했다가 대개는 흔한 방식으로 멀어진,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준 것이 하나의 장르전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일이나 시 자체일 수도. 이 사실을 잊고 살기는 쉽지만 특별히 잊히지 않는 몇 경우가있는 법이다. 나는 장 끌로드 아저씨에게 오페라를 빚졌다. - P127
우리는 오로지 관극을 위해서 만날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만남이 무대를 제외한 다른 풍경을 품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에겐 극장이라으로 일종의 무덤을 훈련한 는 배경이 있었고, 그곳은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다다를 수 없는, 한 광활한 세계가 되기에 충분했다. 모퉁이를 돌면 다른 장소가 펼쳐지고, 자리를 옮기면 시선이 바뀌고, 때로는 객석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꼭대기 층 복도에는 스러져간 역사가 진열돼 있는 프랑스어로는 장르의 이름과 같이 ‘오페라‘라 불리는 그 오페라 극장들. 오래전 음악이라는 말이 그랬듯 허다한 시공을 품는 그 많은 오페라들. 오페라에서 만나자, 하는 신비로운 약속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던 날들. - P134
무언가를 오래 좋아해온 사람이 지닌 자신만의 역사와그 섬세한 애정의 방식. 그것만큼 내게 부러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이 부러움은 순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에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세월이기 때문이다. 나는끝내 따라잡을 수 없을 아저씨의 세월을 따라 극장별로 정해진 만남의 장소로 나가는 일이 즐거웠다. 오페라 바스티유나파리 필하모니 같은 현대식 공연장에서는 프로그램 판매대앞 로비가 좁은 샹젤리제 극장은 출입문 앞. 오페라 코믹은 마농 앞. 오페라 가르니에는 헨델 앞. 헨델 앞에서 보자, 라고말하는 일. 그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는 일에 능숙했고, 그 능력은 무엇보다 티켓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발휘됐다. 아저씨는 모든 극장의 세세한 구조를 머릿속에 꿰고 있으며, 가장 저렴한 자리가 어디 있는지, 그중 어떤 종류의 공연을 위해서는 발코니석이 좋고 또 어떤 종류의 공연을 위해서는 천국의 자리가 좋은지, 각각의 자리에서 시야가 어느 정도로 방해되는지, 몇 유로 더 지불하면서도 객석 중앙 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때는언제인지 등을 전부 안다. - P135
그렇듯 내가 즐거이 훔쳐본 것은 주로 무대 밖의 가려진단편들이었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허구의 세계보다는 그 세계의 가상성을 뜻하지 않게 폭로하는 작은 것들의 침입이나는 좋았다. 그것들을 구경하느라 무대를 외면하는 동안, 무대위의 세계는 내게 실로 ‘가시성 없는 곳이 되곤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저 가상의 장면들에 좀처럼 몰입할 수 없었으므로 현실의 단편들로 눈을 돌린 것이었다. 나는 오페라라는 장르와 오래 불화했다. 그러면서도 오페라에 가는 것은 언제나 좋았다. 이 모순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는 것이 나의 세월이었다. - P138
오페라는 아름답고 화려하다. 장르뿐 아니라 극장 자체가 그러하다. 로비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웅장한 계단. 까만 정장을입고 티켓을 확인하며 재빠른 단어 몇 개로 굽이굽이 갈 길을일러주는 안내원. 때로는 열쇠로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방. 붉은 융단과 볼록한 의자. 코트 걸이와 거울, 발코니로 몸을 내밀면 바라다보이는 천장화. 그 모든 사적이고 은밀한 위치에서 한때는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무대가 아닌 서로를 염탐했던 옛 귀족들의 사교, 쾨쾨한 냄새 속에 남아 있는 시절의기운 탓으로, 부르주아적인 취미의 공간에 들어서는 기분을지울수 없던. 그곳 무대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또 얼마나 웅장하고진지한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악한 나뭇잎으로 치장한채 노래하는 사람이나 드라이아이스 연기를 여러 개의 팔로 - P138
휘젓고 지나가는 합판 보트를 보면서도 관객은 어떻게 웃지않는지. 저 비장한 세계 속에 몰입하는 일이 그처럼 쉬운지. 국가를 지키는 영웅, 목숨을 바치는 사랑, 급작스런 선악의화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결말을 목도하는 일이 진정 아무렇지 않은지. 그것이 너무 멀지는 않은지. 우리의 지금, 여기로부터. - P139
인천으로 다녀오는 왕복 티켓을 파리에서 끊었으므로 1년 안에 올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게 쉽지 않다고, 나를 영영 못 볼 것으로 그는 여겼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가지 못했다. 그런 것이 삶인 것을 그는 이미 아는 사람이었을까. 그래서그토록 오페라로 그도 도피했던 것인지. 아저씨가 내게 한없이 권한 먼 아름다움. 그것이 단순한 선의 이상의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차가운 새벽이나 뜨거운 한낮, 나를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준 사람. 그는 내게 아프지 않은 세계를 주었다. 고통을 다루더라도 화해가 이루어지는 세계. 때로 비참한 결말일지라도 죽음 직전엔 반드시 고결한 노래가 흐르는 세계. 연극에서와 달리 오필리어가 물에 빠지는 장면이 직접 다뤄지는 우리가 몰랐던 말, 현실에 없었던말, 영영 못 들을 말이 전해지는 세계. 나는 떠나지만 당신을 영원히 사랑했을 것이라는,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 나는 장 끌로드 아저씨에게 오페라를 빚졌다. - P150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나는 슬픈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슬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아주 오래 살다 나올 수 있어요 슬픈 사람의 그림자를 몰래 쓰다듬어주다가 잠드는 것을 보고 돌아올게요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이 세상이 슬프다는 걸 우린 알아요 슬픈 세상 속에서 슬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글씨를 쓸 수 있어요 슬픈 사람의 눈물 자국을 몰래 닦아주다가 눈뜨는 것을 보고 돌아올게요 - P166
생각하고 있어요 안아보고 싶어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소중해요 깊이 고마워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눈을 감으시기 전 당신은 잘 것이라 하시고 아빠가 말했어요 잘 자라고
세상에 남아 - P170
사는 동안에 우리도 잘 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안아보고 싶어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소중해요 깊이 고마워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P171
가만히 있으라 해놓고 구하러 가지 않았어요 기다리시는걸 알아 물 밖에서 울었어요 세월이 흐른다는 말을 우리 쉽게 하지 못해요. 그래도 세월이 흘러갔어요 맑은 날 옅은 구름이 연기처럼 흩날려가요 하늘 아래 있는 것들 바닷속에도 다 있던가요. 쓱 한번 문지르면 입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그 없는 입으로 한줌 뼈에 입맞추고 싶어요 - P172
스스로가 초라할 때 노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나만 생각하던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래는 나의 비천과 무관하게 흘러, 흘러가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따금 공연을 할 때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관객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듣고 있기에, 노래가 그 순간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 속에서, 나무와 구름,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잎새와 눈물 속에서, 노래가, 완전하게. 나는 당신에게 노래를 나누어준다. 당신은 또 다른 곳으로가 노래의 일부를 나눠줄 것이다. 목도한 슬픔을 당신의 몸에 기입하며, 당신의 호흡대로 춤추며. 다시 사랑하며.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되었다가, 마침내 우리가 아닌것들로 흩어진다. 죽음 이후에는 정말로 영혼만 남게 될까. 그때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를 비춰볼 몸이 없어도. 모든 계절을 춤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 춤을 추듯 객석에 - P172
앉을 수 있을까. 당신을 볼 수 있을까.
꽃그늘 아래 계절이 바뀌는 것이 서럽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함께 노래했던 봄 푸르게 절망한 여름 고요했던 가을과 찬란한 고립의 겨울
그리고 다시 이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편지할 때 마음속에 차오르는 슬픔은 우리만 아는 것 기어 통과한 세월의 이름은 우리만 아는 것입니다 - P173
세기말까지 이어진 극단적인 실험은 오늘날 다소 사그라졌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무대로 귀환했다. 그럼에도 퍼포먼스적인 것은 많은 연극에서 여전히 주요한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다만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고통과 아름다움으로, 눈앞에서 명멸하는몸짓과 물질로, 몸은 건드려지기를 희망하고, 생은 휘청거리기를 원한다. 연극만이 펼쳐줄 수 있는, 다른 세계에 가기를나는 원한다. 카스텔루치의 연극에서, 여자들은 가위를 꺼내 자신의혀를 자르고, 노인은 하염없이 물똥을 싸고, 아들은 한없이그똥을 치우다 마침내 울고, 아이들이 배낭을 메고 걸어 나와신의 얼굴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객석은 굉음으로 진동하 - P182
고, 장막 너머 검은 가루가 폭풍처럼 휘날리고, 피아노가 불에 타고, 낡은 텔레비전이 깨지고, 몸들이 스러져 바닥에 깔리고, 서로를 껴안을 때마다 차가 충돌하는 괴음이 나고, 누군가 교황청 벽을 맨손으로 타고 올라가 까마득한 지붕 너머로홀연히 사라진다. 객석에 앉은 이는 그 장면들을 단지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소리를 겪고, 배설을 겪고, 두려움을 겪는 것이다. 나의 주체성은 그의 관객이 되는 체험만으로 조금씩 변한다. 발생하고 사그라지는 온갖 감각들의 신음 속에서, 나는 매번 조금씩아프고 다시 나았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의 작품들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 아름다움이 완전한 것을, 거기 불필요한 형식의 찌꺼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때 사건이나 발생이라는 말과, 완전함, 이해라는 말은 모순을 이룬다. 그리고 모순적인 것들을 껴안고 사랑이 이루어진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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