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광고회사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자주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쓰고, 매번 떠나고 싶어 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나는 나의 빛을 기록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빛은 나를 고스란히드러내는 빛이었기에 미처 몰랐던 취향이, 애써 외면했던 게으름이, 펼칠 수 없는 모범생적인 습관이, 난데없는 것에 폭발하곤 하는 성질머리가, 또 어지간한 것들은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단순합이 여행의 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여행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배웠다. 여행이 내게 나를 말해주었다."
(모든 요일의 기록>을 통해 일상에서 아이디어의 씨앗을 키워가는 카피라이터의 시각을 보여줬다면 <모든 요일의 여행>은 ‘여행자‘가 된 카피라이터만의 시각을 보여준다.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도시의 바깥을 꿈꾸지만 결국 남는 건 사진밖에 없는 천편일률적인 여행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유명하다는 그곳‘을 향해 여행지에서조차 분주한 사람들. 그들에게 이 책은 작지만 확고한 나만의 여행을 직조해가는 즐거움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잃어버린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고, 진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이 말은 뻔하다. 굳이 종이를 낭비해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는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햇살이 스며든다. 공기의 질감까지 부드러워진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진다. 오후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한낮 차가운 와인을 마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골목이 노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두둥실 떠오르기도 한다. 유난히 작았던 숙소가 문득 - P10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바람에 고립되었던 그 아찔했던 순간은 인생의 모험으로 포장된다. 폭포 앞에 서는 사람도, 골목 끝에서는 사람도, 끝없는 시골길 위에 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연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사람도 있고, 유독 높았던 웃음소리가 덧입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장 하나 바꿨을 뿐인데 저마다의 여행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나기 시작한다. 좀처럼 바래지 않는 빛을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 P11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그 모든 여행 끝에내가 내린 결론이다. 분명 같은 곳으로 떠났는데 우리는 매번 다른곳에 도착한다. 나의 파리와 너의 파리는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다. 나의 보석은 너의 보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여행지의 문제인 걸까. 여행을 떠나는 시기의 문제인 걸까. 우연히 만나는사람들의 문제인 걸까. 어쩌면 나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했다. 결국 나는 내 깜냥만큼의 여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 나는 나의 빛을 기록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빛은 나를고스란히 드러내는 빛이었기에 미처 몰랐던 취향이, 애써 외면했던게으름이, 떨칠 수 없는 모범생적인 습관이, 난데없는 것에 폭발하곤 하는 성질머리가, 또 어지간한 것들은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해석 - P11
해버리는 단순함이 여행의 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걸 못 견디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걸 위해서는 다른 모든 걸 포기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저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등등 여행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배웠다. 여행이 내게 나를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여행에 대해 말해줄 차례다. 그 어떤 여행기도 여행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하여 결국 실패로 돌아갈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말해볼 생각이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굳이 종이를 낭비해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는 말이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2016년 7월 김민철 - P12
무턱대고 닛포리 지하철 역에 내렸다. 관광책자에는 없는 곳이했다. 낡은 골목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마음에 드는 골목을 따라 한없이 들어가다 보면 고양이가 나타나 나를 또 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누군가의 집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그 골목길엔 고양이와 나만 있었다. 4월 햇살에 고양이는 눈을가늘게 떴다. 나도 가늘게 눈을 뜨고 가만히 있노라면 생과 사의경계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공동묘지 옆으로 우체부 아저씨가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나를 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골목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요히 나를 스쳐지나갔다. 생명을 가진 것들도, 생명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들도 모두 고요했다. 그렇게 낯선 골목을 네 시간 동안 헤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들어간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커피‘라는 말도 못 알아듣는 주인장에게 식사를 주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읽지도 못할 메뉴판은 덮고 "코히"라고 짧게 주문했다. ‘기묘하지만 마음에 드는 동네다‘라고 메모를 했다. 이제 그만 여기를 - P22
빠져나갈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풍경이 말을 거는 동네였다. 아까와는 또 다른 자전거, 또 다른 화분과 꽃, 또 다른 골목이 펼쳐지는 동네였다. 유명한 것 하나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있는 동네였다. 화분과 꽃과 낡은 골목길과 함께 느긋해져도 좋았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꼭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나는 또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줬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고. 오롯이 너의 시간이라고. - P24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지하철 역에서 다시 친구를 만났다. 집 근처에서 저녁을 사먹고, 마트에 들러서 찬거리를샀다. 매실 장아찌도 사고 연어도 사고 캔맥주도 여러 개 샀다. 일본식 아침을 해먹자며 친구와 낄낄댄다. 그러다 문득, 이 순간을 찾아내가 도쿄까지 왔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 순간이 서울에서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상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회사 갈 걱정에 이불 속에서부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른 아침 단박에 깰 수 있고, 왠지 억울한 심정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일상. 출근길에 삼각김밥이나 우유를 입에 쑤셔 넣지 않아도 되는 일상. 집에 들어오기 전 - P24
에 내일 먹을 음식을 간단하게 장볼 수 있고, 피곤하다며 멍하게 TV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것도 해야 하는데, 저것도 해야하는데, 라며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일상. 정직하게 몸을 움작이고, 머리는 잠시 쉬게 만들 수 있는 일상. 피곤해진 몸 덕분에, 끊임없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머릿속 덕분에 이른 시간에 잠을 청하게 되고 그리하여 다시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일상을 벗어나여행을 하러 온 곳에서 나는, 비로소 원하던 일상의 리듬을 찾는 중이었다. 어쩌면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 P25
‘떠난다‘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라는 말에 도착한다.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 유목민은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떠나기만 하는 여행자도 없다. 우리는 떠난다. 그리고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다. 문제는, 어디에 도착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지 이미도쿄에서 깨달아버렸다. 일상을 떠났으면서 다시 일상에 도착하고싶다는 이 모순.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어느새 내 여행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방법부터 달라져야 했다. - P29
가장 먼저 내가 바꾼 것은 숙소였다. 분명 호텔의 미덕이 있다. 하얀 시트와 깨끗하게 정리된 방과 푸짐하게 차려낸 아침.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말끔한 얼굴들. 누군가는 호텔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이 시작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서울이나 파리나 도쿄나 다 같은 얼굴을 한 호텔방이 아니었다. 하얀호텔방의 익명성이 아니었다. 멸균된 그 공간을 거치지 않고 속살로직행하고 싶었다. 답은 집을 빌리는 것이었다. 단 며칠짜리 집이라도 우리 집이 필요했다. 비슷하지만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도시마다의 시장에 갔다가 돌아올 골목이 필요했다. 양손 가득 낯설고 궁금한 재료들을 사서 돌아올 대문이 필요했다. 서툰 실력을 뽐내며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부엌이 필요했다. 신기한 맛의 음식을 두고 술 한잔할 테이블이필요했다. 그 음식보다 더 맛있을 창밖 풍경도 필요했다. 너무 좋은집은 부담스러웠다. 너무 비싼 집도 필요 없었다. 그런 집은 나의 일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깨끗해야 했다. 남의 허물까지 치우고싶진 않았으니까. 아무리 일상을 꿈꾸어도 이건 여행이니까. - P30
좋은 숙소는 중요하다. 좋은 식사만큼이나 여행에서 중요하다. 다만 좋은 숙소가 꼭 비싼 숙소는 아니다. 지금 내게 좋은 공간. 내가 편안해지는 공간, 샤워기는 좀 불편해도, 화장실이 좀 좁아도, 컵들은 하나같이 짝이 안 맞아도,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도, 매트리스가 좀 딱딱해도, 나에게 좋은 숙소란 나의 일상 같은 숙소였다. 완벽해 보이진 않지만, 내 몸을 구겨 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숙소. 지금 막 도착했지만, 며칠은 산 것처럼 순식간에 익숙해지는 숙소. 긴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하게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숙소,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겐 완벽한 숙소. 수많은 집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 집들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함께 브리악에 있는 우리 집에 머물던 때가 생각난다. 시간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를 낮춘 채 밖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어찌나 잘 훈련되어 있던지 마을에 간 그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야 비로소 짖어대기 시작했다. 로맹 가리, 《여자의 빛>, 마음산책, 2013 - P34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그대가 길을 가다가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대가 꿈꾸던 행복이 ‘그런 것‘ 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대의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오직 그대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행복만을 인정한다면 그대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민음사, 2007 - P48
내가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처럼 결단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거나, 혹은 결단을 늘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성공수기들의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이탈리아 소도시에서 빨래를 널다 들어와서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브라질 오지를 탐험하면서 수첩에 이 글을 끄적이고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일요일 오후에 겨우 빨래를 널고, 다음 날 출근을 괴로워하며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나는 지극히 소심하고, 어설픈 확신 따위에 인생을 거는 치기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나는 ‘만일‘이라는 가정법에 인생을 송두리째 걸수 있는 인간형이 아니므로, 스물한 살이 아니라 서른일곱 살쯤이되고 나면 자기 자신에 대해 그 정도는 알게 된다. 동시에 결국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매일을 살아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도 고향은 없다는 것을. - P57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바뀔 수 없는 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사는 이곳이 고향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끝없이 여행을 꿈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생 하나를 준비하는 것처럼 여행을 준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여행 때마다 여기서 살아보면 어떨까 꿈꾼다. 이 음식이, 이 햇살이, 이 공기가, 이 나른함이, 이 매혹이, 그러니까 마주치는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되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혹시 여기가 나의 고향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깨지 않는 꿈은 없듯이, 끝나지 않는 여행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P58
시작은 스물두 살 때였다. 혼자서 전국 일주를 하겠다며 서해를따라 내려가다가 남해 땅끝마을을 거쳐 보길도로 들어갔었다. 중간에 친척들이 있는 곳에 들러 용돈을 두둑하게 받은 터라 여행은 점점 더 길어지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종착역은, 여수였다. 대구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연락을 했다. 여수로 오라고. 같이 여수를 여행하고 같이 대구로 돌아가자고 말을 했다. 게으름뱅이인 친구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수락했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여수를갔다. 처음으로 향일암에 갔고, 처음으로 남해에서 떠오르는 해를봤고, 놀랐다. 남해도, 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일출을 보는 것도처음이라 놀랐다. 산 위에서 해를 정면으로 받고 앉아 눈을 가늘게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 둘은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대구로 돌아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해마다 여수에 갔다. 사람들은 물었다. "또 여수에 가?"라고.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겨울이니까요"였다. 푸른 잎이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듯 겨울이 오면 나는 여수를 향해 길게 목을 뺐다. 빼곡한 달력에 틈을 벌려 겨우 여수에 내려갔다. 그때마다 친구도 대구에서 - P72
여수로 왔다. 그녀도 나도 왜 여수에 끌리는지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냥 겨울이면 여수에서 만났다.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춥다. 여수는 맨날 춥네"라며 시장 밥집으로 향했다. 언젠가 시장에서 귤 파는 아주머니가 알려준 밥집이었다. 이름도 잘 모르고, 그냥 시장 안쪽으로 쭉 들어와서 과일 경매장을 지나 양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가 밥집이었다. 추운 겨울에 주인할머니의 온돌방에 앉아 밥상을 받았다. 할머니의 장롱에 등을 기대고 뜨끈한 바닥에 엉덩이를 지지고 앉아 갓 지은 밥에 갓 만든 반찬으로 가득한 백반을 먹고있노라면 이상한 위로가 내 입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밥상은10년 동안 삼천원이었다가, 사천 원이 되었다가, 오천 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밥상이 주는 위로의 가격은 언제나 측정 불가였다. - P73
할머니의 온돌방에서 누룽지까지 잘 얻어먹고 난 후에는 언제나오동도로 향했다. 실은 오동도보다 우리가 좋아한 것은 오동도 입구의 놀이공원이었다. 놀이기구가 서너 개 남짓 있는 그 놀이공원에는늘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한겨울에 바이킹을 타며 소리를 지르는 정신 나간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고운 여수에 정신 나간 사람은우리 둘로도 충분했으니까. 각자의 남자친구까지 데리고 여수에서만난 날에는 네 명이서 같이 바이킹을 탔다. 바이킹에서 내려와 멀쩡한 사람은 나와 친구뿐이었다. 남자들은 확실히, 약했다. 이게 뭐라고. 그깟 바이킹에 무너져 내리는 남자들이라니. 우리는 쯧쯧 소 - P73
리를 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과거. 놀이공원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실은 오동도든 놀이공원이든 돌산대교든 굴찜이든 게장이든 회든 뭐든, 여수의 유명한 그 무엇도 우리에겐 큰 상관이 없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향일암. 처음으로 우리가 여수와 사랑에 빠진 곳, 바닷가 절벽에 서서 해를 향해 있는 암자. 자주 보던 동해나 서해가 아니라 남해를 향해 있는 암자. 파란색 바다가 아니라 은색과 하늘색과 연두색이 미묘하게 섞여 빛나는 남해를 향해 있는 향일암. 그 향일암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다. - P74
코스는 늘 같았다. 향일암 밑에 있는 민박집 아무 데나 들어가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새벽이면 헉헉거리며 향일암에 오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여수 공식이었다. 향일암을 등지고 서면 바다와 절벽에 매달린 붉은 나뭇가지들이 눈에 같이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향일암나무, 이름도 모르는, 알려고 한 적도 없는 그 나무는 나에게 향일암 나무였다. 보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한 향일암의 증거였다. 선배와 같이 향일암에 갔던 어느 해에는, 선배에게 그 나무에 대해 고백했다. "선배, 고백할게 있어요." "뭔데?" - P74
"실은, 여수 그렇게 많이 외봤으면서도 나는 이 나무들 끝에 잎이 돋아난 걸 본 적이 없어요. 늘 겨울에 왔거든요. 그래서 푸른향일암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 그건 거짓말이라고 혼자서 생각해버리는 거지." "그게 뭐꼬." "그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서울에서라도 이 나무가 보이면, ‘아, 남해다!‘라면서 좋아해요." "이게 무슨 나문데?" "나도 몰라요." 늘 같이 간 친구도 몰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향일암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모호하고, 단편적이었다. 겨울이 아닌 향일암은 알지도 못하고, 좋아한다면서 무슨 나무인지도 알지 못했다. 전형적인 짝사랑의 징후였다. 일방적으로 마음을 정해버리고, 알아서 상대방을 해석해버리고, 나만의 상대방을 만들어버리는. 나는 향일암을 짝사랑했다. 친구도 나도 향일암을 깊이깊이 짝사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향일암이 불탔다. - P75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언니에게도연락이 왔다. 회사 사람들도 문자를 보내왔다. 나의 여수 사랑을 아는 모두가 연락을 해왔다. 향일암이 불탔다고. 너 괜찮냐고. 괜찮을리가 없었다. 향일암이 없는 여수라니, 붉은 그 나무가 무사하지 않은 향일암이라니, 그래서였다. 해마다 내려가던 여수에 안 내려가기시작한 것은 도저히 향일암을 볼 자신이 없었다. 새 페인트칠로 번쩍번쩍한 향일암을 마주하면 내 과거까지 이상한 색으로 채색될 것같았다. 다만 무사하길 빌었다. 피해가 크지 않길 빌었다. 나의 여수가, 향일암이 온전히 회복되길 빌었다. - P76
이번 겨울, 용기를 내서 여수에 다녀왔다. 바다도 그대로고 산도그대로고 붉은 나무도 그대로였다. 번쩍번쩍하지 않고 조용히 복원된 향일암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향일암도 그대로였다. 감사하다고, 정말로 감사하다고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해마다 여수에 올 용기가 생겼다. 다시 여수를 짝사랑해도 좋겠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잠깐 사랑했다가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오래도록 한 도시를 오해하며 바라보는 짝사랑도 꽤 괜찮지 않은가? 그제야 다시 친구의 전화가 생각났다.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뭔가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도 생각났다. 여수가 내 것도 아닌데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이라니. 아니, 누군가 빼앗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이라니. 나조차도 황당했던 그 기분이, - P76
다시 아름다워진 향일암을 앞에 두고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좋아하는 그 도시에 대해 유명한 가수가 노래를 발표해주는 것도 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처음 그노래를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은 오간데 없었다. 그 겨울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수에 왔다고. 향일암은무사하다고. 우리 다시 여기 와도 괜찮겠다고. 이 여행은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겠다고. 그리고 내내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시도 때도없이. 누가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수 밤바다~" - P77
딱 한 걸음 차이가 결정적 차이가 된다.
한 걸음만 가까이. 한순간만 천천히.
다리 위 난간에 앉은 이 여자처럼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천천히.
그녀는 오래도록 이 햇빛을 기억할 것이다. 이 바람을 잊을 리 없다. 이 순간이 잊힐 리 없다.
그제야 사태는 선명해졌다. 우리는 그의 삶의 관광객이었다. 잠깐 들렀다 멀리 떠나는 관광객. 순간을 영원이라 생각해버리고, 파편을 전부라 착각해버리는 관광객. 단골술집이라며 우리가 아무리 친한 척해봐도 변하는 사실은 없었다. 우리는 누노의 일상이 될 수없었다. 그에게는 다른 일상이 있었던 것이다. 별일이 있어도, 별일이 없어도 수시로 그곳을 들락날락거리며 안부를 묻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음식을 나눠먹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의 일상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그 사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3년 전 그 밤은 이미 신화가 되어버렸다. 내가 그 밤을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3년 전 그 밤을 소중히 하고, 닦고, 글로 쓰고, 사 - P95
진을 찍고, 책에 싣고 자랑하면서. 하지만 누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게 그 밤은 평범한 밤 중 하나였으니까. 그것은 누노의 일상이었으니까. 호르헤의 충격을 소화하고, 누노의 충격까지 꾸역꾸역 소화하며 앉아 있다 보니 명확한 것이 생겼다. 그제야 나의 이기심에 나조차 너털웃음이 났다. 나는 그들이 유적이 되길 바랐던 건가.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일 유적지의 돌덩이가 되길 바랐던 건가. 지나간 과거만 쓸고 닦아 애타게 기억하는 박물관이 되길 바랐던 건가. 나는 3년 동안 이토록이나 변했으면서 그들의 변화에는 왜 이토록 매정한 것인가. 나는 수많은 것들을 다 잊어버렸으면서 그들은 왜 나를 잊으면 안 되는 건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랐던 건가. - P95
"진실이 항상 비극은 아니야."
진실이 항상 비극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맞닥뜨렸다. 그리고 이 진실이 나는 마음에 든다. 상상보다 훨씬 더 풍성한 진실이었다. 새 생명과 눈물이 흐르는진실이었다.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모르는 진실을 찾기 위해 끝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히여행자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진실이 진실로 마음에 든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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