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의 단단한 과육을 베어 물기만 하면 여름이 보인다. 먼지와 낮아지는 하늘. 여름은 내게는 여전히 폭풍우의 계절이다. 바싹 마른 낮과 끈끈한 밤은 내 머릿속에서 분간되지 않지만 폭풍우만은, 갑작스럽고 사나운 폭풍우만은 겁이 나면서도 내 갈증을 풀어주었다. 하지만내 기억은 불확실하다. 나는 우리가 살았던 마을의 여름 폭풍우를 회상하고 1929년에 어머니가 겪었던 여름을 상상한다. 그해 회오리바람이 로레인 남부를 덮쳐 반을 쓸어갔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난 어머니의 여름과 내 여름을 뒤섞는다. 딸기를 베어 물며, 폭풍우를 생각하며,
난 어머니를 본다. 얇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호리호리한 여자아이. 한 손은 엉덩이에 대고 다른 손은 허벅지 위로 늘어뜨리고 있다. 기다리면서. 바람이 휙 낚아채 아이는 집 위로 높이 솟구치지만, 여전히 엉 - P225

덩이에 손을 댄 채 서 있다. 빙그레 웃으며 늘어뜨린 손에 담긴 기대와 약속은 재앙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1929년 여름의 회오리바람에도어머니의 손은 소멸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강했고, 웃고 있었고, 주변세상이 무너져내리는데도 느긋했다. 기억은 이 정도로 해두자. 공적사실이 사적인 현실이 되고 중서부 마을의 계절은 우리의 작은 삶에서운명의 여신이 된다.
프리다와 내가 씨앗을 받았을 때는 이미 여름이 한창이었다. 우리는씨앗이 수없이 담긴 마법의 꾸러미를 4월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한 뭉치에 5센트씩 받고 팔면 새 자전거를 살 수 있겠지. 우리는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매일 한나절 씨앗을 팔며 동네를 돌아다녔다. 엄마는 친분이 있는 집과 아는 동네만 다니라고 했지만 우리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어주면 다 들락날락했다.  - P226

기름과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여섯 가구가 들어앉은 방 열두 개짜리 주택, 기찻길 근처 덤불 사이에 박힌 방 네 개짜리 아주 작은 목조주택, 어시장이나 정육점, 가구점, 술집, 식당 위에 자리한 상가주택, 꽃무늬 카펫과 물결모양 테두리의 유리그릇이 있는 작은 벽돌집.
씨앗을 팔던 그 여름 내내 우리는 돈 생각, 씨앗 생각뿐이라 사람들의 말을 거지반 흘려들었다. 아는 집에서는 우리에게 들어와 앉으라고하고 냉수나 레모네이드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서 땀을 식히는동안, 상대와 하던 대화를 이어가거나 집안일을 했다. 우리는 조금씩 얻어들은 이야기의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끔찍하고 참혹하고 은밀한 이야기. 그리고 그렇게 어렴풋이 대화를 엿듣는 일이 두세 번 있은 뒤에야 페콜라를 두고 하는 이야기임을 깨달았다.  - P226

"아니, 무슨 소리야. 겨우 열두 살인가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 그래도 어떻게 알아. 왜 저항도 안 했겠어?"
"했겠지."
"그럴까? 모를 일이지."
"뭐, 뱃속 아기가 멀쩡하진 못할 거야. 사람들 말이 그 엄마가 딸을얼마나 두들겨팼는지 안 죽은 게 다행이라고 하더만."
"아기가 죽으면 차라리 다행이지.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애가 나올테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법칙이잖아. 못생긴 사람 둘이 합쳐지면 더 못생긴게 나온다. 땅에 묻히는 게 차라리 낫지."
"나라면 걱정 안 하겠다. 멀쩡히 태어나면 그게 기적이지." - P228

우리는 경악했지만, 그런 놀라움은 어느새 묘한 방어적 수치감에 자리를 내주었다. 페콜라를 대신해 민망하고 마음이 상했고, 그리고 그아이가 안쓰러웠다. 너무 슬픈 마음에 새 자전거 생각은 저만치 멀어졌다. 슬픔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우리의 슬픔이 더 강렬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 일에 넌더리를 내고 흥미로워하고 경악하고 격분하고, 심지어 신이 난 모습이었다. ‘불쌍하기도 해라‘나 ‘아기가 불쌍해‘ 같은 말이 혹시 나오지 않을까 귀를 기울여도, 그런 말이나올 순간에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심어린 눈빛을 찾아보았지만 표정이 지워진 눈빛뿐이었다.
다들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아기를 떠올리자 내 눈에 아기가 아주또렷하게 보였다.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있었다. 양털 같은 머리칼이 머리를 둥글게 감싸고 시커먼 얼굴에는 5센트 동전 같은 맑고 검은 두 눈 - P228

이 있고, 나팔 모양 코에 두툼한 입술, 그리고 살아 숨쉬는 실크 같은검은 피부, 구슬처럼 파란 눈 위쪽으로 가짜처럼 보이는 금발 앞머리가 내려와 있지도 않고, 뾰족한 코나 얇은 입술이 있지도 않은. 그 흑인 아기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겠다 싶었는데 그런 마음이 페콜라에 대한 애정보다 더 강했다. 백인 아기 인형들과 셜리템플들과 모린 필들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분명프리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페콜라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고도 아기를 낳는 여자는많았다. 아기의 아버지가 페콜라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따져보지 않았다. 누가 되었든 남자에 의해 아기를 갖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겐 불가해한 것이었으니까. 자기 아버지였으니 적어도 페콜라가 아는 사람 아닌가. 우리는 오로지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향한 압도적인 미움만 생각했다. 우리는 미시즈 브리드러브가 페콜라를 후려치고는 우리 냉장고 문처럼 삐걱대는 소리를 내던 인형 같은 아기의 분홍색 눈물을닦아주며 달랬던 일을 떠올렸다.  - P229

학교에서 아이들이 ‘머랭파이‘의 시선을 받으면 눈길을 피하면서, 페콜라를 볼 때면 눈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억했다. 어쩌면 기억이 아니라 그냥 알았던 것일 수도 있다. 기억할 수 있는 때부터 내내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맞서 우리자신을 방어해왔다. 말은 전부 알아서 해독해야 하고, 모든 몸짓은 세심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여겼다. 우리는 고집불통이고 앙큼하고 교만해졌다. 우리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 스스로 우리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의 한계는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는 우리가 지닌 불리한 조건은 몸집, 딱 하나였다. 다들 우리보다 크고 힘이 세니까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연민과 자부심으로더 단단해진 자신감으로, 일이 진행되는 방향을 바꾸고 한 인간의 삶을 바꾸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 P230

그랬다.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 여자아이의 파란 눈을 갈망하고, 그 갈망의 중심에 자리한 참혹함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그런 갈망이 실현되었을때의 끔찍한 폐해뿐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프리다와 나는 이따금 그 아이를 보았다. 아기를. 조산하고 그 아기가 죽은 뒤에 다들 쑥덕거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에 보기 애처로웠다. 어른들은 시선을 돌렸다. 그애를 보고도 겁먹지 않는 아이들은 대놓고 비웃었다.
그애가 받은 손상은 전면적이었다. 허구한 날, 덩굴처럼 이어지는진초록 날들을, 자기 귀에만 들리는 아련한 북소리에 맞춰 고개를 홱홱 움직이며 거리를 오르락내리락했다. 팔을 접어 손을 어깨에 얹은채 파닥거렸다. 날아오르려 영원히 기를 쓰지만 그 헛된 노력이 기괴할 정도인 새처럼. 닿을 수 없는 볼 수조차 없는 마음속 계곡을 가득 채운 푸른 허공만을 응시하며, 날개는 있지만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헛되이 파닥거리는 새.
우리는 그애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보려 애썼다. 절대로, 절대로 가 - P246

까이 가지 않았다. 그애가 우스꽝스럽거나 혐오스러워서가 아니라,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애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꽃을피우지 못했다. 프리다 말이 옳았을 것이다. 내가 씨앗을 너무 깊숙이 심은 것이다. 난 어쩌면 그렇게 서툴렀을까? 그래서 우리는 페콜라 브리드러브를 피했다. 영원히.
세월은 손수건처럼 차곡차곡 접혔다. 새미는 오래전에 마을을 떠났다. 촐리는 노역장에서 죽었다. 미시즈 브리드러브는 여전히 가정부일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옮겨간 마을 변두리의 작은 갈색 집 어딘가에 페콜라가 있다. 지금도 간혹 그곳에서 그녀를 볼 수 있다. 새를 닮은 몸짓은 닳아 시들해져서 이제는 그저 폐타이어와 해바라기. 콜라병과 박주가리 사이에서, 세상의 모든 폐기물과 아름다움 - 그녀자신이 그런 존재였다-사이를 되는대로 돌아다닐 뿐이다.  - P247

우리 모두가 그녀 위로 쏟아버렸고 그녀가 받아들인 우리의 모든 폐기물. 그리고 처음에 그녀의 것이었으나 그다음에 우리에게 넘겨준 우리의 모든 아름다움. 우리는 그녀를 아는 우리 모두는 더러운 것을 전부 그녀에게 쏟아붓고 나서 아주 건전해진 기분이었다. 그녀의 추함을 발아래두고 당당히 설 때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소박함이 우리를 아름답게 꾸며주었고 그녀의 죄가 우리를 정당화했고 그녀의 고통이 우리를 건강한 혈색으로 빛나게 했고 그녀의 어색함을 보며 우리에게 유머감각이 있다고 여겼다. 그녀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유창하다고 믿었다. 그녀가 가난했기에 우리는 관대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백일몽까지 이용했다. 우리의 악몽을 잠재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으니, 그녀는 우리의 경 - P247

별을 받아 마땅했다. 우리는 그녀의 자아를 숫돌 삼아 우리 자아를 연마했고 그녀의 약점을 우리 인격의 완충재로 삼았고 우리가 강하다는환상 속에서 하품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환상이었다. 우리는 강한 것이 아니라 공격적이었을뿐이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방종했을 뿐이고, 인정이 있었던 것이아니라 정중했을 뿐이고, 선한 게 아니라 예의바르게 행동했을 뿐이었으니까. 스스로 용감하다고 자부하려고 죽음을 무릅썼고 삶에서는 도둑이 숨듯 숨었다. 올바른 어법을 총명함인 양 여기고 성숙함을 가장하려고 습관을 바꾸고, 거짓을 순서만 바꾸어 진실이라고 불렀으며,
새로운 패턴으로 늘어놓은 낡은 사고에서 계시와 신의 말씀이 보인다고 했다. - P248

하지만 그녀는 제정신의 경계를 넘어버렸다. 그렇게 미쳐버린 모습에 우리는 결국 따분해졌으므로 그녀는 그렇게 우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한 셈이었다.
오, 누군가는 그녀를 ‘사랑했다‘. 마지노선. 그리고 촐리도 사랑했다. 사랑했다고 난 믿는다. 어쨌든 그녀를 만지고 감싸고 자신의 일부를 내줄 만큼은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손길은 치명적이었고, 그가 준 것이 그녀가 지닌 고통의 모체를 죽음으로 채웠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을 수는 없다. 사악한 사람은 사랑도 사악하게 하고,
난폭한 사람은 사랑도 난폭하게 하고, 허약한 사람은 사랑도 허약하게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사랑도 어리석게 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의 사랑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선물이 없다. 그저 자기 혼자 사랑이라는 선물을 소유할 뿐. 사랑받는 이는 사랑하는 - P248

이의 내면의 시선이 쏘아대는 빛 속에서 자기 존재가 잘려나가고 무력화되고 얼어붙는다.


그래서 이제 나는 쓰레기를 뒤지는 그녀를 본다. 무엇을 찾느라? 우리가 암살한 것? 난 내가 씨앗을 너무 깊숙이 심은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흙과 땅과 우리 마을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그해에온 나라의 땅이 금잔화에 적대적이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 토양은어떤 부류의 꽃이 자라기에 좋지 않다. 이 토양에서는 어떤 씨앗은 무럭무럭 크지 않고, 어떤 열매는 결실을 맺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땅이자기 의지로 무언가를 죽이면 우리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피해자에게 살 권리가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틀린 것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미 늦었으니까. 적어도 우리 마을의 변두리에서는, 우리 마을의 쓰레기와 해바라기 사이에서는 아주 아주 아주 늦었으니까.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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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젊었다. 겨드랑이와 궁둥이 냄새에 멋진 사향향기가 섞여들기도 했다. 은근한 눈빛에 살짝 벌어진 입술, 가느다란검은 목 위로 우아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사슴과 다를 바 없었다. 깔깔거리는 웃음은 소리라기보다 어루만짐이었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었다. 뒷문을 통해 조금씩 삶 속으로 들어갔다. 어떤 상태로 되어감. 세상 사람 모두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있었다. 백인 여자는 ‘이거 해‘라고 말했고, 백인 아이들은 ‘저거 줘‘라고 말했다. 백인 남자는 ‘이리 와‘라고 했다. 흑인 남자는 ‘누워‘라고 했다. 명령하지 않는 존재는 흑인 아이들과 서로서로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전부 받아들여 자기 이미지로 재창조했다.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았고, 그래서 다 알았다. 백인 남자가 자기 남편을 때리면 바닥에 떨어진 피를 닦고, 집에 돌아가면 그 피해자의 학대를 견뎌야했다. - P170

한쪽 손으로는 아이들을 때리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그 아이들을 위해 물건을 훔쳤다. 나무를 베어 넘어뜨린 손으로 탯줄도 잘랐고,
닭 목을 비틀고 돼지를 잡은 손으로 아프리카 제비꽃을 잘도 피워냈다. 다발과 뭉치와 자루를 나르던 팔로 아기를 가만가만 흔들어 재웠다. 비스킷 반죽을 잘 매만져 순결한 타원형 페이스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고인에게 수의를 입혔다. 하루종일 밭을 매고도 집에 돌아오면남편의 사지 아래 자두처럼 들어가 누웠다. 노새에 올라앉았던 그 다리로 남편 엉덩이에 올라탔다. 다른 점이라고는 그 정도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늙었다. 뼈가 불거지고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 P170

사탕수수밭에서 쭈그린 채, 면화밭에서 허리를 숙인 채 강둑에서 무릎좋은 채, 그들은 머리 위에 세상을 이고 살아왔다. 자식들의 삶은자식들에게 넘기고 손주를 돌봤다. 이제는 안도하며 낡은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가슴에 면직물을 둘렀다. 두꺼운 양말을 신었다. 욕정과 수유는 다 끝났고, 눈물과 두려움도 넘어섰다. 미시시피의 길이나 조지아의 골목이나 앨라배마의 들판을 걸어도 괴롭힘당하지 않는 사람은그들뿐이었다. 언제고 어디서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도 될 나이였다. 죽음을 고대할 만큼 지쳤고, 고통의 존재는 모른 체하면서도 고통이라는 관념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무심해졌다. 마침내, 실제로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리고 이 늙은 흑인 여성들의 삶은 그 눈 속에 집약되었다. 비극과 유머, 짓궂음과 평온함, 사실과 환상이 뒤범벅된 그 표정에. - P171

다정함이 솟구쳐서 그는 무릎을 꿇고 딸의 발을 바라보았다. 네발로 기어가서 손을 들어, 종아리 쪽으로 올라간 발을 잡았다. 페콜라가 균형을 잃으며 자빠지려는 찰나, 넘어지지 않도록 촐리가 다른 손을 들어 엉덩이를 받쳤다. 촐리는 고개를 숙이고 딸의 장딴지를 야금야금 깨물었다. 탄탄한 살맛에 그의 입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눈을 감고 손가락을 딸의 허리께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딸은 깜짝 놀라 몸이 뻣뻣해지고 망연자실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폴린의 편한 웃음보다 나았다. 엉망으로 뒤섞인 폴린에 대한 기억과 해서는 안될 짓을 한다는 의식이 그를 흥분시켰고, 욕망이 번개 치듯 뻗어내려 그의 성기가 팽창하며 항문이 부드러워졌다. 공손함이 이 욕정 전체를빙 둘러쌌다.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다정하게. 하지만 다정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질이 얼마나 단단히 조여 있던지 더는 참을 수가없었다. 그의 영혼이 내장을 타고 미끄러져내려가 그녀의 몸속으로 날아들 것처럼, 어마어마한 힘으로 성기를 쑤셔넣자 그녀에게서 나올 수있는 단 하나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목구멍 뒤쪽으로 공기를 훅 들이마시는 소리. 서커스 풍선에서 한순간에 공기가 빠져나가듯. - P198

예전에 사물을 사랑하는 노인이 있었다. 사람과는 살짝만 맞닿아도약하지만 지속적인 구역질이 일어서였다. 이런 혐오감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기억에 없고, 그런 혐오감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어릴 때는 남들에게 없는 이런 반감 때문에 매우 불안했지만,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배운 것들 가운데 ‘인간혐오‘라는 단어가있었다. 그런 꼬리표가 위로와 용기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악에이름을 붙이면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중화할 수는 있다고 믿게 되었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각 시대의 위대한 인간혐오자 몇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들과의 정신적 동반관계가 그를 달래주고 자신의 변덕과열망과 반감을 가늠하는 척도를 제공했다. 게다가 인간혐오가 인격을계발하는 뛰어난 수단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치미는 반감을 눌러가 - P200

이따금 상대를 어루만지고 도움이나 조언을 주고 친분을 맺을 때면자신의 행동이 관대하고 의도는 고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인간적 노력이나 결점에 울화가 치밀면, 자신이 안목이 뛰어나고 가탈스러을사람이라 자잘한 거리낌이 많을 뿐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
인간혐오가 대개 그렇듯이, 그 역시 사람을 업신여기다보니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상대의 신용을 얻는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직업, 아주 친밀한 관계가 요구되는 직업에 종사했다. 한동안 성공회 목사가 되어볼까 하다가 그 생각을 버리고 사회복지사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운도 때도 맞지 않아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자유와 만족을 모두 보장하는 직업에 안착했다. ‘마음을 읽고 조언하고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에게 아주 잘맞는 직업이었다. 시간을 마음대로 정하고, 경쟁자도 별로 없고, 고객은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라 다루기 쉬웠다. 함께 나누거나 거기에 물들지 않으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목격하고, 썩어가는 신체를 바라보며 자신의 까다로움을 육성할 무궁무진한 기회를 누렸다. 수입은보잘것없었지만 그는 사치를 즐기지 않았다. 한때의 수도원 생활로 고독을 더 좋아하게 된 동시에 타고난 금욕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독신의 삶은 피신처였고 침묵은 방패가 되어주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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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드러브 가족의 집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석탄 난로뿐이었다. 난로는 그 무엇이나 그 누구와도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스스로 알아서 불을 ‘꺼뜨리거나‘ ‘재로 덮어두거나‘ ‘불꽃을 피워올리거나‘ 했다. 석탄을 넣어주는 것이 그 가족이고, 살살 뿌린다. 한꺼번에 붓지 않는다. 너무 많은 양을 넣지 않는다 같은 상세한 식습관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불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살아나고 잦아들고죽는 듯했다. 하지만 아침에는 늘 죽어 있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 P55

얼마 전부터 페콜라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 눈이, 장면을 담고 광경을 알아볼 자기 눈이 달라진다면, 그러니까 아름다워진다면 자신도 달라지지 않을까. 치아는 가지런했다. 적어도 코는 크지도 납작하지도 않았다.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애들 중에 그런 코를 가진 애들이 있었다. 자기가 아름다워지면, 지금과 달라지면, 어쩌면 촐리도 달라지고 미시즈 브리드러브도 달라질지 몰랐다. "아니, 저 예쁜 눈을가진 페콜라를 봐. 저 예쁜 눈앞에서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되겠어." 그렇게 말할지도 몰랐다.

예쁜 눈. 예쁜 파란 눈, 커다랗고 예쁜 파란 눈, 달려, 지프, 달려, 지프가달린다, 앨리스도 달린다. 앨리스 눈은 파랗다. 제리 눈은 파랗다. 제리가 달린다. 앨리스가 달린다. 그들은 파란 눈을 가지고 달린다. 파란 눈 네 개. 예쁜파란 눈 네 개. 하늘색 눈, 미시즈 포러스트의 파란 블라우스 파란 눈, ‘나팔꽃 파란 눈. 앨리스와 제리』 이야기책 파란 눈. - P65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호기심이 들어앉아야 마땅한자리인데 텅 빈 공간이 보인다. 그것만이 아니다. 인간적 인식의 완전한 부재, 투명한 막이 입혀진 단절. 그의 시선이 왜 중도에 정지했는지그녀는 모른다. 아마 그는 어른이고 남자인데, 그녀는 어린 여자애라서 그럴 수도.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어른 남자의 눈에서 관심과 혐오, 심지어 분노까지 보아왔다. 이 텅 빈 공간이 새롭지는 않다. 거기에는날카로운 날이 있다. 눈꺼풀 안쪽 어딘가에 불쾌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녀는 모든 백인의 눈에 그런 불쾌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니까. 그 불쾌감은 그녀를, 그녀의 검은 피부를 향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내면에 지닌 것은 전부 유동적이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검은 피부는 고정적이고 두려움의 대상이다. 백인의 눈에불쾌감이라는 날을 지닌 텅 빈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바로 흑인이라는 특성이다. - P68

차라리 분노가 낫다. 분노에는 존재감이 있다. 현실성과 존재감. 가치의 깨달음. 그 솟구칩은 근사하다. 야코프스키의 눈과 가래 끓는목소리로 생각이 되돌아간다. 분노는 지속되지 못한다. 강아지는 너무 쉽게 물려버린다. 갈증이 금방 사라지고 바로 잠이 든다. 수치감이다시 차올라, 흙탕물이 눈으로 스며든다. 눈물이 나기 전에 뭘 해야 할까. 메리 제인을 기억해낸다.
연노랑 포장지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탕 이름의 주인공인 메리제인의 그림. 미소 짓는 하얀 얼굴, 살짝 헝클어진 금발과 청결하고 안락한 세상에서 페콜라를 바라보는 파란 눈, 성마르고 짓궂은 눈. 페콜라에게는 그저 예쁘기만 하다. 사탕을 입에 넣으니 달콤해서 참 좋다.
사탕을 먹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 눈을 먹는 것이고 메리 제인을 먹는것이다. 메리 제인을 사랑하고 메리 제인이 되는 것이다.
3페니는 그녀에게 메리 제인과 아홉 번의 근사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사탕 이름의 주인공인 멋진 메리 제인. - P70

첫 나뭇가지는 녹색이고 가늘고 유연하다. 고리가 되도록 동그랗게구부려도 부러지지 않는다. 개나리와 라일락 관목에서 돋아난 그 섬세하고 눈부신 희망, 그것은 고작 매질 방식이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봄의 매질은 달랐다. 겨울날 가죽띠의 둔탁한 아픔 대신 등장한 새로운녹색 회초리의 쓰라림은 매질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길쭉한 나뭇가지에는 신경질적인 비열함이 서려 있어서, 우리는 가죽의 한결같은 강도나 단단하지만 솔직한 솔빗의 찰싹하는 소리를갈망했다. 지금도 내게 봄이란 여전히 회초리의 통증에 대한 기억으로가득해서, 개나리를 봐도 전혀 신이 나지 않는다.
어느 봄날 토요일에 나는 공터 풀밭에 주저앉아 박주가리 줄기를 찢으며 개미와 복숭아씨와 죽음에 대해, 눈을 감으면 세상이 어디로 사 - P123

라지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 게분명했다. 집을 나설 때 나를 앞서가던 그림자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아예 사라졌으니까. 집안에 들어서니, 불편한 정적이 들어찬 집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문득 기차와 아칸소를 들먹이는 어머니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개킨 노란 커튼을 안고 뒷문으로 들어와부엌 탁자에 잔뜩 쌓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노랫말을 들으려 했는데.
문득 어머니의 행동이 어째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여전히 모자를쓴 채였고, 진창길을 걸어온 것처럼 신발도 진흙투성이였다. 어머니는불 위에 물을 올린 뒤 포치 바닥을 쓸었다. 그러고는 커튼 봉을 내렸는데, 커튼을 걸지는 않고 다시 포치로 나가 비질을 했다. 그러는 내내기차와 아칸소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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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쉬쉬했지만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금잔화가 자라지 않은 까닭이 페콜라가 자기 아버지의 애를 가져서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살펴봤다면, 훨씬 덜 우울했다면, 우리 씨앗만 싹을 틔우지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누구의 씨앗도 싹이 트지 않았으니까. 그해는 금잔화가 호숫가의 정원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페콜라가 무사히 건강한 아기를 낳아야 할 텐데, 그 걱정이 태산이라 우리 마법을 거는 일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씨앗을 심고 거기에 꼭 맞는 주문을 외워주면꽃이 피고 다 괜찮아지리라는 마법.
한참이 지나서야 언니와 나는 우리 씨앗에서 초록 싹이 나오지 않으리라는사실을 인정했다. 알고 나니, 상대를 탓하며 비난하고 싸우는 것으로나 우리의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난 언니 말이 맞는다고, 내 탓이라고 생 - P19

각했다. 내가 씨앗을 너무 깊숙이 심었다고. 땅 자체가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둘 다 하지 못했다. 페콜라의 아버지가 자기 씨를 자기 땅검은 흙에 뿌린 것처럼 우리도 우리 땅 검은 흙에 우리 씨앗을 뿌렸다. 그의욕정이나 절망이 그랬듯 우리의 순진함과 믿음 역시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그 모든 희망과 두려움과 욕정과 사랑과 슬픔에서남은 것이라고는 페콜라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땅뿐이라는 사실이다. 촐리브리드러브는 죽었고 우리의 순진함도 죽어버렸다. 씨앗은 쪼그라들어 죽었고, 페콜라의 아기도 죽었다.
정말이지 더는 할말이 없다. 어째서라는 질문을 빼면. 하지만 어째서란 다루기 영 힘든 문제이니 어떻게에서 피신처를 구해야만 한다. - P20

수녀들은 욕정처럼 조용히 오고가고, 취한 남자들과 취하지 않은 눈들이 그리스호텔 로비에서 노래를 한다. 자기 아버지 카페 위층에 사는 우리 이웃 친구 로즈메리 빌라누치는 1939년식 뷰익에 앉아 버터바른 빵을 먹고 있다. 그애는 차창을 내리더니 프리다와 내게 우리는출입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빵이 먹고 싶어 그애를 빤히 바라보는데, 무엇보다 그 눈에서 오만함을 뽑아내고 싶고 우물우물 빵을씹는 입에서 소유의 자만심을 박살내고 싶다.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흠씬 두들겨패서 그 하얀 피부에 벌건 자국을 만들어줘야지. 그러면그애는 질질 짜면서 바지를 내려야 하느냐고 묻겠지. 우리는 아니라고대답할 것이다. 정말 바지를 내린다면 우리 기분이 어떨지, 뭘 어떻게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그애가 그렇게 물을 때면 뭔가 소중한 것을 주 - P23

겠다는 것이므로 받지 않겠다고 해야 우리 자부심을 내보일 수 있다는사실을 우리는 안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프리다와 나는 새 갈색 스타킹과 간유를 받았다. 어른들은 피곤하고 날선 말투로 지크 석탄회사에 대해 떠들고, 저녁이면 우리를 기찻길로 데리고 간다. 그러면 우리는 널려 있는 작은석탄조각을 주워 마대에 담는다. 나중에 집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면, 시뻘겋게 달아 연기를 피워올리는 광석 찌꺼기를 화차들이 잔뜩 실어다 제철소를 둘러싼 협곡 아래로 내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꺼져가는 불이 칙칙한 오렌지빛으로 하늘을 밝힌다. 주위는 온통 시커먼데 색을 지닌 그 작은 부분을 바라보느라 프리다와 나는 뒤로 처진다.
그러다가 자갈길을 벗어나 들판의 죽은 풀 사이로 발이 푹 빠지기라도하면 몸서리가 안 날 수가 없다. - P24

어머니가 계속 웅얼거린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다. 토사물을 보며말하는데 내 이름인 클로디아라고 부른다. 최대한 닦아낸 뒤, 여전히젖어 있는 넓은 부분을 빳빳한 수건으로 덮는다. 난 다시 눕는다. 창문틈에 끼운 헝겊이 떨어져 방안 공기는 차다. 차마 어머니를 다시 부르지는 못하겠고, 따뜻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싫다. 어머니가 화를 내면 난 굴욕감이 든다. 하는 말마다 내 뺨이 거칠게 쏠리는 느낌이라 울음이 터진다. 내가 아니라 내 병 때문에 화를 낸다는 사실을 나는 모른다. 어머니는 병에 ‘휘둘린‘ 내 허약함을 경멸한다고 믿는다. 머지않아난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지금은 울음이 터진다. 울면 콧물이 더 많아진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언니가 들어온다. 슬픔이 가득한 눈길로 내게 노래를 불러준다. "졸린 정원 담벼락에 진보라색이 드리우면 누군가 나를 생각하겠지......"
난 자두와 담벼락과 ‘누군가‘를 생각하며 깜빡 잠이 든다. - P26

어른들의 대화는 은근히 짓궂은 춤 같다. 소리와 소리가 만나 인사하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추다가 물러난다. 다른 소리가 등장하지만 곧또다른 소리가 무대를 차지한다. 두 소리는 서로 원을 그리며 돌다가멈춘다. 때로는 말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높이 솟구친다. 또 어떤 때는요란하게 뜀뛰기를 하다가 그 모두가 젤리로 만든 심장이 고동치듯 훈훈하게 벌떡거리는 웃음소리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들 감정의 뾰족한날과 찌르기와 구불거림이 프리다와 나에게는 항상 명료하다. 나는 아홉 살, 언니는 열 살이라 우리는 대화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얼굴과 손과 발을 주시하고, 음색에 깃든 진실에 귀기울인다. - P30

우리는 나앉는 것이 삶의 진짜 공포임을 알았다. 당시에는 나앉게될 위험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이 잦았다. 도를 넘을 뻔하다가도 그생각에 다들 멈칫했다. 너무 많이 먹으면 결국 나앉게 될 수 있었다. 석탄을 너무 많이 태워도 나앉게 될 수 있었다. 도박을 하거나 술독에빠져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때로 어머니가 아들을 나앉게 만들기도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아들이 무슨 짓을 했건 다들 그를 동정했다. 아무개가 나앉았는데, 그의 피붙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집주인 때문에 나앉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불행한 일이지만 돈벌이가 자기 의지대로 되지는 않으니 그 또한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삶의 일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태만해서 나앉거나 자기 피붙이를 나앉게 할 정도로 매정하다면 그건 범죄나 다름없었다. - P32

내쫓기는 것과 나앉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내쫓기면 어딘가 갈 데가있지만, 나앉으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였다. 나앉는다는 건 무언가의 끝이었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조건을 정의하고 보완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리적 사실이었다. 신분과 계급 모두에서 소수자인 우리는 삶이라는 옷자락의 끝단에서 어떻게든 돌아다니며, 나약한 우리끼리라도 뭉쳐 버티려 기를 쓰거나 혼자서 옷의몸통 부분으로 기어올라가려 버둥거렸다. 그런데 존재의 주변성으로 - P32

말하자면 우리가 대처할 방법을 배워 아는 것이었다. 아마 추상적인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길에 나앉는다는 구체성은 다른 문제였다. 죽음의 개념과 실제 죽음이 다른 것처럼. 죽은 상태는 변하지 않고, 나앉는 것도 여기 계속 있을 것이다.
나앉는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재산과 소유를 향한 갈망이 자라났다. 마당과 포치와 포도 시렁의 확고한소유 재산을 가진 흑인은 자기 둥지에 모든 열정과 사랑을 쏟았다. 광분하여 필사적인 새처럼 무엇이든 과도하리만치 장식했다. 힘들여 얻은 집을 두고 수선을 떨고 안절부절못했다. 여름 내내 조림과 잼과 보존식품을 만들어 찬장과 선반을 가득 채웠다. 집 구석구석을 칠하고뒤지고 쑤석거렸다. 그래서 그런 집들은 셋집이라는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온실 속 해바라기처럼 위용을 과시했다. 셋집살이하는 흑인들은그들이 소유한 마당과 현관을 슬쩍슬쩍 건너다보며 ‘작고 오래된 근사한 집‘을 장만하는 일에 더욱 일로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집을가질 날을 고대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긁어모아 가축우리 같은 셋집에 할 수 있는 한 쌓아올렸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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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편에 서고 싶은가. 혐오의 편에 서고 싶은가, 작은 친절편에 서고 싶은가. 영화 <르아브르) 속에서 난민 소년 옆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배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의 답은 명확했다. 자신이 당한 인종차별 앞에서는 분노하면서,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여행의 끝이 되어서야 이런 생각이 찾아왔다는 건 두 달간 내여행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방증하는 걸지도 몰랐다. 놀랍게도 모두 친절했고, 기적처럼 어떤 위험도 만나지 못했다.
이 운이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운이나에게 찾아와서 나는 파리에서 안전하게 행복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한다. 부랴부랴 남편에게 연락을 한다. 오늘 내가 탄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에 대해 긴 수다를 시작한다. 이제 파리의 시간은 3일 남았다. - P303

여행 초반에는 모두 설렘 필터를 끼고 여행지를 둘러본다. 이름 없는 작은 공원에도 설레고, 시장에 과일이 예쁘게 쌓여만 있어도 카메라를 든다. 풀밭에 누운 사람들은 낭만으로 해석되고, 낯선 언어로 된 간판들 하나까지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설렘은 곧 산화된다. 심드렁 필터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 풍경이 저 풍경 같고, 특별함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새로운 걸 경험해도 잠깐 즐겁고 또 금방 무심해진다. 익숙한 맛이 그립고, 때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찾아온다. 체력적으로도 좀 지친다. 여행중반기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다 떠날 날이 가까워지면 우리는 갑자기 애틋 필터를 - P304

장착한다. 뭘 보더라도 애틋하다. 어딜 가더라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이 새삼스럽고,
매일 먹던 맛이 결정적인 맛으로 둔갑한다. 이곳이 더 이상 나의 일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고, 천천히 걷게 된다. 나의 여행은 한 번도 이 공식을벗어난 적이 없다. 두 달의 파리 여행도 똑같은 공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파리와 산뜻하게 이별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정작 겪어보니 참으로 곤란했다. 나는 참으로 파리와의 이별식을 혼자 요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욕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나타나니 자꾸 또 욕심을 내게 되었고,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무엇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아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길을 걷던 내 눈에 술집 간판 하나가 눈에들어왔다. Demain, C‘est Loin. 뭐라고? 내일은 아직 멀다고? - P305

문장 하나를 손에 쥐고 계속 걸었더니 문득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로댕 작품이 생각났다. 로댕은 1880년부터 죽을 때까지 30년 넘게 <지옥의 문>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지옥의 문>을 완성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1년 넘게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신곡> 속 <지옥 편>에 나온 이야기들을 작품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지옥의 문 앞에 서서 작품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문에 있는 수많은 인간 군상이 하나하나 독립적인 작품임을 알게 된다. 가장 유명한 건 문의 맨 위에서 지옥을 내려다보고 있는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문의 왼쪽 아래에는 우골리노백작과 그의 죽은 자식들이 있다.
단테의 《신곡》 속 우골리노는 13세기 이탈리아 귀족이다. 대주교 루지에리와 함께 음모를 꾸몄지만, 루지에리의 배신으로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와 함께 피사의 탑 속에 감금이 된다. 탑의 열쇠는 강으로 던져졌다. 그들은 꼼짝없이 탑 속에 갇혀하나둘씩 굶어 죽는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우골리노는 고통과 비탄과 굶주림 속에서 결국 자식의 시신을 먹으며 버텨 마지막 생존자가 된다. 그것이 우골리노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다. - P307

단테의 신곡》도 안 읽었고 우골리노는 더더욱 몰랐던 나는,
며칠 전 오르세 미술관 2층에 갔다가 로댕의 <지옥의 문> 옆에우골리노 조각이 단독으로 크게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아무 배경지식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궁금했다. 거인 같은 남자가 비탄에 잠겨 바닥을 기고 있다. 그 옆으로 작은 사람들이 죽어 있다. 남자 발치의 갓난아기도 죽어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묘사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혼자 살아남은 저 거인 같은남자의 표정이 저런가. 어떻게 저런 감정을 작품에 그대로 옮겨올 수 있는가. 남자의 비통함은 나에게로 곧바로 전이되어 나도 비통한 심정으로 작품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우골리노라는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단테의 《신곡》 속 우골리노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 P308

계속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바라보고, 오른쪽에서 다시 왼쪽에서 바라보았다. 앙상하게 말라 뼈가 다 드러난 얼굴. 감정을 숨길 구석조차 다 사라진 벌거벗은 얼굴.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각각의 각도에서 감정이 다 다르다는 걸 알아채게 되었다. 정면에서 얼굴을 바라보면 참담한 현실에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이다. 시선은 오갈 데를 모르고 텅 비어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식들이 다 죽어 있는데, 무슨 이런형벌이 다 있는가. 그 와중에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 가장 참담한 형벌이다. 우골리노의 왼쪽 얼굴에는 (관람객의 시선에서 봤을 때는 오른쪽) 그 비참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롯한 슬픔. - P308

비탄, 참척의 고통. 하지만 우골리노의 오른쪽 얼굴을 보는 순간, 섬뜩함이 느껴졌다. 다른 어떤 각도의 표정과도 달랐다. 그것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물적 본능이 지배한 얼굴. 본능이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 본능이 자식의 시신을 먹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 인간이길 포기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다시 정면에서 보면 그 막막하고도 고통스럽고도 살고자 몸부림치는 한 인간이 드러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면면이 이토록 다르다. - P309

다시 한 인간의 얼굴을 그토록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 건까르띠에 재단에서 열린 론 뮤익 전시에서였다. 론 뮤익은 몇 해전 한국에서도 전시를 한 극사실주의 조각가다. 그는 특히 대형 인체 조각으로 유명한데, 한국 전시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건 6미터가 넘는 여인의 조각이었다. 커다란 침대에 누운 이거대한 여자는 어찌나 사실적인지, 혈관부터 주름과 머리카락한 올 그리고 무엇보다 표정까지 다 살아 있는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의 충격이 여전히 생생한데, 오랜만에 파리에서 다시 론 뮤익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까르띠에 재단이 숙소근처였던지라, 어느 날 닫혀 있는 그곳 앞을 지나다가 3미터는족히 넘을 것 같은 하얀색 두개골들이 전시장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전시를 준비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바로 론 뮤익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전시가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까르띠에 재단으로 달려갔 - P309

다. 수십 개의 두개골이 나동그라진 모습도 장관이었고, 5미터가 넘는 신생아의 사실적인 모습도 장관이었지만, 내가 떠날수 없었던 작품은 배를 탄 남자를 표현한 (Man in a Boat〉라는 작품이었다. 낡은 배에 혼자 앉아 있는 이 벌거벗은 남자는팔짱을 낀 채 목을 길게 빼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뭔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깐깐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성마른 표정.
그 누구도 쉽게 믿을 리 없는 얼굴. 하지만 조명이 비추는 그의왼쪽 얼굴 쪽으로 다가가자 조금 다른 면이 보인다. 분명 지쳐있지만 혹시나 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표정이었다. 희박한 희망만큼이나 간절한 얼굴. 하지만 조명이 닿지 않은 반대쪽 얼굴을 보았더니, 그곳은 이미 포기가 장악했다. 자신에게 희망의 신호가 도착할 리 없다는 절망으로 가득한 얼굴. 언뜻보았을 때는 성마르게 생긴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인간은 한순간에도 여러 감정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 P310

"그때 그 사람 얼굴 봤어?" 라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단정 지으며 이야기하는가. 상대에 대해서 얼마나 주저 없이 간편하게결론을 내리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하나의 얼굴로 살지 않는다. 한순간에도 정면과 오른쪽과 왼쪽 얼굴은 모두 다른 말을한다. 로댕의 우골리노가 그랬고, 론 뮤익의 보트 속 남자가 그랬다. 그리고 매 순간의 우리가 그렇다.


예술가들이 그 순간을 포착해서, 우리에게 순간의 풍성함을 - P310

다 안겨주고 있었다. 한 번에 한 순간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를위해 한순간의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아무런근거도 없는 나의 해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미술 작품들은 언제나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답을 던져주는 존재다. 내가 그 답이 필요했기에, 작품에서 그 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게 객관적인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간절한 답, 내가 기댈 수 있는 답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로댕과 론 뮤익, 조각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아티스트가 나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던졌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두 개의 메시지가 연결되어내 마음에 박혔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Demain, C‘est loin‘이라는 술집 간판 앞에서 뜬금없이 연결이 된 거다. - P311

빠르게 판단했고, 단숨에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세세한 결을 헤아려야 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그게 짐스럽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속도는 능력이었고, 단순함은 결단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복잡한 감정을 털어놓을 때도, 나는 결론부터 궁금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물며 나의 감정도 뭉뚱그려서 구석에 처박아놓는 일이 많아졌다. 그 감정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도 있으니까. 복잡한 걸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게 일에서는꼭 필요한 능력이었지만, 그 능력이 불필요하게 일상에서도발휘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매일 책임질 일이 너 - P311

무 많았으니까. 매일 눈앞에 빚쟁이처럼 달려드는 일들 앞에서 정신을 차리려면 어쩔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제과거다.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좋아하는 조각상 앞에서의 나를 소환해낸 것이다. 그 앞에서의 나는 회사에서의 나와는 명백히 달랐다.


두 달 전, 파리의 시간이 내 앞으로 쭉 뻗어져 있었다. 정해진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매일 내 마음의 결만 보살피며 그날 하루의 모양을 결정했다. 그 시간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시간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온몸으로 살았다. 이 시간은 내가 마련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이 시간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도 나의 몫이었다. 꿈을 살기 위해 왔다면 내 꿈에 부합하는 시간을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내야만 했다.  - P312

매일을 살고, 매일을 곱씹었다. 매일의 섬세한 맛까지 다 느끼고 싶어 매 순간 열심이었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지금부터는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결국 내가 기댈 것은 그 시간뿐이다. 정해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나에게 매일 도착할 24시간. 그 시간을 파리에서의 나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내일은 저 멀리 두고, 아니, 내일을 차라리 잊고, 오늘을 살면 어떨까. 매 순간의 결들을 풍성하게 맛보며. 다채로운 감정을 곱씹어 차근차근 알아채며. 조금은 느긋하게, 조금은 고요하게, 훨씬 더 깊게. - P312

결국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정적인돈 대신 넘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24시간을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정된 삶을 지키는 대신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고 싶다. 그렇다면 너무 모든 걸 정하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목표 같은 건 당분간 잊는 건 어떨까. 40년 넘게 정해진 모양대로 살았는데, 앞으로의 모양도 정해져 있다면 조금 슬플 테니까. 무정형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 찬찬히 나만의 하루를완성해내고 싶다.
자주 불안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의심할 것이다. 24시간을 받아 들고 한숨을 내쉬기도 할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 겨우 이거였나 고민할 것이다. 파리에서의 내가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치의 반짝임을챙기려 애쓴다면, 결국은 행복한 인생이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지난 두 달간 그랬던 것처럼. - P313

막막한 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고독한 만큼 깊어질 것이다.
불안한 만큼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이제 끝나지만,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 P314

파리의 무엇이 그렇게나 좋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대답하긴 어렵다. 사랑은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매력적이고, 웃기고, 다정하고, 감동을 줬다가, 또 울렸다가, 새침했다가 또 자기 방식대로 친절했던 파리. 그 모든 시간이 빚어낸 울퉁불퉁한 파리가 나에게 있다. 이 파리의 모양은 내 마음에 꼭든다. 그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파리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해버리는 것은 참 귀한 능력이라고. 오래전 분명 자신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그 마음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기분이라고. 좋아하는 마음은, 이토록이나 전염성이 강하다.


부디 이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염되길.
그리하여 멀지 않은 어느 날
부디 당신도 당신의 그곳에 도착할 수 있길.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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