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둘은 똑같은 질문이없다. 가능성은 제한되어 있었다. 밤이면 가족들은 덧창문을 전부닫고 식탁에 둘러앉아 비쩍 말라 푸석푸석한 소시지와 감자수프를먹으면서 비통한 심정으로 끝도 없이 이 질문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정신이 명료할 때면 나도 내 그릇에서 감자 덩어리를 열심히 골라내 먹으며 가능한 한 대화에 참여하려 했다. 정신이 명료하지 않올 때면 집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진 곳에 떨어져 혼자 야옹야옹 울며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지저귐을 들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엄마가 말했다. "그 애한텐 아무 문제도 없었어." 나 같은 것을 낳았다는 사실이 엄마를 슬프게 했다. 그건 일종의 비난, 판결이었다. 엄마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 - P165
낮 동안 나는 어두운 내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더는 웃어넘길 만한 몰골이 아니었다. 햇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지내는 게. 내게는 괜찮았다. 밤이 되면 잠 못 이룬 채 집 안을 어슬렁거리면서가족들이 코 고는 소리와 악몽을 꾸며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내 동반자는 고양이였다. 나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내겐 피 냄새가, 오래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났고, 어쩌면고양이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내 위에 올라타 나를 핥은 이유가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족들은 이웃에게 내가 소모성 질병을 앓고 있다고, 열이 난다고, 섬망이 있다고 말했다. 이웃들은 달걀과 양배추를 보내왔고, 이따금 새로운 소식이 없나 궁금해 우리 집을 방문했지만 어떻게든 나를 한번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내 병이 어떤 병이든 전염될 수있다고 여겼다. 나는 죽어야 했다. 그래야 언니의 앞길에 방해가 되지도 않고, 언니에게 파멸의 그림자를 드리우지도 않을 터였다. 할머니는 내방문틀에 마늘 여러 쪽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둘 다 비참하느니 한사람이라도 행복한 게 낫지." 그 말에 나도 동의했다. 도움이 되고싶었다. - P168
그리고 이웃들에게는 내가 성인다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렸다. 나는 흰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동정녀라는 이미지에도 어울리고내 체모를 가리기에도 유용한 흰 면사포를 수 겹 두른 상태로 칠흑처럼 어두운 방에서 까마득히 깊은 관에 누워 전시되었다. 그 안에서 이틀을 누워서 지냈지만 물론 밤에는 관 밖으로 나와 걸어 다닐수 있었다. 누군가가 집에 들어오면 숨을 죽였다. 이웃들은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으면서 귓속말을 했고, 관에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않았다. 여전히 내 병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내가 꼭 천사같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 내가 진짜 죽기라도 한 듯이 눈물을 흘렸다. 언니조차 침울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빠는 검은 양복을 입었고, 할머니는 빵을 구웠다. 그리고 다들 빵으로 배를 채웠다. 셋째 날, 가족들은 축축한 지푸라기로 관을 채운 다음 묘지로 끌고가서 기도문과 수수한 묘비를 세우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3개월 후언니는 결혼을 했다. 가족들 중 처음으로 대형 사륜마차를 타고 교회로 갔다. 내 관은 언니가 밟고 올라갈 사다리의 가로장이었다. - P169
어스름 속에서 나는 푸시킨과 바이런 경과 존 키츠의 시를 읽었다. 나는 좌초당한 사랑, 과감한 저항, 그리고 죽음의 달콤함을 배웠다.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엄마는 내게 감자와 빵, 피가 담긴 컵을 가져다주고 실내용 변기를 비워 왔다. 한때는내 머리도 빗겨 주었지만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부터는 그만두었다. 습관처럼 나를 끌어안고 눈물도 흘렸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지나갔다. 엄마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떴다. 가급적 숨기려고는했지만 엄마는 당연하게도 나를 원망했다. 누군가를 안쓰럽게 여길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대방의고통은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로 느껴지는 법이다. 밤이면 나는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닌 다음 마당도 마음대로 활보했고 그러고 나면 숲도 마음대로 누볐다. 더는 다른 사람의 삶이나 그들의 미래에 방해가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게는 미래가 없었다. 내게는 오로지 현재만, 달과 함께 변하는 변하는 듯했던 현재만 있었다. 발작, 고통의 시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지껄임만 없었더라면 나는 행복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 P170
너그러운 성품을 지닌 나는 그들이 마음속으로는 좋은 의도를 품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장례식을 치렀을 때 입은 흰 드레스에 동정녀에 걸맞은 흰 면사포를 둘렀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상황에 맞는복장을 차려입을 수 있어야 한다. 지저귀는 소리가 몹시 시끄럽게울려 퍼진다. 비상할 때가 된 것이다. 나는 불타는 지붕에서 혜성처럼 떨어질 것이고, 모닥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내 재에 대고 무수한 주문을 외워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진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기형적인 성인이 될 것이고 내 손가락뼈는 어둠의 유물로 팔릴 것이다. 그즈음이면 나는 전설이 될것이다. 천국에서라면 내가 천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천사들이나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다들 얼마나 놀랄까! 기대해 볼 법한 일이다. - P175
오래전 캐리스와 토니와 로즈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지니아는 그들의 연인을 한 번씩 빼앗아 갔다. 토니에게서는 웨스트를빼앗았다. 하지만 토니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했고 혹은그렇게 믿기로 했고 지금 웨스트는 토니의 집에 무사히 뿌리를내린 채 전자 음악 기기를 갖고 놀면서 시시각각 청력을 잃고 있다. 로즈에게서는 미치를 빼앗았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치가 바짓가랑이 단속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남자였던 터다. 하지만지니아는 미치의 주머니까지 털어먹고도 캐리스가 미치의 정신적 고결함이라 부른 것까지 앗아간 후 그를 차 버렸고, 미치는 결국 온타리오호에 투신해 익사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배를 타다가 사고사를 당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로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로즈는 실연을 극복했다. 적어도 그런 일을 겪은 여자가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은 극복했고, 지금은 금융 회사를 다니며 자기와더 잘 어울리고 미치보다 유머 감각도 좋은 샘과, 미치보다 월등히 훌륭한 남편과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상처는 여전하다. 그리고그 상처는 아이들마저 아프게 하고 있다. 이는 로즈가 과거지사를말끔히 잊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도 미치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더는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있어 봐야 뭐 하나 좋을 것도 없지만 말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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