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시작이었다. 어디에서든지, 무엇을 묻든지, 이 마법의 질문을 덧붙이면 사람들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을 뿐인데 ‘나에게 인생이란 어떤의미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바뀌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취향을 동시에 다 불러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다른 이유도 없고, 순전히 나를 위해서. "What‘s your favorite?"이라는 질문을 하는 낯선한 사람을 위해서. 상대가 진지하게 너의 결정을 믿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 P111

그 질문을 여행 내내 써먹었다. 와인 숍에서의 일이었다.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주인은 서너 개의 와인을 추천해줬다. 그리고다시 꺼낸 나의 회심의 한마디, "What‘s your favorite?" 와인 가게 사장님은 추천한 와인 한 병 한 병을 다 쳐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이걸 좋아하나? 아니 이걸 좋아하나? 난 뭘 좋아하나? 고심 끝에 주인은 한 병을 골랐다. "그럼 그걸로 살게!"라고 말하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 주인이 바코드를 찍어보더니 찡긋하며 말했다.
"심지어 이건 지금 세일 중이야. 원래는 13유로인데 지금 세일해서 8유로야." - P111

독일 쾰른에는 쾰른 대성당이 가장 유명했지만, 그건 내 관심사밖이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나의 목적지였다. 렘브란트가 거의 마지막에 그린 자화상. 잔뜩 장식을 하고, 자신만만한 표정, 한껏 밝은 표정으로 그려진 자화상이 아니라, 추하고 어딘가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자화상. 아니 비굴하다, 라는 수식어로 어떻게 그 표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그 표정을 가감 없이 그려낸 화가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오스카 코코슈카와 앙드레 말로 등 거장들이 극찬한 렘브란트의 그 표정 앞에 앉아 오후를 보냈다.  - P116

검정색과 노란색만 가득한 그 자화상에는 화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 뒤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사람. 마치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것처럼, 저먼 세계에서 렘브란트를데리러 온 것 같은 사람을 화가는 그려 넣었다. 그 사람 앞에서 웃고있는 화가의 설명할 수 없는 표정에, 렘브란트의 파란만장한 인생전체를 담아낸 것 같은 그 표정에 나는 푹 빠져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쾰른으로 출장을 간다는 친구에게 그 미술관을 추천했다. 친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별 생각 없이 미술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 자화상을 발견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그림은 또 처음이라서. - P116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내가 하루를 바친 곳은 반 고흐 미술관이었다. 반 고흐의 그림이라면 내가 좀 알지, 라는 표정으로 미술•관에 들어섰다. 하지만 실제 보는 그림은 컴퓨터나 책을 통해서 본그림과 완전히 달랐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그림은반 고흐의 <The Bedroom>이었다.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다가 스물한살의 나는 수첩을 꺼내 썼다. ‘<The Bedroom>은 내가 보던 것과가장 비슷하면서도 느낌은 가장 다르다. 그의 노란색은 창백해 보이고, 광기가 넘치고, 아파 보이기도 한다. 그 역동적인, 살아 움직이는 색깔에 반 고흐는 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난 이사람을 견딜 수 있을까‘ 마음이 자꾸 이 그림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다른 그림들을 보다가도 다시 이 그림 앞에 와서 섰다. 갔다가 돌아오고, 갔다가 돌아오고, 그 과정을 무한 반복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겨우 미술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P118

외국 유명한 미술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볼 때면 늘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토록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서울에서도 미술관을 가본 적 없고, 살면서 한 번도 미술관에 가본 적없는 사람들이 파리에 왔으니까, 그래도 루브르니까, 라며 땡볕에길게 줄을 선 걸 보면 가서 말하고 싶어진다. 안 그래도 돼요. 유명하다고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림을 좋아하지도 않잖아요. 술을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여기 진짜 맛있는 와인을 파는 집이 있어요. 빈티지를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이 도시만큼 좋은 곳이 없죠. 조금만 걸어보세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요? 그렇다면 진짜 여기 잘 오셨어요. 아무 카페에나 앉아서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해보세요. 여행의 참맛은 거기에 있어요.
좋아하는, 내가 좋아하는, 남들과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바로그것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 어쩌면 그것을 찾는 것만으로도 남들과는 다른 여행의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 P123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동시에 여러 순간을 사는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인가, 거기에 언제 있을 것인가. 여행에서 이 두 가지질문은 끝없이 교차한다. ‘나의 시간‘을 선택하고 ‘나의 공간‘을 선택하여 그 둘을 직조하면 비로소 ‘나의 여행‘의 무늬가 드러난다. 이 무닉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며 나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그 무늬를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무가 된다. - P127

내가 아일랜드에서 술쟁이가 되었을 때를 좋아한다. CD가게의 주인아주머니 이야기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수십번을 말했다. Dick Mack‘s를 비롯한 수많은 펍들에 대해서도 수년간을 자랑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술쟁이들이 그리워졌다. 낮이든 밤이든 펍에 들어서면 아일랜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술쟁이들의 성전이 그리워졌다. 낮이든 밤이든 거기서 술을 몇 잔씩이나 시켜먹는 술쟁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모르는 우리에게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며 "슬란챠!"라고 말하는 술쟁이들. T로 시작하는요일엔 술을 마셔야 한다고 말하면서, Sunday를 Thunday라고 바뭐 말하는 술쟁이들, 좋은 술도 좋은 펍도 여행하지 않으니, 우리는늘 다시 아일랜드 여행 계획을 세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제는 어제의 술을 마셨으니, 오늘은 오늘의 술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그럴수밖에 없다. - P146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찾는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 북경에서는 기차를 타고 열한 시간 떨어진 도시 핑야오에 기어이 도착했다. 프랑스 보뉴에서는 한 할머니의 대저택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패티 스미스를 보기 위해 도착한 님에서는 바로 옆 식탁에서 패티스미스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큰 도시에서의 행운은 늘모자라지만 작은 마을에서의 행운은 밤늦도록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 그 마을에 관해, 포르투갈 그 마을에 관해, 아일랜드 그 마을에관해,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작은 마을 관해서는 끝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끝없이 말할 수 있다. - P155

살아오면서 그런 유의 행복을 종종 맛본 적이 있다. 여행끝에 마시는 한 잔의 물, 소박한 은신처, 세상 어느 귀퉁이에서 남모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따뜻하고 소모되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은 낯선 이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길의 끝에서낯선 이가 나타날 때, 인간을 발견한 그 마음은 기쁨으로 설렌다. 그리하여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지극히 확대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열린책들, 2008 - P157

작은 마을들은 어김없이 우리를 확대한다. 큰 도시에서는 우리를 버린 것임에 틀림이 없는 행운의 여신이, 유독 작은 마을에서는우리를 잽싸게 발견한다. 그리고 행복의 진수성찬을 차려버린다. 이진수성찬은 오롯이 우리들의 것,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독특한맛,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다정한 맛. 그 소박한 진수성찬을 맛보고 싶다면 시간을 줘야 한다. 행운의 여신도 우리를 찾아낼 시간이 ㅣ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하루가 아니라. 3일, 유명한 것이 없으므로 오래, 별게 없으므로 천천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이므로 음미하며, 낯선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웃는 낯으로, 그렇게 여행의 보석을 품는 것이다. 나만의 보석을 세공해가는 것이다. 작지만 확실한 보석을. - P157

혼자 여행을 하면 사람들이 쉽게 다가왔다. 손만 들어도 히치하이킹이 가능했다. 멍하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할머니들이 먹을 걸 나눠줬다. 밥을 사주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한 무리의 소녀들을 이끌고 섬으로 여행을 온 선생님은 혼자 다니는 나를 딱하게 여긴 건지, 가는 곳마다 나까지 데리고 다녀줬다. 그 밤, 그 선생님이예약해놓은 민박집의 주인할머니는 방을 같이 쓰자고 말했고, 숟가락만 하나 더 놓으면 된다며 밥까지 차려주셨다. 그 겨울에 남해의별미를 나는 염치도 없이 잘 받아먹었다. 외국 사람들도 혼자인 내게 친절했다. 집으로 초대한 할머니도 있었고, 밥을 사준 사람들도있었다. 유난히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혼자‘는 내 여행의 단단한 코트였다. 따뜻하고, 편안하고, 그래서 벗고싶지 않은. - P172

때로는 여행을 떠나와
누군가의 일상이
묵묵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어이 살아야 한다. - P203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생전 처음 보는 수프를 맛봤다. 파리에서 그 불친절한 사람들만 가득하다는 파리에서 맛있었고 따뜻했다. 나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남편과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누가 파리 사람이 불친절하대?"
분명 불친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파리에도 서울에도 그렇듯이. 분명 두고두고 욕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방콕에도 서울에도 그렇듯이. 분명 편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터키에도 서울에도 그렇듯이. 하지만 분명 친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도시와 사랑에 빠지도록 큐피드의 화살을 쏘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두고두고 고마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그러하듯이. 그러니 여행 가방에 결코 넣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선입견. 나의 눈을 가려버리고, 나의 마음을 닫게 만드는 바로 그 선입견. 그것만 내려놓아도 여행 가방은 가벼워질 것이다.

영양실조 아이들을 돕자는 캠페인도 아니고, 식수를 주자는 캠페인도 아니고,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모자를 만들어주자는 캠페인도 아니고, 자전거라니 생소했다. 하지만 조금의 설명만들으면 알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밥을 주는 건 ‘지금‘을 살게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는 건 ‘미래‘를 선물하는 것이라는 걸, 가로등도 없는 길을 하루에 네 시간 넘게 걸어서라도 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내전으로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생계에 대한 부담으로 학교를 포기해야만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자전거로 희망을 선물하자는 캠페인이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한 내용이었다. - P228

겨우 그거여서 미안했고, 부족해서 미안했고, 겨우 몇 시간에 힘들다고 생각한 게 미안했다. 무엇보다 절망을 말할 자격도 없으면서그들의 희망을 비관한 것이 미안했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내가그들의 희망을 비관한단 말인가. 저렇게 희망이 웃고 있는데, 고작풍선 하나에 웃는데 저 웃음을 어떻게 비관할 수 있는가. 나는 오래전 하워드 진의 책에서 읽은 가르침을 떠올렸다. 나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희망을 고집하는 것.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뢰에도 불구하고, 비닐봉지 집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고집하는 것, 풍선 하나에, 꽃 한 송이에, 화알짝 웃으며, 아이들이 기어이 희망을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끝끝내 꺾일지라도, 끝까지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어떤 희망은 의무다. - P233

남의 여행은 남의 떡이다. 언제나 더 커 보이고, 언제나윤기가 흐른다. 흠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고, 부러운 행운만 넘쳐흐른다. 어쩜 그 여행의 풀밭은 그토록 푸르른지. 남의 여행을 직접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 블로그에서, 각종 SNS에서 남의여행을 보게 되면서 이 증상은 좀 더 심각해진다. 앞뒤 맥락 따위 존재할 수 없는 그 찰나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우리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름살을 제거해버린다. 저 여행은 모든 것이 풍족해. 저 여행은 커피 잔에 떨어지는 빛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 P241

완벽할까. 저 사람은 내내 행복하기만 할 거야. 같이 간 사람이랑 싸우는 일도 없겠지. 돈이 왜 부족하겠어. 돈이 부족하다면 저런 걸사지도 못하지. 여행은 왜 또 저렇게 자주 가. 시간도 넘쳐나나 봐. 명백히 세상은 엄친아들의 여행으로 넘쳐난다.
알고 있다. 나의 여행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란 사실을 내가 나의 SNS를 보고 있어도 이토록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행이 없어 보인다. SNS에서는 내가 방금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도, 어마어마하게 바보짓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엄청 비린 생선을엄청 비싼 돈에 먹었다는 사실도 편집된다. 잘 재단된 사진과 함께올라가니까 나조차도 내가 완벽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행자라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사진밖의 나는, 현실의 나는, 언제나, 어김없이, 햇빛 알레르기와 싸우는중인데 말이다. - P242

결국 겨울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햇빛 알레르기에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결론에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 결론은 거짓이다. 햇빛 알레르기에 좋은 점이 뭐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좋은 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햇빛 알레르기의좋은 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여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여행은 오직 남의 SNS에만 존재할 뿐이다. 지금이 사진은 어떤 풍경으로 보이는가? 고즈넉한 시골길 위에서 귀여운 강아지들이 노니는 풍경? 사실, 온 동네 개들이 동시에 몰려나오며 미친 듯이 짖어 뒷걸음치며 도망가는 중이었다. 물론 이 사진도나의 SNS 상에서는 평화로웠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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