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빛이 찾아오는 것, 어쩌면 그게부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내가 자란 고향의 풍토때문이다. 만약 내가 서귀포나 청진에 살았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삼월에는 들어갈 때의 날씨와 나올 때의 날씨가서로 다른데, 이는 춘분이 지나면 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달이 한 번 차오르고 나면 부활절이다. 그래서 부활절은 삼월 하순에서 사월 하순까지, 그 한 달 안에 찾아오게 되는데, 내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늦잠에서 깨어 동네 벚나무들이모두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일요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면 동네가 온통 벚꽃의 환한 빛이라는 게, 어린 시절 내고향에서 맞는 부활절 아침의 느낌이었다. - P89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둠만을 볼 뿐이다. 그게 바로 인간의 슬픔과 절망이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이 세계를 다르게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슬픔에 잠긴 마리아 막달레나와 절망에빠진 두 제자가 처음에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건, 그래서 당연하다. 그 상황에서 예수를 알아본다는 건 빛을 알아본다는 뜻이고,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온 동네 꽃들이 모두 피어나던, 내 고향의 부활절 풍경이그런 새로운 빛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짐작만 할 뿐. - P94
잠수하기 전, 소년의 옆에는 소녀가 있었다. 서로 학교에그런 학생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인 사이였지만 그 순간 잡은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물이 복도로 세차게 밀려드는 어느 순간 소년은 소녀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잠수했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 손을 놓은 게 너무나 미안해서 졸업할 때까지 소년은소녀의 교실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여행으로 소년은 이 년 만에야 소녀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용기를 낸 셈이다. 이용기에 소녀의 중학교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가세해 셋은 제주도로 스무 살의 졸업여행을 떠났다. 열여덟 살 무렵의 사진으로만 남은 친구들과 섭지코지에서 기념 촬영을 하며 셋은 문득 그게 자신들의 스무 살 첫 여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끝이 아니라 출발이라는 것을. 아울러 자신들은 스스로 일어섰다는 것을. - P97
"그런데 꿈에서는 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시점이었어요. 제가 그 아이가 되어서 그 일을 바라보는 거예요." 아이들의 시점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침몰하는 그 배를 무기력하게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본 어른들인데,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소년이 그 일을 대신한 셈이었다. 구조 책임자는 청문회에 나와서 추궁을 받자, "제가 신입니까? 어떻게 그 일들을 다 합니까!"라고 항변했다.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분하다는 것이었다. 자기 입장을 이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자기 입장이라면 당신도 똑같았으리라는 것,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것, 그러지 않아주니 답답하고 분하다는 것. 이건 충분히 가능한 마음이리라. 어른들이 이런 가능한 마음을 꼭 붙들고 있는 동안, 그 소년은 어떤 꿈을 꿨다. 그러니까 소녀의 눈으로 멀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꿈. 가능한 마음들이 저마다 자기부터 이해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런 세상에서, 소년은 그런 불가능한 꿈을 꿨다. 글쓰기에도 꿈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꿈을 꾸기 위해서 작가가 신이 될필요는 없다. 아니, 그 누구도 신이 될 필요는 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 P98
맹골수도에서 떠오르는 세월호의 선체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눈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세월호의 인양은 지난 삼 년 동안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 억압해온 사회적상식을 복원하고 이 나라를 정상 국가로 복귀시키는 일의 첫단계다. 박근혜 정권은 일찌감치 세월호를 인양했어야 했다. 이일을 자신의 탄핵과 연계시킨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악의적인 마음도 없이 담담하게 "박근혜가 내려가니 세월호가 올라오네"라고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또 완성됐다. 여기에는 어떤교훈이 있을 것인가? 인양 과정을 전하는 뉴스를 지켜보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난 뒤의 여러 날들이 떠올랐다. 혼란과 두려움과 부끄러움과고통의 날들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보도를 지켜봤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러 고비들을 넘기고 인양에 성공했다는 뉴스에 진심으로 기뻤다는 사실이다. 이 기쁨의 경험은 소중하다. 애당초 건강한 공동체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경험하고 지나왔어야 하는 기쁨이니까. 이 기쁨은 조금씩 우리사회가 상식을 되찾고 있다는 신호다. - P103
그러나 주장과 달리 그들은 전혀 무지하지 않았고 무능하지 않았다. 무능 안에서 그들은 많은 일을 했다. 예컨대 그들은거기 맹골수도 아래 누워 있던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았다. 이를두고 무능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유가족들 앞에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 약속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를 두고 무지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무지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진상을 외면한 그들이 무엇을 알았다는 뜻일까? 그건 그들이 진상이 아닌 허상을 알았다는 뜻이다. 2014년여름, 진상을 요구하는 유가족에 대한 정부의 태도 변화는 바로 이 헛것의 감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헛것의 감각은 ‘공 - P104
통 감각common sense‘이라고 말할 때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그들과는 대화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환영을 보고 환청을듣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상식적인 게 아니라 초월적이라고 생각한다. 초월적이라는 건 이 세상을 뛰어넘는다는 뜻, 그러니까인양된 배의 뒤쪽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세월‘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바다. 이 세상을 뛰어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그 영역에서는 때로 이성과 상식에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정치는 초월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지지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국민들이 적으로 보이는 환영과,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정권에 위해를 가하려는 음모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환청에 사로잡혔던박근혜 정권은 종교적 맹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초월적 감각에 의해 스스로 붕괴됐다. 붕괴된 그 자리에서 세월호가 인양되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 어젠다는이렇게 완성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 P105
새벽 세시가 아니었다면 그런 프로그램이 송출되는 일은 없었으리라. 일산 호수로 교차로가 보이는 내 책상에서 바라볼때, 새벽 세시는 세상이 가장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신호등의 색깔에 따라 파도 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자동차들의 소리가 뜸해진다. 시끄럽고 북적대는 세상의 대척지에 와 있는 것과 같으니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다. 글쓰기 가장 좋을 때의 나는 가장 고독한 나다. 작가를 꿈꾼다면, 피할 수 없는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작가가 아닌 다른 것을 꿈꾼다 하더라도 고독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게 도저히 불가능할것 같은 미래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한때든. 새벽 세시에 라디오를 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다고 해도 심야 라디오는 방송되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듣고 있다면, 그게 바로 심야 라디오의 본질이리라. 한사람을 위한 목소리처럼 들린다는 것. 그래서 그 목소리가 나보다 더 고독하게 느껴진다는 것. - P117
이걸 보르헤스의 말로 바꾸면 ‘실수가 없으면 시인도 없다가 되리라. 보르헤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올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니까요." 문학에 끌린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불행에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시인은 이 끌림으로 다시 불행을 뛰어넘는다. 이번 계절에 배운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제일 먼저 보르헤스를 반박하고 싶다. ‘그러나 행복 역시 이삶의 목표가 아니다‘라고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잘못 살수밖에 없다. 동물들의 침묵」을 쓴 존 그레이에 따르면, 행복은자아실현이 이뤄지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이 자아실현이란낭만주의 운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는신처럼 독창적이고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노력해서발견되어야만 하며, 그때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니까.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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