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더 많은 소설을 창작하고 난 뒤, 나는 생각과 문장 사이의 시간차를 줄이는 일이 어떤 소설을 끝까지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깨달았다. 도중에 그만둔 소설들 대개 작가 생활 초기에 이런 미완성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과 끝까지 써서 출판한 소설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애초의 구상에서 대대적인 수정이가해졌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내 경우 출판까지 이른 소설들은대개 애초의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와 플롯으로 완성됐다. 단어와 표현 들은 당연히 모두 바뀌었다. 이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우기 키였다. 지우기 키를 더 많이 이용할때, 즉 쓰고 지우기를 더 많이 반복할 때 어떤 소설이 완성될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이 사실을 체감하면서 왜 육필로 쓸 때보다 키보드를 이용할 때 소설을 완성시킬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지에 대한 이유도 깨닫게 됐다. 키보드를 이용해 컴퓨터에 입력하면 쓰고 지우기를 더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P242

자신이 쓴 문장들을 지우는 일은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예술행위다. 조르조 아감벤은 「창조행위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예술에 품격을 부여하는 저항"이라는 말로 작가의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정의했다. 나는 문장들을 지우는 일이야말로 이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제목은 1987년 질 들뢰즈가 파리에서 가진 강연회의 제목과 같다. 따라서 모든 창조행위를 무언가에 대한 저항행위로 규정한 것은 들뢰즈가 먼저였다. 아감벤은 들뢰즈가 말한 ‘저항행위‘라는 게 모호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왜 창조행위가 저항행위인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여 잠재력을 뜻하는 ‘힘dynamis‘과 행동을 통해 표출된 에너지인 ‘행위energeia‘를 구분한 뒤, 잠재력을행동의 유보, 더 나아가 힘의 부재가 아닌 ‘~하지 않을 수 있는힘‘으로 정의한다. 들뢰즈가 말한 저항행위는 바로 여기에 연결된다. - P243

이처럼 책 중심 시대의 독자는 혁신적 테크놀로지로서의페이지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건 학자뿐만 아니라 소설의 독자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소설의 독자는 스토리텔러가 들려주는대로 이야기를 쫓아가던 이전의 청자들과 달리 자율적인 읽기가 가능했기 때문에, 진부한 부분은 건너뛰고 난해한 부분은 되돌아가 반복적으로 읽으며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모더니즘은 바로 이런 자율적인 독자를 상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자율적인 독자와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게 바로 물질로서의 페이지다. 작가가 최종적으로 구성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이 물질로서의 페이지이며, 이 페이지는 최종적인 것이라 불변한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자율적인 독자는 깊이 있는 독서를 할수 있다. - P249

사실 이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킨 실체는 지우기 키가 아니라 컴퓨터 화면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LCDliquid crystal display 창을 본 것인지는할 수 없지만, 결국 일어난 일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페이지를, 텍스트를,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우려한 문자언어의 완결성과 불변성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키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목격한것이다. 나는 이 ‘액정 liquid crystal‘이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액체와 고체의 중간상태에 있는 물질이라는 이 액정 속에서 책중심 문화를 유지하던 텍스트는 조각조각 나뉘어진 채 녹아내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문자언어의 예술성을 담지했던 표현력과수사력 역시 유실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조차 바꿀 수 없는 것이문명사적 전환이라면, 아감벤의 어투를 빌려, 그것을 읽지 않고쓰지 않는 힘을 유지한 채, 이제 액정 안에서 읽고 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P254

이 지체가 저는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개입돼 있습니다. 역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정교한 시계장치와같이 원인과 결과가 맞물려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지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결과의 시간은지체되거나,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인과율의 세계, 과학의 세계, 근대성의 세계를 학습하면서도 끊임없이우연과 신화와 운명의 세계에 매료됩니다. 이따금 저는 극지방의 겨울을 상상합니다. 몇 개월간 밤이 계속되는, 그런 세계 속에 제가 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때 제가 낮을, 빛을 희망한다면 어떨까, 언젠가 그 빛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도 긴 밤 안에서 죽는다면 또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희망은 지체되다가 결국에는 영영 실현되지 않겠지요. 소망하는 바를 가졌을 때 개인이 직면하는 것은 이처럼 희망이 유예된 시간입니다. - P295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간신히 살아낼 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저절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 사이에 인과의 다리를 놓을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구원받을 수 있겠지만, 그 소년의, 그토록 짧은 약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근대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소년에게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매혹시킨 근대적 기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구불구불 흘러내려가는 강을 닮아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곧잘 지체되며, 때로는 거꾸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지만, 그때가바로 흐름에 몸을 맡길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쉼없이 흘러가는 역사에 온전하게 몸을 내맡길 때, 우리는 근대이후의 인간, 동시대인이 됩니다. 그때 저는 온전히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내맡길 때, 우리의 절망은 서로에게 읽힐 수 있습니다. 문학의 위로는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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