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쉬쉬했지만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없었다. 당시 우리는 금잔화가 자라지 않은 까닭이 페콜라가 자기 아버지의 애를 가져서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살펴봤다면, 훨씬 덜 우울했다면, 우리 씨앗만 싹을 틔우지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누구의 씨앗도 싹이 트지 않았으니까. 그해는 금잔화가 호숫가의 정원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페콜라가 무사히 건강한 아기를 낳아야 할 텐데, 그 걱정이 태산이라 우리 마법을 거는 일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씨앗을 심고 거기에 꼭 맞는 주문을 외워주면꽃이 피고 다 괜찮아지리라는 마법.
한참이 지나서야 언니와 나는 우리 씨앗에서 초록 싹이 나오지 않으리라는사실을 인정했다. 알고 나니, 상대를 탓하며 비난하고 싸우는 것으로나 우리의 죄책감을 덜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난 언니 말이 맞는다고, 내 탓이라고 생 - P19

각했다. 내가 씨앗을 너무 깊숙이 심었다고. 땅 자체가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둘 다 하지 못했다. 페콜라의 아버지가 자기 씨를 자기 땅검은 흙에 뿌린 것처럼 우리도 우리 땅 검은 흙에 우리 씨앗을 뿌렸다. 그의욕정이나 절망이 그랬듯 우리의 순진함과 믿음 역시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했다. 이제 분명해진 것은 그 모든 희망과 두려움과 욕정과 사랑과 슬픔에서남은 것이라고는 페콜라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땅뿐이라는 사실이다. 촐리브리드러브는 죽었고 우리의 순진함도 죽어버렸다. 씨앗은 쪼그라들어 죽었고, 페콜라의 아기도 죽었다.
정말이지 더는 할말이 없다. 어째서라는 질문을 빼면. 하지만 어째서란 다루기 영 힘든 문제이니 어떻게에서 피신처를 구해야만 한다. - P20

수녀들은 욕정처럼 조용히 오고가고, 취한 남자들과 취하지 않은 눈들이 그리스호텔 로비에서 노래를 한다. 자기 아버지 카페 위층에 사는 우리 이웃 친구 로즈메리 빌라누치는 1939년식 뷰익에 앉아 버터바른 빵을 먹고 있다. 그애는 차창을 내리더니 프리다와 내게 우리는출입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빵이 먹고 싶어 그애를 빤히 바라보는데, 무엇보다 그 눈에서 오만함을 뽑아내고 싶고 우물우물 빵을씹는 입에서 소유의 자만심을 박살내고 싶다.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흠씬 두들겨패서 그 하얀 피부에 벌건 자국을 만들어줘야지. 그러면그애는 질질 짜면서 바지를 내려야 하느냐고 묻겠지. 우리는 아니라고대답할 것이다. 정말 바지를 내린다면 우리 기분이 어떨지, 뭘 어떻게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그애가 그렇게 물을 때면 뭔가 소중한 것을 주 - P23

겠다는 것이므로 받지 않겠다고 해야 우리 자부심을 내보일 수 있다는사실을 우리는 안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프리다와 나는 새 갈색 스타킹과 간유를 받았다. 어른들은 피곤하고 날선 말투로 지크 석탄회사에 대해 떠들고, 저녁이면 우리를 기찻길로 데리고 간다. 그러면 우리는 널려 있는 작은석탄조각을 주워 마대에 담는다. 나중에 집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면, 시뻘겋게 달아 연기를 피워올리는 광석 찌꺼기를 화차들이 잔뜩 실어다 제철소를 둘러싼 협곡 아래로 내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꺼져가는 불이 칙칙한 오렌지빛으로 하늘을 밝힌다. 주위는 온통 시커먼데 색을 지닌 그 작은 부분을 바라보느라 프리다와 나는 뒤로 처진다.
그러다가 자갈길을 벗어나 들판의 죽은 풀 사이로 발이 푹 빠지기라도하면 몸서리가 안 날 수가 없다. - P24

어머니가 계속 웅얼거린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다. 토사물을 보며말하는데 내 이름인 클로디아라고 부른다. 최대한 닦아낸 뒤, 여전히젖어 있는 넓은 부분을 빳빳한 수건으로 덮는다. 난 다시 눕는다. 창문틈에 끼운 헝겊이 떨어져 방안 공기는 차다. 차마 어머니를 다시 부르지는 못하겠고, 따뜻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싫다. 어머니가 화를 내면 난 굴욕감이 든다. 하는 말마다 내 뺨이 거칠게 쏠리는 느낌이라 울음이 터진다. 내가 아니라 내 병 때문에 화를 낸다는 사실을 나는 모른다. 어머니는 병에 ‘휘둘린‘ 내 허약함을 경멸한다고 믿는다. 머지않아난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지금은 울음이 터진다. 울면 콧물이 더 많아진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언니가 들어온다. 슬픔이 가득한 눈길로 내게 노래를 불러준다. "졸린 정원 담벼락에 진보라색이 드리우면 누군가 나를 생각하겠지......"
난 자두와 담벼락과 ‘누군가‘를 생각하며 깜빡 잠이 든다. - P26

어른들의 대화는 은근히 짓궂은 춤 같다. 소리와 소리가 만나 인사하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추다가 물러난다. 다른 소리가 등장하지만 곧또다른 소리가 무대를 차지한다. 두 소리는 서로 원을 그리며 돌다가멈춘다. 때로는 말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높이 솟구친다. 또 어떤 때는요란하게 뜀뛰기를 하다가 그 모두가 젤리로 만든 심장이 고동치듯 훈훈하게 벌떡거리는 웃음소리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들 감정의 뾰족한날과 찌르기와 구불거림이 프리다와 나에게는 항상 명료하다. 나는 아홉 살, 언니는 열 살이라 우리는 대화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얼굴과 손과 발을 주시하고, 음색에 깃든 진실에 귀기울인다. - P30

우리는 나앉는 것이 삶의 진짜 공포임을 알았다. 당시에는 나앉게될 위험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이 잦았다. 도를 넘을 뻔하다가도 그생각에 다들 멈칫했다. 너무 많이 먹으면 결국 나앉게 될 수 있었다. 석탄을 너무 많이 태워도 나앉게 될 수 있었다. 도박을 하거나 술독에빠져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때로 어머니가 아들을 나앉게 만들기도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 아들이 무슨 짓을 했건 다들 그를 동정했다. 아무개가 나앉았는데, 그의 피붙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집주인 때문에 나앉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불행한 일이지만 돈벌이가 자기 의지대로 되지는 않으니 그 또한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삶의 일면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태만해서 나앉거나 자기 피붙이를 나앉게 할 정도로 매정하다면 그건 범죄나 다름없었다. - P32

내쫓기는 것과 나앉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내쫓기면 어딘가 갈 데가있지만, 나앉으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였다. 나앉는다는 건 무언가의 끝이었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조건을 정의하고 보완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리적 사실이었다. 신분과 계급 모두에서 소수자인 우리는 삶이라는 옷자락의 끝단에서 어떻게든 돌아다니며, 나약한 우리끼리라도 뭉쳐 버티려 기를 쓰거나 혼자서 옷의몸통 부분으로 기어올라가려 버둥거렸다. 그런데 존재의 주변성으로 - P32

말하자면 우리가 대처할 방법을 배워 아는 것이었다. 아마 추상적인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길에 나앉는다는 구체성은 다른 문제였다. 죽음의 개념과 실제 죽음이 다른 것처럼. 죽은 상태는 변하지 않고, 나앉는 것도 여기 계속 있을 것이다.
나앉는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재산과 소유를 향한 갈망이 자라났다. 마당과 포치와 포도 시렁의 확고한소유 재산을 가진 흑인은 자기 둥지에 모든 열정과 사랑을 쏟았다. 광분하여 필사적인 새처럼 무엇이든 과도하리만치 장식했다. 힘들여 얻은 집을 두고 수선을 떨고 안절부절못했다. 여름 내내 조림과 잼과 보존식품을 만들어 찬장과 선반을 가득 채웠다. 집 구석구석을 칠하고뒤지고 쑤석거렸다. 그래서 그런 집들은 셋집이라는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온실 속 해바라기처럼 위용을 과시했다. 셋집살이하는 흑인들은그들이 소유한 마당과 현관을 슬쩍슬쩍 건너다보며 ‘작고 오래된 근사한 집‘을 장만하는 일에 더욱 일로매진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 집을가질 날을 고대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긁어모아 가축우리 같은 셋집에 할 수 있는 한 쌓아올렸다. -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