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가다듬자 식당 맞은편 끝에서 수석 웨이터와 이야기하는 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웨이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더니 식당을 떠났다. 루시는 천천히 얼음물을 마셨다. 거짓말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루시는 진실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러나해리에게 감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사건으로 충격을줘야만 했다. 루시는 해리가 타고난 무감한 성정,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무시하고 넘겨버리려는 태연스러운 태도를 참지 못하고 순간 이성을 잃었다. 해리가 자신의완력과 커다랗고 건강한 몸집을 이용해서 몸이 없는 감정을, 믿음과 열정을 조롱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줄곧 알았으면서 왜 그에게 잘해주려 했을까? 뭐, 이제는 끝났다. 일찌감치 그의 어리석음과 자만심을꿰뚫었다면 좋았으리라. 어쨌든 성공한 것 같았다. 해리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 P120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루시는 몸이 아프고 쑤셨다. 잠시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부리나케 아우어바흐의 연습실로갔다. 개인 지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우어바흐는 손에 신문을 든 채로 루시를 맞아주었다. "이것 봐라, 루시, 클레멘트가 5월 3일 뉴욕에서 두 번째 공연을한다는 광고야. 시카고에 오자마자 떠나야겠구나. 공연이 굉장히 성공적인걸."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였다. 루시는 즉시 기분이 나아졌다. 서배스천이 잘 지내고 있다면 다른 건 상관없었다. 아우어바흐도 평소보다 정신이 맑은 것 같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워낙유한 성격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도 집중력을 발휘해 루시의 연주를 비평했다. 중년다운 가정적이고 만족스러운 그의생활 저변에는 뛰어난 음악적 지능이 있었는데, 자주 드러나는 특성은 아니었다. 한편 루시는 현실을 잊기 위해 연주에 몰두했다. - P122
루시는 서배스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자신을 감싸는 포옹 속에서 가망 없는 절망을 느꼈다. 가로등을 지날때 루시는 고개를 들었고, 번쩍이는 빛 속에서 서배스천의 얼굴을 보았다. 아, 바로 그때 떠올랐다! 서배스천이 <우리 둘은 작별했네>를 불렀던 밤, 그가 자신의 삶을 바꾸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밤이 그런 예감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런 예감은 미래에서 온 것이었다. 분명 그날이 예고해줬네, 이 이별의슬픔도 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릴 운명이었다. 두 사람 모두그것에, 서로에게 매달렸으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P135
애초부터 이 남자를 향한 루시의 사랑에는 슬픔의 그늘이있었다. 아는 사이가 되기 전부터 그랬다. 거리에서, 미술관계단에서, 대성당 현관에서 우연히 그를 알아보았을 때 루시의 마음이 동한 이유는 그의 얼굴에 어린 외로움과 실망의 기색 때문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요즘, 루시는 이따금 마담드 비뇽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아주 오랫동안 열렬히 기도하던 성당에 가보고는 했다. 그곳은 루시가 모르던 슬픔에 바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루시는 그가 무릎 꿇었던 곳에 무릎 꿇고 앉아 슬픔이 아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간간이 그의 안부가 도착했다. 절절한 사랑의 편지라기보다는 짧은 메모였다. 일이나 루시의 연습에 관한 몇 마디가적혀 있었다. 그리고 항상 루시만을 위한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 공간에 관한 일화, 추억, 문장 한토막, 인간적인 이야기. 그가 재깍재짝 일정을 알려주었기에루시는 어느 때고 그의 소재를 알 수 있었다. - P145
그해 플랫 계곡에서는 파랗고 노랗게 물든 긴 가을이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11월 내내 해버퍼드의 여자들은 1902년의 최신 유행인 맞춤 정장에 때때로 작은 털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 누구도 겨울 외투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무들은 여전히 시멘트 보도 위로 풍성한 금빛 잎사귀를 드리웠다. 강가의 커다란 미루나무는 여름에 비해 나긋해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흰색으로, 은색으로 빛났다. 공기에도 특별한 우아함이 깃들었다. 비 내리는날이 적어서 옥수수수염이 그슬리기 시작했기에 불평할 이유가 충분한 농부들조차 매일 아침 들판으로 나올 때면 내년에는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고, 삶은 제법 수지맞는 도박이라고 생각했다. - P152
"좋은 아침, 해리." 해리가 고개를 들고 모자를 벗은 뒤 외쳤다. "우와 좋은 아침이야, 루시!" 여기서 만나다니 놀랍다는 듯한 태도였다. 루시가 떠났다가 돌아온 적 없다는 듯, 두 사람사이에 특별한 우정 같은 것은 없었다는 듯. 중요하지 않은고객의 부인이나 딸을 상대할 때 쓰는 가식적이고 깍듯한 목소리였다. 은행으로 소유권을 빼앗긴 가여운 농장의 여자 대하듯 쾌활한 태도로 루시를 무시했다. 안경을 쓴 것도 아닌데마치 눈앞에 두꺼운 렌즈가 있는 것 같았다. 날카롭게 반짝이는 엷은 푸른색 눈, 고드름처럼 차디찬 눈. 해리는 루시에게매정하지 않았다. 완전히 무심했다. 그리고 우체국을 빠져나와 편안하고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야구 선수시절, 그가 플랫 계곡에서 제일가는 투수였고 꼬마 루시는관람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그 시절에 마운드로 걸어 나갈때마다 보여주던 발걸음 그대로였다. 루시가 해버퍼드로 돌아온 뒤로 줄곧 이런 만남이 계속되었고, 해리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똑같은 놀라움을 꾸며냈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고, 똑같은 목소리를 냈다. 상대는 그의어조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인데도. 해리가 당황하거나 퉁명스럽게 굴었다면 루시는 어떻게든 화해를 시도했을 것이다. - P157
햇살이 환한 오후 내내 루시는 낮게 드리운 사과나무 가지아래 바삭바삭한 황갈색 잔디에 누워 있었다. 사과나무밭은면적이 12만 제곱미터 정도 됐고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루시는 가장자리에 누워서 구불구불 얽히고설킨 나무들이 쭉 늘어선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가지에는 작고 빨간 사과가 달려 있었고, 희끗희끗 시들한 초록 잎사귀도 몇 장 보였다. 사과밭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먹을 만한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가을이 오래도록 늑장을 부리는 계절, 루시는하루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오랫동안 자기 멋대로 자란 사과나무들의 모양에는 어딘가마음의 위로가 되는 구석이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루시는 추억과 생각에 잠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헤아릴 수있었다. (먼 과거인 것만 같은) 그날 아침 친절한 아우어바흐 부부가 와서 루시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갔던 것을 기억했다. 파울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알았다. 루시가 당장 이곳을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이제 다시는 시카고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 P163
한순간 얼어버린 마음, 한순간 부서져 버린 세상, 서배스천의 죽음은 그런 뜻이었다. 루시는 남겨진 세상에서 길게 호흡하거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기억으로 되살린 세상에서만 숨 쉴 수 있었다.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건만,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유년을 보낸 집을 둘러보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경해서 만지기조차 두려웠다. 자기 침대에 누워도 몸이뻣뻣해졌고, 무언가가 아름다운 마음속 추억을 앗아 갈 것만같아서, 그런 추억이 전부 망상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설득할 것 같아서 경계하게 되었다. 루시는 오직 사과나무밭에서만 안전했다. 이곳에서는 한때 삶과 함께하던 감정들이되살아났다. - P164
루시는 그 비겁한 결박을 끊어내려 애쓰느라 기진맥진하고 싸늘해진 몸으로 꿈에서 깼다. 그러면 다시 잠들지 못해 덜덜 떨면서 남은 밤을 지새웠다. 왜 루시는 서배스천에게 이 남자가 기어코 당신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을까! 대체 왜 그의 발밑에 몸을 던지고 목퍼드를 조심하라고 애원하지 않았을까! 목퍼드가 비겁하고 시샘하고 배신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건만! 이런 끔찍한 밤을 지날 때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것조차루시의 통제력을 산산이 부숴놓았다. 그러면 춥고 두렵고 불안한 몸을 안고 이곳 사과나무 밑으로 왔고, 조금씩 마음의짐이 줄어들고 단단한 가슴속 응어리가 풀어졌다. 그런데 이제 사과나무는 베어져 사라지게 되었다. 올가을 오래된 나무들은 생의 마지막 햇볕을 쬐고 있었다 - P166
분명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고, 육체적인 매력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매력이 있었다. 동정심, 관용적인 이해심 같은 것이. 오래된 노래들, 케케묵은 노래들을 부를 때도 그 가치를 십분 보여주었다. "대리석 회랑에 사는 꿈을 꾸었어요" 하고 노래할 때는 으레 강조하는 부분을 넘겨버리고리듬을 약간 바꾸었다. 낡고 실없는 가사를 근사하게 표현해신선함을 부여했다. 거칠게 다뤘다가는 산산이 바스라질 압화라도 되는 듯 가사에 깃든 감정을 섬세하게 노래했다. 무슨 소용일까, 루시는 궁금했다. 따분한 사람들에게 따분한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이 가련한 가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청춘, 외모, 지위, 고음까지. 그런데도노래를 너무나 잘했다! 루시는 함께 무대에 올라 가수의 노래를 도와주고 싶었다. 마음속에서 불꽃처럼 격렬한 흥분이퍼덕거렸다. 오늘 밤 당장 떠나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기차나 잡아타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세상으로, 저 가수가 추락하기 전에 속해 있던 세상으로 도약해야 했다. - P189
그날 밤 루시 안의 모든 것이 부드러운 황혼의 빛을 통과해 밖으로 뻗어나가고 앞을 향했다. 위아래로 생기가 흘러넘치는 인파 가득한 거리, 장미와 치자꽃과 제비꽃이 가득한 창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루시는 꽃을 한 아름 안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꽃과 음악과 매혹과 사랑을, 서배스천 옆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모든 것을 원했다. 무슨 뜻일까, 루시가 다시 삶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떻게혼자서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일까? 문득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너무나도 선명한 깨달음이었으니 외부에서, 미동조차 없는 적막에서 도래한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만약 생 그 자체가 연인이라면? 저 먼도시에서, 바다 건너편에서 루시를 기다리는 연인. 루시를 끌어당기고, 유혹하고, 마법을 거는 연인. 루시는 부드럽게 창문을 열고 창가에 무릎 꿇고 앉아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머리카락과 달아오른 볼에 눈송이가 닿아 녹아내렸다. - P192
아, 이제는 알았다! 루시는 가져야만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했다. 그 광휘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으니 구하고 싸워 얻어야 했다. 그 속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온 마음을 바쳐 천상에 있는 그를 바라본다면, 분명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처음부터, 루시가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그는 그렇게 노래했다. 이제 루시는 그 진정한 뜻을 알았다. 루시는 창문으로 다가가 눈보라를 향해, 그 뒤에 있는 미지를 향해 팔을 뻗었다. 다가오기를! 전부 돌아오기를! 루시를배신하고 조롱하고 마음까지 부숴놓기를, 그가 바라는 바이니까! - P193
이런 무례라니. 이런 모욕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루시는젊고 튼튼했으며, 세상이 자신을 짓밟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이렇게 잔인하고 멍청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터였다. 다들 길에 얼어붙은 진흙만큼 멍청했다. 여기서생각하기 시작하면 울음이 터지고 말 것이다. 굴복해서는 안됐다. 어서 갈 길을 가야 했다. 강둑에 다다르자 잠시 자리에 앉아서 신고 있던 신발을 벗고 스케이트 날이 붙은 다른 신발로 갈아 신었다. 손이 덜덜떨려서 가죽끈을 단단히 조이고 묶는 것도 겨우 해냈다. 자기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해리에게 자신을 길가에 버리고 떠날기회를 주다니, 그날 밤 시카고의 식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런 무례와 악의를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루시는 보폭을 길게 해서 강가의 얼음위로 나아갔다. 주변을 살펴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꽁꽁 얼어붙은 시골과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그들이 절대 모를 빛과 자유의 세계로 돌아갈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 P205
투시는 살피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강 중앙의 매끄러운 얼음을 향해 나아갔다. 무언가가 부드럽게 갈라지는 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든 루시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은 선을 포착했다. 잽싸게 뒤돌았으나 빙판이 갈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조각난 얼음이 기울어져 루시는 차가운 강물에 허리까지 빠지고 말았다. 두렵다기보다는 흥분되었다. 부주의한 탓에 곤경에 빠졌으니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물이 아주 깊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얼음 위에 팔꿈치를 걸친 상태였다. 바닥에 발이닿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루시는 지금 자신이 강 본류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발로 조심스럽게 물속을 훑는데 무언가에 발목을 잡혔다. 강바닥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던나뭇가지에 스케이트 날이 걸린 것이다. 지난봄 동안 유입된강물에 휩쓸려 온 나무였다. 루시는 팔 밑에 있던 얼음에서 미끄러져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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