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손의 사랑」은 농담으로 시작되었다. 아니, 무모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는데, 마리화나를 적잖이 피워 대고 싸구려 위스키를 퍼마신 탓에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화근이었다. 하겠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빌어먹을 계약 조건과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그 계약은 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무를 수 없는 계약이다. 계약 종료일을명시하지 않은 탓이다. 우유갑이나 요거트 통이나 마요네즈 병에 적힌 상미기한 같은 유효 기간을 적어 두었어야 했는데, 대체 뭘 안다고 덜컥 계약을 해 버린 거지? 고작 스물둘밖에 안 됐으면서, 돈이필요했다.
그래 봐야 푼돈이었다. 고로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다. 착취였다. - P243

그 셋은 어쩌다 그를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을 수 있었던 걸까? 물론 그들은 계약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까지 떡하니박힌 그 빌어먹을 계약서를 운운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그는현실을 받아들이고 돈을 내어줘야 했다. 처음에는 돈을 주지 않으려했다. 하지만 그러고 있으니 이레나가 변호사를 고용했고 이제는 다들 벼룩을 달고 사는 개처럼 변호사를 두고 있다. 이레나는 한때 그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조금 봐줄 법도 했으나 그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이레나는 매해 태양 빛 아래서 더 단단해지고 더 건조해지고 더뜨거워지는 아스팔트 같은 심장의 소유자였다. 돈이 이레나를 망가뜨렸다. - P244

그의 돈이 이레나를 망가뜨렸다. 이레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변호사를 선임할 만큼 형편이 넉넉했던 건 그 덕분이니 이레나를 망가뜨린 것은 그의 돈이었다. 그가 선임한 변호사도 그들이 선임한 업계최고의 수완 좋은 변호사들 못지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승소의 기쁨을 가져다줄 것인가를 두고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골절상을 입은 하이에나의 아침 밥상에 오르는 먹이는 언제나 의뢰인이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처음에는 한입씩 베어 먹다가 나중에는 가죽이나 힘줄이나 발톱만 남을 때까지 휜담비나 쥐나 피라냐 떼처럼 조금씩 뜯어먹는 족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십 년간 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마땅히 지적했듯 이 일을 법정으로 끌고 가 봐야 승소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가 서명했다. 그 간악한 계약서에 새빨간 뜨거운 피로 그가 서명했다. - P244

내가 멍청이도 아니고! 다 안다고! 유약을 발라 반질거리는 파랗고 하얀 타원형 명판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다 잊어버려야 하는데, 최대한 여기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잊어야 하는데 발목에 걸린 족쇄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영화제며 문학 페스티벌이며 코믹 페스티벌이며 몬스터 페스티벌이며 하는 것들에 참석하러 이 도시를 찾을 때마다 스리슬쩍 보고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계약서에 서명한 과거의 바보짓을 상기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호러클래식‘이라는 세 단어를 통해 씁쓸한 만족감을 주는 명판이니 어쩔수 없다. 잭은 이 명판에 지나치리만치 집착한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이룬 중대한 삶의 성취에 바치는 헌사이 터다. 그런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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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둘은 똑같은 질문이없다. 가능성은 제한되어 있었다. 밤이면 가족들은 덧창문을 전부닫고 식탁에 둘러앉아 비쩍 말라 푸석푸석한 소시지와 감자수프를먹으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끝도 없이 이 질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정신이 명료할 때면 나도 내 그릇에서 감자 덩어리를 열심히 골라내 먹으며 가능한 한 대화에 참여하려 했다. 정신이 명료하지 않올 때면 집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진 곳에 떨어져 혼자 야옹야옹 울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지저귐을 들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엄마가 말했다. "그 애한텐 아무 문제도 없었어." 나 같은 것을 낳았다는 사실이 엄마를 슬프게 했다. 그건 일종의 비난, 판결이었다. 엄마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
- P165

낮 동안 나는 어두운 내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더는 웃어넘길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햇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지내는 게.
내게는 괜찮았다. 밤이 되면 잠 못 이룬 채 집 안을 어슬렁거리면서가족들이 코 고는 소리와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내 동반자는 고양이였다. 나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내겐 피 냄새가, 오래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났고, 어쩌면고양이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내 위에 올라타 나를 핥은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족들은 이웃에게 내가 소모성 질병을 앓고 있다고, 열이 난다고, 섬망이 있다고 말했다. 이웃들은 달걀과 양배추를 보내왔고, 이따금 새로운 소식이 없나 궁금해 우리 집을 방문했지만 어떻게든 나를 한번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내 병이 어떤 병이든 전염될 수있다고 여겼다.
나는 죽어야 했다. 그래야 언니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도 않고, 언니에게 파멸의 그림자를 드리우지도 않을 터였다. 할머니는 내방문틀에 마늘 여러 쪽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둘 다 비참하느니 한사람이라도 행복한 게 낫지."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도움이 되고싶었다. - P168

그리고 이웃들에게는 내가 성인다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렸다. 나는 흰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동정녀라는 이미지에도 어울리고내 체모를 가리기에도 유용한 흰 면사포를 수 겹 두른 상태로 칠흑처럼 어두운 방에서 까마득히 깊은 관에 누워 전시되었다. 그 안에서 이틀을 누워서 지냈지만 물론 밤에는 관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닐수 있었다.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면 숨을 죽였다. 이웃들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으면서 귓속말을 했고, 관에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않았다. 여전히 내 병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내가 꼭 천사같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내가 진짜 죽기라도 한 듯이 눈물을 흘렸다. 언니조차 침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빠는 검은 양복을 입었고, 할머니는 빵을 구웠다. 그리고 다들 빵으로 배를 채웠다. 셋째 날, 가족들은 축축한 지푸라기로 관을 채운 다음 묘지로 끌고가서 기도문과 수수한 묘비를 세우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3개월 후언니는 결혼을 했다. 가족들 중 처음으로 대형 사륜마차를 타고 교회로 갔다. 내 관은 언니가 밟고 올라갈 사다리의 가로장이었다. - P169

어스름 속에서 나는 푸시킨과 바이런 경과 존 키츠의 시를 읽었다. 나는 좌초당한 사랑, 과감한 저항, 그리고 죽음의 달콤함을 배웠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내게 감자와 빵, 피가 담긴 컵을 가져다주고 실내용 변기를 비워 왔다. 한때는내 머리도 빗겨 주었지만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부터는 그만두었다. 습관처럼 나를 끌어안고 눈물도 흘렸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지나갔다. 엄마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떴다. 가급적 숨기려고는했지만 엄마는 당연하게도 나를 원망했다. 누군가를 안쓰럽게 여길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대방의고통은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로 느껴지는 법이다.
밤이면 나는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닌 다음 마당도 마음대로 활보했고 그러고 나면 숲도 마음대로 누볐다. 더는 다른 사람의 삶이나 그들의 미래에 방해가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게는 미래가 없었다. 내게는 오로지 현재만, 달과 함께 변하는 변하는 듯했던 현재만 있었다. 발작, 고통의 시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지껄임만 없었더라면 나는 행복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 P170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나는 그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은 의도를 품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장례식을 치렀을 때 입은 흰 드레스에 동정녀에 걸맞은 흰 면사포를 둘렀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상황에 맞는복장을 차려입을 수 있어야 한다. 지저귀는 소리가 몹시 시끄럽게울려 퍼진다. 비상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불타는 지붕에서 혜성처럼 떨어질 것이고, 모닥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내 재에 대고 무수한 주문을 외워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진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기형적인 성인이 될 것이고 내 손가락뼈는 어둠의 유물로 팔릴 것이다. 그즈음이면 나는 전설이 될것이다.
천국에서라면 내가 천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천사들이나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다들 얼마나 놀랄까! 기대해 볼 법한 일이다. - P175

오래전 캐리스와 토니와 로즈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지니아는 그들의 연인을 한 번씩 빼앗아 갔다. 토니에게서는 웨스트를빼앗았다. 하지만 토니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했고 혹은그렇게 믿기로 했고 지금 웨스트는 토니의 집에 무사히 뿌리를내린 채 전자 음악 기기를 갖고 놀면서 시시각각 청력을 잃고 있다. 로즈에게서는 미치를 빼앗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치가 바짓가랑이 단속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남자였던 터다. 하지만지니아는 미치의 주머니까지 털어먹고도 캐리스가 미치의 정신적 고결함이라 부른 것까지 앗아간 후 그를 차 버렸고, 미치는 결국 온타리오호에 투신해 익사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배를 타다가 사고사를 당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로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로즈는 실연을 극복했다. 적어도 그런 일을 겪은 여자가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은 극복했고, 지금은 금융 회사를 다니며 자기와더 잘 어울리고 미치보다 유머 감각도 좋은 샘과, 미치보다 월등히 훌륭한 남편과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상처는 여전하다. 그리고그 상처는 아이들마저 아프게 하고 있다. 이는 로즈가 과거지사를말끔히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도 미치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더는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어 봐야 뭐 하나 좋을 것도 없지만 말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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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관련된 우스꽝스러운 일화에 틴이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못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엄마는 일찍, 그것도 호상이라 할수 없는 방식으로 죽었다. 죽음에 호상이라는 것이 있겠나 싶지만그래도 정도는 있다고 틴은 생각한다. 퇴근 후 슬픔에 잠겨 두 눈이눈물에 가려진 상태로 무단횡단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죽는 것은 호상이 아니었다. 다만 신속한 죽음이기는 했다.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쌍둥이는 대학에 진학할 무렵 얼간이와 깡패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실로 선 없는 악은 없다라고 틴은 그 시절 드문드문일기에 적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있는 법이다. - P124

월간이들 중 두 명은 감히 엄마의 장례식에도 찾아왔다. 이는 조리가 장례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조리는 지금도 그 개새끼들을 가만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묘 옆에 나타나 슬픈 척을 하면서 쌍둥이에게 너희 엄마는 정말 멋지고 친절한사람이었다고, 정말 좋은 친구였다고 말하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친구?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냥 자기랑놀아날 여자나 원했던 거면서!" 조리는 노발대발했다. 그들에게 따줬어야 했다. 소란을 피웠어야 했다. 주먹으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어야 했다.
틴은 그 남자들이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엄마 메이브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는 게,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가지나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로 본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 - P124

지 않나? 아모르, 볼룹타스, 카리타스로 즉 사랑, 쾌락, 자선으로 말이다. 하지만 틴은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랬다간 조리의 분노를더 자극할 것이다. 특히 이렇게 라틴어를 써 가면서 말하면 더 그럴것이다. 조리는 라틴어와 관련된 모든 것에 인내심이 없으니까. 라틴어는 조리가 평생 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 중 하나다. 왜 사람들 기억에서도 잊힌 죽은 언어로 쓰인 그 곰팡내 나는 낙서 쪼가리에 인생을 낭비하는 거야? 너는 정말 영리하고, 정말 재능이 많고, 잘하면...... (뒤이어 틴이 잘하면 될 수도 있었을 많은 것이 길게 나열될 테지만 그중 무엇도 실제로 가능하지는 않다.)그러니 조리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 P125

최악은 개빈이 승승장구하며 찬사를 받자 다크 레이디 소네트가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고 대단하지는 않아도 경력 면에서 상당히의미 있는 상들을 연달아 수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흐름에 따라 개빈의 이 초기 시들은 색다른 결을 가진 후기 시들을통해 변주되었다. 사랑에 빠진 화자는 처음에는 다크 레이디의 단순한 육체성을, 실제로는 추잡함과 변덕스러움을 좇았고, 나중에는 예전만 못해도 여전히 희미한 빛을 발하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의 뒤꽁무니를 다시 좋았다. 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기만 하고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나중엔 책으로 출간되기까지한 화자의 호소를 진정한 사랑은 차가운 눈길로 일축했다. - P138

복수심에 사로잡힌 조리는 길거리의 도랑과 주차장을 훑고 돌아다니면서 마치 눈에 보이는 데이지 꽃을 죄다 꺾어 버리듯 성욕 강한 아무 남자하고 관계를 맺었다가 그들을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런행동이 조리를 함부로 내팽개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틴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사람은 내가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 무슨 짓을 하며 망가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머리 없는 염소와 떡을 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계절의 수레바퀴가 돌아갔고, 매일의 새벽이 362차례 분홍빛 아침을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진 후 또다시 362번의 아침을,
그리고 또다시 362번의 아침을 어루만졌다. 욕망의 달은 차올랐다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정욕의 화신 같은 시인은 점점 희미하고 까마득한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아니, 그러기를 틴은 바랐다. 조리를 위해서.
하지만 정욕의 시인은 사라지지 않은 듯하다. 당장 죽어서 다시 사람들의 조명을 받는 것, 그게 너 같은 자식이 해야 할 일이야. 틴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개빈 퍼트넘의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가. 실제로 사라지지 않는다면, 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 P139

틴이 조리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려 한다. 조리가 버럭 화를 내면서 이 노작가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도,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다. 조리를 여기에서 빼내야 한다. 집에 가서 독한 술을 한 잔씩 하면서 조리를 진정시키고나면 이 모든 상황을 빈정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리는 틴의 팔을 놓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모든 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제 삶 전체가요." 우는 건가? 그렇다.
청동색과 금색으로 반짝반짝하며 흐르는 진짜 눈물이다.
"나도 고통스러웠어요." 콘스턴스가 말한다.
"알아요." 조리가 말한다. 두 사람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정신적 교감 속에 갇힌 채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장소에 살고 있어요. 알핀랜드에는 과거가 없어 - P161

요 시간 자체가 없죠. 하지만 여기에는 시간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존재하는 시간이요 우리에게는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어요.
"맞아요. 때가 온 거죠 저도 미안해요. 저도 당신을 놓아줄게요."
조리가 콘스턴스에게 다가간다. 포옹하려는 건가? 틴이 생각한다. 서로를 껴안을까, 아니면 바닥에 쓰러뜨릴까? 이게 일촉즉발의 순간인가? 어떻게 도와야 하지? 대체 지금 여자들끼리 어떤 이상한 짓을벌이고 있는 거지?
틴은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조리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조리에게 다른 면면이, 다른힘이 있는 건가? 틴으로서는 절대 상상하지도 못한 차원이?
콘스턴스가 뒤로 물러선다. 그러고는 조리에게 "축복을 빌게요." 라고 말한다. 흰 양피지 같았던 피부가 이제 황금 비늘이 발하는 빛으로 반짝인다.
젊은 너비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차마 믿지 못하고 있다. 입은 반쯤 벌린 채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숨죽이고 있다. 우리를 호박 결정으로 만들려는 생각이로군. 틴은 생각한다. 고대 곤충들처럼.
우리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것이다. 호박 구슬 속에, 호박 단어 속에.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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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삶에 의해 보이는 삶이다. 나는 의미를 지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맥동하는 혈관이 의미를 지니지못하는 것과 같다.


나는 배우는 사람처럼 당신에게 글을 쓰고 싶다. 나는매 순간을 사진에 담는다. 음영을 넣은 그림을 그리듯 단어들에 깊이를 준다. 나는 왜냐고 묻고 싶지 않다. 당신은 언제든 왜냐고 물을 수 있지만 늘 답을 듣지 못할것이다 -대답 없는 질문에 따르는 기대감에 찬 침묵,
내가 거기에 굴복할 수도 있을까? 비록 그 어느 장소 혹은 시간 속에 나를 위한 해답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 P19

내가 당신에게 쓰는 글은 편안하지 않다. 나는 확신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나 자신을 금속화한다. 나는 당신에게든 내게든 편안하지 않다. 내 말들은 그날의 공간속으로 터져나간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알게 될 것은 그림자, 과녁에 명중한 화살의 그림자다. 화살은 내게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나는 아무런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그림자를 헛되이 움켜쥔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다. - P23

누구든 나와 함께할 사람은 함께해 주기를: 이 여정은 길고 험난하지만, 사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말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는다. 나는 말들 너머에 뒤엉켜 있는 관능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문구들 속에서 나 자신을 구현한다. 문구들이 조용히 노크하면 거기서 침묵이 뿌옇게 솟아난다. - P31

따라서 글쓰기는 말을 미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말은 말이 아닌 것을 낚는다. 행간에 있는 말 아닌 것이 미끼를 물면 글이 쓰인 것이다. 행간에 있는 것이 잡히고 나면 안심하고 말을 내버릴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비유가 끝나는 곳이다: 말이 아닌 것, 미끼를 물기, 말에 통합되기. 그러니 당신을 구원하는 건 넋을 놓은 글쓰기다. - P31

나는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모호한 존재다. 나는 처음엔 달빛의 선명한 시야를 가졌었고, 그래서 하나의 순간이 죽은 뒤 영원히 죽은 상태로 접어들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해 그 순간을 뽑아낼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전하고 있는 건 관념들을 담은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 속에 숨겨져 있었던, 그간 내가 예견해 왔던 직관적인 황홀경이다. 또한 이것은 향연이기도 하다. 말들의 향연. 나는 목소리보다는 몸짓에 가까운 신호들로 글을 쓴다. 사물들의 내밀한 본질로 파고드는 것, 이 모든 건 그림을 그리면서 익숙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을 새로 만들기 위해 그림 그리는 걸 그만둘 때가 되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을 새로 만든다. 내겐 목소리가 있다. 그림의선線 속으로 뛰어들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글쓰기 역시 내게는 계획 없는 삶이 펼치는 활동에 속한다.  - P35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이렇게 실재하고 또기필코 사라져 버릴 순간에 자그맣고 틀에 갇힌 내 자유가 나를 세상의 자유에 연결시킨다직각으로 짜인틀에 담긴 인상, 그게 아니라면 창문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거칠게 살아 있다. 죽음이 말한다. 자신은 떠난다고. 나를 데려간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나는죽음과 함께 가야 하기에 헐떡거리며 몸서리친다. 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 존재 안에 자리 잡는다 -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죽음은 관능적이다. 나는 죽은 사람처럼 키 큰 풀들을 헤치며 푸르스름한 풀빛 속을 걷는다: 나는 금으로 빚어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이며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수북이 쌓인 뼈들뿐이다. 나는 느낌들로 이루어진 지층 맨 밑바닥에 살고있다: 나는 가까스로 살아 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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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할렐루야가 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이별의 고통이 담긴 처절한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할렐루야를 외친다.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니까. 나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지만 -이성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배웠으므로 -그러나 지금 나는 혈장을 원하고 -태반의 혈장을 그대로 먹고 싶다. 나는 조금 두렵다: 다음 순간은 미지의 것이기에 나를 완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다음 순간을, 그걸 만드는 건 나일까? 아니면 그것 자신일까?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통해 함께 그것을 만든다. 투우장에 선 투우사의 솜씨로. - P11

이 말을 해야겠다. 나는 이 ‘지금ㅡ 순간‘의 사차원을 포착하려 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이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지금-순간이되었으며, 그것 또한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순간 속에 있다. 나는 이 ‘있음‘을 붙잡고 싶다. 그 순간들은 내가 호흡하는 공기 속을 지나다닌다. 그것들은 폭죽이 되어 공중에서 아무런 소리 없이 폭발한다. 나는 시간의 원자들을 갖고 싶다. 그리고현재를 붙잡는 일은 그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상 금지돼 있다. 현재는 스르르 사라져 버리며, 모든 순간이 그 - P11

와 같다. 이 순간 나는 영원한 지금 속에 있다. 오직 사랑의 행위 - 그 맑은 별과 같은 느낌의 추상화- 만이 그 미지의 순간을, 허공 속에서 진동하는 수정처럼 단단한 그 순간을 붙잡으니, 삶은 이 말할 수 없는 순간이다. 사건 그 자체보다 큰 순간: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순간의 보석이, 보편하는 보석이 허공에서 빛난다. 몸의 기이한 영광, 순간들의 떨림 속에서 느낌으로 승화하는 물질-그리고 그 느낌은 형태가 없는 동시에 너무도 객관적이어서 마치 당신의 몸 바깥에서 생겨나는듯하다. 황홀경 속에서 반짝이는 것, 기쁨, 기쁨은 시간의 성분이고 순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순간 속에 순간의 있음이 있다. 나의 있음을 붙잡고 싶다. 나는 새처럼허공에 대고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그리고 내 노래는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열정이없이는 할렐루야가 사랑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 P12

나는 내 모든 걸 바쳐 당신에게 글을 쓰고 있으며, 나는존재의 맛을 느끼고, ‘당신의 맛‘은 순간처럼 추상적이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온몸을 바쳐 형태가 없는 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나는 온몸으로 자신과 씨름한다.
당신은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들을 뿐, 그러니당신의 온몸으로 나를 들어라. 너무 거칠고 무질서한내 글을 본 당신은 내게 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내가 말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쓰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껏진실한 말에 가닿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나의 사차원이다. - P13

내가 당신에게 글을 써야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당신이내 그림에서 명확성 대신에 두서없는 말들을 수확해가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구절들이 조잡하다는건 나도 안다. 나는 너무도 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는중이고, 그 애정이 글의 결함들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애정은 작품에 좋지 않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쓰는 방식으로 쓰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건 어떤 단일한 클라이맥스일까? 내 삶은 단일한 클라이맥스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 P15

하지만 나는 온몸으로 당신에게 글을 쓴다. 말의 여린 신경에 가 박힐 화살을 쏜다. 나의 은밀한 몸이 당신에게 말한다: 공룡, 어룡, 사경룡. 그저 소리라는 의미밖에 지니지 않은 이 말들은지푸라기처럼 마르지 않고 축축해진다. 나는 관념들을 그리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영원‘을 그린다. 아니면, ‘무‘, 영원이나 무나 결국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림 그리기를 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단단한 글쓰기를 쓴다. 나는 말을 손에 쥐고 싶다.
말은 하나의 물체일까? 나는 순간들로부터 주어진 열매의 즙을 짜낸다. 삶의 핵심에, 삶의 씨앗에 다다르려면 나 자신을 소거해야만 한다. 순간은 살아 있는 씨앗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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