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어떤 특별한 경험, 이를테면 비밀의 화원을 남몰래 들어서는 두려움과 호기심과 환희를 유발했으며 그렇게 나는 당신의 첫 자취와대면하게 된 셈이지요.
돌담을 끼고 돌다 대문을 들어서 안채를 지나 또다른 작은 문을 통과해 뒤꼍에 이르기까지, 열살배기 아이에게 그 집은 출구와 입구가 분간되지 않는 이상한 정원이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 나선형으로 한바퀴 돌았다 싶은 곳에 작은 정원을 지닌 사랑채가 마치 비밀의 정원 속에 든 가장 이윽한 비밀의 화원처럼돌연 눈앞에 나타났지요. 아, 설명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던아담한 사랑채 마당에 찬란히 흔들리고 있던 백일홍 꽃그늘! 단단하게 다져진 흙마당에는 군데군데 푸릇한 이끼가 돋아 오래된 청동거울의 표면처럼 비밀스러웠으며, 그 비밀 위에 차마 비밀로 덮어둘 수 없어 나무 한그루로 자라나고 만 어떤 아우성이 그토록 붉게, 그토록 처연하게, 푸른 하늘을 만지며 붉디붉은 꽃자국을 내고 있었습니다. - P24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평화롭고 완벽한 느낌의 낮잠. 많은 이들은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고통스럽던 기억의 편린으로부터 자기 생의 팔할을 이미 완성합니다. 그리고 그 극단의추억은 유소년기를 거치면서 흔히 가장 왕성한 에너지로 자신의 무의식에 각인되곤 하지요.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한인간의 가장 내밀한 지향, 혹은 내밀한 거부의 근원에는 이 추억의 힘이 있다고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그것은 로고스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며 언어로 표현할 방도가 없는 원체험의 세계이지요. 이를테면 내가 종종 바다를 그리워하여 병을 앓게 되는 것은 내 유년의 어느날 바로 그 순간의 기억이 나를 이루는 질료들을 건네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간질이며, 아주 오래된, 어쩌면 이미 사라진 부족의 방언을 중얼 - P25

거리며 내 존재의 근원을 찔러오는 그리움.....
저 고택 사랑마루에서의 낮잠과 백일홍과의 만남이라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은 기우뚱거리며 걸어온 서른 해의 내삶이 어디로 흘러가야 할(혹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 것인지를가능하게 하는 낮별의 세계이며, 난파되었다고 느끼는 모든 순간들에서 나를 지탱해온 근원의 닻이 되어주곤 합니다. 空(공)으로부터 출발하여 공을 향해 가는, 내게 짐지워진 삶이 궁극적으로 공한 것이라 할지라도 공을 완성해내기 위해 가득 차 있어야 하는 삶의 역설을 견인해낼 수 있는 근원의 힘. 세상에 태어나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최대의 축복이 어린날의 그 체험의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쯤이나 흘렀을까..... 나는 낮잠에서 문득 깨어났습니다. 흙마당이 풍기는 아득한 냄새와 담장 건너 솔숲으로부터 불어오는 솔바람 냄새, 미열처럼 떠도는 희미한 꽃내음... - P26

저 요요한 고택.
사백여년 전 당신이 일찍 죽을 운명을 지니고 세상을 향해 첫울음을 던진 저 집과 내가 첫인연을 맺은 지 이십여년이 지났습니다. 강릉 초당마을. 난설헌(蘭雪軒) 허초희(楚姬)의 생가. 솔숲 언저리에 맞춤하게 자리잡은 저 단정한 미음자 고택은 당시의 양반집들이 흔히 그러했을 등등한 기세가 없습니다. 솔숲이 허락하여 내어준 자리에 숲과 하늘을 공경하기 위해 지어진사당처럼, 아담한 미음자의 담장은 하늘을 향하여는 열려 있으나 인간에 대하여는 완고하게 닫혀 있는 듯도 보입니다.
그 열살 이후,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도대체 무엇인가 꼭 되어야겠다는 소년기의 열망도 내 것으로 품지 못하고 머리가 커가던 세월 동안 저 고택을 참 많이도 드나들었습니다. 내가 살던교동집에서 초당마을까지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도 꽤 걸어야했던 만만치 않은 거리였지만 저 고택은 내게 쉼터가 되어주고은밀한 기도처가 되어주곤 했지요.  - P27

그런 날들의 음화 속에는 흔히 부엌에서 혼자 우는 엄마가 있있으며, 결국은 다시 풀게 될 짐을 꾸리고 있는 엄마가 있었고,
항구에서 고기를 받아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를 타며 끝끝내 차장에게 내 버스값을 물지 않던 엄마가 있었고, 그 북새통 속에서 울고만 싶었던 내가 있었고, 친구들과 길을 가다 함지박을이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엄마를 외면한 나에 대한 자책이있었고, 남자아이를 낳으려다 뒤늦게 나를 낳아 친구들 엄마에비해 너무 나이가 든 늙은 엄마를 창피해하던 나의 속죄가 있었고, 얼굴도 모르는 큰오빠가 돌연히 죽지 않았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이상한 피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천신만고끝에 얻은 남동생에게 돌아가는 유별난 사랑에 대한 질투가 있었고, 피해의식이 있었고... - P28

한 여자가 있었느니, 제 이름을 가지지 못한 조선의 여자들속에서 이름과 자와 호까지 가진 여자가 있었느니, 타고난 재능때문에 오히려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있었느니, 이반의기질을 가진 가게 안에서는 평등한 지복을 누렸으나 당대의 제도와 관습 속에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있었느니,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한 백설과 난향을 사랑한 여자가 있었느니, 사랑을 소망하였으나 인간의 세상에서 사랑을 얻지 못한 여자가 있었느니, 어머니가 되지 못하였으나 어머니였던 한 여자가 있었느니...... - P29

당신을 알아가면서 나는 더러 아프고 연민하고 분노하고 또더러는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이 세월의 베틀속에서 직조해낸 옷감 한필을, 옷감 속에 촘촘히 스며 있는 어룽거리는 무늬들을 오래 바라봅니다. 그 무늬들 중 가장 아프고가장 아름다운 몇개를 눈짐작으로 골라내고 나는 속삭입니다. 걸어나와보라고. 떠올라와보라고. 시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부터 아름다움의 의지를 발견하려는 자이며 그리하여 고통스러운 자들이지만 그리하여 또한 유쾌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노래합니다. 무늬가 떠오릅니다. 나는 그 무늬의 결들중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하나를 눈을 감고 만집니다. - P29

구슬꽃은 하늘거리고 파랑새는 나는데
서왕모는 수레 타고 봉래섬으로 가네
흰 봉황 수레에 오색 깃발 휘날리고
붉은 난간에 기대어서 구슬풀을 뜯네
푸른 무지개 치마는 바람에 날리고
구슬 고리와 노리개는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데
흰 옷 입은 선녀들 쌍쌍이 거문고를 뜯고
구슬나무 위에는 봄구름이 향그러워라
동틀 무렵에야 부용각 잔치는 끝나고
푸른 바다의 청동은 흰 학을 탄다네
보랏빛 퉁소 노랫소리에 무지개가 날리면
이슬 젖은 은하수에는 새벽별이 떨어지네

-「신선세계를 바라보며(望仙謠)」 - P30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죽기 직전, 자신의 모든 시를 불태워버리라고 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남겨진 당신의 시편들에서 가장 흔히 만나게 되는 판타지의 세계. 당신은마치 선계의 일상을 살다 온- 사는 사람처럼 선계를 재현해놓고 있으며 그 선계의 일상은 너무 리얼하여 오히려 그 세계가환임을 증거하는 슬픈 역설을 내비치곤 합니다. 두루뭉술하 - P30

고 낯익은 현실의 어떤 풍경을 스윽, 긋고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서 촘촘한 세촉으로 그려내었을 때 그 낯익은 현실세계 속에숨어 있는 너무나 낯설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돌연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독히 비현실적이어서 지독한 현실감을 띠게 되는 원더랜드, 그 원더랜드는 그러나 인간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는 시간 - 새벽별이 떨어지고 동이 트고 나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흔히 당신의 선계 시편들을 일러 현실의 고통을 견인하기 위한 도피처요 위안처였다고들 합니다. 당신이 그려내는 선계는 유토피아요 이상향인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이상향이되, 나는 그 유토피아가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동경하게 된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꿈의 세계가 아니라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원형의 고향인 유토피아로부터 출발하여 하계로 유배온 자가 부르는 노래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 P31

그리하여 그것은무지개 저편을 꿈꾸는 노래라기보다 실향민의 노래, 유민의 노래라고 말이지요.
당신은 고향 - 유토피아의 기억을 간직한 자. 사회 경제 문화적인 차별의 차디찬 납골당 주인들인 인간계에 적응하기엔 당신의 기억의 뿌리가 너무 깊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기억의뿌리-모든 생명 가진 것들의 평등화엄의 세계를 이미 알고 있는 자가 부르는 노래. 당신의 선계에는 혼백과 숨과 교감이 살 - P31

아 있는 우주만물이 등장합니다. 나는 그 세계를 ‘어머니 땅‘ 인고향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 땅을 이루는 무수한 이름들, 꽃새 바람 무지개 구름 나무 바다 은하수 별∙∙∙∙∙∙ 타나토스를 끌어안은 지극한 에로스의 세계인 자연과 우주의 질료들은 엉기고간질이며 속삭이고 상승하며 하강하면서 환環)을 이루고 그것은 물질적 환(幻)의 세계를 이루어냅니다. 불사의 여선(仙)서왕모(母)가 기린 수레(車)를 타고 축제를 주관하러 봉래산으로 갑니다. 그녀의 수레를 끄는 기린은 생명 있는 것은밟지도 먹지도 않는다는 상서로운 동물이며 봉(鳳)은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한, 하늘과 땅과 물속의 만물을 한몸에 표상한, 그 모든 것이 합쳐 이루어진 새지요. 그 몸에는 타자화된 질료가 없습니다. 지극한대자연의 세계, 평등화엄의 세계는 당신의 고향이자 유토피아이며 실향의 탄식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부터이가 나는 ‘문득‘ ‘그저‘ 하게 되었습니다 - P32

인간의 최초의 시는 존재다.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이 ‘문득‘ 이루어진 교감의 세계는 존재의 ‘기억‘으로부터 연원하는 듯합니다. 여러 점의 기억을 간직한 존재들. 때로 어떤 결과 겹 사이의 벌어진 틈새로 아득한 그리움의 파동이 생겨나는 순간이 불현듯 닥칠 때가 있지요. 이미 알고 있음이 분명한데 기억할 수없는 어떤 세계에 대한 그리움, 그 틈새는 그 ‘어떤‘ 맛과 향기 - P32

와 촉감이 육체의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 자들이 망각한 육체의 문자를 찾아나서는 세계이며, 그리하여 아득한 그리움을 동반하는 세계인 듯합니다. 우리의 육체 속에 수백억 개의 세포들이 우주거품처럼 심연의 질서를 이루며 존재하고 있듯이, 또한 동일한 그 육체 속에 심연의 호흡을 삼키는 블랙홀들이 존재하고있듯이. 그리하여 생은, 영원한 신비지만, 그 신비는 ‘지금‘ 잊고 있는 것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발원된 형태라는 생각을 나는 또 ‘문득‘ 하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미 칠팔세에 「광한문옥루전상량문」을 지었다는 뭐 그러그러한 기이는 차치하고라도, 어린날 내게 저 고택에서의 완벽한 낮잠이 무어라 설명할수 없는 근원적인 그리움을 파생시키듯이, 당신에게 있었을 어떤 ‘체험‘이 당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그 세계가 당신의 선계일 것이라는.
- P33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불화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창조해내는 세계에는 가장 낮은 것 속에 든 가장 높은 봉우리와, 가장 거대해 보이는 것 속의 가장 작은 속삭임들과, 가장 미천해 보이는 것 속의 위대한 전언이 공존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세상이 추구해야 할 의롭고 아름다운것에 대한 갈망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열망하고 두리번거리고 귀기울입니다. 아파하고 연민하며 공경하고 분노합니다. 골방과 광장이 공존하며 사랑과 투쟁이 공존하는 시인의 거처에서 당신은 가난한 처녀의 탄식을 아파하며 모순된 사회제도를 비판합니다. - P37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온 하계의 질서란 계급과 계층 간의 끝없는 쟁투와 착취의 역사였으며, 다수 민중에대한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가 가장 폭압적인 형태이거나 세련된 방식으로 그 외연을 바꿔온 것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나는또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살았던 봉건적 왕조시대나 내가 살고있는 자본주의시대가 지배와 피지배 계급간의 여전한 쟁투의장이라는 것을. 더구나 이 척박한 현대의 자본주의는 내외적인식민지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이 별은 끊임없이 강자의 문법에 의해 구획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문법 속에서 선진제국에 의한 제3세계의 가혹한 착취가 소문 - P37

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국 내 빈익빈 부익부와 다수 민중에 대한 착취가 민주(民主)의 외피를 쓰고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것을. 계급의 불평등과 인종의 불평등, 그리고 성의 불평등은 하계를 지배하는 가장 심각한 불평등체계이며 이중, 삼중으로 타자화되어 있는 연옥의 미로라는 것을.
이 연옥의 미로를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사고체계인 것 같습니다. 한 가족 안에서의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가장(家長)이데올로기는 한 국가 안에서의 가장이데올로기로, 국가와 국가간의, 민족과 민족 간의 가장이데올로기로확대되며 종국에는 이 별에 대하여 가장의 폭압적 권위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이 지독한 가부장제의 유령들. 이들이 주관하는 카니발에서 자기의지와 무관하게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예외없이 약자이며 특히나 여성과 아동, 그중에서도 피억압계층의 여성과 아동들입니다. - P38

당신은 당시의 명문대가 ‘규수‘들이 흔히 그러했던 안락이 보장된 여자의 길을 걷지 않은 사람. 당신의 여러 시편에서 보여지는 봉건제도의 피지배계층에 대한 연민과 불합리한 신분제도와 제도적 특혜, 그 자신 여성으로서 받아야 했던 봉건적 남존여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한 분노와 비판은 억압과 지배를 거부하는 본래적 기억 - 지극히 여성적인 힘의 평등 화엄의 세계를 꿈꾸는, 참된 시인의 근원자리일 것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이 속삭이는 사랑과 관능의 노래를 들으러 갑니다. 선계와 하계의 틈새에서, 그 틈새의 원심력을 지탱해가며 흔들리는 푸른 잎사귀들, 붉고 흰 꽃으로 벙그러지는 환한 몸의 세계로. - P39


가을의 호수는 맑고도 넓어
푸른 물은 구슬처럼 빛나는데,
연꽃으로 둘린 깊숙한 곳에다
목란배를 매어두었네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봐
한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연밥을 따면서 - P39

정중동(靜中動)이라 하였습니까. 고여 있는 듯 보이는 맑은호수 속에서 물살은 끊임없이 몸을 뒤척입니다. 하늘이 흘러가고 구름이 흘러가는 호수 속으로 한 여자가 흘러듭니다. 목련으로 엮은 배를 호수 깊숙이 매어두고 그녀는 이윽히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정(靜)한 것입니까. 고요한 듯 보이나 뒤척이는 마음이 앉은 듯이 보이나 달려가는 마음이 기다림이겠지요. 건너편물가에 님이 보입니다. 연꽃향과 물내음이 어우러진 물가에서, 습윤한 향기를 온몸으로 들이마시며 님을 기다리던 그녀의 체액이 맑아집니다. 맑아져서 드디어 흐르는 체액, 흐르는 물살.
여자는 배를 저어 님에게 갑니다. 님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갑니다. 그리고 흐르는 사랑의 시간. 여자가 들이마신 연꽃의 향기는 꽃의 영혼 쪽입니까, 꽃의 몸 쪽입니까. 지극한 사랑을 향해 있을 때, 영혼은 몸과 함께 흐르며 몸 또한 영혼과 함께 흐릅니다. - P40

그것은 타자의 시선에 대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자기 몸의 축제에 즐거이 적극적으로 임한 이가 자신의 몸이행한 비밀스러운 즐거움 앞에서 은근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이며 자꾸만 미소가 떠오르는 부끄러움입니다. 나는 이러한 부끄러움을 아는 몸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관능에 좀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이것은 사랑 없이 단지 육체의쾌만을 위해 다른 몸과 만날 때에는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마음이 적극적으로 발현되지 않는 육체의 행위에서 우리가 흔히 헛헛함과 결핍을 느끼게 되듯이. 삶의 본능으로서의 관능의에너지는 이렇듯 육체의 만남이 끝난 뒤에도 한나절을 그 여운속에서 나와 님의 몸과 마음과 말을 어루만집니다. 서로에게 스며든 몸의 향기를 이윽히 눈감고 듣습니다. - P41

이 솔숲에서는 모든 계절이 사라지고 하오의 시간부터 저물녘을 지나 동트기 직전의 시간만 남습니다. 하루분의 자투리 태양빛을 머금고 숲이 온통 일렁이는 이 시간은, 생명 입은 것들이 그 생명의 미약한 박동만으로도 지극히 귀하여지는 시간. 이때의 빛은, 나무의 근육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수관과 체관의 은밀한 교합을 도우며 뿌리를 타고 아래로 스며듭니다. 상승하며 폭발하는 빛이 아니라 하강하며 어루만지는 그 빛의 길을따라 나는 당신의 유배지였던 하계를 지나 더 깊은 하계로 접어듭니다. 그곳에서 부용봉을 거닐고 있는 당신의 그림자를 만납니다. 나는 징후를 기다립니다. 어스름이 깊어지고 달이 자기의말을 하기 시작하고 소금내음을 품은 밤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어둠속에, 붉디붉은 자국을 내며 흔들리는 백일홍 꽃나무! 나는 그 아래 흩어진 나뭇가지들을 줍습니다. 흩어진 당신의 뼈를 줍습니다. - P42

태양빛이 강렬한 수직성을 갖는 빛인 데 비해 달빛은 구부리는 빛이지요.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빛이 종종 내 속의 공격성을일깨운다면 달빛은 그 빛이 가장 무르익었을 때에도 보듬어 소생시키는 부드러운 힘 쪽에 있습니다. 태양은 명징하게 빛나는형태를 고수하지만 달은 자라나고 소멸하는 만물의 생멸의 주기 속에 함께 있습니다. 자라나는 달, 죽는 달, 소생하는 달은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남루한 중얼거림을 받아안습니다. 그리하여 달님을 향해서라면 인지상정의 남루한 고통과 소망들을입밖에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지요. "그대 천상의 달 안에 나의한쪽 심장이 의지하여 쉬고 있도다/내 그러함을 깨달으니/내가 자식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우는 일이 없게 하여주오" (우쉬따끼 우파니샤드)라고, 내 님이 진창을 밟으실까 걱정하는 간절한마음으로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정읍사)라고.
산 것들의 남루를 끌어안으면서 달의 시간은 따스한 에로스의 시간이 됩니다. 상처로 아픈 것들이 달의 피를 마시고 안식과 생성에 듭니다. 나는 달의 꿀을, 달의 피를 받아 마시고 당신과 나의 몸의 시간으로 갑니다. - P51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세계는 율동이며모든 생명체는 끊임없는 몸 바꾸기의 과정에 놓인 댄서들인 셈입니다. 개체의 아트만 속에 우주적 호흡인 브라만이 숨쉬며 동시에 그 역이 성립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역동성. 세계가 비극이라면, 그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인간 스스로 부여한 오만한 의미들과 부질없는 욕망들 때문일 것입니다. 운명이 허락한다면, 나의 죽음의 순간이 지극한 고요와평화 속에서 오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가 창밖 저 겨울 나뭇가지를 환하게흔들고 지나가네요. 섬세한 운율을 짚으며, 공기의 결들을 타고, 마른 나뭇잎 한장 떠오릅니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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