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파리 지도는 새롭게 계속 그려졌다. 아침마다 유명한 파리가 그냥 우리 동네로 편입되었다. 부자 동네 생제르맹이 우리 동네가 되고, 뤽상부르 공원이 우리 동네 큰 정원이되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과거로 데려가는 자동차가 달린 길을 걸었다가, 오웬 윌슨처럼 그 성당 계단에 앉아 조용한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주저 없이 그 새벽, 내발이 닿는 곳 모두를 우리 동네라 불렀고, 기꺼이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 동네는 점점 더 커져갔다. 길은 반듯하지 않아 늘 나를 낯선 곳에 데려다 놓았으니까. 그리고 나의 정처 없는 새벽 산책을 끝내는 건 언제나 바게트였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는 빵집을 발견하면, 혹시라도 그곳에 ‘ler prixmeilleure baguette (바게트 대회 1등 수상)‘라고 적혀 있으면,
나는 주저 없이 산책을 끝내고 지갑을 열었다. - P33

트라디를 뜯어 먹으며 하는 일은 늘 같았다. 오늘의 운명 찾기. 식탁 앞에 앉아 수년간 구글맵에 표시해놓은 별들을 헤매며 오늘 내 기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운명의 장소를 찾는 것이다. 매일의 산책 길을 선택하는 이야기나, 끌리는 빵집이 나오는 순간 산책을 멈춘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눈치를 챘을지도모르겠다. 그렇다. 어차피 파리 자체를 운명이라 여기며 온 이상, 이곳에서 나는 철저히 운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마음이 이끄는 그곳이 바로 오늘 나의 운명, 평소 그토록 계획짜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파리에서는 아무 계획이 없다. 모두에게 말했다. "정말 아무 계획 없어." 물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말했다. "계획을 안 짜는 걸 계획했겠지." 엄마, 그렇게 나를 단숨에 간파하지 말라고. - P35

나는 책마다 퐁피두 센터에 대한 사랑을 숨겨두었다.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는 "여행이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 아침 바게트가 일상이 되고, 노천카페가 일상이 되고, 밤새워 쓰는글이, 퐁피두 센터가 (중략) 일상이 되는 것을 꿈꾼다"라고 썼고,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왜 이 땅을 떠나 그 땅에 도착해야만 하는가. (중략) 너무 보고 싶어 세 번이나 들러서보고 또 봤던 미술관 한 귀퉁이의 조각상만 다시 보고 싶었다"
라고 썼고,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에선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도 이마엔 자신만의 별이 박혀 있단다. (중략) 나의 별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 있었는데, 너의 별은 밤의 베네치아에 있었구나"라고 썼다. 심지어 이 책의 시작 부분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스무 살, 파리에게 첫눈에 반했다. - P37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또렷하게 말하긴 조금 어렵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나를 좋아했다. 처음 보는 그림에 그토록 마음을 내주고, 처음 알게 된 화가의전시실에 오래도록 앉아 있는 나를 좋아했다. 위로할 길 없는슬픔을 가진 조각상이 마음 쓰여서 퐁피두 센터 앞을 지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번 다시 들어가는 나를, 찬찬한눈길로 그 조각상의 구석구석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나를 좋아했다. 모네의 그림도 좋아하고, 반 고흐의 그림에도 열광했지만 그 감정과 이 감정은 달랐다. 20대의 나는 유독 특정 슬픔에예민하게 반응했다. 토해내는 슬픔이 아니라 속으로 삼키고또 삼켜 내장이 너덜너덜해져 버린 슬픔을 잘 알아봤다. 그런슬픔이 퐁피두 센터에 있어 나는 이해받고 있다고 느꼈다.
스무 살 때만 매일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다음 파리에 왔을 때도 아침이면 늘 퐁피두 센터에 들렀다가 어디론가 다시 떠나곤 했다. 겉에서 보기만 해도 좋았고, 좋아하는 장소에 그렇게 쉽게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고, 하루가 좋아하는마음에서 시작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 이번 여행을 퐁피두센터에서 시작하는 것은 예정된 나의 운명이었다. - P38

밤 9시, 미술관이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나올 때가 되어서야나는 간신히 퐁피두 센터를 빠져나왔다. 저 멀리 에펠탑 옆으로 지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러니 계속 올 수밖에 없지, 라고 중얼거리며. 이러니 오래도록 그림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도 몰랐던, 내게 필요한 것을 그때그때 작품들이 다 챙겨서 오롯이 내게 안겨주고 있으니 말이다.
구글맵을 켜서 집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다. 퐁피두 센터에서 집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이 사실이 어찌나 어이가없는지, 퐁피두 센터 앞에 서서 혼자 바보처럼 웃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눈에는 어쩐지 눈물이 고였다. 이곳에 오고 싶어 그 오랜 시간을 헤맸는데, 이제는 버스 한 번이면올 수 있다. 버스 한 번이면 내 몫의 용기를 챙길 수 있다. 언제든. 그야말로 언제든,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내가 도착한 곳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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