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녹슨 맨홀 뚜껑 같은 게 거기 잠자코 붙은 껌 같은 게
나를 본다 내 이름을 중얼거린다 눈을 깜박이는 게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게
나를 기다린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나의 귀가를
어느 날은 컹컹 짖고 어느 날은 냐옹 울기도 하는 횡단보도 절룩이는 다리로 나를 따라 집까지 온다
병원 같은 게 입원실 간이침대 옆 쪼그려 앉은 그림자 같은 게
쉽게 부서지는 게 부서지고도 반짝이는 게 - P12
공병 같은 게
나와 함께다 함께 먹고 함께 잠든다 함께 꿈속을 거닌다 지옥의 숲을 산책하듯이
일어나 아침이야, 흔들어 깨울 수 없지만 재촉할 수 없지만 허둥지둥 문을 나서면
바퀴에 깔린 장갑 같은 게 부르르 손을 떠는 전단 같은 게
주워 들면 피가 조금 난다 - P13
수
컵을 들고 헤매다 쏟아버린 물
실내는 따뜻하고 둘러앉은 이들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사이 몰래 빠져나가 조용히 흐느끼는 사람의 뒷모습
나는 계속 신경이 쓰여서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고 싶어서
말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본다 깊고 탁한 그늘 속 찢어진 그림자처럼 잠긴 그를
침묵으로 허우적대는 그를 - P16
사람들은 모른다 맑게 흐르고 우아하게 스민다
실내는 따뜻하고,
그는 잠시 돌아본다 아무런 뜻도 담겨 있지 않은 빛으로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챙긴다 어디 먼 곳으로 떠나려는 듯
가지 마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말하지 못하고 깨진 컵을 테이블 위에 그냥 가만히 놓아둔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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