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나는 너의 왼팔을 가져다 엉터리 한의사처럼 진맥을 짚는다. 나는 이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같아. 이 소리는 후시녹음도 할 수없거든.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자.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물잔을 건네는 마음으로.
2024년 6월 안희연
밤 가위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
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하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저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P14
발광체
발밑으로 돌이 굴러온다. 어디서 굴러온 돌일까. 쥐어보니 온기가 남아 있다. 가엾은 돌이라고 생각하며
걷다보니 또 돌이 굴러온다. 하나가 아니라면. 거듭해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간곡한 돌을 쥐고 있다. 바닥을 살피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돌이 온다 또 돌이 온다. 주머니는 금세 불룩해진다. 더는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계속해서 굴러오는 돌이 있어서. 나는 돌의 배후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은 무서운 돌이 된다.
사방에서 돌들이 굴러온다.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르는 돌은 무한한 돌.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돌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P15
갈망
그것은 사람처럼 걷고 있었다
마음이 어두울 땐 환해지고 환할 땐 희미해졌다
당신은 오래 알던 친구 같군요 무심히 말을 걸어본 적 있지만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의자를 내어주어도 앉지 않는다
그것은 오인될 때가 많다 비가 오지 않을 때조차 비를 맞고 있다 독성이 있는 사과일 거라고 심장을 옭아매는 밧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은 다만 기다리고 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풍경을 골똘히 바라볼 뿐이다
수많은 이유로 아침을 사랑하고 그보다 더 사소한 이유로 여름을 증오하는 것처럼
숲이 거기 있다는 이유로 숲을 불태우러 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 P18
그것은 조용히 타오른다
까맣게 탄 몸으로 그것은 걷는다 빗방울의 언어가 얼룩으로만 쓰여지듯 흰종이가 흰 종이인 채로 남아 있더라도 말해진 것이 있다고
발도 없이 문턱을 넘는다 귓바퀴에 고이는 이름이 된다 익숙한 침묵이 낯선 침묵이 되어 걸어나오는 동안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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