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턴
어떤 서평가는 「다들 어디 있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내내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색하고, 불편한 웃음이었다." 다 읽고 나서는 독한 술을 두어잔 마셨어야 했다고 했고요. 작가님의 유머는 고통에 가깝습니다. 안 그런가요?
카버
그게 인생이에요. 아닌가요? 많은 경우에 유머는 양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머에 웃는 건, 웃지 않으면 닭살돋게 하려는 얘기는 아니지만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으니까 그런 거란 말이죠. 아무튼 제 이야기들에서 누군가 유머를 발 - P250
견했다니 반갑네요. 『대성당에 들어 있는 「신경써서 라는작품은 귀에 귀지가 꽉 찬 사내 이야기인데, 그 사내는 아주 암울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지난달에 처음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읽었는데, 다들 박장대소를 하더군요. 어떤 부분들이 그렇게 웃긴 모양이더라고요.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는 웃지 않았지만, 어떤 부분들은 정말웃겼어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 종류의 유머는 아니고, 다크 유머인 거죠. - P251
제 생각에는 「대성당』에 수록된 작품들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고 흥미로워요. 물론 저한테 그렇다는 말이지만요. 예를 들어 「열」이라는 작품에서는 아내가 떠나고 남편에게 아이들이 남겨져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어린아이가 죽고 난 뒤에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는 이야기예요. 제 인생이 바뀌었고 그래서 제가 좀 더 낙관적으로 변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할 것 같아요. 제 작품들에서 그 사실을 읽어낸 것이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제가 젊었을 때 저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긴 수많은 것으로 계속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다른 인생이던 시절에 일어난 일들로 돌아가 재료를 찾는 거죠. 지금 제가 사는 환경은 당시와 물론 많이 다르지만, 그 시절의 일들은 제게 아직도 크나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거든요 - P252
이야기라는 건 물론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고, 어디엔가에 뿌리를 두고 있죠. 그런 면에서 제가 쓰는 모든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다루는 소재들 중 어떤 것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거나 어디선가 얻어들은 것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증인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좋은 작가들 누구나가 그러듯이, 상상하고, 기억하고, 그것들을 뒤섞습니다. 전적으로 자전적인 걸 쓸 수는 없어요. 그렇게 했다가는 이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책이 나올 겁니다. 그게 아니라 여기서는 이런 걸 끄집어내고 저기서는 저런 걸 끄집어내어 눈사람을 만들 듯이 언덕 아래로 굴리는 겁니다. 굴러 내려가는 과정에서 다른 모든 것-우리가 들은 이야기, 눈으로 본 것, 직접 겪은 것이 달라붙게 되죠. 그렇게 이런 토막 저런 조각을 붙여서 어떤 일관성 있는 전체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 P253
제 생각에는 음악에서 작곡가의 고유성이 느껴져야 하는 것처럼, 글에서도 작가의 고유성이 느껴져야 합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몇 소절 들어보면 그게 누구 곡인지 알기 위해 계속 들어보지 않아도 된단 말이죠. 제가 쓴 소설에서 작가 이름을 보지 않은 채 몇 문장이나 한 문단만 읽고 나서도 그게제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심지어 그 이야기가 런던에 살면서 브뤼셀로 출퇴근을 하는 이야기 같은, 제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쓰지 않을 이야기라도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좀 이상한 거죠. 저는 기대치가 아주 낮은 상태에서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때와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카버 소설, 이것에 대해서는 아마 제가 제일 놀라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아주 기쁘고 행복해요. 예. - P254
제가 쓴 단편소설들이나 시들은 자전적인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제가 쓴 글들 모두가 현실 세계에 각자의 출발 지점을 두고 있어요. 이야기들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지 않아요. 어디엔가 구체적인 출발 지점이 있어요. 상상력과 현실성, 약간의자전적인 요소와 풍부한 상상이 결합돼서 나오는 거죠.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그걸 다루는 제 의도에 따라 특정한 방향으로 전환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틀이 잡히게 됩니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렇게 하고,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작가로부터 기대하는 건, 작가가 자신이 다루는 주제에대해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작가를 신뢰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싶어 하고, 이를테면 작가의 손에 자기를내맡기고 함께 떠나고 싶어 합니다. 제가 살았던 그런 삶을 살지 않았더라면, 아마 제가 쓴 그런특정한 이야기들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그 정도의재미와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이야기를 썼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네요.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 P259
그렇진 않았어요. 최소한 생각하시는 그런 모방은 아니었어요 프랭크 오코너가 기 드 모파상 흉내를 냈다거나 단편소설이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보려고 모파상을 연구했다거나, 심지어 베껴 쓰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요. 서머싯 몸도 자기 스타일을 개선하고 다른 작가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걸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장을 베껴 썼다고 하죠. 저는 그런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에게 중요했고, 여전히 그런 작가들이 여럿 있어요. 몇 사람만 꼽자면체호프, 헤밍웨이, 톨스토이, 플로베르 같은 이들이죠. 이작가들의 장편과 단편들을 읽었고, 이 작가들 흉내를 내려고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좀 더 조심스럽게 쓰긴 했죠. 더 잘쓰려고 했고요. 이 작가들은 제가 존경하는 종류의 사람들이었거든요. 하지만 특정한 작가를 다른 작가들 위에 놓거나 하진 않았어요. 체호프를 제외하면요. 제 생각에 체호프는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단편소설 작가들 중 최고예요. 이사크 바벨도 또 다른 뛰어난 작가죠. 바벨은 두세 페이지만 가지고도엄청나게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어요. - P264
제 생각에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작가는 누구나 자기에게 재능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아니면 자기가 해야 하는 걸 할 수가 없을 거거든요. 자신을 지탱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모든 작가는 자신을 믿어야만해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저 자신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지내다가, 존 가드너를 스승으로 만나면서 의문의 여지없이 삶이 바뀌었어요. 그 사람은 제게 엄청나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 P266
저는 무척 흥분했어요. 전에는 작가를 만나본 적이 한 번도없었거든요. 그때 제 나이가 열아홉인가 스물이었는데, 단 한번도 작가를 본 적이 없었어요. 가드너는 당시만 해도 출판된작품은 없었지만 작가였어요. 제가 그때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어요. 저에게는 큰 도움을줬어요. 저는 그때 제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그런 시점에 있었는데, 그런 저한테 이런저런 것들을 보여줬습니다. 그가 하는 말들은 곧장 제 핏줄로 흘러들었고, 제가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꿨어요. 그는 제가 무언가를 열 단어로 말할 수 있다면, 스무 단어 대신 열 단어로 말하는 게 맞다는 걸 이해하게 해줬어요. 제게정확하라, 그리고 간결하라고 가르쳤어요. 그런 것들 말고도많은 걸 가르쳐줬어요. 그에게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제생활은 여전히 제 몸 하나 움직이기도 어려운 처지였는데, 그때당장 써먹기 어려운 것들도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그때 배운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요. - P267
그랬죠. 그리고 같은 에세이에서 저는 에즈라 파운드가 "진술의 근본적인 정확성이야말로 글쓰기가 요구하는 단 하나의 윤리다"라고 한 말도 인용했습니다. 이건 어느 것 못지않게 훌륭한 시작점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하지만 "나는 윤리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걸 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운이좋을 경우, 작가에게서 흘러나오고, 그 작품에서도 흘러나오는 선율이 있게 됩니다. 확실한 건, 작품은 무엇보다 먼저 정서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그 뒤에 지적인 연결이 이어져야한다는 겁니다. 체호프의 단편을 읽고 감동을 받았을 때, 그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나서 감동을 받거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고감정적으로 동요된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무언가가 언어를, 심지어 1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다가오고 마음을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 P270
이상적으로는 이야기가 저를 선택하는 건데, 이미지가 오고 감성적인 틀이 그 뒤를 따릅니다. 저는 작가들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직접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관심 부족 탓일 수도 있고, 지식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정서적인 개입의 부족도 원인이 될 수있죠. 저는 젊은 정치가는 물론이고 늙은 정치가, 혹은 변호사, 혹은 대형 금융이나 패션 같은 것에 대해서는 쓸 능력이전혀 없어요. 이건 이야기가 되고 이건 안 된다를 판별해주는 필터가 항상 작동 중이죠. 아마도 자그마한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어요. 어떤 종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성장하기 시작하는 아이디어의 배아 같은 거요. 이상적인 건 이야기가 작가에게 오는거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그물을 던져놓고 무언가 쓸 거리를찾아다니는 건 좋지 않아요. - P279
어조는 객관화해서 말하기 아주 어려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어떤 작가의 어조란 단순히 이야기를 직조해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작가의 고유성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제 어조가 아닌건 말할 수 있습니다. 비아냥거리는 건 절대로 제 어조가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도 않고, 기발하거나 현란하지도 않습니다. 제 어조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진지하지만, 당연히, 어떤이야기들의 어떤 부분들은 유머러스하기도 합니다. 제 생각 - P296
에어조란 작가가 대충 조합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작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고, 진행 중인 작업에 그 관점을끌어들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어조는 그 작가가 쓰고 있는 거의 모든 문장에 스며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기술은 교육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면서 해야 할 것이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나배울 수 있습니다. 문장을 더 잘 쓰는 방법을 이해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작업에 접근하는 태도로서의 어조는그런 식으로 다뤄질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작가가 자신의 어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어조나 철학을 차용하려 든다면 그건 끔찍한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P2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