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자기의 몸은 자기의 것이면서 모든 시간의 것이 됩니다. 석류나무는 올해도 저 좋은 곳에 둥근 열매를 매달았을 것입니다. 너무 쓸쓸해보였던 가지 끝이거나 여기쯤 매달면 담장 밑이 환해지겠다 싶은 곳이거나 자꾸만 그리워서 여러번 들여다본 어느 꽃자리쯤에, 둥글지만 닫혀 있지 않은, 자기의 방을 가졌으나 살풋하게방문을 열어놓은, 붉은 열매의 몸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세상에! 하나의 열매 속에 이렇게 여러 개의 방이 있네요. 그 각각의방 속에 또 빼곡히 들어찬 보석 같은 붉은 방들! 그것들은 나를따스한 핏물이 스며든 구체적인 인간의 육체로, 포기할 수 없는꿈으로 안내합니다. 모든 존재는 홀로이며 동시에 겹쳐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아프게 나를 바라보던당신에게 나는 쓰고 싶었던 것일까요. 겹침의 틈새,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당신인 시간에 대해,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내게 겹쳐져 있는 모든 틈새를 열어보는 일에 대해. - P162

이제 막 서른을 넘어섰을 뿐인 당신이, 옛날엔반짝이는나뭇잎만 봐도 막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었는데, 라고 말할 때, 그 옛날엔..... 이라는 말의 슬프고 아득한 질감. 꿈없는 시절을 배회하면서 한 생이 늙고 ‘꿈없음‘에 적응하기 위해 제 꿈의사지를 절단해가면서 우리는 한사람의 공인된 ‘사회인‘이 되어갑니다. 이 무모함, 이 유전되는 결핍의 궁극에서 맞닥뜨리게되는 야누스는 완전한 ‘일탈‘과 완전한 ‘적응‘의 두 얼굴을 쳐들고는 봤냐? 내 얼굴 봤냐? 냉소하며 빙글빙글 웃곤 하지요. 그럴 때면 문득문득 솟구치는 살의. 그러나 내 살의는 나조차도해치지 못하고 스러지곤 합니다. 생의 한 페이지에 견고한 갑골문자만 또 가득 새겨지지요. 갑골 속에서, ‘파각‘이라는말을 앙다물어 발음해보며 하루가 힘겹게 저물던 날들입니다.
아, 저것, 불현듯 만나진 종루 위의 만다라, 둥글고 커다란 법고 앞에서 한 비구니의 자줏빛 가사 자락이 펄럭이며 소리를 띄워올립니다. 그 소리의 주름을 따라 겹겹이 포개어진 꽃잎들이 열리며 만다라화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 P170

내가 아는 한 지상에서 가장아름다운 것은 물과 바람입니다. 보탠다면 너무 강렬하여 빠닥빠닥하지 않은 빛살, 일테면 새벽빛이나 저녁빛 같은 것. 그리고 나무들.
이른 새벽 피어오르는 산안개는 그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참으로 아름다운 경전입니다. 체(體)를 입었으나 체(體)가 없는, 가붓하게 제 몸을 띄워올려 바람의 길 위에 몸을 부린 저자디잔 물방울들 사이로 내가 아는 모든 이름들이 스며들고 흘러갑니다. 새벽빛 속에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이 순간, 몸을 띄워 천지사방 흩날릴 것도 같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멸의 이름으로 산안개는 피어오르고 까마득히 흩어져 자취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이처럼 지극하게 공양되는 예불을 찬찬히 지켜보며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말을 문득중얼거려보는 것입니다. ‘나‘는 본시 없고 ‘나‘가 없었던 적도 - P174

없으나.....
이 아름다운 예불의 마지막에 즈음하여 나는 참으로 순하여지고 이미 없는, 이미 흩어져 사라진 흔적을 향해 지극한 합장을 올렸습니다. 허공을 향해 드리는 합장. 아, 그러고 보니 이와비슷한 합장의 기억이 내게 두 번 더 있습니다.
한번은 저 운문산 꼭대기의 기도 도량인 사리암에서였지요. 어머니에서 누이에 이르기까지 이래저래 나는 불연이 깊은 사람이지만 내게 있어 불교의 매혹이란 그 종교적 입성 때문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지극하고 치열한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나는 고착된 형상을 입은 절대자를 믿지 못합니다. 붓다도 예수도참으로 아름다운 구도의 인간들이었으나 그들에게 절대의 신격과 권좌가 부여되는 순간 나는 매혹을 잃습니다. 번쩍이는 금물을 입은 불상이나 북적거리는 십자가의 상징은 이 땅을 지배하는 다른 상징들, 내가 참으로 혐오해 마지않는 부와 권력과 관습의 힘 속에 천박해져가는 여타의 사회적 상징체계들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 P175

최북단 마을의 자그마한 학교인 명파초등학교 운동장을 오래도록 서성거렸습니다. 수업시간인지 사위가 고즈넉합니다. 저아이들은 무엇을 꿈꾸고, 배우고, 질문하고 있을까요. 아득한북방으로부터 날아와 송지호의 갈대숲에 내려앉는 철새떼의 날갯짓 소리를 그저 말없이 듣습니다. 새들이 비상하는 순간의 날갯짓 소리는 우주를 유랑하는 집시별들의 무위를 닮아 있습니다. 아름답다.……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화진포 바닷가를 오래도록 서성입니다. 긴 세월 바다가 빚어놓은 눈부시게 희디흰모래사장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어라고 자꾸 속삭입니다. 가만히 귀기울이니 그것은 백두에서 시작되어 금강과 설악을 거쳐 남으로 흘러내려가는 백두대간의 능선과 나누는 밀어 같습니다. 그들의 밀어에 또 가만 귀기울이니 사람아, 사람아, 안타까워하는 탄식이 간간이 섞여 들립니다. 멀리 고갯마루에 내어건 내 마음이 울적해져 동해를 굽어보고 있구요. 강원도 땅에들 때면 언제나 그러했듯이, 인간인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기도가 간절해집니다. - P206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하이네 • 브레히트 · 네루다/김남주 옮김


책은 사람에 의해 잉태되고 자라고 죽음을 맞는다. 동시에 ‘어떤‘ 책은 사람을 잉태하고 젖을 물리고 자라게 한다. 여기 한권의 책이 있다. 작가도 사라지고, 수배지의 어둠과 싸우며 이시편들을 번역한 이 땅의 시인도 사라지고, 출판사도 사라진책 한 권의 책에 관계된 모든 것이 죽음 저편으로 사라진 뒤에도 오래도록 내 서가에 이 책은 꽂혀 있다. 오월이 오면, 나는이 책을 다시 뽑아든다. 활자의 룰을 따라 ‘읽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지기‘ 위해, 참혹한 어둠속에서 잉태된 낡은 겉장에 손을 얹고 이 책이 나를 때리던 상처의 기억을 향해 손을 내민다. 오늘을 묵상하기 위해, 꿈꾸기를 거세당하지 않고 미래로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 시들을 읽어주기 바랍니다" 라고 시인 김남주는 쓰고 있다. 책의 초판 발행일인 1988년 8월그는 9년째 감옥에서 싸우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들. 어떤 의미 - P209

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앞의 생과 싸우는 전사들이다. 꿈꾸기위해, 자유로워지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삶에 대한 사랑이유무형의 폭력과 맞닥뜨려질 때 지독한 분노와 증오와 싸움이촉발된다. 그리하여 시대와 나라는 다르더라도 부조리와 폭압의 현실 앞에 아름다운 전사들이 있었다.
하이네는 쓴다. "거인 안테우스는 그의 발이 어머니인 대지에닿아 있는 동안에는 막강한 힘을 쓸 수 있지만 헤라클레스가 그를 들어올리자마자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대지를 떠나지 않는 한 막강한 힘을 내지만 공상에빠져 푸른 하늘을 떠돌아다닌다면 그 순간 무력해지고 말 것이다." 브레히트는 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네루다는 쓴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아픔에 견줄 만한 우주도 없다" 라고 - P210

너무도 명백한 폭력의 시대가 이 땅을 시시로 훑고 갔다. 진실로 살아 있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이름 앞에 살해당했다. 시인 김남주도 그렇게 죽었다. 이제 우리는 그때를 단지 ‘그 시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냉소의 이름이든 회한이나 야합이나 대중추수의 이름이든, 인간정신의 점진적 ‘죽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 - P210

다. 살아남으라고, 살아서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 한다고. 그러나, 불행히도, 세계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저질러온 너무도 많은 죄 의미들이 들끓고, 죽을 때까지 싸워도무의미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 P211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나는 조르바를 사랑한다. 그는 육체의 즐거움을 정신의 즐거움으로 도약시킬 줄 아는 놀라운 마법을 지녔다. 이성과 교육으로부터 어떤 수혜도 받지 않은 이 늙은 노동자는 일상적인 남자, 여자, 꽃핀 나무, 냉수 한컵, 빵 한조각도 처음 보는 경이로운 수수께끼처럼 열정적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냄새맡는다. 조르바를 거치면 일상의 모든 것이 신성한 야만으로 돌아간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리(그리스의 현악기)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리는 짐승이요.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춤도 출 수있소.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오.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냐고? 단호하게.
조르바는 말한다. "자유라는 거지" - P212

뜨겁고, 치열하게 생에 밀착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자유. 생의 가장 밑자리까지 질주함으로써 생을 정복하는 조르바의 자유를 나는 사랑한다. 춤추고 싸우고 일하고 산투리를 연주하는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줄 아는 손을 가진 조르바는 야성의 영혼을 가진,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영혼의 자서전에서 카잔차키스는 고백한다.
"내 영혼에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을 대라면 호메로스와 부처와니체와 베르그쏭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생명에의, 불사(不死)를 향한 힘의 흐름과 파괴에의 죽음을 향한 힘의 흐름을한 몸 속에 넣고 너무도 유쾌하게 생을 가로지르는 조르바. 긍지에 찬 모습으로 백정의 춤과 전사의 춤을 추고 있는 조르바.
카잔차키스의 영혼은 ‘춤추며 싸우는‘ 조르바를 만나면서 근육질과 뜨거운 피가 가득 찬 심연을 얻었으며, 그 육체성의 뺄속에서 빛나는 마법이 시간이 무르익는다. - P213

자기 내부에 존재하면서도 자기를 초월해 있는 것을 구하기위해 평생을 싸웠던 작가 카잔차키스는 『돌의 정원에서 이렇게쓴다. "(...) 그리고 우리 식물과 동물과 인간은, 혼례의 행렬에들어 있는 우리는, 신비스러운 침실을 향해 전율하며 돌진하는것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혼례의 성스러운 상징을 가지고 간다." 영원한 청년이며 혼례의 신랑인 조르바가 못 박히고 일그러진 손으로 꽃 한송이를 만지듯 섬세하게 산투리의 줄을 고르 - P213

는 것을 나는 바라본다. 그리고 듣는다. 날마다 죽으라. 날마다태어나라. 중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고 자유를 위한 싸움이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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