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어서야 완전히 태어난다.
-벤저민 프랭클린


이 책은 당연히 끝에서 시작된다. 이 여정은 오로지 여기, 삶의종착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삶을 판단하는 것은 아직 보고 있는 영화나 아직 먹고 있는 음식을 평가하는 것과마찬가지다. 우리의 판단은 좋게 말하면 불완전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
끝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어떤 끝도 행복하지 않다. 1790년 봄, 필라델피아 자택에서 펼쳐진 벤저민 프랭클린의 마지막 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마지막 장은 프랭클린의 둘째 딸이나 다름없었던 폴리 스티븐슨의 손으로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런던에서 두 사람은 수년간 같은 집에 살면서 자연 세계를 향한 맹렬한 호기심을 함께 나누었다. 벤은 폴리를 "귀여운 철학자"라고 불렀다. - P23

생애 마지막 해에 벤은 자기 침실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도르래 장치를 사용해 침대에 누운 채로 방문을 닫았다. 아편과 알코올을 섞어 만든 로더넘 복용량을 점점 늘리고 있었지만통풍과 신장결석, 늑막염으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폴리는 "그분에게서 불평과 짜증은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았"으며 눈곱만큼의 자기 연민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84세까지 긴 삶을 누렸다. 18세기 사람들이 맞이한 무수히 다채로운 죽음의 방식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프랭클린은 각종 질병과 두 차례의 전쟁, 여덟 번의 대양 횡단, 목숨을 앗아갈 만큼의 전기 부하와 칠면조를 이용한 엉망진창 실험에서 살아남았다.‘ 모두가 프랭클린의 긴 삶을 놀라워했다. 특히 프랭클린 본인이 가장 놀라워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 잠들었어야 하는 사람이 후대의 앞을 가로막은 듯한 느낌이네. 하지만 내가 일흔에 죽었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안을 고민했던 12년이 사라졌겠지." 이 말로는 부족하다. 프랭클린 인생의 마지막 10여 년은그가 가장 분주하고 가장 행복한 때였다. - P24

그러던 4월 17일 오후 11시 "그는 84년 하고도 석 달의길고 쓸모 있는 삶을 마감하며 평온히 영면에 들었다."
의사의 단어 선택이 중요하다. 단순히 긴 삶이 아니라 길고 쓸모 있는 삶이다. 쓸모는 18세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모든 발상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효용성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이바지했는가?"
사실 우리는 쓸모 있는 삶에 양가감정을 느낀다. 그런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런저런 것들이 "그저 나를 이용한다"고 불평한다. 다른 사람에게 늘 이용당하는 친절한 성격은 결함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최고의 칭찬일지도 모른다. 이용당하기를 피하지 말고 오히려 기꺼이 요청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네, 제발 저를 이용해주세요. - P26

쓸모는 프랭클린에게 특히 중요했다. 이 단어는 그의 자서전에거의 서른 번 등장한다. 쓸모는 그의 원동력이고 특성이었다. 그는 쓸모 있는 인쇄업자이자 쓸모 있는 정치인, 쓸모 있는 과학자, 쓸모 있는 작가, 쓸모 있는 친구였다. 또한 그는 쓸모 있는 혁명가였다. 아마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가장 쓸모가 많았을 것이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인가? 의문스럽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하다. 우리 아버지는 의사였다. 아버지는 삶을 살렸다. 우리 어머니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삶을 빚었다. 내 친구 제임스는 명상을 지도한다. 제임스는 삶을 진정시킨다. 나? 나는 종이위에 글을 휘갈기고 어떤 날은 그마저도 많이 못 한다. 그러니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비교하면 더더 - P26

욱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래전부터 내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은은한 우울감이 올라온다. 벤은 이렇게 낙담한 적이 없었다. 그는낙관적 전망을 유지했고, 다른 이들이 희망을 잃을 때도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 또는 개선할 수 있을지 물으면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답했다. "안 될 게 뭐야?"
벤저민 프랭클린은 실용주의자라기보다는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이 말하는 "가능성주의자 possibilian"에 가까웠다. 실용주의자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가능성주의자는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은 일도 그 미래 가능성을 믿는다. 가능성주의자의 인내심은 끝이 없다. 가능성주의자는 언제나 끈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고 절대 한숨 쉬지 않는다.
어쩌면 내 안에 가능성주의자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때가 시작이었다. 어디에서든지, 무엇을 묻든지, 이 마법의 질문을 덧붙이면 사람들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을 뿐인데 ‘나에게 인생이란 어떤의미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바뀌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취향을 동시에 다 불러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다른 이유도 없고, 순전히 나를 위해서. "What‘s your favorite?"이라는 질문을 하는 낯선한 사람을 위해서. 상대가 진지하게 너의 결정을 믿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 P111

그 질문을 여행 내내 써먹었다. 와인 숍에서의 일이었다.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주인은 서너 개의 와인을 추천해줬다. 그리고다시 꺼낸 나의 회심의 한마디, "What‘s your favorite?" 와인 가게 사장님은 추천한 와인 한 병 한 병을 다 쳐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이걸 좋아하나? 아니 이걸 좋아하나? 난 뭘 좋아하나? 고심 끝에 주인은 한 병을 골랐다. "그럼 그걸로 살게!"라고 말하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 주인이 바코드를 찍어보더니 찡긋하며 말했다.
"심지어 이건 지금 세일 중이야. 원래는 13유로인데 지금 세일해서 8유로야." - P111

독일 쾰른에는 쾰른 대성당이 가장 유명했지만, 그건 내 관심사밖이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나의 목적지였다. 렘브란트가 거의 마지막에 그린 자화상. 잔뜩 장식을 하고, 자신만만한 표정, 한껏 밝은 표정으로 그려진 자화상이 아니라, 추하고 어딘가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자화상. 아니 비굴하다, 라는 수식어로 어떻게 그 표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그 표정을 가감 없이 그려낸 화가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오스카 코코슈카와 앙드레 말로 등 거장들이 극찬한 렘브란트의 그 표정 앞에 앉아 오후를 보냈다.  - P116

검정색과 노란색만 가득한 그 자화상에는 화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 뒤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사람. 마치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것처럼, 저먼 세계에서 렘브란트를데리러 온 것 같은 사람을 화가는 그려 넣었다. 그 사람 앞에서 웃고있는 화가의 설명할 수 없는 표정에, 렘브란트의 파란만장한 인생전체를 담아낸 것 같은 그 표정에 나는 푹 빠져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쾰른으로 출장을 간다는 친구에게 그 미술관을 추천했다. 친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별 생각 없이 미술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 자화상을 발견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그림은 또 처음이라서. - P116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내가 하루를 바친 곳은 반 고흐 미술관이었다. 반 고흐의 그림이라면 내가 좀 알지, 라는 표정으로 미술•관에 들어섰다. 하지만 실제 보는 그림은 컴퓨터나 책을 통해서 본그림과 완전히 달랐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그림은반 고흐의 <The Bedroom>이었다.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다가 스물한살의 나는 수첩을 꺼내 썼다. ‘<The Bedroom>은 내가 보던 것과가장 비슷하면서도 느낌은 가장 다르다. 그의 노란색은 창백해 보이고, 광기가 넘치고, 아파 보이기도 한다. 그 역동적인, 살아 움직이는 색깔에 반 고흐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난 이사람을 견딜 수 있을까‘ 마음이 자꾸 이 그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다른 그림들을 보다가도 다시 이 그림 앞에 와서 섰다. 갔다가 돌아오고, 갔다가 돌아오고, 그 과정을 무한 반복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겨우 미술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P118

외국 유명한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볼 때면 늘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토록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서울에서도 미술관을 가본 적 없고, 살면서 한 번도 미술관에 가본 적없는 사람들이 파리에 왔으니까, 그래도 루브르니까, 라며 땡볕에길게 줄을 선 걸 보면 가서 말하고 싶어진다. 안 그래도 돼요. 유명하다고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술을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여기 진짜 맛있는 와인을 파는 집이 있어요. 빈티지를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이 도시만큼 좋은 곳이 없죠. 조금만 걸어보세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진짜 여기 잘 오셨어요. 아무 카페에나 앉아서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해보세요. 여행의 참맛은 거기에 있어요.
좋아하는, 내가 좋아하는, 남들과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바로그것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 어쩌면 그것을 찾는 것만으로도 남들과는 다른 여행의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 P123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동시에 여러 순간을 사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인가, 거기에 언제 있을 것인가. 여행에서 이 두 가지질문은 끝없이 교차한다. ‘나의 시간‘을 선택하고 ‘나의 공간‘을 선택하여 그 둘을 직조하면 비로소 ‘나의 여행‘의 무늬가 드러난다. 이 무닉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며 나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그 무늬를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된다. - P127

내가 아일랜드에서 술쟁이가 되었을 때를 좋아한다. CD가게의 주인아주머니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수십번을 말했다. Dick Mack‘s를 비롯한 수많은 펍들에 대해서도 수년간을 자랑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술쟁이들이 그리워졌다. 낮이든 밤이든 펍에 들어서면 아일랜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술쟁이들의 성전이 그리워졌다. 낮이든 밤이든 거기서 술을 몇 잔씩이나 시켜먹는 술쟁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모르는 우리에게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슬란챠!"라고 말하는 술쟁이들. T로 시작하는요일엔 술을 마셔야 한다고 말하면서, Sunday를 Thunday라고 바뭐 말하는 술쟁이들, 좋은 술도 좋은 펍도 여행하지 않으니, 우리는늘 다시 아일랜드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제는 어제의 술을 마셨으니, 오늘은 오늘의 술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그럴수밖에 없다. - P146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찾는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북경에서는 기차를 타고 열한 시간 떨어진 도시 핑야오에 기어이 도착했다. 프랑스 보뉴에서는 한 할머니의 대저택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패티 스미스를 보기 위해 도착한 님에서는 바로 옆 식탁에서 패티스미스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큰 도시에서의 행운은 늘모자라지만 작은 마을에서의 행운은 밤늦도록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 그 마을에 관해, 포르투갈 그 마을에 관해, 아일랜드 그 마을에관해,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작은 마을 관해서는 끝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끝없이 말할 수 있다. - P155

살아오면서 그런 유의 행복을 종종 맛본 적이 있다. 여행끝에 마시는 한 잔의 물, 소박한 은신처, 세상 어느 귀퉁이에서 남모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따뜻하고 소모되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은 낯선 이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낯선 이가 나타날 때, 인간을 발견한 그 마음은 기쁨으로 설렌다. 그리하여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지극히 확대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열린책들, 2008 - P157

작은 마을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확대한다. 큰 도시에서는 우리를 버린 것임에 틀림이 없는 행운의 여신이, 유독 작은 마을에서는우리를 잽싸게 발견한다. 그리고 행복의 진수성찬을 차려버린다. 이진수성찬은 오롯이 우리들의 것,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맛,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다정한 맛. 그 소박한 진수성찬을 맛보고 싶다면 시간을 줘야 한다. 행운의 여신도 우리를 찾아낼 시간이 ㅣ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하루가 아니라. 3일, 유명한 것이 없으므로 오래, 별게 없으므로 천천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이므로 음미하며, 낯선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웃는 낯으로, 그렇게 여행의 보석을 품는 것이다. 나만의 보석을 세공해가는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보석을. - P157

혼자 여행을 하면 사람들이 쉽게 다가왔다. 손만 들어도 히치하이킹이 가능했다. 멍하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할머니들이 먹을 걸 나눠줬다. 밥을 사주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한 무리의 소녀들을 이끌고 섬으로 여행을 온 선생님은 혼자 다니는 나를 딱하게 여긴 건지, 가는 곳마다 나까지 데리고 다녀줬다. 그 밤, 그 선생님이예약해놓은 민박집의 주인할머니는 방을 같이 쓰자고 말했고, 숟가락만 하나 더 놓으면 된다며 밥까지 차려주셨다. 그 겨울에 남해의별미를 나는 염치도 없이 잘 받아먹었다. 외국 사람들도 혼자인 내게 친절했다. 집으로 초대한 할머니도 있었고, 밥을 사준 사람들도있었다. 유난히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혼자‘는 내 여행의 단단한 코트였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벗고싶지 않은. - P172

때로는 여행을 떠나와
누군가의 일상이
묵묵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어이 살아야 한다. - P203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생전 처음 보는 수프를 맛봤다. 파리에서 그 불친절한 사람들만 가득하다는 파리에서 맛있었고 따뜻했다. 나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남편과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누가 파리 사람이 불친절하대?"
분명 불친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파리에도 서울에도 그렇듯이. 분명 두고두고 욕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방콕에도 서울에도 그렇듯이. 분명 편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터키에도 서울에도 그렇듯이. 하지만 분명 친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도시와 사랑에 빠지도록 큐피드의 화살을 쏘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두고두고 고마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그러하듯이. 그러니 여행 가방에 결코 넣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선입견. 나의 눈을 가려버리고, 나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바로 그 선입견. 그것만 내려놓아도 여행 가방은 가벼워질 것이다.

영양실조 아이들을 돕자는 캠페인도 아니고, 식수를 주자는 캠페인도 아니고,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모자를 만들어주자는 캠페인도 아니고, 자전거라니 생소했다. 하지만 조금의 설명만들으면 알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건 ‘지금‘을 살게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는 건 ‘미래‘를 선물하는 것이라는 걸, 가로등도 없는 길을 하루에 네 시간 넘게 걸어서라도 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내전으로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생계에 대한 부담으로 학교를 포기해야만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자전거로 희망을 선물하자는 캠페인이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내용이었다. - P228

겨우 그거여서 미안했고, 부족해서 미안했고, 겨우 몇 시간에 힘들다고 생각한 게 미안했다. 무엇보다 절망을 말할 자격도 없으면서그들의 희망을 비관한 것이 미안했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가그들의 희망을 비관한단 말인가. 저렇게 희망이 웃고 있는데, 고작풍선 하나에 웃는데 저 웃음을 어떻게 비관할 수 있는가. 나는 오래전 하워드 진의 책에서 읽은 가르침을 떠올렸다. 나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희망을 고집하는 것.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뢰에도 불구하고, 비닐봉지 집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고집하는 것, 풍선 하나에, 꽃 한 송이에, 화알짝 웃으며, 아이들이 기어이 희망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끝끝내 꺾일지라도, 끝까지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어떤 희망은 의무다. - P233

남의 여행은 남의 떡이다. 언제나 더 커 보이고, 언제나윤기가 흐른다. 흠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고, 부러운 행운만 넘쳐흐른다. 어쩜 그 여행의 풀밭은 그토록 푸르른지. 남의 여행을 직접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 블로그에서, 각종 SNS에서 남의여행을 보게 되면서 이 증상은 좀 더 심각해진다. 앞뒤 맥락 따위 존재할 수 없는 그 찰나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우리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름살을 제거해버린다. 저 여행은 모든 것이 풍족해. 저 여행은 커피 잔에 떨어지는 빛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 P241

완벽할까. 저 사람은 내내 행복하기만 할 거야. 같이 간 사람이랑 싸우는 일도 없겠지. 돈이 왜 부족하겠어. 돈이 부족하다면 저런 걸사지도 못하지. 여행은 왜 또 저렇게 자주 가. 시간도 넘쳐나나 봐. 명백히 세상은 엄친아들의 여행으로 넘쳐난다.
알고 있다. 나의 여행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란 사실을 내가 나의 SNS를 보고 있어도 이토록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행이 없어 보인다. SNS에서는 내가 방금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도, 어마어마하게 바보짓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엄청 비린 생선을엄청 비싼 돈에 먹었다는 사실도 편집된다. 잘 재단된 사진과 함께올라가니까 나조차도 내가 완벽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행자라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사진밖의 나는, 현실의 나는, 언제나, 어김없이, 햇빛 알레르기와 싸우는중인데 말이다. - P242

결국 겨울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햇빛 알레르기에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결론에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 결론은 거짓이다. 햇빛 알레르기에 좋은 점이 뭐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좋은 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햇빛 알레르기의좋은 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여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여행은 오직 남의 SNS에만 존재할 뿐이다. 지금이 사진은 어떤 풍경으로 보이는가? 고즈넉한 시골길 위에서 귀여운 강아지들이 노니는 풍경? 사실, 온 동네 개들이 동시에 몰려나오며 미친 듯이 짖어 뒷걸음치며 도망가는 중이었다. 물론 이 사진도나의 SNS 상에서는 평화로웠다. - P2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민철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광고회사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자주 책을 읽고, 때때로 글을 쓰고, 매번 떠나고 싶어 한다. 《모든 요일의 기록>, <하루의 취향>, <치즈: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등을 썼다.


"나는 나의 빛을 기록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빛은 나를 고스란히드러내는 빛이었기에 미처 몰랐던 취향이, 애써 외면했던 게으름이,
펼칠 수 없는 모범생적인 습관이, 난데없는 것에 폭발하곤 하는 성질머리가, 또 어지간한 것들은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단순합이 여행의 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여행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배웠다. 여행이 내게 나를 말해주었다."


(모든 요일의 기록>을 통해 일상에서 아이디어의 씨앗을 키워가는 카피라이터의 시각을 보여줬다면 <모든 요일의 여행>은 ‘여행자‘가 된 카피라이터만의 시각을 보여준다.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도시의 바깥을 꿈꾸지만 결국 남는 건 사진밖에 없는 천편일률적인 여행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유명하다는 그곳‘을 향해 여행지에서조차 분주한 사람들. 그들에게 이 책은 작지만 확고한 나만의 여행을 직조해가는 즐거움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잃어버린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고, 진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이 말은 뻔하다. 굳이 종이를 낭비해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는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햇살이 스며든다. 공기의 질감까지 부드러워진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진다. 오후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한낮 차가운 와인을 마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골목이 노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두둥실 떠오르기도 한다. 유난히 작았던 숙소가 문득 - P10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바람에 고립되었던 그 아찔했던 순간은 인생의 모험으로 포장된다. 폭포 앞에 서는 사람도, 골목 끝에서는 사람도, 끝없는 시골길 위에 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연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사람도 있고, 유독 높았던 웃음소리가 덧입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장 하나 바꿨을 뿐인데 저마다의 여행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나기 시작한다. 좀처럼 바래지 않는 빛을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 P11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그 모든 여행 끝에내가 내린 결론이다. 분명 같은 곳으로 떠났는데 우리는 매번 다른곳에 도착한다. 나의 파리와 너의 파리는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다. 나의 보석은 너의 보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여행지의 문제인 걸까. 여행을 떠나는 시기의 문제인 걸까. 우연히 만나는사람들의 문제인 걸까. 어쩌면 나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했다. 결국 나는 내 깜냥만큼의 여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니까.

그러니 나는 나의 빛을 기록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빛은 나를고스란히 드러내는 빛이었기에 미처 몰랐던 취향이, 애써 외면했던게으름이, 떨칠 수 없는 모범생적인 습관이, 난데없는 것에 폭발하곤 하는 성질머리가, 또 어지간한 것들은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해석 - P11

해버리는 단순함이 여행의 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걸 못 견디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걸 위해서는 다른 모든 걸 포기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저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등등 여행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배웠다. 여행이 내게 나를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여행에 대해 말해줄 차례다. 그 어떤 여행기도 여행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하여 결국 실패로 돌아갈 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말해볼 생각이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굳이 종이를 낭비해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는 말이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니까.

2016년 7월
김민철 - P12

무턱대고 닛포리 지하철 역에 내렸다. 관광책자에는 없는 곳이했다. 낡은 골목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마음에 드는 골목을 따라 한없이 들어가다 보면 고양이가 나타나 나를 또 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누군가의 집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그 골목길엔 고양이와 나만 있었다. 4월 햇살에 고양이는 눈을가늘게 떴다. 나도 가늘게 눈을 뜨고 가만히 있노라면 생과 사의경계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공동묘지 옆으로 우체부 아저씨가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나를 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골목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요히 나를 스쳐지나갔다. 생명을 가진 것들도, 생명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들도 모두 고요했다.
그렇게 낯선 골목을 네 시간 동안 헤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들어간 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커피‘라는 말도 못 알아듣는 주인장에게 식사를 주문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읽지도 못할 메뉴판은 덮고 "코히"라고 짧게 주문했다. ‘기묘하지만 마음에 드는 동네다‘라고 메모를 했다. 이제 그만 여기를 - P22

빠져나갈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풍경이 말을 거는 동네였다. 아까와는 또 다른 자전거, 또 다른 화분과 꽃, 또 다른 골목이 펼쳐지는 동네였다. 유명한 것 하나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있는 동네였다. 화분과 꽃과 낡은 골목길과 함께 느긋해져도 좋았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꼭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나는 또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줬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고. 오롯이 너의 시간이라고. - P24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지하철 역에서 다시 친구를 만났다. 집 근처에서 저녁을 사먹고, 마트에 들러서 찬거리를샀다. 매실 장아찌도 사고 연어도 사고 캔맥주도 여러 개 샀다. 일본식 아침을 해먹자며 친구와 낄낄댄다. 그러다 문득, 이 순간을 찾아내가 도쿄까지 왔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 순간이 서울에서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일상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회사 갈 걱정에 이불 속에서부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른 아침 단박에 깰 수 있고, 왠지 억울한 심정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일상. 출근길에 삼각김밥이나 우유를 입에 쑤셔 넣지 않아도 되는 일상. 집에 들어오기 전 - P24

에 내일 먹을 음식을 간단하게 장볼 수 있고, 피곤하다며 멍하게 TV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것도 해야 하는데, 저것도 해야하는데, 라며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일상. 정직하게 몸을 움작이고, 머리는 잠시 쉬게 만들 수 있는 일상. 피곤해진 몸 덕분에, 끊임없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머릿속 덕분에 이른 시간에 잠을 청하게 되고 그리하여 다시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일상을 벗어나여행을 하러 온 곳에서 나는, 비로소 원하던 일상의 리듬을 찾는 중이었다. 어쩌면 원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 P25

‘떠난다‘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라는 말에 도착한다.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 유목민은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떠나기만 하는 여행자도 없다. 우리는 떠난다. 그리고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다. 문제는, 어디에 도착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지 이미도쿄에서 깨달아버렸다. 일상을 떠났으면서 다시 일상에 도착하고싶다는 이 모순.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어느새 내 여행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방법부터 달라져야 했다. - P29

가장 먼저 내가 바꾼 것은 숙소였다. 분명 호텔의 미덕이 있다. 하얀 시트와 깨끗하게 정리된 방과 푸짐하게 차려낸 아침.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말끔한 얼굴들. 누군가는 호텔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이 시작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서울이나 파리나 도쿄나 다 같은 얼굴을 한 호텔방이 아니었다. 하얀호텔방의 익명성이 아니었다. 멸균된 그 공간을 거치지 않고 속살로직행하고 싶었다.
답은 집을 빌리는 것이었다. 단 며칠짜리 집이라도 우리 집이 필요했다. 비슷하지만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도시마다의 시장에 갔다가 돌아올 골목이 필요했다. 양손 가득 낯설고 궁금한 재료들을 사서 돌아올 대문이 필요했다. 서툰 실력을 뽐내며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부엌이 필요했다. 신기한 맛의 음식을 두고 술 한잔할 테이블이필요했다. 그 음식보다 더 맛있을 창밖 풍경도 필요했다. 너무 좋은집은 부담스러웠다. 너무 비싼 집도 필요 없었다. 그런 집은 나의 일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깨끗해야 했다. 남의 허물까지 치우고싶진 않았으니까. 아무리 일상을 꿈꾸어도 이건 여행이니까. - P30

좋은 숙소는 중요하다. 좋은 식사만큼이나 여행에서 중요하다. 다만 좋은 숙소가 꼭 비싼 숙소는 아니다. 지금 내게 좋은 공간. 내가 편안해지는 공간, 샤워기는 좀 불편해도, 화장실이 좀 좁아도, 컵들은 하나같이 짝이 안 맞아도,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도, 매트리스가 좀 딱딱해도, 나에게 좋은 숙소란 나의 일상 같은 숙소였다. 완벽해 보이진 않지만, 내 몸을 구겨 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숙소. 지금 막 도착했지만, 며칠은 산 것처럼 순식간에 익숙해지는 숙소.
긴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하게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숙소,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겐 완벽한 숙소. 수많은 집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 집들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함께 브리악에 있는 우리 집에 머물던 때가 생각난다. 시간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자기를 낮춘 채 밖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어찌나 잘 훈련되어 있던지 마을에 간 그녀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야 비로소 짖어대기 시작했다.
로맹 가리, 《여자의 빛>, 마음산책, 2013 - P34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그대가 길을 가다가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대가 꿈꾸던 행복이 ‘그런 것‘
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대의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면-그리고 오직 그대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행복만을 인정한다면 그대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민음사, 2007 - P48

내가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처럼 결단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거나, 혹은 결단을 늘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성공수기들의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이탈리아 소도시에서 빨래를 널다 들어와서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브라질 오지를 탐험하면서 수첩에 이 글을 끄적이고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일요일 오후에 겨우 빨래를 널고, 다음 날 출근을 괴로워하며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나는 지극히 소심하고, 어설픈 확신 따위에 인생을 거는 치기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나는 ‘만일‘이라는 가정법에 인생을 송두리째 걸수 있는 인간형이 아니므로, 스물한 살이 아니라 서른일곱 살쯤이되고 나면 자기 자신에 대해 그 정도는 알게 된다. 동시에 결국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매일을 살아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도 고향은 없다는 것을. - P57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다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바뀔 수 없는 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사는 이곳이 고향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끝없이 여행을 꿈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생 하나를 준비하는 것처럼 여행을 준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여행 때마다 여기서 살아보면 어떨까 꿈꾼다. 이 음식이, 이 햇살이, 이 공기가, 이 나른함이, 이 매혹이, 그러니까 마주치는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되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혹시 여기가 나의 고향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깨지 않는 꿈은 없듯이, 끝나지 않는 여행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P58

시작은 스물두 살 때였다. 혼자서 전국 일주를 하겠다며 서해를따라 내려가다가 남해 땅끝마을을 거쳐 보길도로 들어갔었다. 중간에 친척들이 있는 곳에 들러 용돈을 두둑하게 받은 터라 여행은 점점 더 길어지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여행의 종착역은, 여수였다. 대구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연락을 했다. 여수로 오라고. 같이 여수를 여행하고 같이 대구로 돌아가자고 말을 했다. 게으름뱅이인 친구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수락했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여수를갔다. 처음으로 향일암에 갔고, 처음으로 남해에서 떠오르는 해를봤고, 놀랐다. 남해도, 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일출을 보는 것도처음이라 놀랐다. 산 위에서 해를 정면으로 받고 앉아 눈을 가늘게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우리 둘은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대구로 돌아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해마다 여수에 갔다. 사람들은 물었다. "또 여수에 가?"라고.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겨울이니까요"였다. 푸른 잎이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듯 겨울이 오면 나는 여수를 향해 길게 목을 뺐다. 빼곡한 달력에 틈을 벌려 겨우 여수에 내려갔다. 그때마다 친구도 대구에서 - P72

여수로 왔다. 그녀도 나도 왜 여수에 끌리는지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냥 겨울이면 여수에서 만났다. 털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춥다. 여수는 맨날 춥네"라며 시장 밥집으로 향했다. 언젠가 시장에서 귤 파는 아주머니가 알려준 밥집이었다. 이름도 잘 모르고, 그냥 시장 안쪽으로 쭉 들어와서 과일 경매장을 지나 양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가 밥집이었다. 추운 겨울에 주인할머니의 온돌방에 앉아 밥상을 받았다. 할머니의 장롱에 등을 기대고 뜨끈한 바닥에 엉덩이를 지지고 앉아 갓 지은 밥에 갓 만든 반찬으로 가득한 백반을 먹고있노라면 이상한 위로가 내 입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밥상은10년 동안 삼천원이었다가, 사천 원이 되었다가, 오천 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밥상이 주는 위로의 가격은 언제나 측정 불가였다. - P73

할머니의 온돌방에서 누룽지까지 잘 얻어먹고 난 후에는 언제나오동도로 향했다. 실은 오동도보다 우리가 좋아한 것은 오동도 입구의 놀이공원이었다. 놀이기구가 서너 개 남짓 있는 그 놀이공원에는늘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한겨울에 바이킹을 타며 소리를 지르는 정신 나간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고운 여수에 정신 나간 사람은우리 둘로도 충분했으니까. 각자의 남자친구까지 데리고 여수에서만난 날에는 네 명이서 같이 바이킹을 탔다. 바이킹에서 내려와 멀쩡한 사람은 나와 친구뿐이었다. 남자들은 확실히, 약했다. 이게 뭐라고. 그깟 바이킹에 무너져 내리는 남자들이라니. 우리는 쯧쯧 소 - P73

리를 내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과거. 놀이공원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실은 오동도든 놀이공원이든 돌산대교든 굴찜이든 게장이든 회든 뭐든, 여수의 유명한 그 무엇도 우리에겐 큰 상관이 없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향일암. 처음으로 우리가 여수와 사랑에 빠진 곳, 바닷가 절벽에 서서 해를 향해 있는 암자. 자주 보던 동해나 서해가 아니라 남해를 향해 있는 암자. 파란색 바다가 아니라 은색과 하늘색과 연두색이 미묘하게 섞여 빛나는 남해를 향해 있는 향일암. 그 향일암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였다. - P74

코스는 늘 같았다. 향일암 밑에 있는 민박집 아무 데나 들어가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새벽이면 헉헉거리며 향일암에 오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여수 공식이었다. 향일암을 등지고 서면 바다와 절벽에 매달린 붉은 나뭇가지들이 눈에 같이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향일암나무, 이름도 모르는, 알려고 한 적도 없는 그 나무는 나에게 향일암 나무였다. 보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한 향일암의 증거였다. 선배와 같이 향일암에 갔던 어느 해에는, 선배에게 그 나무에 대해 고백했다.
"선배, 고백할게 있어요."
"뭔데?" - P74

"실은, 여수 그렇게 많이 외봤으면서도 나는 이 나무들 끝에 잎이 돋아난 걸 본 적이 없어요. 늘 겨울에 왔거든요. 그래서 푸른향일암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 그건 거짓말이라고 혼자서 생각해버리는 거지."
"그게 뭐꼬."
"그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서울에서라도 이 나무가 보이면, ‘아, 남해다!‘라면서 좋아해요."
"이게 무슨 나문데?"
"나도 몰라요."
늘 같이 간 친구도 몰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향일암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일방적이고, 모호하고, 단편적이었다. 겨울이 아닌 향일암은 알지도 못하고, 좋아한다면서 무슨 나무인지도 알지 못했다. 전형적인 짝사랑의 징후였다. 일방적으로 마음을 정해버리고, 알아서 상대방을 해석해버리고, 나만의 상대방을 만들어버리는. 나는 향일암을 짝사랑했다. 친구도 나도 향일암을 깊이깊이 짝사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향일암이 불탔다. - P75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언니에게도연락이 왔다. 회사 사람들도 문자를 보내왔다. 나의 여수 사랑을 아는 모두가 연락을 해왔다. 향일암이 불탔다고. 너 괜찮냐고. 괜찮을리가 없었다. 향일암이 없는 여수라니, 붉은 그 나무가 무사하지 않은 향일암이라니, 그래서였다. 해마다 내려가던 여수에 안 내려가기시작한 것은 도저히 향일암을 볼 자신이 없었다. 새 페인트칠로 번쩍번쩍한 향일암을 마주하면 내 과거까지 이상한 색으로 채색될 것같았다. 다만 무사하길 빌었다. 피해가 크지 않길 빌었다. 나의 여수가, 향일암이 온전히 회복되길 빌었다. - P76

이번 겨울, 용기를 내서 여수에 다녀왔다. 바다도 그대로고 산도그대로고 붉은 나무도 그대로였다. 번쩍번쩍하지 않고 조용히 복원된 향일암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향일암도 그대로였다. 감사하다고, 정말로 감사하다고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해마다 여수에 올 용기가 생겼다. 다시 여수를 짝사랑해도 좋겠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잠깐 사랑했다가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오래도록 한 도시를 오해하며 바라보는 짝사랑도 꽤 괜찮지 않은가?
그제야 다시 친구의 전화가 생각났다.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뭔가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도 생각났다. 여수가 내 것도 아닌데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이라니. 아니, 누군가 빼앗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빼앗겨버린 듯한 기분이라니. 나조차도 황당했던 그 기분이, - P76

다시 아름다워진 향일암을 앞에 두고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이다. 심지어 좋아하는 그 도시에 대해 유명한 가수가 노래를 발표해주는 것도 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이 들었다. 처음 그노래를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은 오간데 없었다.
그 겨울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수에 왔다고. 향일암은무사하다고. 우리 다시 여기 와도 괜찮겠다고. 이 여행은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겠다고. 그리고 내내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시도 때도없이. 누가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수 밤바다~" - P77

딱 한 걸음 차이가
결정적 차이가 된다.

한 걸음만 가까이.
한순간만 천천히.

다리 위 난간에 앉은
이 여자처럼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천천히.

그녀는 오래도록
이 햇빛을 기억할 것이다.
이 바람을 잊을 리 없다.
이 순간이 잊힐 리 없다.

그제야 사태는 선명해졌다. 우리는 그의 삶의 관광객이었다. 잠깐 들렀다 멀리 떠나는 관광객. 순간을 영원이라 생각해버리고, 파편을 전부라 착각해버리는 관광객. 단골술집이라며 우리가 아무리 친한 척해봐도 변하는 사실은 없었다. 우리는 누노의 일상이 될 수없었다. 그에게는 다른 일상이 있었던 것이다. 별일이 있어도, 별일이 없어도 수시로 그곳을 들락날락거리며 안부를 묻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음식을 나눠먹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의 일상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그 사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3년 전 그 밤은 이미 신화가 되어버렸다. 내가 그 밤을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3년 전 그 밤을 소중히 하고, 닦고, 글로 쓰고, 사 - P95

진을 찍고, 책에 싣고 자랑하면서. 하지만 누노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에게 그 밤은 평범한 밤 중 하나였으니까. 그것은 누노의 일상이었으니까.
호르헤의 충격을 소화하고, 누노의 충격까지 꾸역꾸역 소화하며 앉아 있다 보니 명확한 것이 생겼다. 그제야 나의 이기심에 나조차 너털웃음이 났다. 나는 그들이 유적이 되길 바랐던 건가.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일 유적지의 돌덩이가 되길 바랐던 건가. 지나간 과거만 쓸고 닦아 애타게 기억하는 박물관이 되길 바랐던 건가. 나는 3년 동안 이토록이나 변했으면서 그들의 변화에는 왜 이토록 매정한 것인가. 나는 수많은 것들을 다 잊어버렸으면서 그들은 왜 나를 잊으면 안 되는 건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랐던 건가. - P95

"진실이 항상 비극은 아니야."

진실이 항상 비극은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맞닥뜨렸다. 그리고 이 진실이 나는 마음에 든다. 상상보다 훨씬 더 풍성한 진실이었다. 새 생명과 눈물이 흐르는진실이었다. 떠나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모르는 진실을 찾기 위해 끝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히여행자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진실이 진실로 마음에 든다. - P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내 꿈은 내가 꾸어야 한다. 내 꿈을누군가에게 대신 꾸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자기 주권을 내주는 것과 같다. 꿈을 맡기는 순간, 꿈이 아니라 삶이 지배당한다. 내 꿈을 대신 꾼 자가 내 꿈만 아니라 내인생도 통제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꿈을 맡기지 말아야한다. 꿈이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한다. - P146

꿈은 텍스트이다.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텍스트의 운명이다. 모든 텍스트는 그 처지가 꿈과 같다. 해석가의 입장이나 시각, 심지어 이해관계에 따라 텍스트가 요동친다.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해몽가의 입이다. 해몽이 있기전까지 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기보다, 무엇을 말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해석이 나올 때까지 텍스트는 그저 기다린다. 해몽가가 좋게 말하면 좋은 꿈이되고, 그가 나쁘게 말하면 나쁜 꿈이 된다.  - P151

그러니 꿈에 붙들리지 말 것. 꿈으로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것. 꿈의 해석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 것. 꿈이 창의적으로, 자의적으로, 그러니까 우연에 의해 해석된다는 사실을 인지할것. 꿈은 내가 꾸어도 그 꿈의 실현이 나의 뜻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삶의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할 것.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죽는 사람도 나온다. 꿈을 꾸어 다른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지만, 꿈을 꾸었기 때문에 죽기도 한다. 내 의지가 작동했다고 할 수없는 꿈을 꾼 것도 내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52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나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꿈 때문에 죽기도 하다니.
우리는 꿈에 대해 속수무책이고, 속수무책인 채 그 꿈에 지배당한다. 인생이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라고 했던 파스칼의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생은 더 변덕스러운 꿈이다.


다른 사람의 꿈이 나를 취조하는 근거로 작용할 때, 누가 꾼것인지 모르는 꿈에 대한 해석이 나의 삶을 휘저으려고 할 때, 외부의 꿈들과 바깥의 해석들이 내부를 흔들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귀를 닫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해석자의 입‘이 내 삶의 영역으로 파동하며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무용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몸부림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P153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아토포스atopos라는단어를 사용했다. 장소를 뜻하는 topos에 부정을 뜻하는 a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자리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여줄 땅‘은 아토포스이다. ‘보여줄‘ 땅에는 지금 아브람의 가족이 살고 있는 땅, 고향, 하란, 장소로서의 땅이 확보하고 있는 물리적 확실성이 없다. 하란은 어디인지 분명하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아브람이 가야 하는 땅은 어디라고 단정해서 말할수 없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보여줄‘ 땅은 보여주는 순간 ‘보일‘ 것이다. 보여주는 순간까지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보여줄‘ 땅은 현재는 보이지 않는 땅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보여줄‘, ‘보이지 않는‘의 특징이다. - P176

카페에 마주앉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인을 본다. 간혹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지지만 그 웃음은 마주앉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향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접속해 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 마주앉아 있지만 다른 사이트에 접속하여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채팅을 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옆에 있는 연인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에, 혹은 누구 옆에 가 있는지 말할 수 없다. 물리적 접촉이 만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물리적 공간의 점유가 친밀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두사람이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181

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한 나는 신에게 갈 수 없다. 나의 일부가 되어 있는 신은 나를 찾아올 수 없다. 신에게 가기 위해서는 내가 신의 일부가 아니어야 한다. 타자여야 한다. 신이나에게 오기 위해서도 신은 타자여야 한다. 흡수와 예속은 인간을 대하는 신의 방법이 아니고 신을 대하는 인간의 방법도아니다. 인간이 신에게 흡수되어버릴 때 인간의 행동은 신의행동과 같은 것이 된다. 인간의 어떤 과오도 인간의 책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이용하거나 신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혹은 모든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자신에게 이용당한다. - P183

모든 개혁은 근본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강요는 항상 외부에서 온다. 코로나19 상황은 사람의 모든 삶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주문받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집합 금지와 비대면 예배는, 어떤 점에서 강요된 종교개혁이다. 개혁은 흔히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의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통해 완수된다. 익숙해진 것은 낯설어져야 한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 보이는, 장소로서의 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대체할 수없는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서,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신비인 신과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의 대체재가 되어 있는 신을 구해야하고, 전체의 부분으로 예속, 흡수시키는 맹신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야 한다. - P185

물론 그 선택이 순수하게 독자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그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것이다. 그 선택에 관여한 요소들을 언급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내적, 외적 조건들을 공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선택은 때로 의식적이지만 더 자주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고 고립되어있지 않으며 감정의 진공 상태에 있지도 않다. 개인의 욕망이투사되거나 시대의 공기가 스며드는 걸 피할 수 없다. 실은 사람과 시대의 욕망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누가 썼는지 모르거나 수없이많은 사람이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에 관여한, 관여했을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소득 없는일이기도 하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현명할지 모르겠다. - P189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 Fakten‘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사실‘이 한번도,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신념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는 이른바 ‘확신‘
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확신/신념은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을 직격한다.
인간은 사실보다 확신을 선호한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고인간 사회를 물들인 수없이 많은 이런저런 확신/신념들 가운데 사실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니!
벤야민은 확신 Uberzeugung의 복수형 Überzeugungen을 썼다. 신념은 신념들이다. 여러 개다. 여러 개인 신념들은 다양성이 아니라 대결, 갈등, 혼란을 예정한다. 복수의 신념들은 사실과 무관하고 진리와 멀다. - P199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를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높은데 (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 P200

십여 년 전에 영국에서 일 년을 지냈는데, 우리나라와 주행방향과 운전석의 위치가 다른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따로 주행 연수를 받았는데도 운전대를 잡으면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앞에 차가 있으면 뒤따라가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 앞에 차가 없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했다. 나는 내 운전에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실수를 한 적이있다. 사거리에 멈춰 있다가 신호등이 바뀌어 출발할 때 반대차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곧 실수한 걸 깨닫고 후진해서 나왔지만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보다 다행인 것은 진입하자마자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역주행을 계속했을지, 그러다 무슨 사고를 냈을지 누가 알겠는가. - P202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 P203

확신이 사람을 당당하게 만든다. 확신에 찬 사람은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눈치보지 않는다. 자신감은 주체적 자아의 표상이라고 선전된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거침없고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사람은 절대군주 루이 14세였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다. 자신감이 권장되면서 자만심을 흡수했다. 미국 힙합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플렉스 Flex 현상이 과도한 자기 과시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현대인이 동경하는 존재 방식이 되었다. 타인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자신감의 결여, 비굴함으로 치부되므로 해롭다. 해로운 것,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옳지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확신은 일종의 처세의 갑옷 같은 것이 되었다. 확신의 갑옷 없이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누구나 어떤 갑옷인가를 착용하려고 한다. - P204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 (의심해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5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본회퍼는 예수의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 (『나를 따르라』) 어떤 선한 뜻도, 그것이 설령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광신자가 된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은 사실을 묻지 않고 성찰도 의심도 하 - P205

지 않는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신념이다.


종교는 자기 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종교는 자기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 P206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진리가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광신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P207

"설득aberzeugen은 비생산적인 것이다"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신념과 신념이 부딪칠 때의 곤란함에 대한 말이다. 신념이나 설득으로는 안 된다. 확신 앞에 사실이 놓여야 한다.
물론 입장과 의견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특히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입장과 의견 없는 단순한사실의 나열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니까. 그러나 그 의견이 사실에 바탕하지 않았거나 진실과 거리가 있을 때, 확신이 제공한 허구일 뿐일 때 그 의견은 단지 확증편향의 다른 이름이므로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확신은홍기와 같아서 사람을 해친다. 벤야민은 현재가 확신보다는 ‘사실‘에 기반한 사유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는 문장을 한 세기 전에 (일방통행로」는 1928년에 출판되었다) 썼지만, 우리의현재는 여전히 확신이 사실을 삼키고 있는 시대이다. 사실이 어떤 곳에서도 한 번도 확신을 뒷받침한 적 없다는 그의 두번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이다.
현재가 어느 시대보다 더 확신에 지배되는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시대 못지않은 확신의 시대라는 건 확실하다.
‘사실을 말하는 자는 죽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경고가 탄식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 P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지기는,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다고대답한다. ‘당신만을 위한 삶‘은 없다. 오직 ‘당신만을 위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5일마다 되풀이되는 마중의 어느 순간에, 그녀 역시, 법의문 앞의 그 사람이 그런 것처럼, 문득 "꺼지지 않고 비쳐나오는 사라지지 않는 한줄기 찬란한 빛을 볼 것이다. 아마 그럴것이다. 요새를 떠나 허름한 시골 여관에 누운 드로고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생각이, 분명하고 무서운 생각이 " 불쑥 떠오르는 경험을 할 것이다, 라고 우리는 예언할 수 있다.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 그녀가 기다린 것이 죽음이었음을 모를 수 없을 거라고. - P132

그런데 그 빛 가운데 드러난 분명한 얼굴인 죽음은 커다란•질문, 삶의 온 경험이 뭉쳐 이루어진 하나의 큰 의문부호여서, ‘환한 어둠‘ 가운데 자리한다. 죽음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 질문은 환한 어둠에 의해 드러난다. 환한 어둠이라니! 눈앞이 캄캄해도 볼 수 없지만, 눈앞이 하얘도 볼 수 없다. 불가지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P1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