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파리 지도는 새롭게 계속 그려졌다. 아침마다 유명한 파리가 그냥 우리 동네로 편입되었다. 부자 동네 생제르맹이 우리 동네가 되고, 뤽상부르 공원이 우리 동네 큰 정원이되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과거로 데려가는 자동차가 달린 길을 걸었다가, 오웬 윌슨처럼 그 성당 계단에 앉아 조용한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새벽, 내발이 닿는 곳 모두를 우리 동네라 불렀고, 기꺼이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동네는 점점 더 커져갔다. 길은 반듯하지 않아 늘 나를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았으니까. 그리고 나의 정처 없는 새벽 산책을 끝내는 건 언제나 바게트였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는 빵집을 발견하면, 혹시라도 그곳에 ‘ler prixmeilleure baguette (바게트 대회 1등 수상)‘라고 적혀 있으면,
나는 주저 없이 산책을 끝내고 지갑을 열었다. - P33

트라디를 뜯어 먹으며 하는 일은 늘 같았다. 오늘의 운명 찾기. 식탁 앞에 앉아 수년간 구글맵에 표시해놓은 별들을 헤매며 오늘 내 기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운명의 장소를 찾는 것이다. 매일의 산책 길을 선택하는 이야기나, 끌리는 빵집이 나오는 순간 산책을 멈춘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치를 챘을지도모르겠다. 그렇다. 어차피 파리 자체를 운명이라 여기며 온 이상,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운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마음이 이끄는 그곳이 바로 오늘 나의 운명, 평소 그토록 계획짜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파리에서는 아무 계획이 없다. 모두에게 말했다. "정말 아무 계획 없어." 물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말했다. "계획을 안 짜는 걸 계획했겠지." 엄마, 그렇게 나를 단숨에 간파하지 말라고. - P35

나는 책마다 퐁피두 센터에 대한 사랑을 숨겨두었다.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는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아침 바게트가 일상이 되고, 노천카페가 일상이 되고, 밤새워 쓰는글이, 퐁피두 센터가 (중략)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라고 썼고,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이 땅을 떠나 그 땅에 도착해야만 하는가. (중략) 너무 보고 싶어 세 번이나 들러서보고 또 봤던 미술관 한 귀퉁이의 조각상만 다시 보고 싶었다"
라고 썼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에선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도 이마엔 자신만의 별이 박혀 있단다. (중략) 나의 별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 있었는데, 너의 별은 밤의 베네치아에 있었구나"라고 썼다. 심지어 이 책의 시작 부분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스무 살, 파리에게 첫눈에 반했다. - P37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또렷하게 말하긴 조금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나를 좋아했다. 처음 보는 그림에 그토록 마음을 내주고, 처음 알게 된 화가의전시실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나를 좋아했다. 위로할 길 없는슬픔을 가진 조각상이 마음 쓰여서 퐁피두 센터 앞을 지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번 다시 들어가는 나를, 찬찬한눈길로 그 조각상의 구석구석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나를 좋아했다. 모네의 그림도 좋아하고, 반 고흐의 그림에도 열광했지만 그 감정과 이 감정은 달랐다. 20대의 나는 유독 특정 슬픔에예민하게 반응했다. 토해내는 슬픔이 아니라 속으로 삼키고또 삼켜 내장이 너덜너덜해져 버린 슬픔을 잘 알아봤다. 그런슬픔이 퐁피두 센터에 있어 나는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다.
스무 살 때만 매일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다음 파리에 왔을 때도 아침이면 늘 퐁피두 센터에 들렀다가 어디론가 다시 떠나곤 했다. 겉에서 보기만 해도 좋았고, 좋아하는 장소에 그렇게 쉽게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고, 하루가 좋아하는마음에서 시작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 이번 여행을 퐁피두센터에서 시작하는 것은 예정된 나의 운명이었다. - P38

밤 9시, 미술관이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나는 간신히 퐁피두 센터를 빠져나왔다. 저 멀리 에펠탑 옆으로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러니 계속 올 수밖에 없지, 라고 중얼거리며. 이러니 오래도록 그림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도 몰랐던, 내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작품들이 다 챙겨서 오롯이 내게 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구글맵을 켜서 집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퐁피두 센터에서 집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이 사실이 어찌나 어이가없는지, 퐁피두 센터 앞에 서서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눈에는 어쩐지 눈물이 고였다. 이곳에 오고 싶어 그 오랜 시간을 헤맸는데, 이제는 버스 한 번이면올 수 있다. 버스 한 번이면 내 몫의 용기를 챙길 수 있다. 언제든. 그야말로 언제든,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내가 도착한 곳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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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망매
ㅡ흰 꽃들의 노래


너는
거기 앉아
죄 없이 눈부시구나

봄 나무 불길 속에 앉아
헤헤 웃고 있구나

손 흔들며 뛰어갈 때
귓불을 흔들던 작은 귀걸이
때죽나무 조롱조롱 흰 종을 달고

무얼 하고 놀고 있느냐

산천 가득 다시 돋는
하얀 꽃망울
종아리 아래 빛나던
열여덟 네
뒤꿈치처럼

햇빛 재잘거리는 물속
젖은 얼굴에 흰 수국
못다 한 말 자줏빛 꽃술로 품고
산목련 숭어리마다 맺힌 응어리

설운 땅 닿지 말고 딛고 가라고
절뚝절뚝 철쭉이 피네 오르네
더 놀고 가렴
다물지 못한 입에 이팝꽃 피네
천석 만석
저녁을 짓네

이 멀고 억울한 향기
나는 알지
네 몸 냄새
캄캄한 향기

무덤가에 휘이 호랑지빠귀
네 휘파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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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일상을 여행하며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며 다시 기억을 여행하는 사람.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래 일했다.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띵 시리즈: 치즈》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하루의 취향》 등을 썼으며 현재 ‘오독오독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이 책은 ‘직장인의 틀‘에서 벗어나 내가 빚는 대로 모양이 바뀌는 삶을 시작하기 위해 로망의 종착지인 파리에서 보낸 두 달간의 이야기다. 새롭게 다가온 ‘무정형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해답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은 어느새잃어버린 꿈, 낭만, 취향, 행복 등 나만의 ‘좋음‘들이 번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의 이유를 묻는 건 어리석다. 아무리 촘촘히 대답해도 말과 말이 만드는 성근 망 사이로 사랑은 빠져나갈 수밖에 없으니.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말과 말 사이를 헤매며 파리에 대한 나의 사랑을 설명해보려 애했지만, 그 어떤 말에도 이 사랑은 담기지 않았다. 어디부터 말하면 좋을까. 무엇을 말해야 내 사랑이 남들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사랑에 빠진 연인의 마음이다. 이 사랑이 얼마나 운명적인지, 다시 없을 감정인지 설명하고 싶은 거다. 나만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사랑스러움은 하아... 그걸 어떻게 말로 해. 그러니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시점에도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다. 파리와의 사랑을 하아...... 그걸 어떻게 말로 해.
나는 이 사랑에 대한 설명을 포기한다. 다만 이 사랑의 역사를 말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 P10

어떤 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휴가가 아니라 여행. 여행이 아니라 삶. 한 시기의 삶. 기어이 내가마련한 삶. 20년간의 회사 생활을 저축해 얻어낸 이자 같은 삶.
거기에 합당한 삶의 모양을 취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순간을 잘게 잘게 쪼개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야금야금 뜯어 먹을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완벽한여행이 아니라 나를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파리 살기가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로망 살기의 모양을 만들어야 한다.
나의 결단은 곧바로 다른 친구도 울려버렸다. 오랫동안 같이 일하며 오랫동안 같이 퇴사 후 삶을 이야기한 친구였다. 그친구도 나의 계획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눈이 부풀어 오르더니 울면서 또 웃었다. - P16

봄의 파리는 처음이었다. 내가 알던 회색빛 파리는 그곳에없었다. 공항 지하철에서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쁘렝평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땅 울렸다. 주저함이 없는 햇빛이었다. 그 햇빛 아래에서 사람들도 주저함이 없었다. 오늘 이 도시의 본업은 쁘렝땅이었으며, 이 햇빛을 받는 것만이 모두의 의무였다. 공원 잔디밭에 사람들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색색의천을 바닥에 깔고서. 웃통을 훌러덩 벗고서. 몸의 마지막 긴장한 톨까지 다 풀어버리고서, 햇빛이 드는 노천카페에는 빈자리라곤 없었다. 테이블 위에선 와인 잔들이 쨍그랑쨍그랑 봄빛을 튕겨냈고, 분수의 물줄기도 봄빛으로 샤워하며 차르르차르르 시끄러웠다. 봄볕에 말린 이불 같은 공기가 바스락바스락 세상을 채우고 있었고, 높다란 마로니에 나무엔 분홍 꽃, 하얀 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오늘, 이 봄을따 먹지 않는 자, 유죄였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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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많은 소설을 창작하고 난 뒤, 나는 생각과 문장 사이의 시간차를 줄이는 일이 어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깨달았다. 도중에 그만둔 소설들 대개 작가 생활 초기에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과 끝까지 써서 출판한 소설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애초의 구상에서 대대적인 수정이가해졌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내 경우 출판까지 이른 소설들은대개 애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플롯으로 완성됐다. 단어와 표현 들은 당연히 모두 바뀌었다. 이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우기 키였다. 지우기 키를 더 많이 이용할때, 즉 쓰고 지우기를 더 많이 반복할 때 어떤 소설이 완성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이 사실을 체감하면서 왜 육필로 쓸 때보다 키보드를 이용할 때 소설을 완성시킬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지에 대한 이유도 깨닫게 됐다. 키보드를 이용해 컴퓨터에 입력하면 쓰고 지우기를 더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242

자신이 쓴 문장들을 지우는 일은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행위다. 조르조 아감벤은 「창조행위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예술에 품격을 부여하는 저항"이라는 말로 작가의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정의했다. 나는 문장들을 지우는 일이야말로 이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제목은 1987년 질 들뢰즈가 파리에서 가진 강연회의 제목과 같다. 따라서 모든 창조행위를 무언가에 대한 저항행위로 규정한 것은 들뢰즈가 먼저였다. 아감벤은 들뢰즈가 말한 ‘저항행위‘라는 게 모호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왜 창조행위가 저항행위인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여 잠재력을 뜻하는 ‘힘dynamis‘과 행동을 통해 표출된 에너지인 ‘행위energeia‘를 구분한 뒤, 잠재력을행동의 유보, 더 나아가 힘의 부재가 아닌 ‘~하지 않을 수 있는힘‘으로 정의한다. 들뢰즈가 말한 저항행위는 바로 여기에 연결된다. - P243

이처럼 책 중심 시대의 독자는 혁신적 테크놀로지로서의페이지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건 학자뿐만 아니라 소설의 독자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소설의 독자는 스토리텔러가 들려주는대로 이야기를 쫓아가던 이전의 청자들과 달리 자율적인 읽기가 가능했기 때문에, 진부한 부분은 건너뛰고 난해한 부분은 되돌아가 반복적으로 읽으며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모더니즘은 바로 이런 자율적인 독자를 상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자율적인 독자와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게 바로 물질로서의 페이지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이 물질로서의 페이지이며, 이 페이지는 최종적인 것이라 불변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자율적인 독자는 깊이 있는 독서를 할수 있다. - P249

사실 이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킨 실체는 지우기 키가 아니라 컴퓨터 화면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LCDliquid crystal display 창을 본 것인지는할 수 없지만, 결국 일어난 일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페이지를, 텍스트를,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우려한 문자언어의 완결성과 불변성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목격한것이다. 나는 이 ‘액정 liquid crystal‘이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상태에 있는 물질이라는 이 액정 속에서 책중심 문화를 유지하던 텍스트는 조각조각 나뉘어진 채 녹아내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문자언어의 예술성을 담지했던 표현력과수사력 역시 유실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문명사적 전환이라면, 아감벤의 어투를 빌려, 그것을 읽지 않고쓰지 않는 힘을 유지한 채, 이제 액정 안에서 읽고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P254

이 지체가 저는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개입돼 있습니다. 역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정교한 시계장치와같이 원인과 결과가 맞물려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지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결과의 시간은지체되거나,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인과율의 세계, 과학의 세계, 근대성의 세계를 학습하면서도 끊임없이우연과 신화와 운명의 세계에 매료됩니다. 이따금 저는 극지방의 겨울을 상상합니다. 몇 개월간 밤이 계속되는, 그런 세계 속에 제가 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때 제가 낮을, 빛을 희망한다면 어떨까, 언젠가 그 빛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도 긴 밤 안에서 죽는다면 또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희망은 지체되다가 결국에는 영영 실현되지 않겠지요. 소망하는 바를 가졌을 때 개인이 직면하는 것은 이처럼 희망이 유예된 시간입니다. - P295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간신히 살아낼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저절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사이에 인과의 다리를 놓을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 그 소년의, 그토록 짧은 약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소년에게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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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이 찾아오는 것, 어쩌면 그게부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내가 자란 고향의 풍토때문이다. 만약 내가 서귀포나 청진에 살았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삼월에는 들어갈 때의 날씨와 나올 때의 날씨가서로 다른데, 이는 춘분이 지나면 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달이 한 번 차오르고 나면 부활절이다. 그래서 부활절은 삼월 하순에서 사월 하순까지, 그 한 달 안에 찾아오게 되는데,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늦잠에서 깨어 동네 벚나무들이모두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요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동네가 온통 벚꽃의 환한 빛이라는 게, 어린 시절 내고향에서 맞는 부활절 아침의 느낌이었다. - P89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둠만을 볼 뿐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슬픔과 절망이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이 세계를 다르게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슬픔에 잠긴 마리아 막달레나와 절망에빠진 두 제자가 처음에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 그 상황에서 예수를 알아본다는 건 빛을 알아본다는 뜻이고,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온 동네 꽃들이 모두 피어나던, 내 고향의 부활절 풍경이그런 새로운 빛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짐작만 할 뿐. - P94

잠수하기 전, 소년의 옆에는 소녀가 있었다. 서로 학교에그런 학생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인 사이였지만 그 순간 잡은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물이 복도로 세차게 밀려드는 어느 순간 소년은 소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잠수했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 손을 놓은 게 너무나 미안해서 졸업할 때까지 소년은소녀의 교실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여행으로 소년은 이 년 만에야 소녀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용기를 낸 셈이다. 이용기에 소녀의 중학교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가세해 셋은 제주도로 스무 살의 졸업여행을 떠났다. 열여덟 살 무렵의 사진으로만 남은 친구들과 섭지코지에서 기념 촬영을 하며 셋은 문득 그게 자신들의 스무 살 첫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끝이 아니라 출발이라는 것을. 아울러 자신들은 스스로 일어섰다는 것을. - P97

"그런데 꿈에서는 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시점이었어요. 제가 그 아이가 되어서 그 일을 바라보는 거예요."
아이들의 시점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침몰하는 그 배를 무기력하게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본 어른들인데,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소년이 그 일을 대신한 셈이었다. 구조 책임자는 청문회에 나와서 추궁을 받자, "제가 신입니까? 어떻게 그 일들을 다 합니까!"라고 항변했다.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분하다는 것이었다. 자기 입장을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자기 입장이라면 당신도 똑같았으리라는 것,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것, 그러지 않아주니 답답하고 분하다는 것.
이건 충분히 가능한 마음이리라. 어른들이 이런 가능한 마음을 꼭 붙들고 있는 동안, 그 소년은 어떤 꿈을 꿨다. 그러니까 소녀의 눈으로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꿈. 가능한 마음들이 저마다 자기부터 이해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런 세상에서, 소년은 그런 불가능한 꿈을 꿨다. 글쓰기에도 꿈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꿈을 꾸기 위해서 작가가 신이 될필요는 없다. 아니, 그 누구도 신이 될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 P98

맹골수도에서 떠오르는 세월호의 선체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눈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세월호의 인양은 지난 삼 년 동안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억압해온 사회적상식을 복원하고 이 나라를 정상 국가로 복귀시키는 일의 첫단계다. 박근혜 정권은 일찌감치 세월호를 인양했어야 했다. 이일을 자신의 탄핵과 연계시킨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악의적인 마음도 없이 담담하게 "박근혜가 내려가니 세월호가 올라오네"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완성됐다. 여기에는 어떤교훈이 있을 것인가?
인양 과정을 전하는 뉴스를 지켜보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난 뒤의 여러 날들이 떠올랐다. 혼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과고통의 날들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보도를 지켜봤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러 고비들을 넘기고 인양에 성공했다는 뉴스에 진심으로 기뻤다는 사실이다. 이 기쁨의 경험은 소중하다. 애당초 건강한 공동체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경험하고 지나왔어야 하는 기쁨이니까. 이 기쁨은 조금씩 우리사회가 상식을 되찾고 있다는 신호다. - P103

그러나 주장과 달리 그들은 전혀 무지하지 않았고 무능하지 않았다. 무능 안에서 그들은 많은 일을 했다. 예컨대 그들은거기 맹골수도 아래 누워 있던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았다. 이를두고 무능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가족들 앞에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를 두고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무지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진상을 외면한 그들이 무엇을 알았다는 뜻일까?
그건 그들이 진상이 아닌 허상을 알았다는 뜻이다. 2014년여름, 진상을 요구하는 유가족에 대한 정부의 태도 변화는 바로 이 헛것의 감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헛것의 감각은 ‘공 - P104

통 감각common sense‘이라고 말할 때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그들과는 대화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환영을 보고 환청을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상식적인 게 아니라 초월적이라고 생각한다. 초월적이라는 건 이 세상을 뛰어넘는다는 뜻, 그러니까인양된 배의 뒤쪽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세월‘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바다. 이 세상을 뛰어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그 영역에서는 때로 이성과 상식에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정치는 초월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지지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들이 적으로 보이는 환영과,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정권에 위해를 가하려는 음모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환청에 사로잡혔던박근혜 정권은 종교적 맹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초월적 감각에 의해 스스로 붕괴됐다. 붕괴된 그 자리에서 세월호가 인양되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 어젠다는이렇게 완성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 P105

새벽 세시가 아니었다면 그런 프로그램이 송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일산 호수로 교차로가 보이는 내 책상에서 바라볼때, 새벽 세시는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파도 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뜸해진다. 시끄럽고 북적대는 세상의 대척지에 와 있는 것과 같으니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다. 글쓰기 가장 좋을 때의 나는 가장 고독한 나다. 작가를 꿈꾼다면, 피할 수 없는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작가가 아닌 다른 것을 꿈꾼다 하더라도 고독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도저히 불가능할것 같은 미래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때든. 새벽 세시에 라디오를 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다고 해도 심야 라디오는 방송되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듣고 있다면, 그게 바로 심야 라디오의 본질이리라. 한사람을 위한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가 나보다 더 고독하게 느껴진다는 것.
- P117

이걸 보르헤스의 말로 바꾸면 ‘실수가 없으면 시인도 없다가 되리라. 보르헤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올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문학에 끌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불행에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시인은 이 끌림으로 다시 불행을 뛰어넘는다.
이번 계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보르헤스를 반박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 역시 이삶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침묵」을 쓴 존 그레이에 따르면, 행복은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이란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는신처럼 독창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노력해서발견되어야만 하며, 그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니까.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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