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아우른 ‘인연의 지도‘처럼 보였다.
여자라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겐 책과 사람이 학교였고, 그는 ‘대화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없다‘라는 깨달음을 일찍이 터득한다. 대화로 영감을 얻고 나면 글쓰기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말로 큰다. 당신이 존재와 영혼의 확장을 도와주는좋은 대화 상대를 찾는다면, 어서 이 책을 열고 살아 움직이는버지니아 울프를 만나라고 귀띔하고 싶다"
-은유 작가

수사네 쿠렌달(Susanne Kuhlendahl)

일러스트레이터. 복잡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어 사람들이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매력을 느껴 그래픽 노블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산문 <빵>,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 등 예술성 높은 작품을그래픽 노블로 만들었다. 지금은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올랜도》를 준비 중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세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글이 영원히 기억될 가치를 가질 것인지,
단 몇 시간 만에 잊힐 만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큐 가든>에서 이렇게 썼다.
타원형 화단에서 달팽이는 자신의 집 안으로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는것처럼 보였다. 곧 달팽이는부드러운 흙 위에서 움직일 준비를할 것이다. 달팽이가 시든 나뭇잎을 피할지 아니면 처리할지를 결정하기도 전에 비트 잎 사이로 인간의 발이 나타났다.

버지니아는《세월》에서 이렇게 썼다.


침묵은 깊어만 갔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엘리너는 자신의머리 위의 아치형으로휘어진 네모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대포 소리가 울렸다.
공기가 위로 치솟았다.
이번에는 바로 그들의머리 위에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에서 이렇게 썼다.

이런 신체적 감각을 어떻게 하면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저 너머에 있는 허공을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거실 너머의 계단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은 텅 비어 보였다.) 무엇인가를 갈망하지만 얻지 못하는 그녀의 몸은 경직되고,
공허하며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하고 있지만 얻지 못하는 것 ㅡ 간절하고,
간절하게 원하는 것 ㅡ 아, 쥐어짜는 마음을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하고 또 끊임없이 원하는 이 마음을!

1937년 4월 27일 버지니아 울프는 라디오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언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어들, 영어 단어들로 가득한 메아리가 나를일깨우고 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말들은 수 세기 동안 자연을 떠돌았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사람들의 집과 거리그리고 들판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그것을 쓸 때 겪는 어려움 중 하나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의 말에는 다른 기억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오래된 말들에새로운 쓰임을 부여할 수 있을까요?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게 하기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그 안의 아름다움을 말하기 위해서?
또는 그 안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인가요?

여기 나 자신은 지금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 어떠한 문장도 꺼내지 않는다.
나는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나는 외쳤지만, 그 순간 내가 완전히 패배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진짜 죽음, 이었다.

1941년 3월 28일 금요일,
버지니아는 레너드에게 두 번째 편지를 썼다.

내 사랑, 당신이 나에게완벽한 행복을 선물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 누구도 당신이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내 말을 믿으세요.
하지만 나는 이것을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나는 당신의 인생을 망치고 있어요.
바로 이 광기 때문에 말이죠.
그 누구도 나를 설득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일을 할 수 있으니 내가 없다면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갈 거예요.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내가 옳다는 것을보여주는 이 글조차 제대로 쓸 수 없어요. 그래도 꼭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 병이 나를 덮치기 전까지 우리는 완벽하게 행복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당신 덕분이에요.
그 누구도 당신만큼 잘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우리의 첫날부터 바로 오늘까지.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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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절망에는 지극히 사적인 이유가 있었으나, 이를 차치하고라도 나의 공적 자아는 더 이상 한국에 돌아와야 할 동기를 부여받지 못했다. 마로니에 공원 맞은편, 커다란 게시판에촘촘히 붙은 포스터를 기웃거려도, 볼 만한 공연, 가슴 뛰게하는 이름 하나를 찾을 수 없었다. 자기만의 언어로 연극을 만드는 이름 두어 개가 나는 필요했기에. 게시판 위에는 흰 바탕에 파란 글씨로 쓰인 낡은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연극은 시대의 희망이다.‘ 그때, 연극은 도무지 희망이 아니었다. 그때, 내 속에서 오래 간직한 꿈 하나가 사그라졌다. - P54

나의 꿈은 언젠가 관객 학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관객觀客 보는 사람들의 학교. 이때 관은 행위이며 객은 그 행위의 주체를가리킨다. 또 객을 풀어보면 집을 뜻하는 갓머리 부에 음을 제공하는 각자가 결합돼 있는데, 후자는 뒤쳐짐과 입이 결합되어, 앞에 온 사람과 뒤에 오는 사람의 말이 다름을 지시한다. 요컨대 각자 다른 생을 살다가 하룻밤 극장의 지붕 아래 결집하여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는 우연의 공동체가 관객인 것. 그들 저마다의 시선이 자유로이 편력할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내가 꿈꾸던 학교의 일이었다.
서구에서 극장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테아트론dhicarron에서 찾을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테아트론은 무대가 아니라 객석을 칭하는 용어였다. 극장이란 무엇보다 보는곳이었고, 그곳의 제1주체는 관객이었던 것이다.  - P54

쩌면 극장에서뿐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도, 우리의 주체성은 관객의 주체성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순간 무언가를 바라보고, 이미 본 것과 지금 본 것을 연결하며, 그렇게 펼쳐가는 의식의 지형도로 생을 꾸리고, 자신을 구축한다.
이때 바라보는 일이 그저 매끄럽기만 하다면 생은 아프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때로 무언가에막히고, 충격으로 아득해지고, 성찰의 거리를 취하고, 다시금용기와 다정으로 몰두하고, 기필코 뒤돌아 나 자신을 또한 응시함으로써 굳건해진다. 그리고 어떤 예술은 이 같은 시선의아찔한 편력을 돕는다. 종종 그런 작품은 ‘스캔들을 일으킨다‘고 말해지는데, 스캔들의 어원인 스칸달론skandalon은 ‘발을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를 의미하며, 이때 넘어지는 것 역시, 시선의 일이라 할 수 있다. - P55

관객으로서 나는 언제나, 걸려 넘어지고 틈으로 추락해버릴 아름다움을 좇아 극장에 간다. 객석에 운집한 각각의 생이 동시에 떨리는 순간은 얼마나 귀한지. 그 전율이 일으키는파문은 또 얼마나 다채로운지. 살면서 그런 연극을 만날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한지. 고백하건대 나의 경우, 한국 연극에서스캔들을 만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자면 드라마적 과잉의 천편일률뿐이었다. 관객에게 슬픔이 내려앉기도 전에 무대 위에서 배우가 오열했다. 그러면 관객은 멀찍이물러섰다.
지극히 섬세한 조형적 아름다움과, 응집된 절제와, 고요와, 의식을 깨우는 현실의 난입과, 때로 퍼포먼스가 그 자체로 발생시키는 감각의 충격이 거기 없었다. 드라마적 서사나감정적 해소를 다수의 관객이 선호해서라기에는 애초에 관 - P55

객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예술가의 자유가 보장되지도 않았다. 선택하는 주체는 도리어 지원 심사를 하는 비평가에 국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취향과 유행과 명분을 핑계로, 작품들의 세계는 단조로워졌다.
하여 나는 감히 다른 세계를 꿈꾸었고, 창작자나 비평가를 변화시키는 대신 관객을 변화시키는 일에서 희망을 보았다. 기실 한국에서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주저하는법을 배우며 자라왔다. 그리하여 창작자의 의도나 비평가의답안을 모범으로 여기고, 미처 이해할 수 없는 건 자신의 무지탓이라 꼬리를 내리는 유순한 관객이 되었다. 허나 겸양의 태도는, 관객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다지 미덕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다. - P56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러워 않고 스스로 느끼는 좋음과나쁨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새로움을 요청한다면. 보다 섬세한 사유와, 대상화하지 않는 예의와 고유한 형식미를 갖출 것을 우리가 작품들에 요구한다면 그 형식들이 다채로워지고, 관객은 그 하나하나의 힘을 바라보고, 의미를 풀어내고, 그래서 언젠가 오직 관객이 좋다고 하는 연극이 지속가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일이 삼백 년쯤 뒤에 이루어지더라도 삼백 년 전의 사람으로서 할 일을 하고 싶던 꿈. 그런 꿈이 내게 있었다. - P56

어떤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보면 거기 어김없이 박탈이 있다는 것을. 질서가 부여되는 순간 혼돈으로 명명되어 사라지는것들. 고대 그리스, 문명이 꽃피고 직접민주주의가 이루어진시대, 그보다 먼 옛날, 문명이 야만을 분리시키기 전에, 도시국가에서 의사를 표결하는 시민이 남성에 국한되기 전에, 니체를 따르자면 아폴론적 밝음이 디오니소스적 어둠을 물들이기 전에, 도취와 환각 속에 봄이 오는 것을 기뻐하며 부활의신에게 포도주를 바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모든 혼돈이생의 근본으로 인정되었고, 여성과 이방인도 춤을 추었다.
그때는 아직 춤과 노래가 이야기를 입지 않았다. 특정 생을 대변하는 서사도, 서사의 주인공도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저마다의 그늘진 서사를 품고 그럼에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봄 앞에 생의 요동을 찬미했다. 그러다 BC 6세기,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저 축제를 도시국가의 연례행사로개편시켰고, 거기 비극 경연 대회가 도입되었다. 매년 선발된세 명의 작가가 비극 세 편씩을 준비했고, 사흘에 걸쳐 종일각 작가의 연작을 공연한 뒤 마지막 날에 우승자를 선정했다. - P72

그렇지만 배워야해, 가르치던 사람이 답한다. 우리는 곧저들의 침입 속에서 저들 언어의 물살에 휩쓸려 갈 거야. 그물살이 어느 바다를 향해 가는지 알기 위해서 이 말을 알아야 해. 그러나 저들은 우리의 말을 배우지 않잖아? 저들도 배울 거야. 다만 필요한 용어들을 익히겠지. 그것을 점유하기 위해. 잠시 후 두 사람은 가면을 벗고 자신들의 몸이었던 허물마저 벗는다. 천장에서 내려온 바에 흙빛 허물을 걸쳐 올려 보낸다. 벗은 것은 남자의 허물이나 드러난 것은 여자의 몸이었다.
다시 어둑해진 무대에 한 농부와 그의 아내가 등장한다. 시대를 뛰어넘어 둘은 영어로 대화한다. 오줌에 피가 섞이고배가 부풀어 올라, 여자가 말한다. 의사를 보러 갈까? 남자가묻자, 뭘 타고? 우리가 팔아버린 말을 타고? 여자가 되묻는다. 겨우 수확한 썩은 감자들을 내어 보이며, 여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으나 아무래도 신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돕기로 한 것 같다고 말한다. 남자는 그래도 신께 기도하자권하고, 둘은 농기구를 내려놓고 가만히 두 손을 쥔다. - P75

연출가 루이 주베와 함께 일하다 레지스탕스 운동가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던 작가 샤를로트 델보는 수용소의 고돌 속에서 밤마다 침상을 찾아 대화해준 알세스트와 엘렉트라. 옹딘을 회고하며 『유령들, 나의 벗Spectres, mes compagnons』이라는 책을 썼다. 그토록 허약한 시절에 조금 더 살 용기를, 잊지않고자 하는 힘을, 지켜낼 사랑을 주었던 비극의 인물들. 유령들 갔지만 미처 못 떠난 우리를 위해 다시 오는 지금도 세계속에 가득한. 죽임 당한 동물들과 함께 우는. 끝끝내 우리가 기대 살아갈.
얼마 전 몸이 아파 CT 촬영을 앞두고 나는 잔뜩 겁을 먹었던 적이 있다. 일전에 그 기계 안에서 돌연 혈관이 다 터져버릴 듯한 통증을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두려웠고, 이번에는 정말로 혈관이 다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기계 안에 누워 두 팔을 들고 숨을 멈추고, 그때, 나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당신. 동굴에서겁탈당한 당신, SOS를 남긴 당신과 그것을 발견하는 당신. 기계가 움직이고, 나는 당신에게로 가는 거야, 생각하니 안심이되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자리. 우리들의, 비극의 기원으로. - P81

가까운 이들의 장례를 치를 때마다 알게 된다. 슬픔의 더께와무관하게 계속되는 의식의 절차 속에서 우리는 때로 비통한애도를 잠깐씩 쉰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듯,
울음을 유발하는 특정 순간들은 꼬리를 물고 되돌아온다. 그장치들 앞에 사랑했던 우리가 무력해지는 것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잔혹하고 명백하게, 사라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빳빳한 삼베가 죽은 이의 얼굴에 씌워질 때, 그 몸이 관에 들어갈 때, 화장장 문 뒤로 그를 떠나보낼 때, 곧 불길이 치솟을 단단한 철문 너머로 화면 속 관이 사라질 때, 돌이킬 수없는 소멸을 목도하는 마음들이 거듭 우는 일.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회화와 같은공간예술이 한번 완성되고 나면 공간 속에 지속적으로 존재 - P83

하는 것과 달리,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은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된다. 작품의 존재는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오직 그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관객은 사라짐의 목격자가 되어 영영 혼자만 알아볼 흐릿한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더 이상 존재가 없으므로 점차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중 어떤 기억은 되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몸에 기입된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과 존재가 남는 것은 아득히도 다른 일이다. 시간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
언젠가 매우 뚜렷하게 완전한 행복을 체감한 순간, 나는그 순간의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닐지 격렬하게 망설인 적이 있다. 그때 그 공간의 구조, 햇살의 농도, 바닥의 온도와 내 몸의 기울기를, 그 순간을 둘러싼 모든 지나온 시간의적확한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하기 위해 몸을 움직임으로써 행복의 구체를 깨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든 것을잊었다. 이토록 좋은 것을 잊을 수가 있을까, 생각하고 이내고개 저었던 내 안의 순전함만을 기억할 뿐. - P84

끔찍한 고통은 몸에 각인되므로 쫓으려 해도 영원히 돌연한 소스라침으로 우리를 깨우는 반면,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끝내 잊히고 만다. 나는 삶으로부터 그것을 배웠고 그리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다. 특별히 공연을 보고 돌아온 밤이면, 덧붙여 그 공연이 아름다웠던 날이면 졸음을 붙들고 아직은 생생한 기억을 풀어 내가 본 것들을 남겨두려 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수첩을 뒤적이며 종종 과거의 내게 감사해하고,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도 현쟁디 기록을 멈추지 않는다. - P84

삶에서 가장 진실한 문장은 하루의 끝, 중국 식료품점에 들어가 나누는 대화라고 리델은 쓴다. "빵이 남아 있나요?" "네." "얼마인가요?" "60상팀입니다." 그렇게 한덩이 빵을 받고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한 뒤 돌아나오는 것. 추악한 밑바닥을알아볼 만큼 서로를 더 들여다보지 않는 것. 같은 차원에서 그녀는 먼 나라의 무용한 언어를 배우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주 간단한 문장만을 말하며 모르는 거리를 걷는 기분은 삶에의 비- 종속감을 견디게 해주므로. 가령 남은 생애 무지한 학생으로 중국어를 배우다 늙는 일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일 것인지.
"4,000자를 다 배우고 나면나는 구원받은 기분일 거야. 이미 너무 늙었을 거고, 생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바깥에위치했다 느낄 거고, 어쩌면,
어쩌면, 행복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겠지." - P100

그날 본 연극은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연출한 <오이디푸스왕>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가 쓴 원작을 1804년 횔덜린이 번역한 버전이었다. 횔덜린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보다 이성적 사유에 얽매인 것에서 보다 기인했다고 여겨, 도시 국가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기이전, 술과 춤에 취한 농민들이 봄을 예찬하던 옛 축제의 광란과 야만의 정신을 번역 속에 되살렸다. 이에 더해 카스텔루치는 비극 이전의 세계가 모계 사회였음을 시사하며, 오직 여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무대에 세운다. 장막 너머로 느리게움직이는 우아한 몸들의 유영. 이성 바깥에 놓인, 혼란하고 야만적인 사랑과 고통.
연극은 무사히 끝이 났고, 나는 밤의 정거장에서 버스를기다렸다. 그 극장 앞에서 나의 집까지, 가장 아름다운 길을 - P110

따라 돌아가게 해주는 버스가 있었다. 오래 서 있어도 지겹지않도록 일렁이는 강물을 구경할 수 있던 정거장이 있었다. 거기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2014년 4월에 나는 혼자 운 적이 있다. 그 배가 가라앉은 지 나흘쯤 지나고, 이제 더 이상 그 어떤무지한 희망으로도 그들이 버텨주기를 바랄 수 없던 날에 그아이들 한 사람도 구하지 못했어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원망과 탄식이 치밀어 올라. 어쩐지 그들의 몸을, 오직 그 몸들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내가 몸을 갖지 못하도록 가르쳤다. 그렇게 나를 몰아갔다. 엉덩이를 걷어차면서, 사람들은 여성으로서의 내 몸을 증오하도록 내게 가르쳤다. 그들은 내가 여성인 것에 죄책감을 느끼도록 몰아세웠다. - P111

리델이 말했듯 세계가 우리의 몸을 지울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몸을 끝없이 감각한다. 여자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그 몸이 존재하는 일이다. 몸이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는 일. 더 아름답지 못한 것이 언제나 책망되는 몸을 데리고걷는 일. 그 몸이 수치스럽게 만져지고 살덩이로, 또는 자궁으로 취급되는 일. 그즈음 나는 특히나 더 내 몸과 관련한 바닥같은 자존감을 끌고 다녔고, 그날 버스 정류장에서 문득 수장된 아이들의 몸을 떠올렸다. 퉁퉁 불어버렸을. 형체가 일그러지고 손발이 녹아내린, 아직도 물속을 부유하는 그들을 찾아안고 아름답다고 말하며 울고 싶었다. 눈물이 흐르고 흘러도바닷물에 섞여 흔적 없을 수면 아래서. - P111

앙헬리카 리델의 연극 <힘의 집>(2009)에 나오는 대사에서 볼수 있듯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들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마치 그녀가 죽임당해 마땅했다는듯이. 사실상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같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세계는 무관심하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델보의 희곡 속에서프랑수아즈가 예견했듯,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당한 치욕을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소비되었다.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충분히 끔찍하지 않았고, 심지어 강간도 아니었다고 세계는 선고했다. 살아 돌아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죽어야했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죽으라는 말이다. 영영 침묵하라는 것이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여자는 죽임당한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열등의 조건을 스스로 체화하며 살았다. 세계가 가르친대로 겁탈당한 내 몸을 치욕스러워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결박했다. 그렇 - P119

게 가부장제의 명예 남성이 되어 제목을 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트라우마가 된다. 깨닫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말들이 너무도 뼈아프기때문이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을 부인해야 하기때문이다. 무지했기에 방관했고 무감했기에 동조했던 순간들 속에 나 자신이 또한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여성의 고발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 찢어지는 감정이라기보다. 몸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물리적인 소스라침에 가깝다. 그몸들의 비명으로 온 세계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일. 그 환멸과 피로에 휘청이는 것. - P120

그러므로 몹시 아프고 고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귀 기울인다. 왜냐하면 누군가 기어코 ‘그 말들을 가지고 돌아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세월호 유가족들이 파리에 와 ‘국가 테러 및 재해 희생자 연대FENVAC‘ 대표와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연대가 현재 누리고 있는 상식적인 권리들이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유럽 땅에 전무했다고, 기차 사고로 딸을 잃은 한 사람의 싸움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고, 그러므로 오직 유가족만이 끝내 할 수 있다고, 아마도 용기를 주기 위해 그들은 말했다. 유가족만이, 희생자만이, 피해자만이 할 수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끌어안고 운다. - P120

연극계 내 성폭력에 대한 대부분의 고발은 우리가 알고 있는이야기였다. 나는 밀양연극제에 간 적이 있고, 거기서 안마에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안마만 시키는 것은 아닐 거라고, 모두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고발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아득히 자책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토록 긴 시간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않았나. 그러다 차츰 다시 반문했다. 알고 있었다고 하여 무엇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진실에 대한 고발은, 슬프게도, 오직 피해자로부터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며 또 한 번 깊이 아팠고, 고발자들의 세세하고 뼈아픈 진술을 읽다 결국 나는 실제로 아무것도 알지못했음을 깨닫고 다시 무너졌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이 기억하는 것, 그들이 살아낸 것, 그것이 내가 몰랐던, 진실이었다. - P121

훗날 델보가 회고하기를, 아우슈비츠에서는, 날마다 목도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사실은 나의 죽음일 수 있었으리라는 공포가 그 슬픔이 온몸을 지배했노라 했다. 저것이 나일 수도있었지만 저 사람이 죽음으로써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일. 그런의미에서 모든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이었노라는 감각, 수용소 바깥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프랑수아즈는 말했지만, 이곳, 우리의 현실 속에서, 모든 여자는서로를 대신해 유린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울고 있는저 존재는 나의 얼굴이다. 이토록 뼈아픈 이입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유가족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연극을 끝까지 올리는 일을. 이 연극을 끝까지 보는 일을. - P124

한 장르를 한 사람에게 빚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는 동안 사람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처음 맛보게 해준 과일을 철마다 찾아 먹고, 누군가 들려준 문장을 슬픔의 어귀마다 만져보는 일, 나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한시절 매우 고유한 방식으로 내 삶에 도래했다가 대개는 흔한 방식으로 멀어진,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준 것이 하나의 장르전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일이나 시 자체일 수도. 이 사실을 잊고 살기는 쉽지만 특별히 잊히지 않는 몇 경우가있는 법이다. 나는 장 끌로드 아저씨에게 오페라를 빚졌다. - P127

우리는 오로지 관극을 위해서 만날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만남이 무대를 제외한 다른 풍경을 품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에겐 극장이라으로 일종의 무덤을 훈련한 는 배경이 있었고, 그곳은 아무리 헤엄쳐도 끝에 다다를 수 없는, 한 광활한 세계가 되기에 충분했다. 모퉁이를 돌면 다른 장소가 펼쳐지고, 자리를 옮기면 시선이 바뀌고, 때로는 객석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꼭대기 층 복도에는 스러져간 역사가 진열돼 있는 프랑스어로는 장르의 이름과 같이 ‘오페라‘라 불리는 그 오페라 극장들. 오래전 음악이라는 말이 그랬듯 허다한 시공을 품는 그 많은 오페라들. 오페라에서 만나자, 하는 신비로운 약속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던 날들. - P134

무언가를 오래 좋아해온 사람이 지닌 자신만의 역사와그 섬세한 애정의 방식. 그것만큼 내게 부러움과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이 부러움은 순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에게 있고 내게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세월이기 때문이다. 나는끝내 따라잡을 수 없을 아저씨의 세월을 따라 극장별로 정해진 만남의 장소로 나가는 일이 즐거웠다. 오페라 바스티유나파리 필하모니 같은 현대식 공연장에서는 프로그램 판매대앞 로비가 좁은 샹젤리제 극장은 출입문 앞. 오페라 코믹은 마농 앞. 오페라 가르니에는 헨델 앞. 헨델 앞에서 보자, 라고말하는 일.
그는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는 일에 능숙했고, 그 능력은 무엇보다 티켓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발휘됐다. 아저씨는 모든 극장의 세세한 구조를 머릿속에 꿰고 있으며, 가장 저렴한 자리가 어디 있는지, 그중 어떤 종류의 공연을 위해서는 발코니석이 좋고 또 어떤 종류의 공연을 위해서는 천국의 자리가 좋은지, 각각의 자리에서 시야가 어느 정도로 방해되는지, 몇 유로 더 지불하면서도 객석 중앙 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때는언제인지 등을 전부 안다. - P135

그렇듯 내가 즐거이 훔쳐본 것은 주로 무대 밖의 가려진단편들이었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허구의 세계보다는 그 세계의 가상성을 뜻하지 않게 폭로하는 작은 것들의 침입이나는 좋았다. 그것들을 구경하느라 무대를 외면하는 동안, 무대위의 세계는 내게 실로 ‘가시성 없는 곳이 되곤 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저 가상의 장면들에 좀처럼 몰입할 수 없었으므로 현실의 단편들로 눈을 돌린 것이었다. 나는 오페라라는 장르와 오래 불화했다. 그러면서도 오페라에 가는 것은 언제나 좋았다. 이 모순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는 것이 나의 세월이었다. - P138

오페라는 아름답고 화려하다. 장르뿐 아니라 극장 자체가 그러하다. 로비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웅장한 계단. 까만 정장을입고 티켓을 확인하며 재빠른 단어 몇 개로 굽이굽이 갈 길을일러주는 안내원. 때로는 열쇠로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방. 붉은 융단과 볼록한 의자. 코트 걸이와 거울, 발코니로 몸을 내밀면 바라다보이는 천장화. 그 모든 사적이고 은밀한 위치에서 한때는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무대가 아닌 서로를 염탐했던 옛 귀족들의 사교, 쾨쾨한 냄새 속에 남아 있는 시절의기운 탓으로, 부르주아적인 취미의 공간에 들어서는 기분을지울수 없던.
그곳 무대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또 얼마나 웅장하고진지한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악한 나뭇잎으로 치장한채 노래하는 사람이나 드라이아이스 연기를 여러 개의 팔로 - P138

휘젓고 지나가는 합판 보트를 보면서도 관객은 어떻게 웃지않는지. 저 비장한 세계 속에 몰입하는 일이 그처럼 쉬운지. 국가를 지키는 영웅, 목숨을 바치는 사랑, 급작스런 선악의화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결말을 목도하는 일이 진정 아무렇지 않은지. 그것이 너무 멀지는 않은지. 우리의 지금, 여기로부터. - P139

인천으로 다녀오는 왕복 티켓을 파리에서 끊었으므로 1년 안에 올 거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게 쉽지 않다고, 나를 영영 못 볼 것으로 그는 여겼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가지 못했다. 그런 것이 삶인 것을 그는 이미 아는 사람이었을까. 그래서그토록 오페라로 그도 도피했던 것인지.
아저씨가 내게 한없이 권한 먼 아름다움. 그것이 단순한 선의 이상의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차가운 새벽이나 뜨거운 한낮, 나를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준 사람. 그는 내게 아프지 않은 세계를 주었다. 고통을 다루더라도 화해가 이루어지는 세계. 때로 비참한 결말일지라도 죽음 직전엔 반드시 고결한 노래가 흐르는 세계. 연극에서와 달리 오필리어가 물에 빠지는 장면이 직접 다뤄지는 우리가 몰랐던 말, 현실에 없었던말, 영영 못 들을 말이 전해지는 세계. 나는 떠나지만 당신을 영원히 사랑했을 것이라는,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곳. 나는 장 끌로드 아저씨에게 오페라를 빚졌다. - P150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나는 슬픈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슬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아주 오래 살다 나올 수 있어요
슬픈 사람의 그림자를
몰래 쓰다듬어주다가
잠드는 것을 보고
돌아올게요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이 세상이 슬프다는 걸 우린 알아요
슬픈 세상 속에서
슬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글씨를 쓸 수 있어요
슬픈 사람의 눈물 자국을
몰래 닦아주다가
눈뜨는 것을 보고
돌아올게요 - P166

생각하고 있어요
안아보고 싶어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소중해요
깊이 고마워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눈을 감으시기 전
당신은 잘 것이라 하시고
아빠가 말했어요
잘 자라고

세상에 남아 - P170

사는 동안에
우리도 잘 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안아보고 싶어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이 소중해요
깊이 고마워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P171

가만히 있으라 해놓고 구하러 가지 않았어요
기다리시는걸 알아 물 밖에서 울었어요
세월이 흐른다는 말을 우리 쉽게 하지 못해요.
그래도 세월이 흘러갔어요
맑은 날 옅은 구름이 연기처럼 흩날려가요
하늘 아래 있는 것들 바닷속에도 다 있던가요. 쓱 한번 문지르면 입이 없어지면 좋겠어요
그 없는 입으로 한줌 뼈에 입맞추고 싶어요 - P172

스스로가 초라할 때 노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나만 생각하던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래는 나의 비천과 무관하게 흘러, 흘러가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따금 공연을 할 때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 관객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듣고 있기에, 노래가 그 순간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풍경 속에서, 나무와 구름,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잎새와 눈물 속에서, 노래가, 완전하게.
나는 당신에게 노래를 나누어준다. 당신은 또 다른 곳으로가 노래의 일부를 나눠줄 것이다. 목도한 슬픔을 당신의 몸에 기입하며, 당신의 호흡대로 춤추며. 다시 사랑하며.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되었다가, 마침내 우리가 아닌것들로 흩어진다. 죽음 이후에는 정말로 영혼만 남게 될까. 그때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를 비춰볼 몸이 없어도. 모든 계절을 춤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 춤을 추듯 객석에 - P172

앉을 수 있을까. 당신을 볼 수 있을까.


꽃그늘 아래 계절이 바뀌는 것이
서럽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함께 노래했던 봄
푸르게 절망한 여름
고요했던 가을과
찬란한 고립의 겨울

그리고 다시 이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편지할 때
마음속에 차오르는 슬픔은 우리만 아는 것
기어 통과한 세월의 이름은
우리만 아는 것입니다 - P173

세기말까지 이어진 극단적인 실험은 오늘날 다소 사그라졌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무대로 귀환했다. 그럼에도 퍼포먼스적인 것은 많은 연극에서 여전히 주요한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다만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고통과 아름다움으로, 눈앞에서 명멸하는몸짓과 물질로, 몸은 건드려지기를 희망하고, 생은 휘청거리기를 원한다. 연극만이 펼쳐줄 수 있는, 다른 세계에 가기를나는 원한다.
카스텔루치의 연극에서, 여자들은 가위를 꺼내 자신의혀를 자르고, 노인은 하염없이 물똥을 싸고, 아들은 한없이그똥을 치우다 마침내 울고, 아이들이 배낭을 메고 걸어 나와신의 얼굴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객석은 굉음으로 진동하 - P182

고, 장막 너머 검은 가루가 폭풍처럼 휘날리고, 피아노가 불에 타고, 낡은 텔레비전이 깨지고, 몸들이 스러져 바닥에 깔리고, 서로를 껴안을 때마다 차가 충돌하는 괴음이 나고, 누군가 교황청 벽을 맨손으로 타고 올라가 까마득한 지붕 너머로홀연히 사라진다.
객석에 앉은 이는 그 장면들을 단지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소리를 겪고, 배설을 겪고, 두려움을 겪는 것이다. 나의 주체성은 그의 관객이 되는 체험만으로 조금씩 변한다. 발생하고 사그라지는 온갖 감각들의 신음 속에서, 나는 매번 조금씩아프고 다시 나았다. 그리고 나는 감히 그의 작품들을 온전히 이해했다. 그 아름다움이 완전한 것을, 거기 불필요한 형식의 찌꺼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때 사건이나 발생이라는 말과, 완전함, 이해라는 말은 모순을 이룬다. 그리고 모순적인 것들을 껴안고 사랑이 이루어진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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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는 다른 편견들도 작용했다. 나는 실감나고 자세한 상황 속의 사실적인, (사람들 표현에 따르자면) ‘생생한 캐릭터들에게 호감이 간다. 나는 전통적(구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방식의 서술에 끌린다. 진실의 한 층이벗겨지면 더 다른 층이 더 풍부한 진실의 층이 드러나는 방식, 의미 있는 세부 묘사의 점진적인 첨가, 캐릭터에 대한 뭔가를 밝히는 것뿐 아니라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는 대화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연한 발견, 존재감 없는 캐릭터, 기법이나 기술이 전부인 이야기들, 간단히 말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거나 설사 일어난다 해도 세상이 미쳐간다고 보는 작가의 음산한 시선을 확인시켜주는 내용뿐인 이야기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 글 속에 과장된 언어를 잔뜩 집어넣는데, 나는 그러한 글도 믿지 않는다. 나는 추상적이거나 제멋대로이거나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단어나 구나 문장에 반 - P356

대한다. 나는 구체적인 단어의 효력을 믿는다. 그게 동사든 명사든 마찬가지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제대로 쓰이지 않은 듯한 글.
단어들이 서로 충돌하고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는 피하려 한다. 독자가 무슨 이유에서든 글을 읽다가 방향과 흥미를 잃는다면 독자는 그 글을 피하게 되고, 결국은 잊어버린다.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도 부주의함은 피해야만 한다.
이 책의 출간 목적이 단정치 못한 글쓰기 또는 빈약하고 제대로 쓰지 못한 글들을 반대하기 위함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그 안에 담긴 내용 덕분에 그러한 종류의 작품들에 당당히 맞설만한 위치에 서 있다. 이 세상에서 중요하지 않고 조리가 맞지않는 행동들에 대한, 통속적이거나 얼빠지거나 뻔하고 멍청한글들이 유행했던 시절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러한 날이 지났다는 것에 감사해야만 한다.  - P357

나는 글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소 직설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단편들을 뽑으려 애썼다. 나는 우리를 만들어주고 지켜주는 것들에빛을 던져줄 수 있는, 때로는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생생히 담긴 글들을 선정하고 싶었다.
단편소설은 집이나 자동차처럼 오래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설령 아름답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보는 동안 즐거움을 주어야하며 그 안의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실험적‘ 또는
‘혁신적‘ 작품을 찾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지 - P357

못할 것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의견을 좇아, 나 역시도 한눈에 "의심스러워 보이는" 글은 피하려 했음을 인정한다.) 도널드 바셀미의 「그 여인의 정원에서 딴 바질이 실험적 또는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셀미는 항상 그러하듯 이 경우에도 예외이다. 종종 ‘의심스러워 보이는‘ 바셀미의 작품들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으며, 누구나 간직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고르기 위한 기준과도 같은 글이다. 또한 바셀미의 글들은 좀 이상한 방식으로 감동적인 경우가 흔하고, 이 역시 또다른 기준이 된다. - P358

막심 고리키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난 뒤 이렇게 비교를 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펜이 아니라 통나무로쓴 것처럼 조악해 보인다. 다른 이들의 모든 작품은 거짓 같아보였다."
학생이든, 문학 선생이든, 비평가든 아니면 다른 작가든 상관없이 사려 깊은 독자 아무나에게 물어보라. 모두가 한입으로 말할 것이다. 체호프는 생존했던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고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체호프가엄청나게 많은 단편소설을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ㅡ 체호프보다더 많이 쓴 작가는 설령 있다 해도 몇 안 된다. 더 큰 이유는, 체호프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감동시키는 동시에 죄를 사해주는, - P371

오로지 진실한 예술만이 달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 감정을 드러내는 걸작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체호프가 ‘성인처럼‘ 신앙심이 깊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체호프는 성인이 아니었다. 체호프는 위대한 작가이자 완벽에 가까운 예술가였다. 체호프는 다른 작가에게 이렇게 훈계한 적이 있다. "당신의 게으름이 행마다 줄줄 흘러나오고 있군. 당신은 문장을 제대로 쓰지 않았어. 그래야 한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예술이란 건 그렇게 이루어진다고."
체호프의 단편들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훌륭하다(그리고 없어서는 안 된다). 체호프의 작품들은 그가 살았던 당시 인간의 활동과 행동에 대해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설명을 더없이 명확한 방식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그렇기에그 글들은 모든 세대를 뛰어넘어 가치가 있다. 문학을 읽는 자라면, 예술의 초월적 힘을 믿는 자라면(믿어야만 한다), 언젠가는 체호프의 작품을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 가장 적절한 때다. - P372

가치 있는 소설은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리라. 어쨌거나 소설에선, 일부 작가들이 믿듯 기교가 내용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이름이 없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쉽게 잊히는 ‘캐릭터‘, 이 생에서 별로 할 일이 많지 않거나 더 나쁘게는 같은 부류에게 생각 없고 부주의한 짓을 하는 데 열을 올리는 불운한 피조물들이 등장하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이 충분히 많은 것 같다. 가치 있는 소설에서는, 소설 속 행동의 의미가 소설 밖 사람들의삶으로 전환된다. 이 점은 정말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최고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서 미덕은 그런 식으로 인식된다. 충절, 사랑, 의연함, 용기, 고결함이 언제나 보답받지는 않지만,
이런 것들은 훌륭하거나 고귀한 행동 혹은 자질로 인식된다. 그리고 우리는 악하거나 비열하거나 단순히 멍청한 태도를 있는그대로, 즉 악하거나 비열하거나 멍청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막아야만 한다.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적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원한다면 약간의 진리라고 해두자.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 P427

이 책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처음 읽는 이들을 위한 선집이 아니다. 이 책을 편집한 테스 갤러거가 적었듯이, 카버의 모든 작품을, 평소 그의 글을 사랑하여 미완성작을 포함해 그 작가가 쓴 모든 글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를 위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카버는 물론이거니와 전혀 다른 카버를 만나볼 수 있다. 기존의 카버만을 원하는 독자라면 고개를갸웃할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버의 또다른 면까지도 원하는 독자들이라면 당연히 선택해야만 할 책이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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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십오 년 전인 1963년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그뒤로 계속 단편소설만 썼다. 이렇게 내가 간결함과 강렬함에 끌리는 원인의 일부는 (일부일 뿐이지만) 내가 단편소설 작가임과 동시에 시인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아직 학부생이던 1960년대 초기부터 시와 단편소설들을 거의 동시에 쓰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인인 동시에 단편소설작가라는 점이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편소설 쓰기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에 설사 내가 원한다 할지라도 이제는 그만둘 수가 없다. 그리고 그만두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좋은 단편이 보여주는 재빠른 도약을, 종종 첫 문장부터 - P338

시작되는 흥분을, 최상급 단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신비로운 감정을 사랑한다. 그리고 단편소설은 앉은자리에서 다쓰고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시처럼!) 이는 내가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ㅡ 그리고 아마 지금까지도 ㅡ 내게 가장 중요한 단편소설 작가는 이사크 바벨, 안톤 체호프, 프랭크 오코너, V. S. 프리쳇이었다. 누가 내게 바벨의 단편집을 처음 건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바벨의 가장 위대한 단편 가운데 한 문장과 마주한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문장을 당시 늘 가지고 다니던작은 공책에 옮겨 적었다. 모파상과 그의 소설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쇳조각도 올바른 자리에 찍힌 마침표처럼 강력하게 우리의 가슴을 찌를 수는 없다." - P339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계시를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바로 그렇게 글을 쓰고 싶었다. 정확한 위치에 정확한 구두점을찍음과 동시에 적절한 단어들을 배열하고, 정확한 이미지들을그려내서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집에 불이 나지 않는 한 눈을돌리지 못할 만큼 이야기에 확 빨려들게 하고 싶었다. 단어에 행동의 힘을 요구하는 건 아마도 헛된 바람일지 모르겠으나, 그건분명히 젊은 작가가 지닐 만한 소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독자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명확하고 힘있는 글을 쓰고 싶 - P339

다. 오늘날도 이것은 내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첫번째 단편이 발표되고 십삼 년이 지난 1976년이 되어서야내 첫 단편집인 『제발 조용히 좀 해요』가 출간되었다. 창작, 잡지를 통한 발표, 그리고 책 출간 사이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것은 내가 일찍 결혼한데다 아이들을 양육하고 블루칼라 노동직에 종사해야 했던 절박한 상황들, 황급하게 약간의 교육을 받아야 했던 점, 그리고 단 한 번도 월말까지 돈이 풍족했던 적이 없던 생활에 어느 정도는 원인이 있다. (내 삶에 은은함이란 거의없었는데도, 어떻게 하면 강물처럼 은은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될수 있을까 배우려 한참 동안 애쓰던 때이기도 하다.) - P340

첫 책을 채울 분량을 쓰고 그걸 출판해줄 사람 ㅡ 덧붙이자면 그 사람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 즉 무명작가의 첫 단편집을 내는 일에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ㅡ을 찾느라 십삼 년을 소비한뒤 나는 시간이 있을 때 재빨리 글을 쓰는 법을 배우려 애썼고,
영감이 있을 때 후다닥 글을 써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시간이 흘러 영감의 원천이 된 일들이 잠잠해지고, 너무나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면 거리를 두고 꼼꼼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살펴보았다.
인생이 다 그러하듯 필연적으로 시간이 뭉텅이로 그냥 사라져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고, 그 오랜 기간 동안 나는 그 어떤 단편도 쓸 수 없었다. (지금 그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얼마 - P340

나 좋을까!) 때로는 소설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일이 년을흘려보냈다. 하지만 종종 나는 그 시간의 일부를 시를 쓰며 보낼수 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제 꺼진 건아닐까 종종 두려워하던 내 안의 열정이 시를 쓴 덕분에 완전히 꺼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적어도 내게는 신기하게도 다시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돌아왔다. 내 삶의 환경이 바로 섰고, 아니면 적어도 개선되었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글을 썼다. - P341

나는 십오 개월 동안 「대성당을 썼다. 이번에는 그중 여덟 편이 다시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 단편들을 쓰기 전 이 년 동안 나는 앞으로 무얼 쓰든 그걸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그리고 어떻게 쓰고 싶은 건지를 알아내기 위해 이전에 썼던 글들을 살펴보았다. 그전에 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분수령이 되어준 책이었지만, 그런 책을 또 쓰거나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기다렸다. 시러큐스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시와 서평 몇 편, 에세이를 한두 편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뭔가가 일어났다. 잠을 푹 잔 뒤, 나는 책상으로 가서 「대성당」을 썼다. 이게 그동안 내가 써온 이야기와는 다른 종류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어찌어찌 나는 내가 가야할 새로운 방향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쪽으로 갔다. 빠르게. - P341

V. S. 프리쳇은 단편소설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얼핏 본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에는 얼핏 본 것일 뿐이다. 이윽고 그 얼핏 본 것에 생명이 생기고, 순간을 밝히는 뭔가로 바뀌고, 아마도 독자의 의식에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깊게 새겨질 것이다. 헤밍웨이가 너무나도 멋지게 해냈듯이, 독자의 경험의 일부가되는 것이다. 영원히. 작가는 희망한다. 영원히.
만약 우리가 작가와 독자 모두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단편소설의 마지막 한두 줄을 마치고 잠시 조용히 앉아 있을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방금 우리가 쓴 또는 읽은 글에 대해 생각하리라. 아마 우리의 심장 또는 지성은 글을 읽기 전에 비해 아주 살짝 그 위치가 달라졌으리라. 우리의 체온은 눈에 띄게 올라가거나 내려가리라. 이윽고 숨이 다시 차분해지면, 우리는, 작가와독자는 마찬가지로 정신을 수습하고 일어나리라. 그리고 체호프 - P342

의 등장인물이 말했듯이 "따뜻한 피와 신경으로 창조되어" 다음 일을 향해 전진하리라,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 P343

좋은 창작 수업 선생이라면 좋은 작가 한 명을 여러 번 구해줄 수 있다. 내 생각에는 나쁜 작가 한 명도 여러 번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글쓰기란 힘들고 외로운 과정이며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다. 만약 우리가 일을 제대로 한다면, 창작 수업 선생들은 없어서는 안 될 부정적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선생 노릇을 하려면, 젊은 작가들에게 어떻게 쓰면 안 되는지를 가르치고, 또 어떻게 쓰면 안 되는지스스로 깨닫는 법을 가르쳐야만 한다. 에즈라 파운드는 독서의ABC에서 "서술의 근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만약 ‘정확성‘이라는 단어를 언어 사용에서의 정직함으로 받아들인다면, 즉 작가가 얻고자 하는 결과를정확히 얻기 위해 의도하는 것을 정확히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학생의 글쓰기에서 정직함이란 도움과 격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남에게서 배울 수도 있으리라 본다. - P349

글을 썼던, 또는 한 줄도 쓰지못했던 방에 들어가 텅 빈 종이 앞에 앉아 있을 때면 작가는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흥분을 느낀다. 동료 작가들도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봤자, 심지어 당신과 동시에 그렇다는 걸알아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그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뭔가가 나오고, 그 공동체에 당신이 한 것을보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이 옳고 진실된 글을 쓰면기뻐하고 그러지 못했을 때 실망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경우이든 상대는 자신의 생각을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묻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걸로 충분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도움은 된다. 그동안 당신의 근육은 강해지고, 피부는 두꺼워지고, 추위와다가올 힘든 여행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줄 두툼한 겨울용 털이자라기 시작한다. 운이 좋다면, 당신은 별의 인도를 받아 방향을잡을 수도 있으리라.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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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편으론 이 단편이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영향과 폭과 깊이와 등장인물의현실감 넘치는 감정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이것은 다른 종류의 이야기-어쩌면 더낫지 않을 수도 있고, 분명히 희망컨대 더 나쁘진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쨌든 다른 종류이다. 그리고 이 단편에서 내부적·외부적 진실과 가치는 안타깝지만 등장인물과도, 단편소설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다른 가치들과도 별 관계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글쓰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내가싫어하는 점보다는 좋아하는 점을 더 잘 찾아내는 경향이 있다.
요즘에는 대형 잡지와 소형 잡지, 그리고 책의 형식으로 온갖 좋은 글들이 출판되는 듯하다. 물론 별로 안 좋은 글들도 많지만,
뭐하러 그런 것까지 걱정하겠는가? 내 마음속에서는 조이스 캐럴 오츠가 내 세대의 첫번째 작가이며(아마도 최근 세대까지도그러하리라, 우리 모두는, 적어도 가까운 장래까지는 그 그림자또는 주문 속에서 살아나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P307

나는 ‘타고난‘ 시인이 아니다. 내가 쓴 시 상당수는, 단편소설쓰는 걸 가장 좋아함에도 그것을 쓸 시간이 늘 주어지는 건 아니라서 쓰게 된 것들이다. 단편소설에 흥미가 있다보니 나는 이야기 줄거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내가 쓴 시 상당수는서술적인 경향이 있다. 나는 처음 읽었을 때 뭔가를 말해주는 시를 좋아한다. 하지만 물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 또는 특별히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시의 경우에는 그 시를 이해하기 위해 두 번, 세 번, 네 번이라도 읽는다. 내가 쓴 모든시에서 나는 명확한 분위기 또는 환경을 추구한다. 나는 시 속에인칭대명사를 빈번히 쓰지만 내가 쓰는 시의 상당수는 순수한 창작물이다.  - P308

에세이 두 편은 1981년에 원고 청탁을 받아 쓴 것이다. 하나는 뉴욕 타임스 북 리뷰>의 편집자가 나에게 "글쓰기에 대한 견해를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써달라고 해서 그 결과로 나온 「글쓰기에 대해」라는 짧은 글이다. 다른 하나는 <아메리칸 포어트리리뷰>의 스티브 버그와 하퍼 & 로의 테드 솔로태로프가 ‘영향‘에대한 글들을 모아 『계속되는 것을 찬양하며』라는 책을 내겠다며내게 원고를 하나 써달라고 했을 때 쓴 글이다. 나는 거기에 「정열」을 보냈고, 이 책의 제목으로 그걸 쓰기로 한 건 노엘 영의 생각이었다. - P313

가장 일찍 쓴 단편은 1966년에 쓴 「오두막」으로, 『분노의 계절』에 실렸으며 이번 출간을 위해 올여름에 개정을 했다. <인디애나 리뷰>는 1982년 가을호에 이 단편을 실을 예정이다. 훨씬더 최근에 쓴 단편 「꿩」은 이번 달에 메타콤 프레스가 내는 한정판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며, 올가을 <뉴잉글랜드 리뷰>에도실릴 것이다.
나는 내 단편소설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처음부터 제대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글을 다 쓴 뒤 이리저리 고치고, 더 고치고, 여기를 바꾸고, 저기를 바꾸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내게 있어 처음에 글을 쓰는 건 그 이야기를 가지고 놀기 위해 - P313

견뎌야 할 시련처럼 보일 뿐이다. 내게 있어 고쳐쓰기는 하기 싫은 시시한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충동적이기보다는 계획적이고 신중한 쪽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뭔가에 대한 설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연관지으려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다 쓴 글을 개정하는 작업이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건확실하다. 어쩌면 내가 개정 작업을 하는 건 그 과정을 통해 점차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심장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 알기 위해열심히 애를 써야만 한다. 글이란 고정된 위치라기보다는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 P314

당연히, 내 시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다. 진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며, 실제 일어났다 하더라도 적어도 시에서 내가말한 방식대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단편소설 대부분이 그러하듯 시에도 내 자서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시 속에서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한 뭔가가 언젠가 내게 일어났으며, 그 기억이 표출되길 기다리며 내 안에 담겨 있었다. 또는 시에서 종종서술되는 대상이 그 시를 쓰던 당시의 내 심적 상태를 어느 정도는 반영하고 있다. 나는 크게 보아 내 시가 단편소설보다 좀더 개인적이며 그래서 좀더 나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작품이든 다른 사람의 작품이든, 서술적인 시를 좋아 - P326

한다. 시가 꼭 시작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이야기를 말해야 할필요는 없지만, 내게 있어 시는 계속 움직이고, 생생히 나아가고, 번뜩이는 게 있어야만 한다. 시란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야한다. 그 방향이라는 것이 과거일 수도 있고, 먼 미래일 수도 있다. 또는 옷자란 오솔길로 방향을 틀 수도 있다. 심지어 지구에한정된 게 아니라 별들 속을 누비며 머물 곳을 찾을 수도 있다. 무덤 너머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연어, 기러기, 메뚜기와 여행을 할 수도 있다. 시는 정지해 있으면 안 된다. 시는움직여야 한다. 시는 움직이고, 설사 그 안에서 신비로운 요소들이 작용할지라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암시하는 본질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시는 빛나야 한다. 적어도, 나는 시가 빛나길 바란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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