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게이하트가 죽고 25년이 흐른 어느 겨울 오후, 해버퍼드의 선량한 주민들은 또 다른 장례식을 위해 묘지에 모였다. 수술을 받기 위해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던 게이하트씨의 시신이 고향으로 보내진 것이다.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치고는 이례적인 오후 4시였으나 기차 도착 시각에 맞춰 정한 일정이었다. 급행열차로 실려 온 관은 영구차로 옮겨져(이때는 현대, 1927년이었다) 루터 교회로 운반되었고 짧게 추도식을 치른 뒤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큰 장례식이 열린 적이 언제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게이하트 영감님으로 통한 그는친구가 많았다. 5년 전 폴린이 죽고 난 뒤에도 재단사네 딸 - P211
중 한 명을 가정부로 부리며 줄곧 같은 집에 살았다. 변함없이 시계방을 운영하며 클라리넷 연주도 조금씩 계속했지만, 숨이 달린다며 불평했다. 여름날의 일요일이면 이따금 오래된 사과나무밭으로 나가 연습했다. 사과나무밭은 베어내지않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길고 훌륭한 삶이었다고, 사람들은 걷거나 천천히 차를 몰고 묘지로 가는 길에 생각했다. 해버퍼드에 있는 시계 중에 그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분명 손이 느리기는 했으나 솜씨 좋은 장인이었다. 오랜 손님들은 간밤에 시계태엽을 감다가 괜스레 망연해졌다. 째깍째깍, 그의 손안에 있던 작은 것은 전과 마찬가지로 똑똑하게 시간을 재고 있는데 게이하트 영감님은 시간의 흐름에서 완전히 튕겨 나간 것이다. - P212
지루하고 공허한 삶을 산 수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리고든 역시 열정적으로 전시 사업에, 흔히 하는 말처럼 ‘자신을내던졌다. 적십자, 식량 보존 사업 등을 벌였고 종국에는 자금 조달을 도왔던 야전병원에 가서 직접 일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8개월을 보내는 동안 아내가 은행장으로 대행하며 남편의 사업 전반을 관리했다. 그때가 고든 부인의 인생 중 가장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사업가의 성정을 타고난 여자였다. 고든에게 외국에서 보낸 시간은 굉장히 의미 깊었다. 사람들은 돌아온 그에게서 모종의 변화를 느꼈다. 게이하트 영감님과 맺은 우정은 더 긴밀하고 따뜻해졌다. 실로 부자 같은사이였다. 가정에서 맡은 역할도 한층 능숙하게 해냈다. 부부는 전보다 잘 어울렸다. 함께 외출하고 손님을 초대해 저녁을먹었다. 매끈한 바닥과 수많은 화장실이 있는 저택의 분위기는 전처럼 냉랭하지 않았다. - P216
그는 우체국에서 처음 루시를 보고 자기 마음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루시는 지저분한 남자들이득실거리고 사위로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천천히 아버지의 사서함 자물쇠 비밀번호를 맞추고 있었다. 문 너머로 보이는 루시의 몸이 그리는 곡선에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섬세하고, 너무나도 가만했다. 해리는안으로 들어가 루시를 마주하는 대신 번개처럼 뒤돌아 부리나케 떠났다. 하지만 한 손을 들고 서 있는 옆모습을 한 번흘긋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후로 매일 거리에 나설 때마다 저 멀리 지나가는 루시를바라보고 그 옆을 지나쳐야 했다. 루시의 우아함은 걱정 없고 명랑하던 시절보다 내향적인 지금 더욱더 돋보였다. - P220
해리가 즐거움 없는 결혼 생활을 시작한 후로 1년이 흘렀고 (실로 모든 종류의 즐거움이 박탈된 결혼이라 아내는 아이도 낳지 못했기에) 마음 한쪽에 항상 루시와 함께 산다면 누렸을 삶에 관한 궁금증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루시가 한순간의 변덕 때문에, 한 조각의 간지러운 감상주의 때문에 망쳐버린 것이다. 그러니 고통받으라. 하느님은 아시거니와 자신은 고통받았으니까!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루시를 두고 길모퉁이를 벗어날 때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루시를 벌주겠다는 결심과 앙심 저변의 깊은 곳, 너무나도 깊어서 들여다볼 수도 없는 곳에는 모순적인 확신이있었다. 두 사람 모두 충분히 벌받고 나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리라는 확신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어쩌면그가 보장된 미래를 다 내던지고 이 마을을 떠나게 될지도몰랐는데, 어쨌든 그와 루시 게이하트는 다시 함께하게 될 터였다. - P222
그렇다. 그는 오래도록 마음 끓였다. 그는 강했으나 고통도그만큼 강했다. 다행스럽게도 세기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가 보급되었다. 그는 카운티 최초의 자동차 소유주가 되었고, 더 좋은 차가 나올 때마다 사고 또 샀다. 그는 가진 땅이 많았기에 도로에 살다시피 하며 여기저기로 다녔다. 주말에는 ‘악마처럼 사납게 차를 몰아 덴버에 다녀올 때가많았다. 운전하며 머릿속 생각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상 자동차 엔진에 대고 말하는 셈이었다. 한번은 아내가 동석했는데 깜빡 잊어버리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래, 종신형을 받은 셈이지." - P226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루시는 몇 시간, 기껏해야 몇주 고통받았다. 하지만 자신은 영원히 고통받아야 했다. 그는루시가 어째서 플랫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알았다. 고통과 분노가 루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았으니까.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서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세월이 흐르자 그는 마음속 어둠에 익숙해졌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의족을 달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고, 땅을 어마어마하게 사들였다. 부동산 가치가 떨어지는 중이었기에 실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주의를 돌려야만 했던 시절에 분주하게 지낼 수있었다. 게이하트 씨와 다진 우정은 위로가 되었다. 일종의 응보였다. 체스판 앞에서 보내는 저녁은 그의 일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게이하트 영감의 시계방이 마을의 그 어느 장소보다 애틋해졌다. 그들은 절대 루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루시가 앉아서 연습하던 피아노는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 P227
사소한 것,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토록 행복해할 수있다니! 그는 그런 성정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해도 외면했을터였다. 하지만 잠시 루시를 통해 엿보는 것, 한순간 귀 옆으로 느껴보는 것은 좋았다. 가만히 서서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새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의 옆에서느껴지는 기대감에 저릿저릿했다. 사냥복과 단단한 근육 위로 거센 봄 소나기가 퍼붓는 듯했다. 몸이 경이롭도록 자유로이 가벼워졌고, 핏속을 질주하는 불꽃에 이를 악물게 되었다. - P229
집을 나서자 겨울 한낮의 강렬한 햇살이 마지막으로 저 밑의 마을에 내리쬐고 있었고 무성한 나무 꼭대기와 교회 첨탑이 황동처럼 빛났다. 이제 해버퍼드를 떠나는 일은 없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곳을 영영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겪었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가벼운 발자국을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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