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2014. 04. 16.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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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월의 시를 준비하면서 나희덕시인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과 이영광시인의 [나무는 간다]를 펼쳤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매달 화장실에 시를 붙이는 일은 고르기부터 공력을 들여야 한다. 계절을 생각해야하고, 대중적으로 무난하게 읽혀야하고, 길어도 안 되고, 덧붙이는 말을 일순 떠올려야하고, 너무 흔하고 쉬운 시는 쉬이 식상해져서 내 스스로 마음에 안 들어서 빼게 되고 두고두고 읽어보아도 감칠 맛 나는 시를 택하게 된다. 준비하기 전에 '이번엔 이 시다'하고 생각한 바대로 쉽게 쓸 때도 있고 도무지 마땅한 시를 찾지 못해 빈약한 시집꽂이의  시의 집들이 몽땅 펄럭거리게 될 때도 있다. 삼월은 후자에 속했다. 시인과 시집을 택했는데 도무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두 시인의 시집을 모두 다시 읽었다.

  봄비 내리는 날, 가지 끝에 맺힌 물방울을 보면서 맨 처음 마음에 두었던  나희덕시인의 어떤 나무의 말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

제게 입김을 불어 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피우지는 마십시오.

​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지성사 2014)-중에서]

  그냥 읽을 땐 몰랐는데 적고 보니 완곡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무겁다는 느낌이 든다. 봄인데, 삼월인데.......​ 하여 패스되고. ​

뿌리로 부터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 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 부터 달아나는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 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잇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 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 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시인의 '뿌리에게'를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이 시의 여운이 남는다. 우리는 뿌리로 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 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나무의 가지 끝에서 뿌리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아, 매력적인데 내가 쓰기엔 너무 길다. 서체와 글자 크기까지 고려해서 A4 용지 안에 맞춰 넣어야 한다.

다시, 다시는​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 들어 살지 않는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려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에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힐 수 없는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질 수 없는, 쓰다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불투명한 유리벽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찰칵,

네 얼굴이 켜졌어

누가 기억의 스위치를 누른 것일까

그러나 이내 네 얼굴은 꺼지고

깨진 유리조각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지

네가 쓰다 만 페이지,

자동차 바퀴가 멈춘 곳에서 유리벽은 자라나

점점 불투명해지고 단단해졌어

새소리가 나를 일으키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도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는 방

거기 춥지 않아?...... 어둡지 않아?...... 무섭지 않아?

성에 낀 유리벽을 향해 하염없이 중얼거렸어

까마득한 곁에 누운 너를 향해

감긴 네 눈을 감겨주고

닫힌 네 입술을 어루만져주고

굳은 네 손과 발을 쓸어주고

식은 네 가슴에 흰 꽃을 놓아주고

그렇게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간신히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어

물을 틀었어

뜨거운 물이 몸 위로 흘러내리고

불투명한 ​유리벽이 천천히 녹아내렸어

네 얼굴처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속의 곳곳에서 상처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특히 이 두편의 시는 아직 남겨진 자의 슬픈 피눈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정도상작가의 '낙타'를 읽고 있는 것처럼 저릿저릿하고 묵직하다. 모든 것을 방기해버리고 싶은 순간에도 글의 동앗줄을 잡고 있는 이에게 글은 구원일까? 업일까? 당신들은 스스로에게 징그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독자의 눈에는 존경이 담기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픔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아픔의 강도는 누구랄 것 없이 고르게 느껴질 터인데 글로, 시로 풀기까지 스스로를 얼마나 담금질 했을까. 다시, 다시는 으로 반복되는 운율 속에. 거기 춥지 않아 등의 물음 속에 울음이 뜨거운 깊은 울음이 담겨 있다. 이제는 부재를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그 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나의 오독일까? 분명 세월호 이전 출간된 시집인데 나는 자꾸만 세월호 속 아이들에게 거기 춥지 않아?...... 어둡지 않아?...... 무섭지 않아? 묻고 싶어지는 것일까? 지금 여기는 어디일까 지옥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을까.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거리에서 돌아갈 수 없는 부모들의 마음이 짚어져 온다. 이 무책임한 정부의 꿍꿍이는 무엇일까? 이러고도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일까? 그들만의 나라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치루는 그들에게 우리가 국민인 때는 선거용뿐이겠지만.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겹의 마음을 읽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창비2001)]-중에서

​ 

  이번에 새롭게 읽힌 시다. 마음의 빚, 원주에서 복숭아 농장을 하시는 별밭농부님께 안부도 여쭙지 못하는 세월이 여러 해다. 그분을 떠올리면 또 다른 무거운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그렇게,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처연해지는 심사가 빚으로 남아있는데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가서 그저 가만히 앉아있다 오고 싶어진다.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고 싶다.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길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목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중에서

​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때문에 오래 가슴에 묻어둔 시편이다. 처음으로 나희덕의 시집으로 장만한 것이 [그곳이 멀지 않다] 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시집 속의 시들을 오래 끌어안고 다녔다. 언제고 한번은 써먹고 싶은 시의 목록에 속해있다.

연두에 울다

떨리는 손으로 풀죽은 김밥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동안에도

기차는 여름들판을 내 눈에 밀어넣었다​.

연둣빛 벼들이 눈동자를 찔렀다​.

들판은 왜 저리도 푸른가

아니다. 푸르다는 말은 적당치 않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연두는 내게 좀 다른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기엔 아직 고개 숙이지 않은

출렁거림, 또는 수런거림 같은 게 ​남아 있다.

저 순연한 벼포기들.

그런데 내 안은 왜 이리 어두운가.

나를 빛바래게 하려고 쏟아지는 저 햇빛도

결국 어두워지면 빛바랠 거라고 중얼거리며

김밥을 네 개째 삼키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마치

감정이 몸에 돌기 위한 최소 조건이라도 되는 듯.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그래. 저 빛에 나도 두고 온 게 있지.

기차는 여름 들판 사이로 오후를 달린다.

               시집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중에서

 

 연두, 몇 해 전부터 자꾸만 연두가 눈에 밟힌다. 여린 새순에서도 나무들의 가지 끝에서도, 징글징글 올라오는 풀에서조차  연두를 발견하고는 뭉클해진다. 아마도 저 표현​ 눈에 즙처럼 괴는 연두.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이영광

주먹 쥔 손을 ​내밀고 나무는

자욱이, 서 있다​

힘없이 멈춰 있다

싸우지 않는 싸움꾼처럼 ​

잔매가 쌓이듯 마른 몸에 내리는 눈발을

삭풍이 달궈놓은 팔뚝으로 받는다

싸움꾼은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우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저렇게 싸워야 한다 ​

내릴 수 없는 백기를 들고​

나무는 빈 들판에 서 있다

대지를 섬광처럼 한바퀴​ 돌고와서 고요하다

뿌리째 떠돌아도 제자리에서

터질 듯, 가만히 숨 쉰다

나무의 적은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세력

빈 들은 이글거리는 뿌리들을 비끄러맨다

바람은 잡념의 가지들을 ​조각조각 부러뜨린다

나무의 정권들이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오직 나무로 지워진다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삭풍과 눈보라와 흙먼지의 백만 대군을,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무한의 지평선을

한그루 장창으로 막아선다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2014)]-중에서​

​ 

  '딱 이시다'하고 시작한 삼월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덧붙일 말이 써지지 않는 거다. 며칠 시만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그러다가 놓았지만 아쉬움은 여전하다 나무는, 오직 나무로 지워진다/ 한점​ 배후도 없이 나무는/ 삭풍과 눈보라와 흙먼지의 백만 대군을,/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무한의 지평선을/ 한그루 장창으로 막아선다 나무에게서 배운다 외에는 여전히 덧붙일 말이 궁하다. 산수유 광고처럼 참 좋은데, 참 좋은데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슬픔이 하는일

슬픔은 도적처럼 다녀간다

잡을 수가 없다

몸이 끓인 불,

울음이 몸을 꽉 눌러 터뜨리려 하면

어디론가 빠져 달아나버린다

뒤늦은 몸이 한참을 젖다 시든다

슬픔은 눈에 비친 것보다는 늘

더 가까이 있지만,

깨질 듯 오래 웃고 난 다음이나

까맣게 저를 잊은 어느 황혼,

방심한 고요의 끝물에도

눈가에 슬쩍 눈물을 묻혀두고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슬픔이 와서 하는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 

천국

 

봄꽃 그늘 지날 때

먼 것들, 모두 지척에서 숨 쉬고

숨 거둔 것들은 돌아와 심장에.

나는, 나는 저 흰 꽃의 깨끗한 흰 빛이

참 마음에 드네

신은 아무래도 이곳을

천국으로 지은 것 같으다.

사람이 낳는 괴로움이 아니라면

고통은 받아들일 수 있네.

사람이 짓는 괴로움도 칼 받듯 하얗게

봄날엔 받을 수 있네.

우주는 다 하늘이고

지구는 하늘의 작은 별나.

꽃 피듯 생이 제 혼몽을 젖히고

죽은 것들 꽃 향기에 받아 적시는  ​

반갑고 서러운 해후가 있어,

그늘이 희게 살찌는 날​.

아무래도 신은 이곳을 ​

천국으로 지은 것만 같으다.

아이 손에 부서지는 장난감처럼

천국은 오래 천국을 망치는 손안에 있었지만

하얀 그늘 하얗게 지고 나면

이곳은 또 천국의 지옥일 테지만.

​ 

  [나무는 간다]를 새로 읽으면서 시인께서 병중이 아닐까 하는 기미를 여러 군데서 발견했다. 프로필의 사진으로는 머리도 부스스 소도둑처럼 우락부락한 이미지가 강한데 어찌 저리 여리고 섬세한 시어를 구사하는 것일까. 이래서 세상의 시름에 아픈 건 아닐까 싶었다. [천국]을 찜했는데 [두부]를 발견하는 바람에 밀리고 말았다. 슬픔이 와서 하는일이란 겨우/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내는 일​/ 이라든가 그늘이 희게 살찌는 날​./ 이런 표현에 압도당한다.

저 나무

저 나뭇잎들 만원권 ​지폐거나

로또였으면, 하는 마음들이

석 달 열흘 지나갔는데

절대로 집구석엔 들어가지 않겠다,

허망과 오기로 떠들며 견디던

국밥집의 사내들도 취해 돌아갔는데

소주 이빠이 들어간 빈속처럼

뒤틀린 언덕길

그늘을 다 나눠준 누드

저 나무, 불 끄듯 언 손을 더듬어

마지막 한 잎을 떨군다

어둠이 한번​ 받았다가 내려주는

추운 땅

변두리에서의 오랜 공덕,

아무도 지갑에 넣어가지 않는

복권을 다 파셨다

한 점의 후회도 없으시다

​                     시집[아픈 천국(창비 2010)]-중에서

나팔꽃

  가시 난 대추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간 나팔꽃 줄기, 그대를 망설이면서도

징하게 ​닿고 싶던 그날의 몸살 같아 끝까지 올라 갈 수 없어 그만 자기의

끝에서 망울지는 꽃봉오리, 사랑이란 가시나무 한그루를 ​알몸으로 품는 일

아니겠느냐 입을 활짝 벌린 침묵 아니겠느냐​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2003)]- 중에서

​문

가지 말아야 했던 곳

범접해선 안되었던 숱한 내부들

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

더렵혀진 발길이 함부로 밟고 들어가

지나보면 다 바깥이었다

날 허락하지 않는 어떤 내부가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한번도 받아들여진 적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그대의 텅 빈 바깥에 있다

가을 바람 은행잎의 비 맞으며 

더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닿아서야

그곳에 단정히 여민 문이 있었음을 안다

단풍​ 

산들도 제 고통을 치장한다​

저 단풍 빛으로 내게 왔던 것

저 단풍 ​빛으로 날 살려냈던 것

열려버린 마음을 얼마나

들키고 싶었던가

사랑의 벗은 몸에 둘러주고 싶었던가

불난 집처럼 불난 집처럼 끓어

마침내 잿더미로 멸한다 해도​

​  이 네 편의 시를 새롭게 찜해둔다. 계절에 맞게 언제 써먹어야지 하는 것이다. 삼월은 시편을 준비 하는데는 힘들었지만 시인별로 몇 권의 시집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게 읽히는 시를 여럿 만나는 행운을 안겨주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좋은 것이 꼭 다 좋은 것은 아니고, 나쁜 것이 꼭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평범한 교훈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경우에 속한다. 시를 읽지 않고 산다면 얼마나 황폐할 것인가. 아찔하다. 내가 이런 자잘한 노력을 하는 것은 누군가도 나처럼 시에서 잠시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것이고 이렇게 준비하는 시간동안 나름 시의 이마를 만지면서 사유가 깊어지는 나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다.

  사월에는 쪼들린 시간 때문이었지 비교적 쉽게 시를 고른 달이기도 하다.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가게 앞 목련은 기대했던 대로 장하다.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리 멋진 것도 보지 않고 느끼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목련을 보면서 새로이 한다. 목련이 이렇듯 시리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목련을 가진 마당을 부러워하기만 하고 살아온 것이다.

  봄바람, 봄 햇살, 봄꽃 조화롭게 아름다운 사월이다. 거기에 잠시 의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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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30
김수열 지음 / 실천문학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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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시

                김수열

바람붓으로

노랫말을 지으면

나무는 새순 틔워

한 소절 한 소절 받아 적는다 ​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이른 아침

새가 노래한다는 건

잠에서 깬 나무가

별의 시를 쓴다는 것

지상의 모든 나무는

해마다 한 편의 시를 쓴다

​                   시집 [빙의(실천문학사2015)] 중에서

김수열시인의 신작 시집에서 고른 시입니다.

시인에게 새 시집은 이렇듯 나무의 시를 받아 적는 걸까요? 갑자기 그런 의문이 생기네요.

옮겨 적고 싶은 시가 너무 많아서요. ㅎ~

연두, 물이 올라오는 나무를 보는 일은 요즈음,

사월의 봄에만 누릴 수 있는 새롭고도 경이로운 발견이요,

즐거움인데 우리는 사는데 바쁘다고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계절은 지나갑니다.

세월호의 4월도……. 그렇지요.

벌써 1년이네요.

일 년……. ㅠ.ㅠ

이래서 시를 읽어야하는 것 아닐까요?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는 시를.

읽어주세요.

“ 바람 끝이 바뀔 때마다// 행을 가르고// 계절이 꺾일 때마다// 연을 가른다 ”

당신의 나무는 어떤지요? 어떤 시어로 읊나요?

들려주세요.

세상의 낮은 목소리, 수줍은 당신만의 詩를.

들어주세요.

이 봄의 찬가, 지구의 아름다운 사월의 詩를.

 

 

            

 

 

파문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비는

잊지 않고

웬만한 것들을 손수 가지고 오신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사는 게 이런 거라고 ​

지상의 못난 것들에게

비는

한 번도

모난 걸 보여준 적이 없으시다

 

            

 

 

 

흔적

푸드덕

산비둘기​

물 마시다 날아간 자리

팔랑

팔랑​

팔랑

깃털 하나 날고 있다

날아간 듯

안 날아간 듯

있는 듯

없는 듯​


 

빙의를 읽는데

자꾸​

​세상을 받들 듯 굳건히 서서 제 자리를 지키는 큰 나무 같은 지도자가 그리워지는 걸까?

어쩐지

.

.

.​

나의 대통령,

우리들의 대통령,

당신이 그리운 봄 밤이다.

그쪽 세상에서 물 속에서 죽어간 어린 영혼들의 ​ 친구가 되어주시겠지.

아직

부모에게 오지 못한 ​

그들을 도와주시겠지.

꽃 몸살을 앓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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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잘 못 찍는데 언니를 위해 찍어 보낸다는 커밍아웃과 함께 그녀의 사진이 카톡으로 날라져왔다. 홀로 통도사 홍매화를 보러갔는데 홍매화는 스르르 지고 없고 청매화 몽우리들만 꽃 필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런데 덧칠 안 된 세월의 날 것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극락보전을 다 담을 수 없노라고.

 

 

 

 

 

  그때 난 윌리 로니스의 사진집 [그날들]을 보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서사가 있었다. 한 세기를 고스란히 살아온 작가의 시선은 항상 사람을 향해있었고 낮은 곳, 어둠 속의 빛에 주목했다. 그 속을 헤매며 현실과 사진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중에 날라져온 그녀의 사진은 뭉클했다. 사진집에서 내가 보고 읽은 것도 진실이었고, 그녀의 사진에서 담겨온 것도 진실이었던 것이다.

  봄을 찾아 홀로 떠난 그녀의 심경들이 짐작되어 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아는 척 했다 해도 그녀의 깊고 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을 어찌 다 알겠는가. 그녀의 서성일 걸음과, 아마추어인 사진과, 이십세기 휴머니티의 거장의 사진들이 겹쳐 여운이 강렬했다.

 

 

 

 

 

 

 

  보통, 나는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기다린다. 어떤 사진이든 그냥 그 상황의 인상에 따른다. 내 순간성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위치만 찾으려고 애쓸 뿐이다. 실재가 더 생생한 진실 속에 드러나도록. 그것은 싯점의 쾌락이다. 때론 고통이기도 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일을 바라는것이기 때문에. p30

 

  나는 자주 높은 곳에서 사진을 찍곤하는데, 그러면 같은 순간에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구도도 나눠진다. 이미지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각자 서로 감춰지지않고, 서로를 보완한다. 서로를 더 잘 분리시킬 수도 있다.

  나는 음악을 정말 좋아해서 한때 작곡가가 되려고 했었는데, 악보를 읽을 때처럼 오선지 위에 함게 겹쳐진서로 다른 멜로디 라인같은 것이 떠오른다. 그 오선 사이에서 항상 새로운 어떤 것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것이 일어난다. 조각을 구성하는 전체의 조화 같은 것이다. 이미지에 그 모든의미를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p128

 

  내가 포착하는 것은 대개 불안정한 순간들이지만, 그 내부에서 덧없을지라도 또 다른 균형점을 찾으려고 한다. 그 찰나성을 잡을 수 만있다면, 그건 정말 커다란 보상이다. P160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주 앉아서도 대화보다는 스마트폰을 들고 먼 곳의 가공된 이미지들과 가상의 세계를 떠도는 일에 피차 익숙하다. 멋진 야생화를 잘 찍기 위해서 꽃을 꺾어다 계곡의 얼음 옆에 연출하는 일을 당연시하고, 소나무 숲의 멋진 사진을 얻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500년 된 소나무쯤 쉽게 베어 버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모두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요가 없다면 공급이 그런 식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배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구도가 좋다고, 풍경이 좋다고, 찬사와 흠모를 남발한 우리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양 극점에 있는 두 사람은 한참 다르고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로 내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행복해지는 공통점을 가진 사진을. 윌리 로니스, 문정씨! 고마워요.

 

 도서 정가제전 쓸어 담은 책 중 한 권이다. 모든 사진들이 보고 있으면 힘이 불끈 난다.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동작과 배경이 어우러진 연출이 그러할 터이지만 내 시선을 뺏는 건 남, 여 불문하고 모든 무용수들의 근육이다. 특히 종아리 근육. 무수한 도약과, 반복연습과, 인내의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흔적을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사건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이것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역경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상을 얻게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을 때에도 미지의 것을 두려워 하고는 한다. p112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맞닥뜨리는 모든 힘겨운 순간들을 가볍게 넘기도록 해주기를 소망한다. 또한, 잠시 동안의 울음이 우리의 고통을 영원히 해소해 주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소망일 뿐이다. 그렇다할지라도 크고 작은 슬픔 (고작 한 시간이 흐른 뒤에 웃어 젖힐 수 있는 상황이 있는가 하면 결코 완전히 해소할 수 없는 슬픔도 있는 법이다.)을 존중하는 것은 우리를 찾아오는 강렬한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기억하도록 해 준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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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3-15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주 앉아서도 대화보다는 스마트폰을 들고 먼 곳의 가공된 이미지들과 가상의 세계를 떠도는 일에 피차 익숙하다. 멋진 야생화를 잘 찍기 위해서 꽃을 꺾어다 계곡의 얼음 옆에 연출하는 일을 당연시하고, 소나무 숲의 멋진 사진을 얻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500년 된 소나무쯤 쉽게 베어 버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데....... 어쩌면 우리는 모두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요가 없다면 공급이 그런 식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배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구도가 좋다고, 풍경이 좋다고, 찬사와 흠모를 남발한 우리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꼭 기억하고 싶어요..
누군가가 사진으로 보내는 순간을, 나누는 이 봄에, 산님 !

봄이 오네요.. 홍매화가 .. ^^

2015-03-16 11:59   좋아요 0 | URL
오늘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는 순간, 오늘은 또 어떤 하루일까 생각하면서 덧글을 씁니다.
표현이 인색한 제 방에 매번 흔적을 남기고 격려를 주는 숲길님 계셔서 멋진 하루를 예감합니다.
봄, 보옴이 오고있네요.
문 밖에...^^
 
나무는 간다 창비시선 36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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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이영광

 

두부는 희고 무르고

모가 나있다

두부가 되기 위해서도

칼날을 배로 가르고 나와야 한다

 

아무것도 깰 줄 모르는​

두부로 살기 위해서도

열두 모서리,

여덟 뿔이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사납게 모 나는 두부도 있고

이기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모 나는 두부도 있다

 

두부같이 무른 나도

두부처럼 날카롭게 각 잡고

턱밑까지 넥타이를 졸라매고

어제 그놈을 ​또 만나러 간다

              시집 [나무는 간다 (창비 2013)​]-중에서

 

 

 

시인께서 두부집을 차린 우리를 위해 쓴 시는 아니지만^^

저희에게 맞춤한 "두부"를 시집을 뒤적이다 발견했네요.

'콩콩두부家'​아니었다면 무심코 읽고 말았을 테지요.

관심을 갖지 않으면 쉽게 지나치는 것들이 처처에 있지요​.

'두부'를 좋아해서 '두부'를 만들게 되었지만 이토록 무르고 까칠하고 예민한 녀석일 줄은 몰랐습니다.

매번 새롭고 경이로워서 만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해줍니다.

두부는 "이기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모 나는"

신산한 세상살이의 다른 이름이고,

"날카롭게 각 잡​"은 두부처럼 살기 위해서

"열두 모서리 여덟 뿔"을 가지고

"어제 그놈을 ​또 만나러"

가는 삶의 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월, 봄입니다.

순두부처럼 담백하고 깊은 봄,

환한 봄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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