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사제가 쌀알 한 움큼을 흩뿌리고 있기라도 하듯, 차디찬 빗방울이 체에 거른 가루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빗방울이 닿은 곳마다 표면이 오돌토돌한 얼음 알갱이가 맺힌다. 가로등 아래서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은빛 요정 같네. 콘스턴스는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이런 생각이 뒤따른다. 자신은 너무 쉽게 매혹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아름다움은 일종의 환상이다. 또한 일종의 경고다. 아름다움도 독나비처럼 어두운 이면을 간직하고 있는 터다. 그러니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번 얼음 폭풍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겪게 될 것이고 또 이미 겪고 있다고 하는 위협과 위험과 비탄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완이 하키와 축구 경기를 보겠다고 산 텔레비전은 평면 고해상도 화면을 탑재하고 있다. 콘스턴스는 수상한 오렌지빛을 발하는 사 - P9
람들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가 어슴푸레 옅어지기 일쑤였던 옛날의 호리호리한 화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고해상도 화면으로 보면 더 별로인 것들도 있지 않은가. 모공, 주름, 코털, 그리고 바로 두 눈 앞으로 덮쳐드는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치아, 현실 속 자기 모습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그런 것들을 보면 콘스턴스의 마음에는 불쾌감이 인다. 마치 본의 아니게 타인의 욕실에서 오목한 확대 거울 역할을, 좀처럼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그런 거울 역할을 수행하는 느낌이다. - P10
콘스턴스는 텔레비전을 끈다. 방을 가로질러 램프 조도를 낮춘 다음 현관 전면으로 난 유리창 옆에 앉아 가로등이 불을 밝힌 어둠을내다보면서 나뭇가지와 지붕과 전봇대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광경을, 바깥세상이 다이아몬드 결정으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알핀랜드"콘스턴스가 소리 내어 말한다. "소금이 필요할 거야." 이완이 콘스턴스의 귀에 대고 말한다. 처음 이완이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을 때 콘스턴스는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공포심마저 느꼈다. 이완이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난 지금은 그의 존재에 한결 편안해진 상태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은 여전하다. 이완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완의 참견은 보통 일방적이다. 콘스턴스가 대답을 해도 이완은 보통 대꾸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거의 늘 그런 식이었다. - P12
현재 알핀랜드는 콘스턴스의 컴퓨터상에 살아 있다. 알핀랜드는여러 해에 걸쳐 다락방에서 꽃피었다. 그 다락방은 콘스턴스가 알핀랜드를 통해 방 개조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어들이자마자 스스로를 위한 일종의 작업실로 탈바꿈시킨 공간이었다. 하지만 바닥을 새로 깔고 창문도 새로 내고 에어컨과 천장형 선풍기를 설치해도 다락방은 옛 빅토리아 시대 벽돌집의 꼭대기 층처럼 비좁고 숨 막혔다. 그래서 얼마 후, 아들들이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 알핀랜드는 부엌식탁으로 이주했고, 한때는 혁신의 주봉(主峯)이었으나 이제는 한물간 전동 타자기 위에서 수년간 문장으로 펼쳐졌다. 알핀랜드의 다음이주지는 컴퓨터였는데, 위험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컴퓨터에담긴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분노가 솟구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는 점점 발전했고 콘스턴스도 이제는 능숙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이완이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지않게 된 이후, 콘스턴스는 컴퓨터를 이완의 서재로 옮겼다. - P27
집중해야 할 때다. 콘스턴스는 서재로 가서 이완의 의자에 앉아 컴퓨터의 검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완은 틀림없이 알핀랜드를 구하고 싶었을것이다. 그는 알핀랜드가 전기 자극에 타 버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콘스턴스에게 컴퓨터를 꺼 두라고 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알핀랜드는 이완의 영역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알핀랜드의 유명세에 속으로 질색했다. 알핀랜드 자체가 바보 같은 짓거리라고 생각했고, 알핀랜드의 지적인 경박함에 모욕감을 느꼈다. 콘스턴스가 알핀랜드에 흠뻑 빠져 있게 하면서도 거기에 깊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분개했다. 게다가 이완은 알핀랜드에서, 콘스턴스의 사적인 세계에서 배제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빗장이 이완을 막고 있다. 늘 그랬다. 콘스턴스와 이완이 만난 순간부터. 이완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 P54
아니, 들어갈 수도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마법에 걸린재가 소임을 다하고 고대의 주문이 깨어졌으니 알핀랜드를 다스리는 규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밤 개빈이 펑하고 오크통 뚜껑을 열어 콘스턴스의 집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개빈이 알핀랜드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이완은 알핀랜드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혹은 금지된 것의 마력에 이끌려 알핀랜드로 끌려 들어갈 수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이완이 사라진 곳은 분명 그곳일 것이다. 이완은 망대가 설치된 석벽을 통과해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완은 구불구불하고 어둑한 길을 따라 걷고, 달빛이 비치는 다리를 건너고, 고요하고 위험한숲으로 들어서고 있다. 머잖아 그늘진 교차로에 다다를 텐데, 그러면 어느 방향으로 향할까? 이완은 답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거기서길을 잃을 것이다. 이완은 이미 길을 잃었다. 이완은 알핀랜드의 이방인이고, 알핀랜드에 도사리는 위험을 모른다. 룬 주문도 모르고, 무기도 없다. 동맹도 없다. 아니면 콘스턴스가 유일한 동맹일 수도, "날 기다려, 이완, 거기서 기다려!" 콘스턴스는 알핀랜드로 들어가 이완을 찾을 것이다. - P55
레이놀즈는 두 서재를 신전처럼, 그리고 개빈을 자신의 우상처럼 돌본다. 개빈이 쓰는 모든 연필을 날카롭게 깎아 두고, 모든 핸드폰전화를 차단하고, 개빈을 서재에 가둬 둔다. 그러고는 개빈이 생명유지 장치를 부착하고 있는 상황인 양 서재 밖에서 발끝으로 살금살글 걸어 다니고, 그러면 개빈은 한 자도 쓰지 못한다. 지푸라기를 엮어서 금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서재라는 그 영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와 가장 닮은 악랄한 난쟁이 룸펜슈틸츠킨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굼뜬 룸펠슈틸츠킨이 그 서재에는 절대 나타나지 터다. 그렇게 있다 보면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레이놀즈는 식탁 맞은편에서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며 개빈에게묻는다. "뭐 새로운 소식 있어?" 레이놀즈는 자신이 개빈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그가 자신만의 시적 정수와 교감하게 해 주고, ‘창의적인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개빈은 자기가 비쩍 곯아 뼈만 남은 상태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 P77
조리가 무덤 위에서 혼자 탭 댄스를 추지 않는 이유는 뭐든 혼자하기 싫어해서다. 조리가 여자만 한가득한 침울한 장례식장에 같이가 달라고 계속 조르면, 틴은 겉으로는 우울한 척하지만 속으로는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축하는 늙은이들 틈에서 지루해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빵 테두리를 잘라 낸 샌드위치를 잇몸으로 물어뜯으며 말하면서도 조리의 뜻대로 해 준다. 생의 마지막 통과의례에 대한 조리의 관심이 다소 지나치고 심지어는병적이라고 틴은 생각하며 조리에게 그 생각을 털어놓고는 했다. "존경을 표하는 것일 뿐이야."라고 조리가 대꾸하면 틴은 코웃음을 친다. 농담하기는 두 사람 모두 겉치레를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존경을 중요한 가치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냥 그거 보는 게 고소해서 그러는 거잖아." 틴이 응수한다. 조리는 틴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코웃음만 친다. "우리 좀 가식적인가?" 조리는 틴에게 그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것과 가식적인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 P112
조리와 틴은 쌍둥이이므로 서로 함께일 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잘 되지 않은 일이다. 속마음을 숨기고 가식적으로 굴어도 외부 사람만 속인다. 서로 앞에서는 구피처럼 투명하며,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있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틴이 한때 수족관을 가진 애인을 만난 덕에 잘 알듯이 구피의 몸에도 불투명한 부분이 있다. 심홍색 테 돋보기안경을 쓰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아니 보톡스를맞은 것을 감안한다면 최대한 찌푸릴 수 있는 만큼 얼굴을 찌푸리면서 부고란을 보고 있는 조리를 틴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응시한다. 최근 들어, 그러니까 근 수십 년 사이에 조리의 눈은 과로한 사람처럼 앞으로 조금 튀어나왔다. 모발 상태도 좋지 않다. 그래도 틴은 조리가 모발을 시꺼먼 색으로 염색하는 것을 관두게 하는 데 결국 성공했다. 짙은 색의 파운데이션을 칠하고 반짝이는 청동색 미네랄 파우더를 아무리 성실히 발라도 생기가 없는 지금 피부색에 맞지 않게 모발이 너무 ‘죽지 않은‘ 상태라 자기를 기만하는 딱하고 불쌍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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