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한 사람을 입원실에 옮겨두고 저는 서울로 갑니다
별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픈 사람의 입에서 짜부라져 나온 그 말 별수 없다, 별수 없어, 따라 중얼거리다보니 제법 안심하게 됩니다. 별수 없이, 또 살겠구나 그러겠구나
저는 서울로 갑니다
아야야 아파라, 하는 말 또한 저를 걷게 합니다
늦도록 문을 닫지 않았을 뚜레쥬르로 달려가 단팥빵을 두어개쯤 사야겠다는 결심
지금 이 시각이면 병도 잠이 들었을지 한움큼 약을 털어 넣고 알록달록한 꿈속을 거닐고 있을지 - P30
해마다 열리는 국화축제나 미더덕축제를 한번쯤 구경해보자 한 적도 있었는데 퇴원을 하면 퇴원을 하면
또다시 입원을 하겠고
애를 써보아도 눈은 감기지 않습니다 옆 사람이 켜둔 휴대폰 화면을 흘끔거리며 공연히 어떤드라마를 상상하며 울고 이별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 같은 것 결국, 사랑하는 이야기일 테지요
네, 저도 괜찮습니다
겹겹의 흉터로 덜컹이는 창을 도리 없이 바라보면 그 독하다는 어둠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의 피 사람의 침, 가래, 오줌, 그리고 - P31
얼굴
저는 서울로 갑니다 제가 아는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듯 기차가 달려갑니다
깊은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나, 꼭 그런 척 공들여 기지개를 켭니다 뻣뻣한 몸이 응급실처럼 환히 불 밝힌 역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갈 때쯤
배가 고파질 것입니다
저는 곧 도착합니다 - P32
먼곳
포인세티아는 멕시코에서 페튜니아는 아르헨티나에서 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 알지 못하는 곳
구립도서관 앞 새로 조성된 화단의 조그만 팻말을 들여다본다 종합자료실 구석에서 발견한 두 발의 고독을 옆구리에 끼고서
맞은편 두서없이 열거된 사랑빛교회 고려마트 금성얼음 한참을 두리번거린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이국의 어린 풀들은
너무 쉽게 시들고 너무 쉽게 눈을 감을 텐데 머지않아 바닥의 거칠고 메마른 흙을 제 손으로 끌어다 - P56
수의처럼 걸칠 것이다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마트에서 그득 채운 비닐봉지를 배낭처럼 부둥켜안고서
콜레우스 메리골드 아스타 팜파스그래스 나는 누구인지
읽을 수 없는 색색의 활자가 저녁 바람에 너풀거린다
굶주린 독수리들이 날아든다 전봇대 아래 누군가 토해둔 썩은 내장
목줄을 풀어 헤친 한마리 들짐승이 갈라진 아스팔트 위를 쏘다닌다 - P57
하향
잔에 든 얼음을 우물거리다보니 여름이군요 차고 각진 기억을 아작아작 깨물어 삼키다 보니
대충 견딜 만하다고 할까요 더위도 이 불쾌한 마음도
누군가는 혀로 살살 달래면서 누군가는 어금니로 윽박지르고 다그치면서 어쨌든 한 계절을 지나겠지요
어떤 계절을 좋아하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 없고요 여름 따위 여름 따위
여름에 죽은 사람 따위
오래전 뙤약볕 아래 녹아버린 건지 얼음과 울음은 분명 다른 것일 테지만 - P82
실은 그리 다르지도 않다고
땡, 하면 최다 별수 없다고
녹고 얼고 다시 녹고 슬픔도 땀처럼 훔치면 그만이라고 할까요
에어컨 아래 앉아 미열의 이마를 짚다보니 여름은 가고 없군요 언제나처럼
여름도 얼음도 없이 한잔 물을 마시고 혼자 남은 이야기를 괜스레 끄적입니다 빈 마음을 글로적는 일에 대해 뒤늦게 배우면서 어름어름어름,
아무도 읽지 못해요
여름에 다 죽었으니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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