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도심 한복판에서 별안간 당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휴대전화를 목에 걸고 혹은 귀에 대고 서로를 지나치는 인파 속에서, 무어라 무어라 끊임없이 발신되는 말들의 홍수 속에서, 자동차 소리와 온갖 기계들의 소음 속에서 길을 잃고 허둥거릴 때, 되묻게 된다. 이 넘쳐나는 소리들 속에서 우리는 정작 소리를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침묵으로부터 말을 분리시킴으로써 우리의언어는 버림받은 고아의 말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도심에서 지쳐 돌아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펼친다. 「침묵의 세계는 한번에 완독할 필요도 속독할 필요도 밑줄쳐가며 주석을 달 필요도 없는 책이다. 필요와 효용성이 가치의우선 척도가 된 오늘날, 아무런 효용성도 생산성도 없는 ‘침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가장 무용한, 동시에 참으로 유용한 책. ‘나‘라는 덧문이 너무 자주 여닫혀 소란스러워질 때, 아무 문단이나 펼쳐 허공에 띄워놓고 그 느릿느릿하고 절제된 사유가 만 - P215
드는 아름다운 소롯길을 걷는 즐거움이란! 그러나 그 즐거움의이면에는 이 지독한 소음의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아니, 철저히 버려져 자유롭기를 원하는 자의 응집된 고뇌가 있다. 그리하여 얻어진 소금결정 같은 말들이 소란스런 내 혀를 각성시킨다. "침묵하는 풍경, 그것은 인간의 얼굴 속에 들어오면말하는 침묵이 된다. (...) 오늘날 인간의 얼굴에는 어떠한 바다도산도 없다. 얼굴이 더이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에게서 밀쳐내버린다. 얼굴에서 나무들이 베어져나가고, 산은 파여없어지고, 바다는 말라붙었다. 그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세워졌다." 하나의 페이지를 허공에 띄워놓고, 시간과 사랑과 꿈과 보이지 않는 신의 얼굴을 상상하다가 나는 오래 전나를 이루었던 바다와 숲이 그리워진다. 자연의 소리가 속삭이던밀어를 떠올린다. "침묵해요. 당신이 나의, 내가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 - P216
당신과 나 사이에 웅덩이가 있다. 어떤 말씀. 어떤 행위가 있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아득한 심연의 웅덩이-‘침묵의 세계‘ 가우리 사이에 놓여 있다. 고여 있는, 그러나 내부로부터 부드럽게 유동하는 그 세계로부터 말이 자라나고 말의 봉오리가 벌어진다. 침묵의 웅덩이 속에서 두근거리는 말의 구근. 침묵에 젖줄을 댐으로써 육체를 얻은 인간의 말은 침묵에서 나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말의 어머니인 침묵을 경청하는 시간이 우리 - P216
에겐 얼마나 절실한가. 그리하여, 침묵 자체가 말하게 하는 일! 그러니 내 혀가 창조해야 할 것은 언어가 아니라 침묵일지도 모른다. - P217
알렙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사람들은 창이 넓은 집을 좋아한다. 큰 창을 가져볼 기회가 드물었지만 나 역시 커다란 창문이 있는 집을 꿈꾼다. 창은 햇빛과 만나면서 비약적인 매혹의 순간을 낳는다. 창문 앞에 놓인꽃병 하나를 생각해보자. 오전에서 오후에 이르까지 시시각각변화하는 빛의 질감과 각도에 따라 꽃병은 제 속에 간직한 무수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빛과 창의 마술 속에서 꽃병의 형상은 깊은 우물이, 아름다운 여체가, 다알리아 구근이, 주름살 빼곡한 노파의 옆얼굴이 된다. 흙의 질감과 그것을 구워낸 불의열기가 느껴지고 그 열기가 전해주는 규정할 수 없는 슬픔과 사랑이 ‘꽃병‘이라는 딱딱한 기표를 무화시킬 때, 권태로운 생의한순간이 돌연 싱싱해진다. 그리하여 나는 창을 사랑하고, 창앞에 놓인 사물들이 그들에게 규정된 이름과는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들을 사랑한다. 기표와 기의가 교란되는 순간의 즐거움. 이를테면 오독(誤讀)의 즐거움?! - P218
보르헤스의 소설은 나에게 오독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그의 여러 단편집 중 픽션들』과 『알렙은 정교하게 세공된 꽃병이 놓여 있는 창을 바라보는 일처럼, 여러번 읽어도 매번 새롭다. 그 즐거움의 어느 굽이에서 나는 돌연 머릿속이 텅 비는 서늘함을 느끼고, 그 자체로 ‘미궁‘인 세계의 다양한 이면들과만난다. 그의 소설에는 신, 영원, 우주, 시간과 신비라는 형이상학적주제가 넘쳐나지만 그가 보여주는 형이상학의 세계는 고답적이지 않다.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직관과 상상력으로 육박해가는 알 수 없는‘ 존재의 ‘알수 없는 근원. "그리고 나는 ‘알렙‘을 보았다. (...) ‘알렙‘의 직경은 2 또는3센티미터에 달할 듯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기의 축소 없이 우주의 전공간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하나의 사물은 무한히 많은 사물이었다. (...) 나는 모든 각도에서 ‘알렙‘을 보았고, ‘알렙‘ 속에 들어 있는 지구를 보았고, 다시 지구 속에 들어 있는 ‘알렙‘을 보았다. 나는 나의 얼굴과 내장들을 보았고, 너의 얼굴을 보았다." - P219
죽은 애인의 사촌 집 지하실에서 발견한 알렙은 동전 크기만한 무한 시공체이다.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때로는 터무니없는 상상력이 그 터무니없음‘의 힘으로 ‘어떤‘ 진실에 육박해가는 법이다. 알렙을 발견하는 순간의 행간을 읽어가면서, ‘일중일체다중일(中切多中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을 말한 동방의 현자를 떠올리는 것은 내 오독의 편향일까. 꽃병 속에 화엄이 있고 당신의 얼굴 속에 알렙이 있다. - P220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겨울 전등사에 갔다가 소나무 밑둥치에 붙어 있는 매미 유충의 껍질을 보았다. 검지 한마디만한 바싹 마른 얇은 껍질에는여섯 개의 발이 오롯하게 남아 나무껍질 틈새에 단단히 발톱을박아넣고 있었다. 오랜 시간 땅속에 머물다 지상에 나온 어느날자신의 등을 가르고 여름햇살 속으로 날아올랐을 매미는 짧디짧은 생의 시효를 다하였을 것인데, 겨울바람 속 메마른 껍질하나가 증거하는 생의 흔적이 아찔하다. 차갑고 어두운 겨울숲 밑자리, 매미 유충의 껍질로부터 돌연끼쳐오는 빛과 열기의 폭풍. 나는 고흐를 떠올린다. 그가 그려낸 해바라기와 붓꽃과 아를르의 지글거리는 태양과 타는 밀밭, 꿈틀거리는 나무들엔 또다른 빛이라고 할, 어둠이 스며 있다. 그의 화폭에서 터져나오는 자연의 광휘는 지독히 인간적인 통증으로부터 피어난다. 우리가 ‘예술혼‘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으로부터 분리된 예술에 대한 이상화된 열 - P221
망이 아니라 벼랑 끝에 부려진 생의 매순간을 끌어안아 창조의힘으로 전이시키는 견인주의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빙 스톤이 이 책에서 그려내고 있는 고흐의 생애가 감동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고흐를 위대한 예술혼을 부여받은‘ 천재화가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고사랑받기를 원했고 어둡고 가난한 땅에서 소외된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길 원했으며 굶주림과 외로움, 때로 배신감으로절망하는 고흐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난 태양을 그릴 땐 태양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보리밭을 그릴 땐 보리알 안에 든 원소 하나하나가 영글어 터지는최후의 순간을, 사과를 그릴 땐 사과의 즙이 표피를 밀고 나오려는 것을 중심에 있는 사과씨들이 그 자신의 결실을 맺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 싶어." 절망과 희망이 깍지끼고 자신을 밀어가는 ‘산것‘들의 치열한 리듬- 운동성이야말로 최초이자 최후의 생의 조건 아니던가. - P222
고흐가 처음 그림을 그린 때로부터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기까지의 9년 동안 그가 남긴 그림은 879점이었다. 1년에 거의100점의 그림을 그린 셈인 화가로서의 그의 지상의 9년은 그무시무시한 열기만으로도 자신을 내파(內破)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또 그리면서, 그를 이해한 유일한 벗이었던 동생 테오에게 고흐는 쓴다. "어디까지가 습작화이고 어디부터가 본격적인회화인지 잘라말하긴 어려워. 그저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그리고, 결점도 갖고 우수함도 가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기로하자." 생의 매순간은 생의 전부이다. 영원이란, 찰나에서 찰나로 거듭나는 생의 매순간이다. - P223
「창백한 푸른 점」 칼 쎄이건
고등학교 1학년 지구과학 시간이었다. 암청빛 칠판에 선생님이 분필로 작은 점 하나를 ‘쾅‘ 찍었다. "이것이 지구다!" 맙소사. 저 작은 점 속에 깃들인 숱한 생명 중의 하나가 ‘나‘ 라니! 호명할 수 있는 태양계의 별들을 모두 그려넣어도 칠판 한구석에동전 크기만하게 옹크린 저 세계 속에 내가 있다니! 칠판이라는우주 위에 작은 점 하나로 치환되어 나타난 지구는 열여섯의 나를 미열에 시달리게 했다. ‘나‘를, ‘인간‘을, ‘지구‘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데 길들여진 내게 암청빛 칠판이 보여준 거대한 우주는 어떤 막연한 두려움과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천문학자 칼 쎄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은 우리가 일상의 속도 속에서 잃어버린 우주에의 꿈을 복원시킨다. 동시에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나‘란,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를 던진다. 또다른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비유하고 있는 바, 약 150억 - P224
년의 나이를 가진 우주의 역사를 달력의 1년으로 줄인다면 지구의 탄생은 9월 중순 어느날 일어난 사건이며 그후 10일쯤 지나최초의 생물이 싹트며 인간의 조상이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12월 마지막 날의 마지막 15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구가 탄생하기 훨씬 전에 무수한 별들이 있었고 인간이 탄생하기 전에 무수한 생물들이 이 별의 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인간을중심으로 생명들이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종종 빠진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가 수천억을 헤아리는 수많은 은하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이 평범한 우리 은하 속에만도 4천억개 가량의 별들이 존재하며 그 가운데 지구는 극히 미미한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경쟁과 정복과 착취로 얼룩져온 인간의 역사는 무슨 의미일지. 이 작은 점 위에 빼곡하게 구획된 지독히 인간중심적인 영토들 인종, 국가, 민족, 지역과 가족의 성곽이 서로를 경계하며 벌이는 아귀다툼은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사랑하기에만도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너무도 짧다. - P225
별을 바라보자. 저 무한의 빛들이 지지배배거리며, 자그락거리며, 몸 비비는 소리를 들어보자. 우리가 머무는 이 찰나의 순간에 닿기 위해 무수한 별들의 몸을 스쳐 수십, 수백만 광년을달려온 저 별빛. 어쩌면 저 별은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 내게 닿는 사이 이미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래 전 죽은 별이 오늘의 내게 보내오는 속삭임.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을하러, 나는 날마다 이 별로 온다. - P226
섬 장 그르니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타인에 의해 생긴 것이든 내 속의 무수한 나에 의해 생긴 것이든, 상처는 우리의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물질성이며 환영(幻影)이다. 가장 권태로운 삶 속에서도 상처는 끊임없이 환생한다. 살아 있으므로, 우리는 상처의 영혼을 불러내고 치유를 위한 비나리를 거듭할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운명이자 선택받은 존재들인 셈이다. 일상의 어느 결에서 문득 상처가 만져질 때, 한권의 책이 나를 치유하는 경험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상상력을 자극한다거나 새로운 지식을 준다거나 정신을 각성시키고 들끓게 하는 좋은 책은 종종 있으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책은 그리많지 않다. 장 그르니에의 『섬」은 내 상처의 덧난 자리에 고요하고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치장이 없는 맨얼굴로, 말보다는 침묵으로, 섬세하지만 결코 도망가는 법 없이 섬의 뿌리가 나의환부에 닻을 내린다. 그 순간, 뿌리와 환부가 만나는 그 순간이 - P227
그르니에의 글에서는 인식과 사유 이전에 영혼에 직접 손을 내미는 방식으로 온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름다운 에쎄이들은 ‘문학적‘이기보다는 ‘음악적‘이다. 그리하여 나는 선율을 읽듯, 내 젊은날의 어느 캄캄한 모퉁이를 지날 때 주문처럼 떠오르던 아름다운 멜로디를 읊조려보는것이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228
나는 샤먼이 되어,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아득한 미래의 어머니가 되어, 몇개의 문장을 입속에서 굴려본다. 말들의 틈에서유연하게 파동치며 배어나온 빛살이 내 혀끝에 둥근 환약 한알을 올려놓는다. 나는 머뭇거리며, 마침내는 주저없이 그것을 받아 삼킨다. 아, 내가 상처라고 믿었던 것들의 영원한 흥취와 덧없음이라니! 나는 애초에 상처로 지어진 집이며 그리하여 새로이 얻은 상처란 없는 것이다. 세계의 헛됨을 아는 그르니에의 문장이 만드는 지극히 아름다운 울림 속에서 나는 느릿느릿 산보를 한다. 가장 일상적인것들이 보여주는 낡음 속에서 빛나는 ‘공(空)‘의 매혹. ‘비어 있음‘은 슬픔도 쓸쓸함도 그 무엇도 아닌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그 무엇인가의 힘으로 우리는 다시 세상을 껴안는다. "나는 저 - P228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그르니에가 사랑한 고양이 물루가 창틀에 턱을 괴고 속삭이듯이. - P229
「유마경」
"거사님, 이 병은 무엇으로 인하여 일어났습니까?" "일체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이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 나의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오래 전 내가 유마힐에게 매혹된 것은 문학서나 철학에쎄이들에 간혹 인용되던 이 문답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떤 ‘통증‘을동반한 매혹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인간의 존재론적 비극성을 환기하는 전언이기도 했다. 그때 내가 상상했던 유마힐은 일체의 생명 가진 것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동참하고 함께 아파하는, 섬세한 영혼의 시인이자 대속자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경을 읽게 되었을 때, 나는 또다른 빛깔의유마힐을 만났다. 스스로 최고 경지의 불법을 얻었으면서도 재가신도로 남아 중생이 앓는 병을 함께 앓으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 유마힐은 자기의 방에 수많은 방을 들인 광장의 구도자였다. 다른 경전들이 보이는 비교적 순연하고 온건한 말하기 방 - P230
식이 아니라 쾌도난마하는 논객이며 자유분방한 비판자로서의유마힐. 그는 어떤 보살의 권위에도 주눅들지 않고 심지어 붓다앞에서조차 논리정연한 설법과 영감에 가득 찬 게송을 노래할줄 안 자유로운 철인(哲人)이었다.108『불가사의해탈법문』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유쾌하고 판타스틱한 불경은 『천일야화』만큼 재미있고 『우파니샤드만큼 상서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동시에, 듣고 읽는 이로하여금 의외의 친밀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는 아마도 이 경전이대승불교의 사상 위에 성립된 것이라는 역사적 맥락과 연결될터이지만, 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이미 깨달은 자보다는 깨달음에 들고자 소망하는 이들에 대한 공경의 자세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P231
여러 종교의 많은 경전들이 인간의 상상력의 문학적 보고라고 할 수 있지만 「유마경」은 인간사의 다양한 곁가지들에 대한 독특한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이를테면 지혜의 상징인 문수사리와 유마힐이 벌이는 문답과 토론의 장에서 나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겅중겅중 시공을 건너뛰어 철학의 황금기를구가하던 옛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로 건너간다. 자유분방한비판과 토론의 문화 속에서 비옥하게 영글던 언어의 열매들과절대권위에 물음표를 던지는 열린 정신들이 그립고, "그대는 어찌하여 여자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가"라고 묻는 사리불에게 남녀를 차등지어 분별하는 그릇된 분별심을 깨닫게 하는 천녀의 - P231
설법이 또한 통쾌하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생사가 곧 열반 인, 번뇌를 품은 일체중생의 몸을 부처의 씨앗으로 귀히 여기는 지극하고 도저한 정신들이 그립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쓴, 설산의 고독과 광장의 싸움을 온몸으로 실천한 만해의 눈빛처럼. - P232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모란공원에 간다. 그곳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죽은, 아직도스물두살인 전태일이 있다. 그리고 문익환, 박영진, 박래전, 성완희, 문송면, 김귀정, 조영래..... ‘민주열사 묘역‘에 들어서는데 낯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밥이 되지 않고, 알콩달콩 생활의 잔재미를 북돋우지도 못하는 ‘기억을 더듬으며 저들과 나는 왜 이곳에 오는가. 5월과 11월이면 밀린 부채를 탕감하듯 나는 왜 서둘러 묘지를 찾는가. 묘지 부근에서 유독 살지게 자라는 나무들, 붉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움켜쥔 적단풍나무 줄기에 이마를 댄다. 어떤꿈을 덜고 어떤 꿈을 더하러 우리는 묘지로 오는가…… 고백하건대, 어떤 ‘책‘을 읽고 눈물 흘려본 기억이 있다면 내겐 이 책이 유일하다. 그것은 좋은 책이라든지 감동적인 책이라든지의 범주를 넘어선, 날것 그대로의 아픔과 분노가 촉발시킨 눈물이며 그때의 눈물은 카타르씨스의 둥근 포용성이 아니라 - P233
날카로운 예각으로 나의 내부를 찢으며 온다. 어린 스물에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그렇게 와서 내 바깥의 ‘나들‘ 을 깨닫게 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인간적인‘이라는 말이 빚는 빛과 그늘의 웅덩이를 들여다보게 하였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초등학교조차 졸업할 수 없었던 삶의 조건 속에서 전태일이 남긴 빼곡한 일기속에는 인간에 대한 절망과 분노와 탐구와 희망과 고통받는 어린 생명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다. 지극한 사랑을 품은 댓가로 그는 스물두살의 나이에 분신 산화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그리고 시작되었다. 그 이전엔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노동자의 대자적 인식이 인간의 조건을 각성한 ‘노동운동‘의 격류가. - P234
우리는 흔히 ‘평균적‘으로 살 만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배불러도 단 한명의 굶주린 이가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바로 이 땅에서, 가까이 북녘에서, 몸팔러 고향을 떠나온이국의 노동자들 속에, 제3세계에 가해지는 숱한 폭력과 착취속에, 이 막돼먹은 세계 속에 순연한 ‘긍정‘이 놓일 자리는 불행히도 없다. ‘자기부정‘과 ‘부정‘을 ‘부정‘하여 도달한 ‘긍정‘의좁은 문이 있을 뿐. 고치를 뚫고 나오는 나비처럼, 스스로를 태운재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전설의 새처럼.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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